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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24. 발제 탁선경

부분적인 연결들. 문화들(부분2). 중심과 주변. p.198-222

 

부분1. 예기-제거

부분1. 예표

전체의 형상화는 이미 입수한 내레이션의 전략을 통해 파악 가능하다. 가장 포괄적인 것은 로이 와그너가 예기-제거라고 부르는 재귀적 절차의 형식을 해명한 후에, 예기-제거 분석으로 알려지게 된 방식이다. 제임스 와이너는 파푸아뉴기니의 쿠투부 후수 지방의 포이족을 다룬 논문에서 예기-제거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인류학자가 사회과정으로 인식하는 것, 즉 사건들의 흐름은 비유를 다른 비유로 대체하거나 치환하는 가운데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했다. 예기-제거 ‘분석’은 관찰자가 보기에 시간적 공간적 시퀀스를 반복 복제하는데, 그렇게 끊임없이 관계를 재인식함으로써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스스로 이동하고 그들 인식의 관계적인 기반은 명백해진다. 

관계가 사물과 인격에 내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곳에서 사람들은 사물과 인격이 드러내는 유비유추를 통해 그 관계가 알려지도록 노력한다. 그에 따라 인격과 사물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분해된다. 여기서 관계가 사물과 인격에 내재한다는 예표는 ‘사회’나 ‘문화’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고 상정하는 것, 즉 모든 새로운 인격이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배치를 상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러한 배치는 북부 메케오의 생식에 관한 공간적인 이미지 속에 암시적으로 존재한다. 거기서는 그 어떤 것도 다른 것의 내부이거나 외부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밀봉된 태초의 단일한 존재라는 이쿠와예iqwaye의 개념 속에,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난 수학 속에 존재한다. 

예기-제거 분석이 사회적 및 문화적 전체성의 예시를 해명할 수 있다면, 구조주의적 분석은 정신활동을 표면적으로 구성하는 요소들의 선취에 기초한다. 스트래선은 이 가능성들을 간과해온 부분에 대해 지적하는데 이 ‘공백’은 사례들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의 효과에 의해 창출되었다.

 

부분2. 형식을 끌어내다

파푸아뉴기니와 그 이 멜라네시아의 사람들이 어떻게 연결을 다루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학에서 방치되었던 사례들의 대응관계가 자리 잡힐 필요가 있다.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분명하게 문화적인 의도를 갖고 여행을 떠난다. 댄서가 거대한 대나무 조형물을 머리 위에 이고 있어도 목이 꺾이지 않는 것은 이름 있는 정령의 힘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자와 피규어가 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에서 그 정령을 보는데 이러한 것들은 관계들을 알게 해주는 특정한 효과, 즉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피규어는 그에 대응하는 피규어를 ‘생산하는’ 것으로 보이며 한 이미지가 창출한 효과는 그 다음의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연행performance 혹은 의례의 사회적 맥락으로 인식하는 것 또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피규어들(피규어들과 반-피규어들)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마치 비유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는 예시된, 계획된 환기, 예정된 목적지를 향해가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나무와 피리>는 이와 대조적으로 이미지의 대응이 너무 거리가 있는 탓에 모든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듯 하고, 유사성을 암시하는 내레이션은 동떨어진 대응관계들을 차례로 이어붙이고 발동시켰다. 유사성이 인위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내러티브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사성을 배경에 깔아두는 “인간 행위의 도덕적 기반”은 그들에게는 차이를 만드는 구별짓기가 된다. 이 변환과 차이화의 시퀀스를 모방함으로써 형식이 특정한 연쇄 속에서 나타나는 그 모습을 전면에 드러낸다면, 대응관계들의 자의적인 성격은 해소될 것이다. 

