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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실존의 미학] 6강 발제

윤춘근 2022.04.17 10:24 조회 수 : 166

  • 문장을 읽기 쉽도록 약간씩 변형하였으나 맥락파악이 모호한 것은 그대로 발제했습니다.
  • (괄호)는 발제자의 부언입니다.

 

1982-2-17 전반부

<알키비아데스>에서 볼수있는 '자기를 배려하기'는  실존의 명령이 아니라 생과 공통의 외연을 갖는 규칙이고, 사회적 신분을 얻는 것도 아니며, 주체 자신의 존재 전반에 관련된 것이다.

배려해야 할 주체 전반은 자기 자신에게로 전향하여야 하고, 자신에게 몰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주체가 단순히 자기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된 주체의 실제적 이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주체의 이동을 해명하기 위한 '항해의 은유'의 요소들을 보자.

  • 이동을 의미하는 도정
  • 목표 지향성
  • 목적지인 항구, 안식처, 복락
  • 예측 불가능한 위험
  • 항해를 위한 앎의 테크네(의술, 정치적 통치, 자기자신의 통치 : 항해술) <280>

항해술을 통해 보편적 원리 테크네(technê) 개념의 이미지와 실천을 구체화 한다. 요컨데 군주는 타자를 지배해야 하는 한에서 자신을 지배해야 하고, 도시국가의 병, 시민의 병, 자신의 병을 치료해야 한다. 이 자기실천에서 자기는 목적으로 간주되어 불확실하고 위험한 인생 여정의 종착지(항구)가 된다. (기독교는 자기 포기로 인해 자신을 목적지로 하지 않고 인식 안에서 순환한다.)

이 자기로의 회귀 이미지가 갖는 서구 문화의 특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82>

  •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다른 생, 빛, 진실,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근본 원리로 설정하고 있다. (포기를 위한 회귀-죄인으로 자기를 인식, 우회된 epimeleia는 교육, 의학, 심리학이 담당하고 gnoth는 철학의 특권이 된다.)
  • 이 자기로의 회귀의 테마는 16세기부터 '근대' 문화에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몽테뉴: 자기윤리와 자기미학의 복원 시도)
  • 그리고 19세기 사상사를 이 관점에서 재검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슈티르너, 쇼펜하우어, 니체, 댄디즘, 보들레르, 무정부주의) 이들은 서로 상이한 시도이지만 자기미학과 자기윤리를 구축하고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으로 집중된다.

'자기로 돌아가기, 자기를 해방시키기, 자기 자신이 되기' 등은 대단히 친숙한 담론적 표현들이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 자기 윤리를 복원하려는 일련의 시도와 노력들이 붕괴되는 것에는 무엇인가 의심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 같다. <283> ('자기 자신' 이라는 인식의 대상과 자기윤리의 연관이 의심받는다)

통치성의 문제에 권력의 문제가 재설정 된다면 반드시 자기와 자기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권력관계를 우선적으로 규정한다. (알키비아데스에서의 자기통치를 타자통치보다 우선시 한다.) 그러나 통치성 자체에 대한 분석이라면 우리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결정될 주체 윤리를 참조해야 한다. 

권력관계-통치성(규칙)-자기와 타자의 통치(관리)- 자기와 자기의 관계(태도)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사슬과 골조를 구축하며 정치문제와 윤리문제를 제기할수 있어야 한다.  <284>

 

자기로의 전향 원리와 자기 인식의 원리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 타자와 세계의 사물(외부)로부터 자기 자신(내부)으로 시선 전환을 내포하는 것인가?
  • 자기로의 전향이란 자기 자신을 인식의 대상화 하거나 영역으로 구축하는 것인가? (x 해방, 재구축: 영적지식)
  • 기독교 세계와 근대 세계(의식의 탐구와 지도)의 실천과 인식의 기원지점을 '자기로의 전향이라는 헬레니즘-로마의 정언'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일까?
  • 바로 거기에서 정신과학, 심리학, 의식의 분석, 프시케(puskhê)의 분석이라고 불리게 될 최초의 형태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 자기인식은 스토아, 에피쿠로스, 견유주의와 같은 일화로부터 기원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인식이나 기독교의 자기해독이 자기실천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지난번에 증명했던 것처럼 스토아주의자들과 관련하여 견유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을 검토해야하는 중요성이 있다. 즉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 세 가지이다.

