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원자료 :: 인사원의 과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문에서 3장까지(쪽글) -닉네임:편지

 

 

 

 

 

존재 저편의 선이라는 정식은 존재자(existant)를 선으로 이끄는 운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존재자(existant)가 그보다 상위의 존재(existence)로 올라가는 그런 초월이 아니라, 일종의 존재와 그 존재를 기술하는 범주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곧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벗어남행복은 필연적으로 존재 안에 발판을 지닌다.

 

동사적 의미의 존재라는 늘 열려 있는 장을 끝장내 버릴(부정해 버릴)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라고는 아무것도 떠맡지 않는 익명적 존재, 존재자들(‘etants)도 존재들(’etres)도 없는 존재, 끊임없는 소란’,블랑쇼의 은유를 다시 쓰자면, ‘비가 온다(il pleut)’, ‘밤이다(il fait nuit)’등과 같은 비인격적인 있음이다. 있음은 하이데거의 있음(es gibt)’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있음,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간직하고있으며, 침묵이 공명하고 공허가 충만할 때 불면 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기묘한 짓눌린 상태들(obsessions)가운데 하나에서 원칙적으로 발견된다.

 

 

여기서 세계, 존재자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존재자들의 자기에 대한 염려가 지니는 비사교성이 문명을 이루고 있는 곳, 그러나 또 그 비사교성이 무관심으로, 힘들의 익명적인 균형으로, 그리하여 필요하다면 전쟁으로 되어버리는 그런 곳이다.

 

무관심(in-diffe’rence)’은 타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 저편에서 모색하는 이기주의 속에서 유지된다. 우리가 자기 정립의 변절이 드러나게 되는 그런 과정들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변절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존재자(existant)가 존재(existence)하게끔 해주는, 존재로서의 존재 개념으로부터 사유는 존재(existence) 원인의 이념, ‘존재자 일반의 이념, 엄밀히 그 본질이 존재(existence)를 포함하는 신의 이념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나 신 역시 존재자이며 사실이나 행위, 혹은 존재의 순수 사건 또는 존재의 작업이 아니다. 존재의 순수 사건 또는 존재의 작업은 존재자와 뒤죽박중이 된 채 이해 될 것이다.

 

탄생이란 미리 존재하는(pre’existant)주체가 어떤 위탁물이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는 피조물의 측면에서 보자면 순수한 수동성을 함축한다. 이 무로부터의 창조조차 창조가 고조되어 가는 순간, 즉 창조의 순간에 피조물에게, 그 피조물[자신]의 존재에 대해 행사하는 활동, 즉 주어가 자신의 속사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권을 부여한다.

 

시작이란 이미 존재를 소유하는 일이며 존재의 활동이다. ‘순간은 하나의 묶음[bloc,덩어리]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순간은 [따로따로]분절되어 있다. 바로 이렇게 분절되어 있기에 순간은, 사건에 대해 이질적이고 단순한 영원한 것(l’e’ternel)과 구별된다.

 

존재의 일반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것일반, 즉 대상의 순수 형식은 존재자일반의 이념을 이미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의 상위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유로부터 종들을 구별할 때 하는 것과 달리]종차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존재자 일반에서 그것의 종으로 내려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존재(existence)와의 관계

 

조각난 세계또는 뒤죽박죽이 된 세계와 같은 표현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역시 세계에 대한 본래적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사건들과 이성적 질서 사이의 균열, 물질처럼 불투명한 정신들 상호 간의 불가해성,서로에 대해 터무니없는 것들로 취급되는 논리 체계들의 다수성, 자아(moi)와 너(toi)의 불합치성, 그리고 결론적으로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된 지성등이 확인되면서, 이것들은 세계의 황혼 속에서 세계 종말에 대한 해묵은 망상을 소생시킨다.

 

 

존재란 막연한 누군가 존재한다(on est)는 사실, 있음이라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자 또는 존재하는 것은, 막이 오르기 전 드라마에 앞서 취해진 결단에 힙입어서 자신의 존재(existence)와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이것[존재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가운데(en existant de’ja’) 이 존재(existence)를 떠맡는다.

 

빛과의 접촉, 눈을 뜨는 행위, 단순한 감각의 빛남 등은 분명 관계 바깥에 있으며, 마치 어떤 문제에 대해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처럼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빛은 빛나며 자연적으로 이해된다. 빛은 이해의 사실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와 세계 사이의 이러한 자연적 상관관계 안에서 일종의 구별[de’doublement, 둘로 가름]을 통해서 하나의 물음이 떠오른다. 그 물음이란, 빛남 앞에서의 놀라움이라는 것이다.

 

권태는 존재[existence]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웃음의 본질적 가벼움 속에서 잊히는 대신에 웃음 속에서 존재[existence]는 천진난만하게도 무르익는다. 또 웃음 속에서 존재[existence]는 그것의 충만함과 더불어 무게 없이 떠돌아다닌다.-- 권태 속에서 우리는 더욱 아름다운 곳을 동경하면서, 존재[existence]의 모습들 가운데 하나로부터가 아니라, 존재[existence]자체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여행 안내서도 없고 기한도 정해지지 않는 도피’, 그것은 어느 곳엔가 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도피에서는 보들레르가 말하는 진정한 여행자처럼 오로지 떠나기 위한 떠남이 관건인 것이다.