형식은 형식을 발생시키거나 그에 의해 대체되고 이미지는 이미지를 창출한다. 사람들은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의 확장으로 이용하는데 의미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이미지에 내포된 것이 도출되거나 환기된 것을 통해 알려지게 된다면, 의미의 해명은 그 이미지의 사용법에 적용된다. 행위자의 연행이나 시간의 흐름을 갖는 연행의 시퀀스는 이미지 자체의 창조성을 위한 유비유추의 틀을 제공한다. 유비유추를 드러내는 것, 즉 유사성과 차이 간의 내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대체된 피규어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성장과 이행의 감각은 하나의 가치 세트가 그 다음의 가치 세트를 ‘생산함’(나타나게 함)과 동시에 그에 대체되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부분2. 커뮤니케이션

부분1. 복합적인 지식

시퀀스라는 관념은 분석자의 발견 여행에 적절한 이미지이고 멜라네시아의 신화, 의례, 특히 교환관계에서 연쇄와 계시가 분명히 나타난다. 리처드 워브너는 앨프리드 겔이 부수적으로 다뤘던 피규어에 대해 분명히 한다. 완토아트의 조형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형식, 다른 피규어들에 의해 확장되고 거대한 구조물에 감싸여 있으며 깃털 장식으로 길이를 연장하는 피규어.

겔은 하나의 도안이 다른 도안에 잇따라 나타나는 변증법적인 병치의 의의를 확립한다. 시간은 그 순간에 내포되며, 개막을 알리는 몸짓(이다 축제)은 전체의 피규어가 된다. 

프레임, 덮개, 술 장식과 깃털 장식이 달린 가면은 나무와 식물 관련 소재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목재 나팔의 반주에 맞춰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와 그의 가면으로 구성된 형상 전체에 대한 우메다 사람들의 해설에서 나무의 구조와 신체의 구조 간에는 명확한 평행관계가 형성된다. 

화식조 가면 윗부분의 과일 한 묶음은 남자들이 결혼할 때 인도받은 딸들에 대응한다. 어느 한 마을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마을들은 딸을 교환하는 마을과 가면을 교환하는 마을로 양분된다. 그에 따라 어느 한 남자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공동체의 딸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그 공동체의 남자들의 가면을 쓸 수 있다. 워브너는 이 교환행위를 그 자신의 공간분석의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서, 시간처럼 공간 또한 진동하는 중심-주변 관계로 되돌려진다. 수풀 곳곳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은 축제 기간에 마을에 집합했다가 또다시 흩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창출한 중심은 다른 사람들의 중심의 유사물로 간주되며, 이 중심 또한 그 사회적 주변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가면을 씀으로써 남자는 공간을 통해 시간을 가로지르는 상징적인 이행을 달성한다. 가면 속에서 그는 생명이 출현한 내부 공간에 진입한다. 이 공간은 태초의 존재의 기원에 따라 어떤 나무였다가 또 다른 나무가 된다. 그리고 그는 공간과 시간을 역전하면서 마치 화식조처럼 태초의 존재가 된다. 서로의 영토에서 외부자인 남자들은 가면을 교환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내부자에게 자신을 내주고, 그에 따라 서로의 내부 공간에 접근한다. 한해(…)의 대부분을 그들은 사실상 인근의 작은 땅에서 삶을 보낸다.(…) 그러나 축제 기간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한계를 확장한다. (…) 남자들은 가면과 여자를 이용해서 마을들 간의 영원한 접촉을 창출한다. (…) 여자는 가면처럼 내부자인 남자들을 담는 그릇인데, 각 그릇은 [그릇, 즉 마을의] 내부자로 제한된다. 가면은 남성적인 자궁이며 여자는 여성적인 자궁이다(Werbner). 사회적 교환의 측면에서 영토와 여자는 대조적으로 다뤄진다. 영토와 여자는 둘 다 생명-공간 제공자이자 그 그릇으로 다뤄지는데, 이 속에서 영토는 움직일 수 없는 반면 여자는 움직일 수 있다. 생명-공간의 그릇을 둘러싼 호혜성과 교환은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접촉을 가져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명-공간의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에워싼 물리적 환경, 즉 움직일 수 없는 주변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가면은 한편으로 여자처럼 움직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영토 같은 영속성과 관련된다. 가면의 내부에서 공간에 대한 접근을 공유함으로써 [남자들은] 여자들을 교환하지 않는 영토들 간의 더욱 고차원적인 상징적 접촉을 확립한다. (Werbner)(208,209)