  • "우리가 문화라는 총체를 통해 어떻게 주체의 진실문제가 구축될 수 있었을까?"
  • 도대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주체에 대한 담론을 시도하는 것일까요?
  • 왜 미친주체나 범죄주체라는 우리와 다른 주체와, 노동하고 생활하는 우리라는 보편적 주체, 성의 특수한 경우의 주체에 대한 담론들을 시도하는 것일까요? <285>

푸코는 이 주체의 진실 문제가 형성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시기를 헬레니즘 〮 로마 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자기배려와 자기인식 두 모델이 혼동되기 쉬워 헬레니즘 모델이 갖는 특수성이 가리워졌다고 한다.

  • 견유주의 〮 에피쿠로스주의 특히 스토아주의를 통해 분석하려는(헬레니즘) 모델이 가리워졌다고 한다.
  • 이후의 문화에서는 플라톤적인 모델과 기독교적인 모델이라는 두 주요 모델에 의해서 가려진다.
  • 따라서 푸코는 별도의 헬레니즘적 모델을 떼어내고자 한다.

 

'자기 인식'이 일어나는 형식의 3가지 모델(플라톤, 기독교, 헬레니즘)

플라톤의 상기 모델은 단 한번의 운동(이동)을 통해 자기인식 〮 진실인식 〮 존재로의 회귀가 한데 모인다.

플라톤주의적 모델은 세 핵심을 중심으로 설정된다. <286>

  • 무지와 무지에 대한 무지의 발견이 자기배려 정언을 발생 시킨다. 알키비아데스가 그랬다
  • 영혼은 자기자신의 모습을 재확인 해야하는 (메타)인지의 거울속 자신을 응시하게 된다.(코기토)
  • 영혼은 자신이 본 바를 상기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 합니다. (재인의 동일성)

기독교 모델이 형성(3~4세기)되었는데 '수도원 금욕' 모델이라 부를 수도 있다. <287>

  • 자기인식과 진실(神)인식 그리고 자기배려(정화) 간에는 순환적 관계가 있다.
  • 영혼이 유혹을 뿌리치는 기술의 기원과 목적, 그리고 형식을 파악해야만 하는 자기 인식을 위한 해석학적 방법론이다. (주해 방법)
  • 구원을 위한 자기 포기라는 목적성

플라톤주의 모델은 기독교의 변방에서 발전한 그노시스 운동을 통해 전파되었다.  이 모든 운동에 존재의 인식과 자기의 재인이 라는 동일한 도식이 있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생활 내에서 주체의 상기가 아니라 영혼 내에서 발생하는 활동과 속성의 기원을 식별하는 주해 기능을 주체에 부여하는 결과를 발생시켰다. 두개의 모델은 서구 문화사 전반에 전승된다. <289>

  • 플라톤주의 모델 + 기독교 모델  => 서구 문화

헬레니즘 모델은 상기나 주해를 형식으로 취하지 않는다. 푸코는 까다롭고 엄격한 도덕이 헬레니즘 모델에서 형성된 것이고 . 도덕은 기독교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의 도덕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자기에로의 전향적) 자기 실천에 대한 세 모델의 발생 흐름.

  • 플라톤주의 모델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재인에 의한 상기)
  • 헬레니즘 모델은 관계의 자목적화를 중심으로 돌며 (자기로의 회귀)  => '기독교 모럴' 형성의 장소
  • 기독교 모델은 자기 주해와 자기 포기를 중심으로 돈다.

자기로의 회귀를 중심으로하는 헬레니즘 모델의 자기인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90>

견유주의(데미트리우스)와 에피쿠로스주의 텍스트 관점에서  자기 인식과 자연에 대한 인식은 같은 것으로 '자기로의 전향'은 자연을 인식하는 일정한 방식이다.

