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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영원회귀] 늦은 니체 에세이

메롱 2019.01.23 02:10 조회 수 : 323

많이 망설이다 올립니다. 여러 사정으로 끝까지 못해 죄송합니다.

항상 이진경선생님의 열정보다 못미쳐서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배울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니체의  ‘위버멘쉬’가 되는 몇 가지 방법 

- 영혼은 흘러넘치고 감정은 고요하게

목차

Ⅰ. 들어가며 : 선택의 순간, 주사위를 던져라!

Ⅱ. 기억도 해석이고, 고통도 해석이다.

Ⅲ. 주인의 도덕이 영원성으로!

Ⅳ. 맺으며 : 생의 모든 순간, ‘위버멘쉬’함을 잊지 마라!

 

 

Ⅰ. 들어가며 : 선택의 순간, 주사위를 던져라!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마주하고 갈등한다. 그 선택의 순간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무한 반복으로 다가온다. 고통은 온전히 나의 몫이고 절망은 바닥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처절하게도 간절할 때, 니체는 ‘주사위를 던져라! 활을 쏘아라. 나를 파멸로 이끌어라!’ 조언한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육사가 「절정」에서 보여주는 고뇌에도 끝날 것 같지 않은 현실에 대한 절망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극한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시인은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라고 말하며 또 다시 주사위를 던진다. 저 건너편 언덕에 의지의 화살을 쏜다. 이상의 『날개』의 ‘나’도 어찌할 바 모르는 존재의 한계상황과 마주한다. 몇 번의 외출을 감행하면서 ‘나’는 반복되는 현실을 재확인하며 절망할 뿐이다. 이 분열된 자아는 백화점 옥상에서 ‘정오의 종소리’를 들으며 “날개야 돋아라!” 외친다. 날개가 돋는 나를 발견한다. 그림자가 가장 짧아져서 모든 허위가 소멸되는 정오의 시간, 그 정오의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의 온몸을 주사위와 함께 우주의 우발성 속에 내맡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80여일의 허탕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어부의 삶’을 살기위해 또 다시 배를 띄운다. 반복되는 좌절은 반복되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다시 한 번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다. 저 건너편 언덕으로 활을 쏘아야 하며, 나를 파멸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영원회귀는 우연을 긍정함이며, 동시에 이 우연은 ‘필연적 우연’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힘에의 의지가 없이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연적 우연은 ‘의욕하는 우연’이 된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자를. 덕이야말로 몰락하려는 의지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 나는 사랑하노라. 상처를 입고도 그 영혼이 심오하며, 하찮은 사건으로도 파멸할 수 있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기꺼이 저 교량을 건너고 있는 것이니.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을 잊을 만큼, 그리고 자신 속에 만물을 간직할 만큼 넘쳐흐르는 영혼을 지닌 자를. 그럼으로써 만물은 그에게 멸망의 계기가 되리니.”

몰락을 맛보았다. 끊임없이 몰락을 맛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주사위를 던진다. 왜일까? 고통을 즐기는가? 아니다. 단지 고통만이 선물이라면 몰락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 몰락과 고통 속에는 진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를 의욕한다’는 것은 고통을 재확인하는 작업인 줄 알면서도 또 다시 주사위를 던지는 의지적 행위이다.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 닥칠 그 모든 순간이 긍정될 때 비로소 우리는 ‘중력의 영影’과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자신의 깊이를 잃지 않고’ 몰락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은 ‘최후의 인간’에 맞서는 ‘최초의 인간’이며, 자신을 망각할 정도로 영혼이 흘러넘치는 사람이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가 장자가 되었다가, ‘나’가 장자인지 나비인지 분별할 수 없다. 여러 가면을 자유자재로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은 가면이 나를 감추는 도구가 아니라 또 다른 나임을 의미한다. 가면을 긍정하는 것은 나로 대변할 수 있는 수많은 타자를 긍정하는 행위이며, 내 안에 수많은 감수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장자는 나비의 세계에서는 나비의 가면을 인간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가면을 잘 쓰고 있어야한다. 혹여나 어긋나면 미친놈(?)이 된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나’를 분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망각할 정도로 영혼이 흘러넘치는 상황에서 주사위를 던져라! 그것은 삶을 긍정하는 순간이며, 나를 치유하는 순간이다.