 

워브너는 우메다와 가까운 공통체 사이의 교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지리적인 배치를 지도로 그리는데. 이 관계는 두 가지 원리의 작동을 입증한다. 첫째, 사회가 단순한 이진법적인 단위로서 재현된다는 것. 둘째, 각각의 공동체는 자신을 공동체들로 이뤄진 우주의 중심으로 본다는 것.

남자는 자기 네트워크의 중심에 자신을 놓지 않는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의 중심과 마주하는 곳에 놓인다. 예를 들어, 푼다 마을은 우메다의 퍼스펙티브에서 보면 우메다의 일종의 거울본이며, 이 한쌍의 마을을 가로지르는 영속적인 대외 교환은 인접하지 않는 영토들 간의 접촉규칙에 따라 더 큰 공동체를 형성한다. 각각은 다른 쪽에게 ‘또 다른 남자의 중심’이다. 

광역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워브너의 이론화에서 푼다는 중축의 위치를 점하는데 푼다는 그 자신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메다의 거울이라 해도 복사본은 아니다. 푼다 마을은 아마나브어를 말하는 이웃 공동체와도 접촉을 갖는다. 이 지역은 줄리에라트의 민족지의 연구대상인 야파르 마을을 포괄한다. 푼다는 우메다와 야파르 양쪽 모두와 통혼한다. 푼다와 마찬가지로, 야파르는 우메다로부터 풍요신 숭배의 식인 이다ida를 차용해서 그것을 양기스라고 부른다. 우메다의 ‘딸들’인 푼다와 야파르는 우메다를 ‘어머니’로 모신다. 

서로의 지식이 표면적으로 불균일하게 분포하는 것에 대해 도발적으로 접근하면서 워브너는 우메다의 이다와 야파르의 양기스 간의 차이가 야파르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야파르의 관점이란 우메다와의 관계에서 자신들을 보는 관점의 측면임과 동시에 자신들을 위해 실천을 재중심화하는 측면이기도 하다. 야파르는 양기스를 외부에서 차용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양기스라는 의례는 야파르에게는 이국적이고, 반면 우메다에게는 토착적이다. 그것은 그들을 양성한 우메다 문화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야파르는 결사활동이 그들을 진정으로 양성한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그것을 재중심화해왔다. 워브너가 보았듯이 양기스는 이다를 반복 복제할 수 없다. 두 공동체는 동일한 기대효과(풍요로움)를 위해 의례를 연행한다. 그러나 ‘딸’이 보는 것은 ‘어머니’가 보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야파르가 낳은 쪽의 관점보다 태어난 쪽의 관점을 재구축할 때의 다양한 차원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워브너의 분석은 사람들이 서로의 의례를 해석하는 방식을 상상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세계가 다른 사람들의 중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그들 자신의 중심을 창출한다. 그렇게 저 중심들을 바라보는 이 시야는 보존되고 공동체들은 상호 소통하지만 자신의 퍼스펙티브를 타자의 퍼스펙티브에 강요하지 않고 각각 자체 버전을 수립한다. 따라서 이웃 공동체는 반-실천을 이끌어낸다. 커뮤니케이션은 효과적이며 회로는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메시지’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전달된다. 워브너의 분석은 우메다의 축제 그 자체의 고동치는 움직임에서 착상을 얻었다. 공동체는 확장하고 다시 흩어진다. 