반면 스토아주의에서는 자연(세계)에 대한 인식이 무엇일 수 있는가에 관한 엄격한 주장이 발견된다. (무용한 지식에 대한 비판적 전통 때문에)

제논의 제자 키오스 아리스톤은 (무용한)논리와 (접근 불가능한)물리학을 버리고 철저한 도덕주의를 주장한다. 이는 우주론과 사변의 총체에 연결된 도덕/논리학/물리학/을 설정하는 스토아주의 체계에 대한 한계점이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두개의 텍스트 세네카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를 살펴볼 것이다. <292>

먼저 세네카를 보겠다. <293>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비판 (허영심의 장식 효과 비판)
  • 진실에 대한 명상과 사유훈련 (고행, 테크네. 여기서는 다루지 않음)
  • 백과사전식의 지식을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유용성, 자기배려를 위해)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의 의문들』이라는 천체, 지리, 기상 등 천지를 포괄하는 세계에 관한 탐색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술에서 왜 우리는 우리로부터 멀어진 이런 주제로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래서 우선 3권의 서문을 보겠다. 그 이유로 여기서 세네카가 원하는 세계 주파(mundum circuire)가 세네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네 가지 성찰로 설명한다. <294> 
  1. 나이의 문제. 세네카는 노년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가능한 한 서둘러 생을 완수해야 한다." 여기서 완수란 끝남의 의미가 아니라 충만함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나이 많음과 잃어버린 시간 때문에 서둘러야 하는 것이 있다. 유산이나 영지가 아니라 나와 밀접한 영역(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현자의 은둔, 도피 같은 여유로움이 아니라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고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고 세네카는 말한다 <295-297>
  2. 위대함에 대하여. 연대기가 왕들의 장식된 이야기이고 이로부터 전승되는 것은 고통일 뿐이다. 그리고 역사가들처럼 타인의 정념을 이야기 하는 것 보다 자기 자신의 정념을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대하지 않은 바를 위대하다고 기술한 역사적 이야기를 통한 착각으로 불안정한 승리나 불확실한 재산에서만 인간의 위대함을 보려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세네카는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알렉산더 왕의 화려함과 권능적 형태가 아니라 로마 토착민(스키피오 Scipio)의 자기 제어의 개인적 형태를 위대함의 모델로 제시한다. 즉 자연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모범적이지 못한 역사적 인식과 연대기적 인식은 자기배려를 위해 배격해야 한다. <~298>
  3. 도시와 국가 전체의 지배자가 된 사람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지배자가 된 사람은 참으로 적다. 위대한 것은 운명의 위협과 약속 위로 영혼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역경 속에서도 마치 그것을 원하기라도 하듯이 모든 사건을 받아들이는 굳건하고 평온한 영혼이다.
    • 자신의 악덕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 지배력
    • 악운의 역경에서 굳건히 평온을 유지하기
    • 쾌락의 극복
    • 행복이 아니라 지혜, 즉 궁극적인 복락을 내면에서 발견하기.
    •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의 유지. 죽을 준비가 완료된 상태. <~300>

1982-2-17 후반부

역사적인 연대기와 대립적으로 정의된 이 목적에 세상을 편력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필요성을 어떻게 연관 시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도시국가의 법에의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에 의해 자유롭다. 이 자유는 무엇으로이루어진 것일까? 죽음 명상을 통해 얻는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인가? 그것은 예속으로부터 벗어남이고 예속은 자기 자신에의 예속이다. 동시에 자기 가까이에서 인간은 위대한 관능과 유일한 행복과 희열을 체험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예속과 자기 배려의 구별이 필요) <302>

     4. 어떻게 자신의 예속에서 벗어난 자유를 누리면서, 자신 가까이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세네카는 무겁고 지속적이며 누구도 피하거나 면제받을 수 없는 강요된 이 예속에 저항해 인간은 투쟁할 수 있다면서 두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303>

  • 자기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 (자신에게의 요구와 부담할 노고는 비례관계)
  • 자기 자신을 이윤에 결부시키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 (자신의 노예화로 이득을 얻음)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책임을 부과하고 그로부터 이득(재물, 영광, 평판, 쾌락 등)을 얻으려 한다. 이러한 책임-보상의 관계를 자연에 대한 연구를 통해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세네카 『자연의 의문들』 3권 서문을 종결하며, 자연에 대한 탐구가 책임-채무의 예속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고 단언한다.

