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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드디어 오늘이 종강 날이네요 ㅎ  

 


공복(空腹)

 

바른손에 과자봉지가 없다고해서

왼손에 쥐어져있는 과자봉지를찾으려 지금 막 온 길을오리나되돌아갔다

 

*

 

이 손은 화석이 되었다.

 

 

이손은 이제는 이미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않는 소유한물건의 소유된것을느끼기조차하지아니한다

 

*

 

지금떨어지고있는것이눈(雪)이라고한다면지금떨어진내눈물은눈(雪)이어야할것이다

 

 

나의내면과외면과

이 계통인모든중간들은지독히춥다

 

 

좌  우

이 양측의 손들이 서로의 의리를저바리고두번다시악수하는일은없이

곤란한노동만이가로놓여있는 이 정리해가지 아니하면 아니될길에서 독립을고집하는것이기는하나

추우리로다

추우리로다

 

*

 

누구는나를가리켜고독하다고하느냐

이군웅할거를보라

이전쟁을보라

 

 

나는그들의알력의발열의한복판에서혼수한다

심심한세월이흐르고나는눈을떠본즉

시체도증발한다음의고요한월야를나는상상한다

 

 

천진한촌락의축견들아짖지말게나

내체온은적당스럽거니와

내희망은감미로웁다

 

 

                                                                                                                       1931.6.5

 


사실 위 작품에 관한 해석은 거의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공복은 상실감일테고, 그 상실감의 원인은 폐결핵을 진단받은 데 있었을 것이며, 그 진단에 대한 충격 때문에 초래된 내적인 불균형과 신체적인 고통이 시의 내용이라는 것이죠. 간단해서 좋습니다만, 이러한 해석방식은 이 시와 같은 시기에 발표된 다른 작품들에서  ‘과자’나 ‘시체’, ‘월야’, ‘전쟁’과 같은 단어들이 유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석상의 통찰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가령, ‘과자’와 같은 단어는 [파편의 경치]에서도 등장하는데, 이 시에서서와 같은 방식으로 ‘과자’의 시적 기능을 그 두 작품에 적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ㅎ

 

이상문학에서 시어의 반복 사용은 특이한 현상입니다만,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그 반복되는 시어들이 매어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재현의 대상들을 찾는데 골몰해왔다고 해서 과언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들에서 환기되는 모종의 속성들을 검토하고 , 그 속성들과 인접하거나 유사한 것들 중에서 가장 적합한 대상을 가져다 붙이는 식이었죠.

 

그러나, 좀 더 주의해서 보면 그 단어들은 일정한 구성적인 맥락 안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파편의 경치]에서 ‘과자’는 ‘슬리퍼’와 구별되고 위 작품에서는 그것을 든 손과 그렇지 않은 손의 대비 구도 위에 있습니다. 즉, ‘과자’가 같은 기능은 그것과 계열을 이루는 단어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인 것으로 작동한다고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 ‘과자’는 무수한 과자들의 속성을 종합한 어떤 대상을 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자를 통해서 환기되는 것들의 이면에서 들끓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미분적인 차이들의 유희입니다. [파편의 경치]의 화자는 ‘나는 논다’라고 단적으로 말하기조차 합니다. 각 작품에서 ‘과자’는 서로 다른 구별의 맥락 속에 있고 화자는 그 구별의 맥락 이전의 조건에서 그 구별의 방식을 응시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화자에게는 그러한 차이의 유희를  봉쇄하는 것이 왼손과 오른 손의 구분, 과자와 슬리퍼의 구분,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얼굴에 달린 눈의 구분이고 분류이고, 범주화라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바로 그 미분적인 차이들의 유희와 그것에 대한 봉쇄가 이상이 처음 발표한 첫 6편의 시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문제의식입니다. 따라서 이상문학에서 자주 관찰되는 시어의 반복은 재현적 의미의 반복이 아니라 그 시어들을 둘러 싼 미분적인 차이들의 반복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말을 참조한다면 위 작품에서는  ‘미분적인 것’의 유희가  ‘부정’의 변증법으로 대체되는 광경을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변증법이 겪어온 어떤 긴 변절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헤겔에게서 마지막 국면에 이르는 이 변질의 역사는 차이와 미분적인 것 등의 유희를 부정적인 것의 노동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564)

 

왼손에 든 과자 봉지를 찾기 위해 ‘ 지금 막 온 길’을 오리나 되돌아 가는 것은  과자 봉지를 든 손과 그렇지 않은 손의 차이를 ‘화석’화함으로써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그러니까 두 손으로 나뉘어서 서로 악수도 하지 못한 채 ‘곤란한 노동’만으로 영위하는 것은  변증법에 대한 조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구는나를가리켜고독하다고하느냐

이군웅할거를보라

이전쟁을보라

 

여기서 화자가 추구하는 ‘독립’이 ‘군웅할거’와 ‘전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주목해 볼만 합니다. 화자는 자신이 결코 ‘고독’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독립은 고립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죠. 화자는 그 변증법적인 ‘알력의한복판’에서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 역시 이상의 작품들에서 자주 반복되는 단어입니다만 이 ‘전쟁’이 등장하는 맥락들은 사실 당시의 동북아 정세의 긴장을 환기할 만한 문학적 수사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신형철 선생님처런 그 ‘전쟁’을 역사철학적인 재현물로 보는 것이 전혀 불가하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 작품에 개입된 사건의 퍼즐은 어느 경우에는 너무 딱맞아서 문학의 자리를 위협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어긋나서 해석의 자리를 위협합니다.

이상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전쟁’은 오히려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암살’, 또는 ‘전쟁’에 가깝습니다. 즉, 당연시되는 가치의 질서와 대결하는 유격전 말입니다. 이상은 사실 자신의 문학을 전개하는 동안 항구적인 유격전을 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부정을 통해, 부정의 부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의 규정을 통해, 차이들의 긍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역사는 그 어떤 경우 못지않게 피비린내 나고 잔혹하다. 부정을 통해 연명하는 것은 단지 역사의 그림자들뿐이다. 하지만 의인들은 어떤 정립된 미분의 역량, 어떤 긍정된 차이의 역량 전체와 더불어 역사에 개입한다. 이들은 그림자는 그림자에게 되돌려주고, 오로지 일차적인 어떤 능동성과 긍정의 귀결에 해당하는 것만을 부정한다.” (564).

 

이상문학에는 사실 미분의 역량, 긍정된 차이의 역량 전체와 더불어 역사에 개입하려 했던 특유의 파토스가 넘쳐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상문학을 부정의 문학, 혹은 파괴적인 문학이라고 규정하는데  동원되었던 여러 잡스러운 근거들은 전혀 무의미해지는 것이죠. 가령,  아이러니와 위트는 냉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 식민지 청년의 울분과 분노를 읽어내려 했던 시도들은 그다지 썩 성공한 것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러니와 위트는 이상 자신이 고백하듯 스스로의 문학을 ‘비밀’로 만들어 내거나 ‘속임수’의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한 전쟁의 무기였기 때문이죠. 이상은 이 무기를 이용해서 부정을 통해 연명하는 그 모든 그림자들을 그림자의 위치로 되돌려 놓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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