여기저기 흩어진 경작지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신의 중심성에 대해, 또 주변에 있는 다른 중심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에 대해 즉각적으로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점의 수축과 확산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 수축과 확산은 남자들이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 꾸미고 다시 인간의 크기로 축소하는 방식에도 반영된다. 그러나 워브너가 이것을 찾는 데에 사용한 스케일은 항상 중심의 시야를 견지해야 한다. 주변의 시야는 중심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시야이며, 그것은 의례적 집회와 대외적 교환에 쏟는 남자들의 노고를 통해 상호소통 속에서 불러들이는 다양한 이름의 공동체에 의해 구성되는 하나의 버전이다. 이 시야는 언어집단을 넘어설 수 있다. 이 서부 저지대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신의 고유한 내면을 그 외 다른 곳에서 중심화된 인격들의 내면들로부터 만들어 내는 것, 즉 문화를 ‘빌려오는 것’에서 한층 더 나아갈 수 있는지의 가능성이다. 

 

부분2. 수출과 수입

이다에 관한 겔의 분석에 대해 워브너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단일한 변환의 전개가 아니라 개시의 순간에서 갈라져 나오는 시퀀스들의 융합과 얽힘이라는 점에 대해 비판 한다. 또한 겔은 그 가치를 평가절하했던 광대의 중요성을 복원, 이항 조직을 이론화하기 위한 분석적인 좌표를 만들어내고 야파르의  퍼스펙티브에서 어떻게 한쌍의 태곳적 피규어가 하나의 같은 남성의 형식 속에서 남성으로 드러나면서 여성으로도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이 점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관습적인 분리가 남녀 간의 상호관계를 비유적으로 본뜬 남성의 교차사촌들 간의 대립으로 변환한 것에 관한 제임스 와이너의 예기-제거 분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스트래선은 이 점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논한다. 하나로 하든 둘로 하든 어떤 숫자이든지 간에 완전한 혹은 전체의 피규어와 함께 출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 혹은 ‘둘’은 다른 쪽의 확장 혹은 수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두 배가 된 하나인 둘을 묶은 것이고, 둘은 반이 된 둘인 하나를 분할한 것이다). 이것은 장난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이 이미지는 남자의 신체가 나타나는 완토아트의 조형물이나 머리와 몸통을 에워싼 것처럼 보이는 묵직하고 목이 꺾인 우메다의 가면과는 대조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평범한 망태자루(끈으로 땋아 만든 뜨개자루)의 한 버전에 속한다.

 

아마도 가장 인상적이고 또 멜라네시아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떤 뜨개자루의 용도는 아기 요람이다. 주머니쥐의 육아낭처럼 엄마의 머리에서 매달리듯이 들리는(Gell) 느슨하게 땋인 자루는 자궁 같은 확장가능성을 갖고 있다. 시각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바깥 자궁과의 유사함이 반영된 이 자루는 밭작물과 자궁의 결실을 담어 보호하기 위해 늘어나고 볼록해진다.(Mackenzie)

 

이러한 자루는 어디에서든 여자가 만들고 여자가 몸에 두르기 때문에, 그 최초의 이미지는 여성적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남자 또한 이 자루를 몸에 두른다. 파푸아뉴기니 남부의 텔레폴과 우메다가 이에 해당한다. 겔은 남자와 그의 개가 분리될 수 없듯이 남자와 그의 자루(“빌럼”)가 어떻게 해서 분리될 수 없는지를 묘사한다. 여기서 개와 자루는 남자의 가장 인격적인 소유물을 담고 있는 일종의 그림자 정령이고 여자의 부푼 자루는 남자의 부푼 자루보다 큰 버전으로 그녀의 ‘사회 속에서’의 공적인 역할과 물질적인 현존을 드러낸다. 