왜 늙은 그가 자연의 연구에 몰두해야하는가? 세네카에 따르면 철학에는 두 부분이 있다. <304-305>

  • 인간을 돌보며 응시하는 분야 :
    • "quid agendum in terris" 지상에서 해야할 바.
    • "primum se scrulari, deinde mundum" 먼저 자신을 점검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나서 세상을 고려하는 것.
    • 오류를 피하도록 모호함을 밝혀주는 빛의 역할을 한다.
  • 신들을 응시하는 분야: 
    • "quid agalur in caelo" 하늘에서 일어나는 바
    • 빛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 빛의 원천까지 인도하고자 한다.
    • 실존과 상관 없고 인식과도 다른 무엇이 우리를 인도한다. (주체 자체의 이동이 있다.)
    • 이 운동은 4가지 특성을 갖는다. <305>
      • 결점 및 악덕과의 단절을 완결하고 자기와도 단절을 구축한다.
      • 신과의 공통 가능성 내에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고 신과 공통의 자연성 내에 위치시키며 인간을 가장 높은 것으로 상승시킨다.
      • 인간이 사물의 수준 위로 인도되는 순간 자연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꿰뚫게 된다. 
  • 이 운동은 이승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신과 공유하는 속성을 갖는 주체의 운동이다. <306>
  • 인간을 최고의 정점에 위치시키고 땅을 향해 시선을 던지게 한다. 신의 이성을 속성으로 갖게된 인간은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게 되고 인간의 사소함 또한 알게된다.  <307>
  • 다른 세계를 응시하기 위해 이승세계를 벗어나는데 있는 플라톤주의 운동에 반하여 세네카가 정의한 스토아주의 운동은 우리가 있는 지점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자신에 대해 눈길을 떼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 도달할 수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굽어 보면서 인간의 가식적인 화려함을 경멸할 수 있다고 한다.
  • 인간은 방대한 공간을 주파했다고 생각하지만 한점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 점은 자기 자신이 있는 점이다.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세계로 가기 위해 세계를 주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상 점에 불과한 우리의 실존을 정확히 알기 위해 세계를 주파하는 것이다. 우리가 볼때 우리 자신이기, 즉 하나의 점이기, 우주의 보편적 체계 내에 우리를 점으로 표시하기, 바로 이것이 자연 사물의 전반적인 체계에 우리가 던지는 시선이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해방이다. <309>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역할과 관련된 3가지 결론 <309>

  1. 합리적이고 안전한 세계 내에 우리의 위치를 재설정하는 것. 인간은 자연의 지식을 갖출때 비로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세네카가 필요로 하는 자연에 대한 인식은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因果의 연쇄 내에서 우리를 위치시킨 신의 섭리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자기 인식은 자연에 대한 인식과 별개로, 내재성으로 탐색하거나 해명해야 할 특수한 인식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내재성과 상관 없는 (자연이나 우주의)한 점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기인식이 주체(자기)에 의한 주체(자신) 해석과 같은 그런 것도 아니다.
  2. 자연에 대한 지식은 해방적인 효과를 지닌다. 자연에 대한 지식은 보편적 이성이며 신의 이성과 동일한 속성을 지닌 자기와, 개별적인 속성을 지닌 자기 두 속성 간의 (메타적)긴장을 최대한 얻어내고,  자연에 대한 지식이 인간을 교정하여 연속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자연속)관점을 갖게 하여 자기명상(contemplatio sui)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해방효과를 가진다. <310>
    • 덕 있는 영혼은 우주 전체와 고통하며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행위와 사유 모두를 자신이 스스로 통제하는 영혼이다. <311>
  3. 세네카가 플라톤주의적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려는 영혼의 운동. 인간의 이성과 신의 이성의 공통, 자연성과 공통 - 기능성의 발견은 플라톤의 상기 형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호기심 운동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것이 첫번째이고, 두번째 차이로 영혼의 운동에는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속하는 세계를 포괄하며, 이 세계 내에서 인간의 자유를 확보해 주는 자기가 자기를 굽어보는 시선이 중요하다. 
    • 세네카가 마르키아에게 탄생 이전의 명상를 권고하는데 입구에서의 이 시선도 출구(죽음)에서의 시선과 같다고 한다.
    • 굽어보는 시선을 통해 국가 전체와 그 순환, 달과 별자리, 구름, 벼락, 사물들과 경이로운 것들 평원, 산, 들, 대양, 괴물 등을 볼 것이라고 한다.
    • 동시에 신체와 영혼의 재앙, 전쟁, 약탈, 독살, 좌초, 질병, 가까운 사람의 죽음, 감미롭거나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있음을 보게될 것이라 한다.
    •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이유로, 세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 유일한 선택은 좋은사람이 될 것인가 나쁜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를 숙고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자는 생의 말기에 그가 세계의 총체를 보는 순간, 자연에 대한 연구를 한 덕에 consertium Dei(신과 공유하는 속성) 안에서 굽어보는 시선에 힘입어 자유롭게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1982-2-24 전반부

