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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 : 위반의 시학] 12강 발제

필아 2022.12.05 18:49 조회 수 : 40

2022-2 수유너머104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조르주 바타유 : 위반의 시학]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김필아 발제

 

 

인간이 짐승과 구분된 계기는 라스코의 기적이라는 형태로 사유된다. 라스코동굴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예술 작품이 인류의 형성과 긴밀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는지 이 책은 드러내 보고자 한다.

브뢰유 신부가 기획(『벽화 예술 4만 년』, 1952년)한 그리고 글로리 신부가 결실을 맺고 있는 연구에 도움을 받아 저술하였다.

 

 

라스코의 기적

 

예술의 탄생

라스코동굴은 선사시대 동굴로 인간과 예술에 대해 감각할 수 있는 태초의, 최초의 기호이다. ‘라스코인’은 무에서 예술의 세계를 창조했으며, 이 세계에서 정신들의 소통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라스코인’은 자기의 먼 후손인 현재의 인류와도 소통하고 있다. 시간의 끝없는 흐름에도 변질되지 않은 그림들이 현 인류에게 도달해있다.

 

라스코와 예술 작품의 의미

그리스의 기적과 라스코의 기적

예술 작품은 이해타산이 아니라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다.

벽화의 마력은, 무엇을 생각했든 간에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출현한 데서 비롯된다. 인류의 청춘은 라스코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풍요로움의 폭을 재단했다. 풍요로움의 폭,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 다다를 수 있게 한 그 능력의 폭, 즉 경이로움.

그리스 역시 기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리스에서 발산하는 빛은 낮의 빛이다. 낮의 빛은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 번개가 내리칠 때, 빛은 더욱 눈부시다.

 

라스코인

 

네안데르탈인에서 라스코인까지

브뢰유 신부 저서 『벽화 예술 4만 년』에서, 라스코 벽화의 일부는 오리냐크기에 해당하며, 주요 부분은 페리고르기에 속한다고 썼다. 이를 오리냐크기, 즉 (구석기)중기와 후기 오리냐크기라고 지칭하였다. 이로써 중기와 후기 오리냐크기를 살았던 인간을 ‘라스코인’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라스코라는 이름은, 짐승과 다름없던 인류가 오늘날 우리들처럼 섬세한 존재로 이행하던 시대의 상징이 된다.

 

라스코인의 풍요로움

동물적 삶의 움직임을 그려낸 풍요롭고 한량없는 이 벽화들 앞에서, 우리가 보기에 분명한 것은, 라스코인들의 삶이 인간다운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물성의 이미지 역시 인간답다. 동물성의 구현한 삶은 동물성 안에서 아름답게 그려진 것이고, 실제로 아름다웠으며, 주권적(主權的)이다. 이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참함의 저편에 있다.

 

천재성의 역할

네안데르탈인이 웃는 법을 알았는지 의심스럽지만, 라스코인은 분명히 웃는 법을 알았다. 우리는 고통의 누그러짐에서 웃음이 탄생했으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동굴에 그려진 작품들과 어린애들의 연필 낙서를 비교해보는 일도 있는데, 이는 참 희한한 일이다. 우리는 원시시대를 유년기로 표상하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 구석기시대 인간들은 우리 어린이처럼 어른들의 보호를 받고 자라는 처지가 아니다. 라스코인은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복잡한 미래를 짊어지고 있었다.

벽화를 그린 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기를 꺾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던 어떤 전통을 거부해서는 안 됐을 것이다. 작가는 그럼에도, 창조함으로써, 그 관습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그 이전까지 존재하던 것을 넘어서버렸다. 그 이전 순간에는 없던 것을 창조해 냄으로써.

