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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 

역사(役事)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하나 끄집어 내어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인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 메고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그날 밤에 한소나기 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詩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

 

(『가톨릭 청년』 2호, 1933.7)


맹세컨대, 이 시는 이상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작품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정이 결코 말랑말랑하지는 않습니다.

돌이 갑자기 사라진 ‘변괴’와 애절한 사랑의 편지 사이의 간극이 쉽게 메워지지 않기 때문이겠죠.

 

이 그 간극을 메워내는 일은 시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일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해석은 대개가 수집 가능한 작가의 연대기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집니다.

가령, 이상이 폐결핵을 진단받고 총독부 기사의 일을 그만둔 것은 대략 1931년 무렵이고

황해동 배명온천으로 요양차 갔다가 금홍이를 만난 것이  1933년이니 이 작품에는 그 두 경험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죠.

 

그렇게 감상하게 되면 불현듯 만났다가 잃어버린 돌은 배명온천에서 우연히 마주친 금홍이가 되고

시 속의 시는 그 금홍이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운 고백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감상하는 것이 이 시의 서정성을 향유하는 보다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시의 해석이 완결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가령, 한  ‘돌’을 다른  ‘돌’이 업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화자의 상상은

우연히 마주쳤다가 불현듯 사라지는 것들의 상실감을 그려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하게 의인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ㅎ 그 돌은 혹시 트롤? ㅋ

 

또, 난데 없이 애절한 사랑의 시편을 적어내고는 그것을 ‘어떤 돌’이 물끄러니 쳐다보는 것같아서

찢어버리고 싶더라는 화자의 고백은 사랑의 상처때문에 그렇다고 말을 만들 수는 있겠습니다만

어째서 이 작품의 제목이  ‘이런 연애’, 또는 ‘이런 운명’이 아닐까에 대해서까지 답을 해주지는 않습니다.

 

즉, 한 방향에서 말이 되게끔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또 다른 방향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사실 이상의 작품들이 그렇게 설계된 듯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작품 속의 시어들을 현실의 어떤 것들과 대응시키려는 해석적인 방식들은 언제나

그 대응관계에 포획되지 않는 부분이 삐져나올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해석을 그런 방식으로 완결시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상의 시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개연성을 빠져나가는 방식, 혹은 비개연성을 조성해내는 방식

그 자체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가령, 돌이 사라진 변괴와 연애편지를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간극을

메워내지 않고 다만 그 관계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것은 어떨까요?

어디선가 본 듯한 ‘돌’은 희미한 기억을 불러내지만 그것은 이내 알 수 없는 이유들로 불현듯

사라집니다. 또,   ‘내 혼자 꾸준히 생각’하리라는  애절한 마음조차 그것을 담은 작문을 찢어비리고 싶다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내 대체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고자 한다면 기억이 망각으로, 이해 가능한 감정이 알 수 없는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이중의 교란으로 되어 있는데 한쪽은 기억을 향해 있고

다른 한 쪽은 낭만적 감성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큰 길’가로 내어 놓아서 위태로워지거나  소나기에 씻겨나갈 수도 있는 돌,  다른 돌에 업혀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돌,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같은 ‘돌’은 도처에 있으면서 보이지는 않고,

그러다가  불현듯 의식의 표면으로 치고 올라오기도 하지만 그 근원은 언제나 망각에 가닿아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는 것은 그런 기억에 기대는 바가 클 것입니다. 화자 역시 한 편의 기억을 소환해서 애절한 연애편지를 쓰지요.

그러나, 그 기억이 실재했는지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기억은  어쨌거나 소환되는 순간에 불러일으켜진 감정에 의지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화자가 애써 써낸 작문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 아닐겁니다.

그것은 오히려 언제나 망각쪽으로 발을 돌리는 ‘돌’의 응시때문이지요.

말하자면 생산된 기억을 붙들어매는 시 한편을 써 놓고는 망각에서 뒤돌아 보는 그 돌의 눈길에 그만 부끄러워진 겁니다.

 

‘돌’은 그 특유의 무게와 익명성, 그리고 거친 질감등으로 인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결코 드러내지 않거나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의 이미지들에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돌’에 무언가를 새겨 넣을 수 있으며 그 돌을 끄집어 내어서 그 위에 시간의 흔적을 새겨 넣는 일을 할 수가 있겠지요.

바로 이런 ‘돌’의 질료성이  [대낮-어느 ESQUISSE]에서 [자상]까지에 이르는 등장하는 ‘돌’들의 공통된 형상입니다.  

(*그리고 이 ‘돌’의 이미지는 근원적으로는 니체가 말한 ‘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환원불가능한 사태’, 즉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각도에서이기는 하지만,  니체와의 연관성은 신범순 선생님에 의해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범순 선생님이 니체와 이상을 연결하는 방식은 지극히 신화적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상은 니체에게서 배웠지만 니체의 예언을 문학적으로 실행하지는 않습니다. 결코)

 

이렇게 작가 이상은 ‘돌’과 애절한 사랑의 작문을 통해서 기억을 ‘자신의 태고이기도한 망각’에 대면시키고 ‘감성’을 ‘자신의 강도와 구별되지 않는 감각 불가능자’에 대면시킵니다.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런 종류의 작품에 직면한 독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설명서처럼 보입니다. 

 

“기억은 자신의 태고이기도 한 망각에 직면하고, 감성은 자신의 강도와 구별되지 않는 감각 불가능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역설은 이 깨진 인식능력들을 향해 양식에는 속하지 않는 관계를 전달한다. 이때 인식능력들은 화산같이 폭발하는 선 위에 놓여서 한 능력의 불똥에서 또 다른 능력이 불길을 내뿜게 되고, 한 능력의 한계에서, 또 다른 능력의 한계로 이어지는 어떤 도약이 일어난다.” (487)

 

그러니,  무엇보다도 이 시의 백미는 바로 제목 ‘이런 시’와 화자가 시 속에서 찢어버리고 싶다는 ‘이런 시’의 관계에 있습니다. 

어느 아테네인이 ‘모든 아테네인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사태가 바로 여기서도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는 화자가 쓰고 찢어버리고 싶은 ‘작문’이자 ‘이 따위 시’를  쓰고 있는 행위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독자들로서는 ‘이런 시’에서 이 따위 ‘시’와 더불어 기억과 망각, 감정과 감각 불가능자 사이에서 시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독자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시’는 절대 ‘전체’로 묶이지 않으며 다만 어떤 도약을 일으키는 극적인 장소를 시 속에 조성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어떤 각도에서 읽더라도 말이 되는 까닭에 말이 되지 않는 게 있고,

말이 되지 않는 것들로 인해 비로소 말이 되고야 맙니다. 

 

독자들은 다만, 자신이 매혹될 수 있는 만큼의 역량만을 이 시속에서 실행할 뿐이죠. 

이렇게, 이상은 기억과 감성을 배반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창조해냅니다. 

그것은 독자들의 행운을 독자 자신들의 것들로 되돌려주는 방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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