 

Ⅱ. 기억도 해석이고, 고통도 해석이다.

팔은 부러져 아물고 나면 충격이 가해져도 같은 곳이 부러지지 않고 그 옆이 부러진다. 외적 상처는 그렇게 아물고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다르다.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는 상처가 아물지 않고 반복되는 충격에 같은 곳이 곪아터진다. 기억에 흔적이 남아 고통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고통의 기억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순간 그 사건을 막지 않는 이상 치유 불가능하지 않을까? 행동주의자 스키너는 ‘스키너 상자’를 만들어 자신의 딸을 크고 투명한 상자 안에서 키웠다.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완벽한 조건 속에서 완전한 인간을 양육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딸은 미쳐버렸다. 또 다른 딸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에서는 고양이가 피아노를 치고, 강아지와 술래잡기를 했었다고 회상했다. 최적의 환경 속에서 완벽한 인간이 길러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다른 딸이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칠게 해석하자면 한 딸은 인간됨에 최소의 조건인 사랑이 결핍되었고, 또 다른 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기억하듯 선택적으로 망각한다. 기억에 대한 선택은 생존과 관련되어 있으며 동시에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생채기 난 기억을 치유하는 가장 고전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이 기억과 망각의 재구성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신에게는 도덕적인 분별심이나 도덕적 식별의 섬세함이 있다고 믿게 하는 데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을 경계하라! - 망각하는 인간들에게는 축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짓도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망각은 능동적인 힘이다. 고통을 잊기 위한 의식적, 무의식적인 의지적 힘이다. 그런데 이 망각은 반복되는 고통, 반복되는 독毒을 끊어버리는 행위, 즉 기억의 단편을 잘라내는 행위가 아니다. 망각의 능력은 사건의 소멸이 아니라 ‘사건의 재구성’이다. 다시 말해 망각은 기계적으로 기억을 절단,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바탕이 된 의식적 행위임과 동시에 무의식적 행위이다. 의식적 행위임은 도덕적 잣대를 버리고 모든 개체의 ‘있음’을 수용하는 자세이며, 무의식적 행위임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적극적인 수용 또는 수동적 방어기제가 무의식적인 망각을 가져온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망각이 수동적인 형태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 형태일 때, 자연적인 망각의 상태에서 기억해야할 일을 의욕하여 기억해 낼 수 있을 때, 약속할 수 있는 인간, 즉 주권적 개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망각을 재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은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을 재구성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행위가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는 사랑을 의욕하는 마음과도 맞닿아 있다. 기억하고 싶은 사건과 망각하고 싶은 사건은 우리를 설레게 한 사건과 고통스럽게 한 사건으로 도식화할 수 있으며, 이는 감정을 일으켰으며 사랑이 흘러넘쳤던 기억과 관련된다.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은 항상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도덕적 분별심으로 인해 상처받기도 한다. 도덕적 섬세함이 강요되면 될수록 사랑이 고통이 되는 이유는 사랑은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 사유하고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코나투스가 증가하는 방향은 모두가 선망하는 방향과 일치하기도 하나, 사랑에 관해서는 대부분은 선악의 저편과 맞닿아 있다. 코나투스의 증가는 사회적 잣대와도 도덕적 식별과도 무관하며, 오직 한 개체의 더 높은 본성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장치인 지도 모른다. 행복한 기억은 개체의 질료 자체를 바꾸지 못하고 유지하도록 강화한다. 그러나 고통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게 하고, 한 번도 사유해보지 않았던 영역으로 침잠하게 만든다. 고통 속에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니체의 위버멘쉬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 ‘그러면 사랑이란?’-뭐라고! 게다가 사랑에서 나온 행위도 ‘이기적이지 않아야만’하는가? 그러나 그대 우둔한 자들이여-! “그러면 자신을 희생시킨 자가 찬양되는 것은?”-그러나 실제로 희생을 치른 적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 대신 어떤 것을-아마 자기 자신의 어떤 것 대신 자신의 어떤 것을-바라고 얻었는지를 알고 있고, 거기에서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아마 대개 그 이상의 것이 되거나 스스로 ‘그 이상’의 것으로 느끼기 위해 여기에서 자신을 희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관계는 희생을 요구한다. 이는 서로가 지불했던 감정과 물질을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는 중립적인 도구가 없음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구성원의 해석 차이가 희생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해석할 수 없는 것까지 해석하려하기 때문이다. ‘희생’을 해석하는 순간, 관계는 ‘온전히 그러함’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희생을 해석하는 순간, 계산기를 두드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관계가 고통을 ‘감내’하는 사건으로 바뀌었기에 살기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다.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은 항상 방어적이다. 힘이 부족한 사람이 고통을 방어하지 않으면 고통이 개체를 파멸로 이끈다. 힘(사랑, 영혼)이 충만한 경우는 달라진다. 고통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포용하고 망각해 버리면 그만이다. 고통은 한없이 작은 아픔으로 해석된다. 전자의 경우 고통을 망각하기 위해 억압기제가 작동하며, 후자의 경우는 흘러넘치는 영혼으로 육체를 감싸 안아 고통을 망각한다. 영혼이 흘러넘칠 때 비로소 희생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기억과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시간은 역류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분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것”, 이름하여 그것은 의지가 굴릴 수 없는 돌덩이다. 그리하여 의지는 통분과 역정에서 돌덩이를 굴리면서 그와 함께 분노와 역정을 나누지 않는 자에게 앙갚음을 해댄다.”