 

놀이의 탄생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결정적 사건이 두 가지있다. 하나는 도구(혹은 노동)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혹은 놀이)의 탄생이다. 도구는 호모파베르에서 시작된 것으로, 호모파베르는 더 이상 동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현생인류와 동일하지도 않은 인간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네안데르탈인이 호모파베르에 속한다. 예술은 현생인류를 가리키는 호모사피엔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순록 시대 초기 이전에는, 인간의 삶이 동물의 삶과 구별되는 지점은 오직 노동뿐이었다. 사냥은 노동이 아니라 동물적 활동의 연장이었다. 예술(이른바 형상화)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에는, 사냥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인간의 활동에 속했다. 돌을 이용해 노동함으로써, 노동을 통해 인간다운 사유를 하게 되었다는 한에서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었다. 노동은, 미리 앞서서, 곧 다가올 시간 속에서,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곧 만들어질 어떤 사물(대상)의 자리를 잡아놓았고, 노동은 순전히 이런 목적에서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인간의 머릿속에서 사물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자리 잡게 된다. 한쪽은 현재 있는 것들이고, 다른 한쪽은 미래에 있는 것들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둘로 나뉜 국면에 과거의 사물들이 더해져 합을 맞추고, 사물들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존재하게 된다. 욕구를 표출하는 짐승의 울부짖음 차원을 넘어서 변별적 기능을 지닌 언어도 이때부터 가능해진다. 언어는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사물을 지속적으로 고정시킬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사물은, 그것을 발화하는 자로부터 즉각적 감각성을 떼어내버린다. 인간은 이 감각적 부분을 되찾는데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해야 한다면, 유용한 작업적 산물을 만들어 냄으로써가 아니라 예술 작품을 창조해 냄으로써 감각적 부분을 되찾는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금기

시체 매장 풍습이 생기기 이전 시대에, 대부분 시체의 머리 부분만 매장하였다. 머리는, 죽음 이후에도 그 몸에 살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영원히 표상해주는 신체 부위로 여겨졌다. (이 당시 사람들은) 물건은 변한다 해도 무엇인가는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주변 사람들은 죽은 자의 머리만은 살아 있을 때의 그 사람으로 여겼다. 원시적 존재들에게 있어 머리는 불완전한, 뭔가가 결핍된 사물이었다.

죽음은 어떤 부정적인 요소로 가져온다고 생각했고, 죽음이란 효율적 행위가 아닌 다른 가능성들을 끝없이 열어주는 균열로 여겼다. 즉 이때의 가능성들은 ‘백조 같은 목’을 가진 사람, 즉 오리냐크인에 이르기까지는 개척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 이전의 인류는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금기로 인식하였다.

산 자들은 시체의 접근을 금지하려 애셨고, 어떤 대상이든 간에 시체 주변에 허가되는 일상적인 왕복을 제한시켰다. 인간들이 시체들을 대하는 오래된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물건들에 대한 다름과 같은 근본적 분류가 시작되었다. 즉, 한쪽은 신성하고 금지된 것으로, 다른 한쪽은 세속적이고 제한 없이 접근해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나뉘었다. 이런 분류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구축해온 움직임들을 지배한다.

 

금기들의 전체적 결속

라스코의 세계는 금기에 대한 감정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인간의 근본적 금기들은 죽음에 연관된 것과 생식, 즉 출생에 연관된 것이다. 죽음에 관련된 금기들 중, 선사시대에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는 금기는 오직 죽은 자의 유해를 건드리지 말라는 금기뿐이다. 생식에 관련된 금기는 근친상간, 여성의 생리기간과 관련된 규율들, 일반적 관점에서 정숙함과 관련된 금기들, 임신과 잠자리에 관련된 금기들 ― 이런 행동 방식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지, 애초부터 정해진 어떤 특정한 금기의 형태들에 관한 것은 아니다. 단지 노동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자문해볼 따름이다. 인류에게 있어 노동의 세계는 성과 죽음의 세계와 대립되며, 인류는 언제나 바로 이 지점에서 지금의 우리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금기의 초월: 놀이, 예술, 종교