 

그녀의 여성용 빌럼[bilum, 옆으로 메는 가방]이 등 뒤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여자는] ‘옷을 입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만약 남성용 빌럼이 주물이라는 형식 속에서 그의 인격을 담고 있다면, 여자들의 부풀어 오른 (…) 빌럼은 사회에서 그녀의 역할이 아직도 더 커지고 있음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음식(영양 공급자)과/이나 후손(아이 생산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Gell)

 

뜨개질 기술에서 보듯이 남성의 머리 덮개를 위해서도 그 기교는 똑같이 발휘되고 있다. 우메다와 텔레폴의 남자들은 때마다 음경덮개를 착용하는데 중앙 고지대를 포함하여 이런식으로 신체를 치장하지 않는 파푸아뉴기니의 다른 지역에서는 여자들이 그것과 같은 기술을 사용해서 남자들을 위한 음부용 앞치마를 떠서 만든다. 메켄지는 다른 지역에서 보이는 어망, 망토, 방호복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런 자루를 용기로 간주하면 바구니 모양으로 뜨개질한 어로 장치 혹은 중부 세픽 사람들이 잠잘 때 치는 모기장까지도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뜨개자루'를 단일한 실체로 간주하여 다른 인공물과 별도로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메켄지는 텔레폴 그리고 오크 산 지역 일반에 대해 남성 의복의 일부로서 뜨개자루와 여성의 그것 간의 특정한 내적 대비로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자루의 고동치는 이미지는 어떤 성별에도 들어맞는다. 여자들이 짊어진 뜨개자루는 작물의 열매 맺는 주기성에 따라 누그러지거나 부풀어오른다. 그 윤곽은 내부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부각하고, 그 안에 담긴 것이 자루에 형태를 부여한다. 여자의 자루 안에서 뛰는 맥박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맥박의 이동으로 반복 복제된다. 밖에서 볼 때 소박한 전혀 꾸미지 않은 자루는 그녀의 등 전체를 뒤덮는다. 이와 반대로 남자들이 머리와 어깨에 두른 자루는 정성스럽게 확대되고 깃털 장식이 달리며 입사식의 단계에 조응하여 각기 다른 의장이 입혀진다. 이와 같이 남자들의 확대와 성장은 바깥 피부의 일종으로 걸쳐진다. 이러한 자루는 이중의 사회적 기원을 뜻한다. 남자들을 위해 자루를 뜨개질해주는 여자들이 없다면, 남자들에게는 깃털을 매어둘 수 있는 틀조차 존재할 수 없다. 또 자루를 채울 남자들이 없다면, 여자들에게는 자루 안에 넣어둘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소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세상에 만들어지기 전부터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서 소통되어야 한다. 남성용 자루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형식을 내포한다. ‘여성의’ 기본 형식을 넘어서는 자루의 정교화는 ‘남성의’ 배타적인 활동이다. 게다가 남자들의 자루는 남자들이 입사식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변환된다. 

 

깃털로 장식된 뜨개자루는 성별을 명시적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아이들이 성 대립을 처음으로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즉 소년에게 남자다움을 강제적으로 부과하는 입사식 순환단계의 처음에 도입된다. (…) 성인 남성이 입사식의 최종 수준에 도달하면, 화식조의 깃털[뜨개자루]을 휴대하게 된다. 화식조는 수컷 새가 알의 부화를 책임지는 종들[중 하나]이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텔레폴의 신화에서 화식조는 아펙, 즉 태초의 어머니와 동일시된다. 텔레폴의 원로들이 그 자체로 이미 자궁을 상징하는 주요 형식으로서 화식조의 깃털을 취할 때, 그들은 아펙의 자궁의 휴대 가능한 화신을 창출하는 것이며 그녀의 비범하고 강력한 힘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Mackenzie)

 

매켄지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입사식의 첫 단계의 맥락에서 남자들은 가입자 소년들을 ‘부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을 남성적인 어머니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남자들은 결사활동의 단계를 밟아갈 때마다 여자의 공헌 및 남녀의 성적인 상호의존의 중요성을 더 잘 깨닫게 된다. 남자들이 점차 나이를 먹어가고 전사의 힘을 잃어감에 따라 점점 더 성 대립의 완화가 강조된다. 이것은 원로 남성이 휴대하는 화식조 깃털로 장식된 뜨개자루에 반영된다. ‘여자의 풀잎치마’를 뜻하는 ‘꼬리’ 달린 화식조 뜨개자루의 깃털은 여자의 외모를 암시한다. (Mackenzie)