자기로의 전향이라는 테마와 "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라는 특수한 정언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을 형성하는 방식을 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영적인 양태 혹은 靈化라 부를 수 있는 바를 발생시켰다.

세계의 정점과 정상으로 후퇴하는 주체의 형상과 이 지점에서 주체에게 열리는 세계를 굽어보는 시선. 세네카에게서 본 이러한 지식의 영적인 양태화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텍스트에서 보겠다.

주체가 위치한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마르쿠스는 세네카와 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내면을 향하는 시선. 사물의 내면에 관심을 집중한다. 어떤 사물도 그 질(poiotês)이나 가치(axia)를 빗겨갈 수 없다. 요컨데 문제는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미세한 시선이다.

"위에서 언급한 정언에 다른 하나의 정언이 부가된다" 에서 정언들에 부가되는 또 다른 원칙은 대상을 규정하고 기술하는 것,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바 그대로 명확히 보는 것, 대상에 귀착되는 이름들을 생각하는 것, 대상이 어떤 유용성을 갖는지, 어떤 가치를 갖는지, 어떤 덕을 내가 필요로 하는지를 고찰할 수 있게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  등등 <319> 

  • ->정언은 그리스어로 parastêmata이고 이는 거기에 있는 무엇, 고려해야하는 무엇, 간직해야 하는 무엇 등 이다.
  •  세 가지 parastêmata: 善, 자유, 현실(순간) -> 이부분에서는 파라스테마타가 定議로 번역된다. (선의 정의, 자유의 정의, 현실의 정의)
  • 이 세 가지 파라스테마타에 다른 원칙 하나를 부가한다. 원칙이라 할 수 있지만 전개되는 것은 '무엇인가의 훈련' 이라는 규정이기도 하고, 도식일 수도 있다. 즉 부가되는 것은 주체의 자유에 따라 현실이라는 바를 규정하게 해주는 영적인 훈련이다. <320>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있어서 훈련은 어떻게 전개되고 또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요소별로 점검해 봅시다.

영적 훈련의 첫째 단계  <321-324)

  • 이미지가 정신에 나타나는 대상을 규정하고 기술하는 것이다. 여기서 '규정'(poiesthai horon)이라 함은 '경계를 긋는 행위' 즉 철학〮 논리〮 문법의 질서 내에서 定義를 도출하는 일이므로 어떤 면에서는 가치를 결정하거나 평가하는 의미를 갖는 용어다.
  • 그러므로 영적인 훈련은 사물(대상)의 논리적 의미를으로 정의하고 가치를 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hupographen poieisthai 기술하기(설명하기, 정의하기)는 에 사용된 후포그라페hupographe(설명)와 호로스horos(결정) 용어를 볼때 영적인 훈련은 사물에 대해 어떤 개념을 부여할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로 이루어 진다.<321> 
  • 정신 밑으로 떨어지는 모든 것(hupopiptontos 표상, 인상, 관념) 은 나타나는 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런 영적인 훈련은 스토아주의에게 익숙한 테마이다.  
  • 이것이 표상에 관한 영적인 훈련이다. 지성적인 방법은 표상들을 의지적이고 체계적으로 구별하고, 논리적일 경우에만 받아들인다. 데카르트의 여정은 지성적 방법에 속한다. (의심하는 주체)
  • 표상을 주어진 그대로 '포착'하는 것은 본질 명상과 고유명사 명상이라는 두가지 수련의 실천으로 가능하다.  ( 명상 -> 숙고)
    • 본질 명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본래 있는 그대로 명상하라" 전반적이고 개별적인 요소들을 구분해서 표상된 바 그대로 파악(포획)해야 한다고 하며, 이를 blepein이라 부른다. 이 용어는 잘 응시하기, 숙고하기, 시선을 고정하여 집중하기 등을 의미한다.
    • 고유명사 명상: 사물을 명상하는 과정에서 사물의 이름과 관계되는 요소들을 기억하는 것. 마르쿠스는 이를 legein par heauto라고 명시한다.  즉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의 다양한 요소의 이름을 기억하는 의미를 갖는다.             
    • 이름에 입각한 대상 인식 과정: 기억 -> 상기 -> 명시적 인식
  • 이 두 훈련을 통해 대상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뿐만 아니라 그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어떤 요소 안에서 대상이 분해되고 끝나는지 알수 있게 된다. 이것이 대상의 현실적 분석이다.