라스코 예술의 탄생은 맹아의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첫 번째 의미가 있다. 놀이만이 오직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주술적 의도에는 이득의 계산이라는 의미가 있다. 라스코 외의 다른 벽화들 역시, 주술의 힘을 빌린 단순한 계산적 의도로 환원시켜 설명하기 힘들다. 오직 놀이만이, 초보적인 그림들을 그리도록 할 수 있다. 평온한 상태, 효율적인 생활을 바라는 의도는, 놀이라는 산물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모파베르(노동의 인간)는 놀이에 들어서지 못했고 ‘사피엔스’가 기여한 부분이 역설적으로 인식이 아니라 예술이다.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 특히 예술이라는 감탄할 만한 놀이)가 더 적절한 이름이 될 것이다. 호모루덴스라는 표현만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명확하게, 네안데르탈인의‘파베르’에 대응하는 이름이다. ‘파베르’의 도약은 네발짐승 모양새의 둔중함을 극복하지 못해 유인원에 더 가까웠다. 놀이-인간, 웃고 유혹하는 인간, 결여하고 주권적이 풍모가 처음 나타난 것은 호모루덴스부터다.

맹아 단계의 인류에게는 인간의 의의를 예술의 의의와 연결시켜 주었던 놀이라는 인간 세계를 창조할 만한 힘이 없었다. 놀이는, 매번 일시적으로나마 서글픈 욕구에 따른 것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를 해방시켰고,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든 풍요로움의 경이로운 표출에 다가서도록 했다. 그럼으로써 각자가 비로소 탄생했음을 느끼도록 했다.

 

금기와 위반

금기를 초월한 결과로서의 놀이의 중요성과 그 현실.

내가(바타유)가 말하고자 하는 위반은 종교적 위반, 황홀경의 원천이자 종교의 핵심으로서의 법열(法悅)의 감각과 관련되는 위반이다. 이 위반은 축제와 결합되는데, 축제에서 절정의 순간은 바로 희생제의다. 고대인들은 희생제의 속에서 제물을 바치는 사제의 범죄를 보았다. 이 범죄란, 사제가 참석자들이 불안에 떨며 고요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희생물을 죽임으로써 사제 그 자신도 불안에 사로잡힌 채 합당하게 살인 금기를 어기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본질이나 실천에 있어 예술이 종교적 위반의 순간을 표현한다. 오직 예술만이 이 순간을 충분히 엄숙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오직 예술만이 그 표현의 유일한 통로하는 것이다.

위반이 일종의 축제적 움직임이라는 자유로운 흐름 속에 스스로 내맡김으로써 마침내 인간 활동 속에서 종교가 위반에 부여한 탁월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설명된다. 희생제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금기가 삶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세속적 시간을 초월하는 신성한 순간의 탐색에 응답해왔다.

예술의 탄생은 순록 시대에 있어서는 놀이와 축제의 소란과 맞닿는다. 동굴 깊숙한 곳의 형상들에서 삶은 빛나며, 삶이란 늘 죽음과 탄생의 놀이 속에서 스스로를 극복하고 완성시킨다.

 

 

동굴 묘사

 

여기, 우리들 탄생의 장소에서…

큰방: 황소의 방

지하의 라스코로 향하는 계단들 아래에는 먼 존재들, 동물적 삶이 지배했던 밤으로부터 이제 막 솟아오른 존재들의 흔적이 있다.

계단들을 지나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청동문을 지나면 커다란 방, 더 길고 넓은 방으로 이어진다. 동굴에는 무언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무언가가 간직되어 있다. 동굴들은 그 자연적 본성상, 신성한 의식들을 통해 불안감을 조성하기에 좋은 장소들로 여전히 남아 있다. 불안감을 동반한 마력을 조성하는 데에는 다른 여러 사람의 참여나 도움이 필요치 않은, 모여 있기에 좁은 회랑이거나 좁은 구석들이다.

황소의 방에서 말 그림이 완성되지 않은 이유는 먼저 있던 황소들 위에 덧그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라스코(큰방과 중앙 샛길의 경우)에서는 자주 이런 식의 그림 배치가 있다.