 

매켄지는 남자들의 자루와 여자들의 자루를 대조하면서 공개된 지식과 비밀로 감춰지는 지식에 대해 관찰한 바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 자루의 뜨개코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성질은 자루를 쉽게 펼치게끔 하여 그 속의 내용물을 공공연히 노출시킨다. (…) 이것은 여자들이 자루를 떠서 사용할 때의 공개적이고 제한 없는 맥락을 반영한다. 이 영역에서 지식은 알기를 원하는 자에게 공개적으로 주어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자들에게 부가된 깃털은 여자가 실의 끊어짐 없이 뜬 편물을 매듭 짓고, 남자들의 비밀의식 내용을 숨길 수 있는 사적인 용기를 창출한다. 이 사적인 용기는 남자들의 오두막의 감춰진 벽 뒤편에 깃털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배타적인 맥락을 반영한다. (…) 그것은 의례의 지식이 은밀하게 통제되는 방식을 [미러링]한다. (Mackenzie)

 

이에 반해 남성의 성장 과정 그 자체는 비밀에 싸이지만 그 결과는 복장을 통해 어느 단계에 왔는지 공개된다. 여자들과 여자들이 만든 자루를 남자들에 의해 ‘길러지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개인에 대해 진실인 것이 공동체에 대해서도 진실일 수 있다. 남자들의 자루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가정용 자루 또한 변이를 신호화한다. 그것은 입사식의 내적인 위계의 변이뿐만 아니라 다른 집단으로 향하는 외적인 지향으로서의 변이까지도 표현한다. 적어도 텔레폴의 지금 관점에서 보면, 매켄지가 설명하듯이 텔레폴의 여자들은 오크 산의 다른 여자들과 ‘한 종류의’ 자루를 만든다고 말하면서 그 친연성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전문기술을 사용해서 독특한 스타일의 날개 깃털을 고안하고 (…) 그들만의 제품의 독창성을 과시한다”(Mackenzie). 모든 레퍼토리를 습득해서 남자들의 의례를 위한 자루를 뜨개질할 권리는 특정의 기혼여성만 가질 수 있는데, 사람들의 의식적인 기술의 연마는 텔레폴의 뜨개자루를 민Min이라는 다른 집단의 뜨개자루와 구별 짓는 기본적인 스타일을 창출한다. 전체적인 형상과 뜨개코의 질감, 이 두 가지는 이 지역의 언어공동체를 차이화한다. 매켄지는 자루 입구의 제작방식에서 적어도 두 종류의 양식이 확인되며, 여자들은 그것을 통해 종족 간의 차이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최근 비행장 설립과 함께 지역이 개방되어 여자들의 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빌럼 스타일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으며, 그것이 민족적인 차이의 모호성으로 연결되어왔다. 보통 한 집단은 타 집단의 창의를 점차적으로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텔레폴의 여자들은 민이라는 타 집단의 스타일을 모방해서 흡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자신들의 스타일이 가장 독창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타 집단 또한 동의하는 것 같다. 텔레폴의 스타일이야말로 주류이며 모든 방향으로 확산되어 왔다.(Mackenzie)

 

이와 동시에, 텔레포민[텔레폴의 또 다른 이름]에서 뜨개자루를 상품화하는 것에 저항이 있다. 텔레폴의 여자들은 외부 지향의 시장에 빌럼을 공급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텔레폴 사람들 사이에서 자루는 지역의 친족네트워크를 따라서 유통된다. 실제로 떠나보내는 자루는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 타자(아버지, 손아래 남자형제)를 위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며, 그들에 의해 도출된 것이다. 자루는 그것을 선물 받는 사람이 자루 제작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도 여겨진다. 자루 제작자의 활동이 취하는 형식은 익명으로 도출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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