 

무기력은 한가함도 휴식도 아니다. 무기력은 피로와 마찬가지로 행위에 대한 어떤 태도를 내포한다. 그러나 무기력은 선택의 기로에서 단순히 우물쭈물하는 그런 주저가 아니다. ‘무기력은 숙고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기력은 목적에 대해 숙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기력은 지향뒤에 위치한다.- 무기력은 일어나야 하는 분명한 의무와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려놓는 일 사이에서 발견된다.

 

도약은 잃을 것이 없으며 걱정거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도약은 격정과 같다. 격정 안에서는 그 자신을 성취하면서 동시에 소모하는 불이 타오른다. ‘시작은 이러한 이미지들이 암시하는 자유나 순박함이나 무동기성과는 다르다. 이런 것들은 놀이 속에서 모방된다. 시작의 순간에는 이미 잃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

 

존재는 늘 소유와 겹친다. 소유는 소유되는 동시에 소유하는 그런 것이다. 이미 행위의 시작은 귀속됨이며 그가 귀속되는 것 및 그에게 귀속하는 것에 대한 염려이다. --하이데거가 생각한 것과 달리 염려는 무의 가장자리에서의 존재의 활동 자체가 아니다. 반대로 염려, 시작한 존재, 그 자신의 지나친 충만함에 벌써부터 당황해 버린 존재의 견고함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피로를 느끼는 것, 그것은 존재[existence]의 실행 자체 안에서 혐오하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면해서 피로는 격전을 치르며 무력하게 거부해 본다.- 무기력은 격전을 치르기를 거부해 버린다. 무기력은 존재를 내팽개쳐 두고자 한다. 무기력의 본질은, 존재와 계약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배신을 하기에, 무기력에게는 자신의 본질이 쓰디쓴 것이다.--무기력은 미래에 대한 피로이다.

 

피로’, 특히 우리가 경솔하게 신체적이라 일컫는 피로같은 것도 우선은 어떤 경직, 어떤 둔감해지는 마비, 어떤 식의 오그라듦으로 나타난다. --피로는 느슨해짐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느슨해짐 그 자체이다. 피로는 이런 것이다. 피로하게 들어 올리던 짐을 놓아버리는 손안에 피로가 진을 치고 있을 뿐 아니라, 느슨하게 빠져나가 버리는 것을 부여잡는 손안에도 피로가 있는 한 말이다.

 

인간의 노동과 수고는 어떤 연류됨[engagement], 그 안에 노동과 수고가 벌써 자리를 잡고 있는 그런 어떤 연루됨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작업에 묶여 있다. 우리는 작업에 맡겨져 있다. 작업에 찌든 채 고통받는 인간의 보잘것없는 면모로는 포기, 기권등이 있다. 인간의 모든 자유에도 불구하고, ‘수고는 인간에게 언도된 형벌을 드러낸다. 그것은 피로아픔이다. -‘수고피로위로 다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수고는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현재에 대해 앞서 있음 속에서 , 예견을 통해[en anticipant]현재를 연소시켜 버리는 도약의 무아경 속에서, ‘피로는 자기와 현재에 대해 지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지향 개념, 지향을 활동하게 하는 욕망에서 오는 자극과 더불어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지향이 직접적인 것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면, 그것은 욕망이지 염려가 아니다. 존재한다[exister]는 것에 대한 염려, 즉 존재론의 영역에까지 확장된 의미에서의 염려는 지향의 부재이다. 욕망할 때 나는 존재를 염려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욕망할 수 있는 것에, 나의 욕망을 전적으로 만족시켜 줄 대상에 몰입한다.

 

존재와 가치라는 쌍은 확실히 서로 전혀 반대죄지 않느다. 사물의 실재를 이루는 것은 분명 그 사물이 합목적성이다. 지향의 목적(fin)으로서의 사물은 목표(but)이고 한계이며 궁극적인 것이다. 가치로서, 욕망의 목적으로서의 대상은 하나의 존재이고 운동의 종착지이며, 평정(impassibilite’)의 시작, 자기 안에서[즉자 속에서] 휴식하는 평온함의 시작이다. 그 존재는 운동으로부터 자신의 즉자(en-soi)를 이끌어낸다.

 

지향이 단지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지향이 향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욕망이나 욕심은 언제나 근심에 싸여 있는 욕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결핌(manque)에 따른 소극적 쾌락(plaisir)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은 욕망 자체가 그 자신 안에 즐거움(joie)으로서 지니고 있는, 욕망할 수 있는 대상의 약속에 대해 무지하다.