일각수 벽화-일각수는 방을 가득 채워 눈앞이 먹먹해질 정도의 충만감을 부여하고 있는 이러한 야생적 존재의 집합, 장엄한 형상들 가운데 위치한다. 그리하여 난해하면 난해할수록,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과 이질적이면 이질적일수록 더욱 신성하게 보이는 야생적 존재의 집합에 정점을 찍는다.

 

중앙샛길:

이 샛길에서는 큰 방을 지배하는 휘황찬란한 동물 행렬 같은 단일한 움직임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반대로, 여러 움직임들이 거의 온 방향으로 흩어져 있다. 여기저기로 깡충깡충 튀는 모양이 오히려 하나의 총체를 이룰 만한 가능성으로 뒤엎어놓는다. 암소들은 실제로 가볍게 점프하는 것 같은 괴상망측한 자세로 그려져 있고, 안쪽에는 또 머리를 아래로 한 채 위에서 떨어진 말 한 마리가 희한한 표현 방식으로 그려져 있어서, 벽화들이 사방으로 분산되어 있다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이 샛길의 공간은 중간쯤에 오목하게 목이 졸린 모양의 긴 복도 형태로, 끝 쪽을 향해 조금씩 하강하게 되어 있다. 끝부분은 약간 연극적인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위에서 떨어진 말이 등장하는 좁은 무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무대’의 우측에는 실제 연극의 무대 뒤처럼 좁은 틈이 있는데, 이 틈은 폭이 훨씬 더 협소하고, 한 번 꺾였다가 다시 확 좁아지면서 동굴의 경계가 여기까지임을 표시해주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구성원리가 있다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광장히 교묘하게 모자이크처럼 붙여놓았다. 이 요소들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서로 다른 요소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절대로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을 결정하기 위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오직 우연과 맹목적 본능에 따라 배치한 질서에서 풍겨나오는 마력이다.

 

파악할 수 없는 기호들

통로, 회중석과 고양이의 작은 방

붉은사슴 머리 다섯 개가 벽면 돌출부 위쪽에 연이어 그려져 있다. 마치 사슴 머리들이 강물에서 떠올라 회중석 안쪽을 향해 이동하는 것 같다. 첫인상은 그리 놀라울 것이 없지만, 이 이미지들은 묘한 동물적 부드러움의 여운을 남기며 불교의 윤회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이 그림의 화가가, 인간이 아니라 그 자신 한 마리 사슴이 되어, 잠에서 덜 깨 혼란스러운 어느 순간에 이 사슴들을 그린 듯 말이다. 이 사슴 그림들은 그 자체로 몽롱한 인상을 주고, 경계에 대한 느낌을 슬며시 밀어내며 지워버린다.

 

후진과 우물

우물은 동굴에서 가장 놀라운 곳 중 하나다. 이 벽면에는 코뿔소 한 마리가, 다른 쪽에는 들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이 두 동물 사이에는, 장대 위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 윗부분에 새 모양 모리를 한 남자가 반쯤 쓰러져 누워 있다. 들소는 문자 그대로 맹렬하게 털을 곧추세우고 꼬리를 빳빳이 세웠는데, 내장이 다리 사이로 육중한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나오고 있다. 이 들소 앞에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그려진 투창 하나가 들소가 다친 부위 위쪽을 베고 있다. 새 머리를 한 남자는 벌거벗은 상태고, 성기가 발기되어 있다. 어린애 수준의 데생 기법으로 길게 뻗어 누워 있는 사람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그가 방금 죽음을 맞이한 듯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남자는 팔도 양쪽으로 벌린 채고 손도 펼친 상태다(손에는 손가락이 네 개씩밖에 없다).

 

각고 비틀기 그리고 벽화들의 상대적 연령

이미지들은 서투른 솜씨와 강한 표현력이 혼합되어 있다. 서투른 느낌은 동굴의 형상들 전체를 아우르는 공통적 특징을 더욱 부각시킨다. 형상들은 ‘각도 비틀기’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발, 귀나 뿔 혹은 나무) 오리냐크기에는 통상적으로 각도 비틀기가 나타난다.

