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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시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아마도 오감도 연작이거나   선에 관한 각서와 같은 기이한 작품들일 겁니다. ㅎ 

사실 이 작품들이 신비하게 보이는 것은  작가 이상의 상상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읽는 이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는 것같아요. 

이상이 작가활동 초기에 발표한 실험적인 작품들이 특히 그렇죠 

독자들이 이 작품들에서 수비학적인 비밀에서부터 새로운 세계 창조의 전망까지 

읽어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왈가왈부할 일은 아닐 겁니다. ㅎ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들이 예술 작품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좀 합의를 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이 작품들로 촉발된 

공상의 진폭들은 매우 넓고 다양합니다. 

 

 

오늘은 그 중 선에 관한 각서2를 가지고  

들뢰즈와의 대화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선에관한각서 2(線에關한覺書 2)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3 + 1 

  3 + 1  1 + 3 

  3 + 1 
  1 + 3 
  


  線上의點 A 

  線上의點 B 

  線上의點 C 
  

  A + B + C = A 

  A + B + C = B 

  A + B + C = C 


  二線의交點 A  

  三線의交點 B 

  數線의交點 C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1 + 3 

  1 + 3  3 + 1 

  1 + 3 

  3 + 1 
  

                        .  . 
  (太陽光線은, 凸렌즈때문에收○光線이되어一點에있어서爀爀히빛나고爀爀히불탔다, 太初의僥倖 
                                                                      .  . 
은무엇보다도大氣의層과層이이루는層으로하여금凸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 
                                    .  .                                    .  .  .  .  .                          .  .  .  .  . 
하니樂이된다, 幾何學은凸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死亡해버린오늘유우크리트 

의焦点은到處에있어서人文의腦髓를마른풀과같이燒却하는收○作用을羅列하는것에의하여最大의收 

○作用을재촉하는危險을재촉한다, 사람은絶望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絶望하라) 

    1931.9.11



                                                                                                                   

 

‘가능성의 형식’ 으로서의 ‘1+3’ 

 

왜  7+7 나 10+8 따위가 아니라 1+3일까요? 

여기에서 미래를 여는 비밀스러운 수식을 건져내거나 

외계인의 신호를 읽어내는 것도 못할 거야 없지만 

또 그렇게까지 할 것도 없겠죠. 

 

다만, ‘1+3’이 반복을 통해 모종의 형상으로 결합하고 있고, 

이 형상 안에서  배열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해보면서  

그 대강의 기능을 추측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우선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1+3’이 요소로서 조성해내는  ‘블록렌즈’의 형상입니다. 

이 ‘블록렌즈’의 형상은  도상부분이 앞뒤를 떡 허니 자리잡고  

무언가를 포위하고 있고, 바뀌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조금씩의 변화는 있습니다.

 ‘1+3’의 배열이 조금씩 바뀌고 있죠. 

 

따라서, 산술 연산을 닮은   ‘1+3’은 

그 조합으로 형상을 조성하지만 형상에 가두어져 있으며 

형상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배열과 위치만을 바꿀 뿐인 

그 무엇일 겁니다. 

 

그렇다면 ‘1+3’의 기능을 짐작하려면 ‘1+3’을 가두고 있는 

 ‘블록렌즈’의 기능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블록렌즈의 수렴작용 

 

 

‘블록렌즈’에 관해서는 화자의 진술 부분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빛을 한 곳에 모으는 ‘수렴 작용’이 그것이죠. 

이 ‘수렴작용’을 통해  ‘블록렌즈’와 유클리드 기하학은 연결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8주차 강의에서 들뢰즈가 그리스 기하학의 일반적 경향에 대해 비판한 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그리스 기하학이 ' 먼저 정리들을 위해 문제들을 한정하고, 다른 한편 문제들을 정리들 자체에 종속시키는 데 있다.' (354)고 지적했죠.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 또는 유클리드 기하학적인 방법들이 구사하는 추리는

기하학을  ‘지속적으로 동일성 원리의 지배력 아래’ (354)놓이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오우 예 ! 이거, 뭔가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유클리드 기하학’의 수렴작용은 빚을 한 점에 모으는 블록렌즈에 빗대어져 있는데, 

이는 마치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동일성의 원리’로 수렴해가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추리 형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1+3’은 그러한 유클리드적인 추리의 형식들 안에서 관계와 위치를 할당받은 

기능적인 요소들을 뜻한다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생각을 여기까지 해보면 

‘1+3’에서 ‘+’는 합을 뜻하는 연산기호라기 보다는 동일성으로부터 추출되거나 또는 그 동일성에 들러붙은 

일반적인 관계 형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1+3’이 되었건 ‘3+1’이 되었건 그 배열들은  ‘블록렌즈’의 형상 안에서 요소들의 자리바꿈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따라서  ‘1+3’은 동일자(1)와 그것들의 분화, 또는 분산 관계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령 ‘1+3’과 ‘3+1’의 자리바꿈은 문제들을 끊임 없이 정리들에 묶어내고 그 정리들로부터 한정된 문제들을 끄집어내는 

유클리드 기하학적인 방법, 즉 ‘가능성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블록렌즈 형상이 도상부의 앞과 뒤를 감싸고 있는 것은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진술과 관련해서 본다면 