 

영적 훈련의 두번째 단계  <32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분석연습, 본질명상, 고유명사명상의 목표는 메갈로프로수네megalophrosune "영혼을 위대하게 만들기" 달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명상록 11권의 예를 보면, diêrêmênôs(분석적으로)  kai holikos(전반적으로) 고찰하면 adiaphorêsei(무관심)할 수있다고 적혀있다. (댄스나 판크라테온에서 그 동작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볼때 그 것들은 흥미가 사라지고 무관심해진다. -> 분석적 점검) 사물에 무관심해진 영혼은 신의 이성에 부합하는 평정을 획득한다. 이것이 수련의 목적이다. <325>

elegkhein: 대상을 방법적으로 진실되게 검토하는 것 (방법적이라 함은 대상을 인식하거나 관계 맺는 방식)

khreia :전체에 대한 대상의 유용성을 보는 것 ( 전체 = 주체와 세계)

axia :전체에 대해 대상이 갖는 가치를 보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사물에 대한 이러한 점검들은 우리가 국가의 국민으로서라는 추상적 틀이 아니라, 서울에 거주하는,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덕을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 스토아, 에픽테토스에게서 발견됨 <326,327>

에픽테토스의 산책-수련:

  • 산책중에 들어오는 다양한 표상에 의해 내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어떤 것(생각)에 의존하거나 자유로운지, 표상또는 기억된 것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를 수련하는 것.

기독교적 수련의 발생 (4C-5C수도원 문화)에 대한 카시아누스의 예 - elegkhos

  • 방앗간 은유: 매순간 나타나는 표상을 곡물에 비유하고 좋은 알곡과 나쁜 알곡을 분별하여 좋은 것만 절구에 넣어야 한다.
  • 환전상 은유: 동전을 확인하고 교환해야 한다.
  • 표상의 객관적인 내용을 검토하는 스토아주의와 달리 기독교는 심리적 현상 안에서의 표상이다.(주체 자신에 의한 해석이다)
  • 표상의 이분법적 평가와 표상의 기원에 대한 비교를 통해 스토아주의의 분석은 표상하는 내용(외부 세계가 무엇인지를 아는것)에 근거하고, 기독교의 영적인 훈련과 명상은 사유자체의 속성과 기원(내면성)에 근거함을 알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표상 점검원칙