 

인간의 표상

 

짐승의 위용으로 치장한 인간

순록 시대의 인간은, 동물에 대해서는 위엄 있으면서도 충직한 이미지를 남겼지만,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주로 동물의 탈 뒤에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선들만을 남겼다. 즉, 인간의 몸에 동물의 머리를 씌워버린 것이다. 마치 자기 얼굴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처럼. 그리고 만일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싶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동시에 타자의 가면을 써야만 했던 것처럼.

 

우물 인간

우물 인간은 뻣뻣하고 초보적, 들소는 대단히 사실주의적으로 그렸다.

 

 

이 남자와 들소는 단순히 병치 된 것도 아니고 각각 독립적으로 무관하게 그려진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동굴벽화들의 경우 각각의 형상들이 따로 그려졌다.)들소는 정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지각적 사실주의라는 명칭이 걸맞을 정도다. 라스코의 다른 대부분의 동물형상들과 비교해보면, 이 장면에는 더 이상 자연주의적으로, 즉 보이는 대로 충실하게 모방한 그림이 아니라, 형태를 나타내는 대단히 단순하고 식별 가능한 도형들만이 그려져 있다.

총체적 관점에서, 순록 시대의 인간 형상들은 실제로 이런 종류의 근원적 분리에 부응한다. 마치 어떤 체계적 정신에 따라, 인간은 자연주의적 묘사로부터 제외시키고, 동물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완성도 있는 자연주의적 기법으로 표현한 듯 말이다.

 

오리냐크기 인간의 형상들

오리냐크인들의 실루엣은 탈을 쓴 모양(브뢰유 신부 주장)

삼형제 동굴의 반인반수 형상들

에블린 로트팔크가 쓴 『사냥의 제의들』-- 사슴뿔을 달고 있는 인간(아니면 신)

;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인간을 부정하기, 자신의 물질적 행위드의 효용성을 진작시키며 노동하고 계산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기였다. 또한 중요한 것은 신적이고 비인격적인 요소, 이성이 없고 노동하지 않는 동물에 가까운 어떤 요소를 얻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였다. 인류는 노동이라는 이성적 행위를 끌어들이면서, 자신들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인류는 마치 자기들에게 진정한 능력을 부여한 이런 계산적 태도에 대해 속죄하려는 것처럼 주술적 능력에 몰두했던 이유다.

신성의 무한함이라는 특성이 바로 동물의 형태, 즉 인간 고유의 속성인 실용적이고 한정된 측면에 반대되는 동물의 형태를 띠고 표출된 것이다.

 

여성의 형상들

신적인 것이란 곧 동물적인 것이다. 신의 첫 번째 특징은 동물성이다.

여성들의 형상들은 대부분 소형 입상들로 되어 있다. 모성애의 면모들을 강조, 남성 형상들이 그려진 기법이 허술하고 어린애 낙서 같았던 것과는 달리, 여성의 형상들은 정밀한 자연주의에 속한다. 다른 현편으로는 기형적인 관념주의에 속한다. 가슴이 풍만하고, 둔부와 엉덩이가 두드러진 이 하체 비만의 비너스들.

풍만한 형태들은 다산과 풍요의 욕망. 여성의 이미지들은 단 한 번도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난 적은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

 

라스코의 동물 그림과 조각 예술

 

“동물들과 그 인간들”

라스코 형상들의 의미에 대해, 그들이 동물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동물 형상들에 표현된 감정들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에블린 로트팔크의 『시베리아 민족들에게 있어 사냥의 제의들』중 한 문단

“사냥꾼은 동물을 최소한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본다. 사냥꾼이 보기에 동물 역시 자기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위해 사냥한다. 사냥꾼은 동물도 자기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고, 같은 형태의 사회 조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우월성은 오직 도구를 가져와서 사용한다는 기술적 측면에서만 확인된다. … 동물은 인간에 비해 신성과 더욱 직접적으로 접촉하며, 인간에 비해 자연의 힘에 더 가까운데, 자연의 힘들은 대체로 동물 자체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사냥감은 인간과 마찬가지의 존재다, 다만 더 성스러울 뿐이다.’라고 나바호의 인디언들은 말한다. 그리고 이 문장은 시베리아인의 입에서도 그대로 나올 법하다.”