 

관조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대상을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관조는 순수한 관조 그 이상이다. ‘관조는 이미 행위의 요소이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행위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지향이기 때문에, 즉 욕망, 거머쥐는 운동,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운동이기에 행위라고 하는 것이다.

 

지향성은 의미(sens)의 원천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지향성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의미, 그것은 어떤 외재적인 것을 내재적인 것에 이미 합치시키고 그 내재적인 것을 지시하게 하는 그런 것이다.--‘은 내재적인 것을 통해 외재적인 것을 포장하는 일(enveloppement)을 가능하게 해주는데, 여기서 이 내재적인 것은 코기토와 으미의 구조 자체이다.

 

은 중지 사건, 판단 중지의 사건, 중지이다. 이런 중지는 대상과도 또는 역사---우리가 그것과 관련을 맺거나 우리가 성취하는 역사와도 관계를 가지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 , 역사를 정지시키는 존재 자체의 역사가 쟁점일 때조차 중지는 이 대상과 역사에 대해 언제나 외재적으로 머무르는 데서 성립한다. ‘은 자아를 무한한 물러섬의 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오로지 자기로 머무를 수 있음(quant a’ soi)의 힘으로 정의한다. --그겅은 숙명적이고 익명적인 존재에 대한 증대해 가는 저항이다. 저항을 통해 존재는 의식이 된다. 을 통해서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가 성립한다. 은 존재자와 존재의 간격을 메우는 동시에 유지한다.

 

감각은 대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리하여 감각은 더 이상 주관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감각은 지각의 질료가 아니다. 예술 속에서 감각[지향적 인사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요소로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감각은 요소의 비인격성으로 되돌아간다.--예술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상으로도 인도해주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한다. 감각적 성질의 방식은 감각으로서의 감각 사건, 즉 미감적 사건이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감각의 음악성이라고 부른다.

 

있음의 개념을 어떤 존재자로부터, 즉 외재적 사물이나 내재적 세계로부터 빌려오지 않는다. 확실히 있음은 외재성만큼이나 내재성도 초월한다. 심지어 이 개념은 이 두 가지르 구별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는다. 존재의 익명적 흐름은 주체, 인격 또는 사물 등 모두를 침략하고 침몰시킨다. 우리가 존재자들[lesexistants]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객체의 구별은 존재 일반에 접근하는 성찰의 출발점이 아니다.

 

현대 철학에서는, ‘죽음에 앞서는 죽음과 불안의 관념은 무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과 대립한다. ‘에 대한 사유를 현실화하는 일를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죽음과 죽음에 관한 태도로서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어떤 초연한 사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때 여기서 있음의 보편성에 대해 무지할 때, ‘는 있음과 무관한 사유가 되며, 부재의 현전의 변증법적 성격은 간과된다. - ‘는 여전히 존재의 종말이자 한계로서, 즉 존재의 모든 가장자리에 철썩이는 바다로서 검토되는 것이다.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인사원_니체 :: 너희가 니체를 알겠지?! [1] oracle 2019.01.31 664
1445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바흐친에 다가가는 길잡이 네 개의 글 ㅎㅎ 2016.04.08 463
1444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에세이 제출 file vizario 2016.06.26 462
1443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4주차 랑시에르 발제문(서론) file 누혜 2016.03.30 457
1442 [차이와 반복] [7주차 후기] 사유의 폭력성과 이상의 [지팡이 역사] papanaya 2017.11.02 457
1441 [한국 사회와 호모 에코노미쿠스] 9월 18일 후기 및 9월 26일 공지 수유너머N 2014.09.20 456
1440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엣세이(오영진) file 꽁꽁이 2016.06.26 455
1439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5. 미하일 바흐찐<프랑수아 라블레..> 메모 file 아노말리에 2016.04.07 455
1438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루카치 <소설의 이론> 서문과 1-2장 발제 file vizario 2016.06.11 452
1437 쪽글(6)_라깡의 실재계 file 미네르바부엉이 2015.11.13 450
143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모호한 문장들 수정번역 [2] wonderland 2018.10.29 449
1435 [차이와 반복] 2강후기 : 죽음충동과 이상의 시 '절벽'을 뒤섞어서. [2] papanaya 2017.09.15 449
1434 인사원 기말 에세이 file 김효영 2016.01.03 448
1433 이언 해킹, <우연을 길들이다>, 7-9장 발제 file 의횬 2015.12.10 445
1432 수정된 에세이 file 의횬 2016.01.28 442
1431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3주차 쪽글(블랑쇼) 누혜 2016.03.24 441
1430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3주차 블랑쇼 발제문(7장) file 팔랑 2016.03.26 439
1429 잉사원 프로포절 [1] file 병석 2015.12.16 438
1428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7강, 로젠크란츠, 추의 미학, 제1장 발제 file 꽁꽁이 2016.04.22 437
1427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8.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외 메모 file 아노말리에 2016.04.28 436
1426 [2016-1학기 인사원] 예술철학 :: 에세이 Proposal _ 맨디니의 <프로스트의 의자> file 노석지 2016.05.26 433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