트라우마는 과거로부터의 흔적이다. 지우개를 들고 지우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면 지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과거로 소급할 수 없는 흔적,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은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볼 수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심연에 잠식당하게 된다. ‘의지가 굴릴 수 없는 돌덩이’, 그 중력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발버둥치는 인간, 생존이라는 징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반복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모든 문제는 과거에 있으며, 그 모든 해결방법은 현재에서 찾아야 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무엇을 의욕해야 하는가? 시간의 간격이 만들어낸 좌절 속에서 무언가를 의욕할 수는 있는 것일까? 니체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위버멘쉬로 제시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앞을 내다보는 자이며, 의욕하는 자이자, 창조하는 자로서, 미래 그 자체이고 미래로 이어지는 교량이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에 대한 방도를 아는 존재이다.’ 우주의 우발성 속으로 주사위를 던지고, 몰락과 파멸로 나를 이끌어 중력의 무게를 무한의 깊이로 치환시키는 존재가 위버멘쉬다. 그는 현재의 시간이 과거와 미래의 교량임을 안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이 과거와 미래의 공존이며, 순간을 영원으로 산다는 의미임을 안다. ‘주사위 놀이’가 어느 순간 ‘변곡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새로운 포물선을 기대하며 ‘의욕하는 자’로 거듭날 수 있다. 주사위 던지기를 시도하지 않으면 클리나멘을 기대조차 할 수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순간’이 과거를 치유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이 순간의 영원성을 안다면 현재도 순간들의 집합으로 환원할 수 있으며, 모든 현재는 모든 과거와 미래의 교량이며, 모든 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교량이다. 거칠게 도식하자면 과거의 기억을 치유한다는 것은 이 순간을 치유하는 것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흘러넘치는 영혼으로 감싸 안는다는 의미이다.

 

Ⅲ. 주인의 도덕이 영원성으로!