문제의 분화를 한정하는 가능성의 형식들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적 가상에 사로잡혀 공통감의 명제들을 기초로 문제들을 전사하고, 철학적 가상에 사로잡혀 문제들의 진리를 공통의 장소들, 다시 말해서 어떤 해를 받아들일 논리적 가능성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다. 철학사가 진행되어오면서 변한 것은 기껏해야 이 가능성의 형식뿐이다.” (354) 

 

여기서, 철학사를  사유의 이미지를 규정해 온 역사라고 본다면 

기껏 ‘가능성의 형식’만을 바꾸어 온 철학의 역사, 사유의 이미지에 관한 ‘공준'의 전개는 

1+3의 배열 순서만이 바뀐 채 형상은 변하지 않는 블록렌즈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 이상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서구 문명을 지탱하는 사유의 이미지들의 어떤 정수를 간파하고는 

참 걱정스러운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이죠.. 

 

“기하학은 블록렌즈와 같은 불장난은 아닐른지..” 

 

 

그렇다면 진술부에서 블록렌즈로 모아진 빛에 소각될 위험에 처한 ‘인문의 뇌수’는 무엇일까요? 

 

이 ‘인문의 뇌수’관련되는 도상부는 ‘1+3’이 만드는 블록렌즈에 포위된 

3개의 단락일 겁니다. 

 

무언가 멋진 기하학의 정리들을 모아놓은 것같은 게 궁금증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이상이 이것을 ‘시’랍시고 쓴 것이니만큼 적어도 얼마간의 말로 풀어내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게 무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ㅎ 

솔직히 수학적 진술은 좀 지루하기도 하고 ㅋㅋ 

 

일단 세 개의 단락은 이렇게 말로 풀 수 있을 겁니다. 

 

선상의점 A

선상의점 B

선상의점 C

 

첫째, A,B,C는 연속되는 선 위에 자리 잡은 임의의 위치들이다. 

 

 

A+B+C=A

A+B+C=B

A+B+C=C

 

둘째, 'A+B+C=A’ 등은 ‘해’를 갖는 등식이다. 즉 A,B,C는 문제의 요소이자 동시에 해라는 점에서 이 ‘해’는  

문제(좌변의 산술식)의 내적인 성격에 의존한다. 

 

 

이선의교점 A

삼선의교점 B

수선의교점 C

 

셋째, 선의 교점으로 표현되는 A,B,C 각각은 서로에 대해 불연속적이다. 여기서 교점의 수가 어떠한 위계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이 A,B,C 각각은 다시 첫째 규정에 의해서 다른 선 위의 연속되는 점들로 묶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로 풀어 쓴 것을 단락과 단락 사이를 연결해서 읽어보면 

모종의 연관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즉 첫째 단락은 둘째 문제단락의 좌변, 즉 문제의 조건이 될 것이고 

둘째 단락의 문제들은 바로 첫째 단락의 조건 안에서 해를 구성하게 된다는 말이죠. 

따라서,  해들의 근거가 문제의 조건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첫째 단락에 연속체로 존재했던 A,B,C는 

셋째 단락에서 서로 다른 교점의 수에 의해서 불연속체로 탈바꿈됩니다. 

 

세 개의 단락은 A,B,C에 대한 각기 다른 방식의 규정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규정들은 연속체 안에서의 규정과 문제 안에서의 규정, 그리고 불연속체로서의 규정으로 이행해가면서 

각 요소들의 비율적 관계와 특이성들의 복합체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부분은 

  "비율적 관계와 그에 상응하는 특이성들로 이루어진 어떤 복합체, 어떤 다양체”(359)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인문의 뇌수'란 바론 선과 점의 관계를 통해 표현된 다양체였던 겁니다. 

들뢰즈는 마치 이 광경을 보고 쓴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죠.. 

 

“유클리드 기하학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혁명은 역시 기대할 수 없다. 어떤 충족이유의 기하학, 리만적 유형의 미분기하학으로까지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고, 이 기하학은 연속체에서 출발하여 불연속체를 낳거나 해들의 근거를 문제의 조건들 속에서 찾는 경향을 보여준다.” (357) 

 

만일 이상문학에서 어떤 혁명적인 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아마도, 처음으로 언급해야 할 작품이 바로 이 선에 관한 각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선에 관한 각서가 포함된 삼차각 설계도 전체는 

이상이 문제화한 문학 

즉 이상이 문학의 이념에 대한 물음과 문제화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니까요. 

삼차각 설계도에는  리만 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또는 니체의 철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반복 속에서 세계를  잉태한 자의 목소리가 음악처럼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구를 통해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은 

단지 절망과 탄생을 반복하는 것에 대한 냉소적인 토로이거나 

한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장송곡이 아닐 겁니다. 

그것은 파열하는 다양체에 의해 압도되고 탕진되어 버린

세계를 잉태하는 자의 목소리(211) , 또는 장엄한 합창이 되지는 않을지요 ㅎ 

 

"사람은절망하라, 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절망하라"

 

아, 그리고 강의도 중반을 넘어 섰으니 우리 들뢰즈양과 가타리양의 어린시절 사진을 투척합니다. 

거의 '매직 아이'나  '월리를 찾아서'와 다를 바 없는 책을 읽고 정리하시느라 다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우리 서로 위로하자는 취지에서 사진 올립니다. 힐링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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