  • 첫째, 개체의 시간적 분해에 대한 연습입니다.
    • kataphronein (카타프로네인, 비하, 경멸, 업신여김) 정확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식으로 성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 우리는 위에서 아래로 보며 경멸하듯 대상을 성찰해야 하는가? 우리가 쾌락보다 더 강해지고, 쾌락이나 유혹에 저항하고 자신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332>
    • 현실법칙: 카타프로네인 방식으로 보는 대상에서 쾌락적인 것이 제거되었기에 평정심으로 세계를 대할 수 있게 된 그 현실의 순간들, 즉 날아가는 참새떼 가운데 한마리를 사랑하려는 순간 그 참새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한무리의 참새떼 만이 시야에 잡히듯 시간의 한순간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333>
    • puneuma (프네우마, 호흡) 우리의 생은 하나의 호흡에 상당하는 무엇이다. (들숨에 태어나고 날숨에 죽으니 공기는 세상에 되돌려진다.)
    • 여기서 참새나 공기는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부와 권력에 의한 정체성 같은 어떤 것들이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의 정체성은 덕이며, 덕은 분해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덕은 영혼 자체이며 덕의 순간은 영원하기 때문에 분해불가한 덕 만이 우리의 정체성이라 본다.<334>
  • 둘째, 구성 요소로 분해하는 것에 대한 연습
    • 조리된 맛있는 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물의 시체에 불과하다.
    • 성행위는 무엇인가? 신경을 서로에게 문지르는 것으로 약간의 경련과 배설 외 아무것도 아니다.
    • 이렇게 분해해서 보는 연습으로 우리는 사물의 과대포장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다.
  • 셋째, 객체에 대한 "자격박탈" 記述 즉 설명을 환원(축소)하거나 의미를 실추시키는 연습.
    • 주변에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사람을 생각할때 그에 대한 끌림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완장을 제거하는 연습이다.(보석으로 표현된 단어를 완장으로 대체함. 즉 완장만 없으면 그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는 것. )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영적 지식의 관점에 대한 비교 <337>

  • 세네카가 정점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이 지점은 우주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위치에서 인간의 실존(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도록 아래로 내려본다.
  • 우리가 세계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세네카는 우리 아래에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펼처지며,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는 특이함을 환원하고, 냉소적이다. (부러운 것들은 별것 아니다)
  • 주체에 대하여 세네카는 세계를 관찰하는 정점의 위치에서 볼때 자기자신이 매우 작고 미약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주체이다.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관점에서 두가지 방식으로 자신이 관계된다. 가장 작은요소로 파악된 본질 안에서 자유롭고, 서로 부분들의 통일체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우리 모두 평등하다.(union, not unity)
  • 주체의 위상에 대해 세네카는 주체의 정체성과 안정적인 실존을 확립하는 역할을 하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개인성의 해체를 지향한다.

 

'자기로의 전향'이라는 테마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존재, 영혼, 내면성 등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것이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의 양태화이다.

  • 주체의 이동(움직임) : 올라가든 내려가든 주체가 세계를 보는 관점의 전환
  • 사물의 가치 파악(평가)
  • 우주에서 자신을 보는 능력 '자기 보기(héauto scope)'
  • 주체의 변모 (실존의 미학)

위 네 조건을 전제하는 지식이 소위 영적인지식을 구축하는 방법(양태)이다. <339>

영적 지식(le savoir dc spiritualité)이 아닌 인식적 지식 (le savoir dc connaissencc)에 대해 살펴보자.

16C - 17C  인식적 지식이 영적 지식을 덮어버린다.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에게서 그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영적 지식과 인식적 지식의 관계 변화를 잘 보여주는 형상이 있는데 그것은 파우스트의 이미지이다.

  • 파우스트는 영적 지식의 권력(가능성)과 매혹 그리고 내포하는 위험으로 구체화된 인물이다.
  • 영적 지식(금지된 지식)을 인식적 지식(신앙)으로 변형할 수 있기에 레싱은 파우스트를 구원한다.
  • 괴테의 파우스트는 사라지는 영적 지식의 세계에서 다시 행동하려는 인물이다.
  • 괴테 『파우스트 』1부의 파우스트의 독백: 세계 정상으로 올라감 ->모든 요소 이해 -> 사물의 본질을 꿰뚷고 -> 주체를 변형시켜 행복을 주는 지식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I have comprehended philosophy,

I became a lawyer, I became a doctor...

Alas! With diligence and hard work

And in theology I penetrated, -

And I didn't get any smarter after all.

Than before was... I'm a fool of fools!"

출처: <https://unotices.com/books-u/288460/85>

이것은 영적이지 않은 인식적인 지식이다. 인식적 지식에서 주체는 자기변형을 위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파우스트가 지식에 요청하는 것은 철학도 법율도 의학도 그에게 볼수 없는 영적인 가치와 효과이다.