식민지 노예의 역사는 시간적 거리를 공간적 거리로 극복하려 했다. 역사적 시간의 차이는 역사적 진보의 차이를 낳았고, 이 시간적 거리의 결핍을 식민 국가는 경험해야 했으며, 공간적 거리를 좁히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든 노예적 발상은 노예적 해결책으로 귀결된다. 우리나라의 근대도 ‘신新과 구舊’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식민지 지식인은 ‘새로움’에 갈증을 느꼈다. 이 ‘새로움’에 대한 갈증은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동경하게 만들었고, 현상을 관통하는 퍼시펙티브를 생성하지 못하고 노예적 퍼시펙티브에 머물게 만들었다. “고귀함, 거리의 파토스, 좀 더 높은 지배 종족이 좀 더 하위의 종족, 즉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감정-이것이야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라고 니체는 말한다.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기준도 일종의 퍼시펙티브다. 이 퍼시펙티브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계급성에 의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도덕을 지녔느냐 노예의 도덕을 지녔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지배층임에도 노예의 도덕을 지닐 수 있으며, 피지배층이더라도 주인의 도덕을 지닐 수 있다. ‘나의 눈이 무엇에 반짝이며, 무엇에 감응하고 있는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주인의 도덕은 시대정신을 관통하면서 동시에 부정해야 하며, 그 저변에는 끊임없이 파괴하고도 창조할 수 있는 ‘어린아이의 능동성’을 지녀야한다.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강한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외부에서 덮쳐오는 사건들의 깊이를 감지할 수 있는 고도의 섬세함을 지녀야 한다. 한 집단뿐만 아니라 하나의 영혼 안에서도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은 공존하며, 주인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강함과 섬세함’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시켜야한다. 또한 주인의 도덕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약속할 수 있는 자가 됨을 의미하며, ‘운명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한 주권적 개인임을 의미한다.

“진정, 사람은 더러운 강물이렷다.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하리라. 보라,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야말로 너희의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사라질 수 있는 그런 바다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는 자.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사라질 수 있는 바다 같은 존재가 위버멘쉬다. 니체는 바다라는 무규정성 속에 자신을 던져야 비로소 위버멘쉬가 된다고 말한다. 바다는 모든 것을 삼켜서 무無로 만드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 개체들 모두를 되살려 유有로 만들 수 있는 창조성을 지녔다. 개별 존재의 개체성을 버리고 모든 존재로 환원되는 경험. 그런 바다가 되는 경험을 통해 ‘나’ 안의 무수한 나와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무수한 나로 환원될 수 있으면서도 그 각각의 개체들이 모두 ‘그들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습. 상황에 맞게 옷을 갈아입듯 겉모습만 바꾸는 그런 가면이 아니라, 배경과 관계가 달라지면 그 속에 ‘풍부한 삶이 응축’되어 있어서 진정성을 넘어서 경이로움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런 가면을 지닐 수 있는 자가 바다이며 위버멘쉬이다. ‘무아無我’는 어느 무엇도 아니며, 그 모두도 될 수 있음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나를 괴롭히던 고민이 있었다. 왜 인간의 고통은 공평하지 않은가? 가난한 국가에 태어나 두발로 걸어보지도 못하고 죽는 생명은 무엇이며, 평생 부조리한 삶을 살아도 배부르게 사는 사람은 무엇인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위선적 문구로 위로하려 해도 해소되지 않는 고민이었다. 나는 살려고,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내려면 해석해야했다. 인간의 시선이 아닌 ‘신의 시선’으로 보자! 부유함과 가난함,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시선에서는 ‘아주 큰’ 무엇이지만, 신의 시선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이 틀림없다. 그래! 우리의 고통이란 건 인간의 시각을 벗어나 신의 시각으로 해석해야할 무엇이다. 상상했다. 대지를 벗어나 수직으로 무한의 거리를 두면 비로소 신의 시선과 맞닿지 않을까? 무한한 거리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그냥 한 점에 불과한 게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 고통의 크기가 뭐 그리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폭력적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가장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해되지 않지만 이해해 버리고 망각해버린 의지적 망각은 미해결과제로 남아 삶의 어느 순간 해답이 보일 때, 다시 기억의 표층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끊임없는 연습에서 생겨나는 거리의 파토스가 없다면,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는 전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점점 더 높고 점점 드물고 좀 더 멀리 좀 더 폭넓게 긴장시키는 좀 더 광범위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간단히 말해 ‘인간’이라는 유형의 향상이자 도덕적 형식을 초도덕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 극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신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니체는 채찍질을 가한다. ‘인간의 자기 극복, 즉 위버멘쉬’는 대지와 하늘의 거리,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거리가 아니다. 무한히 멀어지는 수직의 거리가 아니다. ‘거리의 파토스’는 ‘영혼 자체 내부’의 거리이자 예술적 창조의 거리이다. 평범한 인간과 위버멘쉬의 거리는 무한의 거리가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제로(숫자‘0’)가 만들어내는 거리이다. 거리가 줄어들어 ‘영’이 되는 지점에서 바다와 같은 위버멘쉬로 거듭날 수 있다. 제로에서 새로운 거리를 읽어낼 수 있는 퍼시펙티브는 영혼 자체 내부를 감지할 수 있는 섬세함을 의미하며, 영혼 내부의 ‘새로운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희망을 담지하고 있다. 이것이 감정의 거리이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섬세함도 치열함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튕겨내어 무모하게 만든다. 모든 감정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감정을 잠재워야한다. 모든 감정을 잠재워 모든 감정을 수용해야한다. 영혼은 흘러넘치고 감정은 고요하게 유지하여, 모든 ‘파토스’를 감지해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라는 유형의 향상이자 인간의 자기 극복’의 한 방법이 아닐까?

