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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시를 한 편 읽어보죠.

이상의 시는 거의가 참 난삽한 면이 있지만 개중 독해가 수월한 작품이 '위독' 연작에 포함된 '절벽'이라는 작품입니다.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ㅡ보이지도않는꽃이". 

 

 

뭐가 보이십니까? 

꽃은 보이지 않는데 향기는 진하게 풍겨오고 화자는 묘혈을 파고 그곳에 누웠다가 다시 또 묘혈을 파고  

이런 행동을 반복합니다. 

 

이상하죠? 

꽃이 보이지 않는다뇨? 또 자기가 파는 묘혈도 보이지 않는다니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를 식민지 조선의 절망적인 상황

또는 작가의 병적인 심리와 관련하여 해석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러기에는 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지 않습니까? 

지독한 반복하는 행위가 주는 묘한 느낌.. 

그 망각의 연쇄들이 주는 은근한 명랑성.... 

 

 

만일 프로이트를 따라 읽는다면  

우리는 화자의 반복되는 행위에서 죽음에 가까이 가려는 충동을 볼 것이고 

왜 그 몬양이 되었는지를 작가 이상의 정신적 내상과 관련해서 찾아보려고 애쓸 겁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그렇게 위의 시를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2주차 강의 시간에 들뢰즈는 프로이트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억압하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반복하므로 억압하며 반복하기 때문에 망각한다". (62쪽) 

 

우리는 들뢰즈의 이 문장을 위의 시에 적용해서 정확히 다음과 같이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정신적인 트라우마나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오는 억압 때문에 ,

즉 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묘혈을 반복해서 파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묘혈을 반복해서 팔 수 있기 때문에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깜빡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반복 속에서 

꽃이 주는 표상들은 적극적으로 제거되고 (보이지도 않는 꽃)

그 향기를 향한 끌림(에로스)은 묘혈을 반복해서 파는 행위 (죽음충동)에 복무한다. 

 

그러니까, 죽음충동이라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복에 자양분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여기서 위의 시가 주는 약간의 우스꽝스러움의 정체가 좀 드러나는 것같지 않습니까? 

묘혈을 파는 것은 일종의 가면 놀이죠.. 자꾸 자꾸 죽었다 깨어났다. 죽었다 깨어났다. 죽고 죽고 또 죽고 

이렇게 반복되는 죽음의 행위는 죽음을 무겁고 비장한 것으로 만드는게 아니라 놀이처럼 만듭니다. 

 

들뢰즈 선생도 이런 뜻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게 아닌가 합니다. 

"죽음은 물질적 모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반면 죽음본능을 가면이나 가장복들에 대한 정신적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60) 

 

 

자, 그러면 이 가면극의 주인공을 한 번 상상해보시죠? 

화자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요? ㅎ 

저는 ㅎ 

라고 생각합니다. 킁킁거리며 땅 파는

 

화자는 개의 가면을 쓰고 죽음 놀이를 반복합니다. 

이상이라는 작가는 스스로 '이국종의 개'라는 가면을 사랑했고 또 즐겼습니다. 

후일의 연구자들이 자꾸 그것을 자기 비하나 냉소로 해석해서  

저는 좀 못마땅합니다.ㅎ 

개가 어때서,  도대체 개가 되겠다는 사람을 불쌍하게 보는건지... 

 

오히려 위의 시에서 드러나듯  묘혈을 반복해서 파는 것은 적극적으로 '개-되기'를 실행하는 것이고 

그 실행의 역량을 통해서 우리는 삶이 죽음을 압도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는 겁니다. 

 

이상 2강 후기였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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