이 독백에는 계몽(Aufkläung)과 함께 사라지는 영적 지식에 대한 파우스트의 슬픈 인사가 있다. 푸코가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하고싶은 인사이기도 하다. <341>

 

1982-2-24 후반부

자기로의 회귀(turnning to oneself)와 세계의 인식 사이의 관계, 즉 마테시스mathêsis에 직면한 자기호소(self-appeal)을 연구하였다. 이번에는 아스케시스askêsis(자기가 자기에게 가하는 수련, 고행)를 검토하겠다.

덕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까? 라는 사람들의 의문에 대해 무소니우스 루푸스는 의학이나 음악처럼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실천적 지식은 자신을 훈련 시킴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고 한다. 덕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피타고라스주의, 플라톤에게서도 발견되고  Askêsis philosophias( 철학적 수련)을 논하는 소크라테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이는 견유주의들이 고집하는 관념이다. <~344> (수련 = 실천)

자기가 자기에게 가하는 실천인 수련이라는 자기로의 전향을 구성하는 순간 주체는 진리가 아니라 법〮 규칙〮 규범의 틀 안에 위치하는 것 아닐까 의심할 수 있지만 askêsis는 진실의 실천이지 법에 예속됨이 아니다. <345>

사유 범주들 내에서 주체와 인식의 관계를 볼때 사물에 대한 인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주체를 대상화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헬레니즘의 사유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제기할때 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주체 안에서, 주체의 경험 안에서 주체의 구원을 위해 영적인 형식과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변형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대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미학적 주체)

 주체의 영적인 방식화야 말로 세계에 대한 인식과 주체의 관계는 어떤 상황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세계에 속한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어떤 한도 내에서 진실을 인식하고 말하고 실천하고 수련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로 존재하게 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346>

  • 근대인: 인식의 장에서 주체의 대상화 -> 법 질서에 주체를 예속
  • 헬레니즘: 주체의 영적인 경험으로 세계에 대한 앎으로 구축 -> 진실의 실천을 통해 주체를 최종적인 목표로 구축.

지식의 靈化와 진리의 실천과 훈련으로 규정되는 주체성의 장치로 askêsis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고행에 대해 우리는 금욕적 수행과 혼동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인에게 고행은 자기 포기가 아니라 askêsis를 통해 자기를 구축하는 완결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또한  askêsis를 통해 무엇인가를 획득하는데 그것은 paraskeuê 를 갖추고 소유하는 것이다. <347>

paraskeuê는 무엇일까? 일종의 개인의 준비물이며 위험이나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장비이다.

  • 데미트리우스의 '운동선수' 은유
    • 자신을 단련하는 자로 모든 가능성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치거나 닥쳐올 사건에 대해서만 준비를 하는것이 중요함을 비유.
    • 타자를 능가하거나 우리자신을 능가하는 방식이 아니다. 기초적이지만 단순하고 잘 습득 되어져 즉각적으로 운용 가능하록 일반적인 훈련을 받는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무용수' 은유도 같은 맥락이다.
    • 그러나 기독교의 운동선수는 원죄, 악마의 유혹, 타락한 자연을 적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 운동선수이다.
  • paraskeuê는 logoi(담론)에 의해 구축된다.
    • logoi는 진실된 명제〮 원칙〮 공리등 외에 물질적으로 실존하는 언표들로 채워진 담론이다. (물질적이라 함은 일상생활과 같이 정신속에 각인된 문장들)
    • 이 담론들은 설득적이다. 신념을 야기할 뿐 아니라 행위자체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설득적이다.
    • logos는 주체가 구조를 요청하는 순간 응답해야 한다. <352>
    • logos는 주체를 위한 훌륭한 항해사이거나 요새이거나 약(paromakôn)이기 위해 prokheiron, 즉 手中에 있어야 한다.
  • menemê(고대적 형태의 기억)는 logos를간직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 현시하는 방법이 아니라 근육속에 지녀야 한다(체화되어야 한다)
    • 즉각적이고 지체없이 자동적으로 가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 고통 받을때 이 장비는 영혼을 보호하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작동해야 한다.

그리스 로마인에게  askêsis는 충만하고 독립적인 자기와 자기의 관계라는 궁극적 목표 때문에 paraskeuê구축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는다.

askêsis는 개인의 paraskeuê구축 과정의 형식, 원칙, 계기로 정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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