 

Ⅳ. 맺으며 : 생의 모든 순간, ‘위버멘쉬’함을 잊지 마라!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것, 영원회귀를 긍정하고 상승하는 것, 위버맨쉬가 된다는 것은 영원회귀를 발판삼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나를 몰락으로 이끄는 영원회귀를 발판삼아 딛고 날아라! 인간은 어둠을 소환하여 어둠을 벗어나려고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의 경험을 해본 사람,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본 사람은 또 다시 죽음을 넘어서려고 하는데, 이때 죽음은 삶과 맞닿아있다. 왜 그 공포와 맞서려 하는가? 몰락은 분명 두려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욕하는 그 모든 선택은 미래의 새로움과 삶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죽음의 경험은 새로운 삶을 시도하는 힘이 된다. 니체가 산책길에 목격한 사건,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고 있던 말을 보고 울면서 뛰어들어 말을 감싸 안은 니체의 행위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니체의 행동은 연민에서 비롯된 너무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 위버멘쉬의 모습이다. 자비심을 가지고 지옥으로 내려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 몸에 걸친 팬티까지도 내어주고 땅으로 온 몸을 두르고 있는 지장보살의 행위, 이 경지 또한 위버멘쉬이다. 이 두 사건은 연민이 극대화되어 표현된 행동이 아니다. 채찍질 당하고 있는 ‘말’은 니체 자신이며, 지옥에 떨어진 수많은 중생은 지장보살 그 자신인 것이다. ‘我를 포함한 無我의 경지’이며, 위버멘쉬의 경지이다. 이는 메타포가 아니다. 실제의 육체를 지닌 ‘개체’의 문제이며, 인식의 전환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며 다른 몸으로 변화해서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경지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인간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가? 거리의 파토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모든 감각은 감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에 어떤 자세로 대응해야하는가? 일렁이는 감정에 거리를 둬 관조할 수 있게 되면, 자신의 객관적 ‘거리’가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감정의 거리가 ‘관조의 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객관적 거리는 존재하지 않음을 니체는 거듭 말하고 있다. 거리의 파토스는 제로의 거리이며 그 제로의 거리에서 비로소 새로운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거리는 개체 내부의 변화이며, 유일하게 의욕하는 자만의 과제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위버멘쉬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믿음을 강요하는 신학적 문제도 아니다. 위버멘쉬는 모든 인간을 넘어선 모든 개체들의 정거장이며, 거부할 수조차 없다. 때문에 위버멘쉬를 의욕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실존의 문제이다. 중력의 영影이 우리의 어깨에 올라타서 무한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낙타의 삶, 난쟁이의 삶을 무한의 깊이로 치환시켜 축제의 삶으로 바꾸어 보자. 그것이 우리가 대지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유일한 의미이며, 유일한 실천일 것이다. 영혼은 흘러넘치고 감정은 고요하게!

 

참고자료

니체, 정동호 옮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18

니체, 김정현 옮김,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18

이진경 선생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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