『사냥의 제의들』저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동물의 죽음은, 부분적으로나마 동물 그 자체에 달린 일이다. 한 마리 동물이 살해당했다는 것은, 그 동물은 사전에 동의를 표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 동물은 자신을 죽일 살해자와 미리 공모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냥꾼은 사냥감을 몰면서 그 사냥감과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순록이 그 사냥꾼을 좋아하지 않으면 사냥꾼은 순록을 죽일 수 없다’고 유카기르족은 말한다.

라스코의 동물은 신이나 왕들과 같은 수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야말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다음의 사실들을 상기시켜주는 장소다. 즉, 주권성(오직 그 자신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음)은 왕만이 지닐 수 있었으며, 왕과 신은 혼동되었고, 신은 짐승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이러한 최초의 인간들의 진실을 놓칠 수 없게 된다.

‘동물들과 그 인간들’은 폴 엘뤼아르의 시집 제목이다. 그가 남긴 이 시구가 우리에게 열쇠가 되어준다면, 우리는 라스코동굴의 문을 열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더 진솔한 감정은 시의 조건이 된다. 이는 또한, 우리가 동굴의 침묵 속에 전해주는 가르침 앞에서 스스로를 닫아걸고 싶은 게 아니라면 꼭 치러야 할 대가이기도 하다.

 

사냥, 노동과 초자연적 세계의 탄생

운이란, 노동과 기술의 세계보다 더욱 강력한 세계에 의해 좌우되는 것, 즉 논리적 효용성의 생각에만 물든 채 노동하는 태도에 머물러 있는 인간에게는 접근이 차단된 세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다.

주술적 작업은, 수단들이 이루는 노동하는 세계보다 신에게 바치는 목적으로서의 세계(신성)에 더 많은 진실을 부여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이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주권적인 힘, 노동의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기에 차라리 동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어떤 힘 앞에 몸을 숙인다.

형상들은, 동물이 지녔음에 틀림없는 성스러움이라는 가장 위대한 가치를 인간이 인정하던 순간을 표현하였다. 인간은, 그를 부추기는 성스러운 식욕이라는 욕구를 숨긴 채, 동물에게서 아마도 우정을 기대했을 것이다.

동굴에 그려진 동물의 자연주의는, 동물을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동물에 내재하는 초자연적인 것을 그려내는 데 도달했다.

 

예술사에 있어 라스코의 위치

라스코의 이미지들을 특징짓는 지점은 이 이미지들이 제의에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이 제의들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벽화 그리기 행위 자체가 제의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의 종교적이거나 주술적인 작업이었던 것이다.

복종할 줄 모르는 자발적인 운동성을 자극.

라스코에서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인습에 찌들지 않은, 열에 달뜬 움직임들 속에서 정신이 춤을 추는 느낌이 우리를 흥분시킨다. 존재와 그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자유로운 소통이다. 풍요를 발견한 이 세계와 하나로 합치된 인간은 여기에 몸을 내맡긴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스코 예술은,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깊이 있는 창조성이 존재했던 시기의 예술과 은밀한 공통점을 지닌다. 라스코의 섬세한 예술은, 인습을 격렬하게 떼어내면서 새로이 탄생하는 예술들을 통해 부활한다. 고대 이집트 제국의 예술, 6세기 그리스 예술 등이 그러한 때라고 상상해본다. 하지만 라스코에게는 떼어낼 인습이 없었다. 라스코는 첫걸음이자,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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