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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 1강 발제(텍스트)

김동현 2020.09.24 17:32 조회 수 : 218

문학의 공간으로의 접근

 

김동현

 

▶ 르네 길의 『언어론』 서문(1866)

 스테판 말라르메가 ‘르네 길’의 저서 ‘언어론’에 수록한 서문이다. 

 말라르메는 시대의 피치 못할 욕망이 ‘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라고 하였다.

 - 직접적이거나 생경한 것. (일상의 언어)

 - 본질된 것. (시의 언어) 

 로 나누었다. 

 

 인간이 서로 생각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또 글을 쓸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아무 말 없이 상대방의 손에 동전 한 닢을 올려 놓거나 또는 집어드는 행위로 충분한 경우도 있다. 언어의 기초적 사용은 이처럼 보편적 ‘사실전달’을 위해 쓰고 있다. 이것이 직접적이거나 생경한 것, 일상의 언어이다.

 

 말라르메가 서문을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는 본질된 것, 시의 언어에 대한 설명이다. 요컨대 시의 언어란 대중들이 우선 생각하듯이 용이하게 대신할 수 있는 화폐의 셈법과는 달라서, 상상에 헌신하고 있는 한 예술의 본질을 이룬다는 필연성으로 시인을 통해 언어의 잠재능력을 되찾는다. 

 

 그는 시어(詩語)의 뜻과 소리를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강조한다. 

 

 뜻과 소리에 서로 번갈아드는 담금질의 세련된 기교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남아 있을 우연을 단호히 제거한 시구는 당신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다. 당신은 이제껏 그토록 정상적인 발성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는가 하면, 그와 함께 명명된 대상의 순수한 ‘기억’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대기 속에 잠겨 든다. 

 

 

▶ 운문의 위기(Crise de vers)(1897)

 

 산문 ‘운문의 위기’는 마지막 문단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문단은 아래와 같다. 

 

 시구(vers)는 몇 개의 음성으로, 총체적이고, 새롭고, 언어(langue)가 아직 알지 못하는, 주문(呪文)과도 같은, 하나의 낱말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인바, 의미와 음향을 바꾸는 능란한 담금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우연을 극치에 이른 솜씨로 부정하여, 말(parole)의 이 고립을 완수하며, 그리하여 이런 범상한 한 조각 한 조각의 말을 예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것만 같은 놀라운 느낌을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바, 바로 그 순간에, 호명된 사물의 잔영이 어떤 새로운 분위기 속에 잠겨드는 것이다. 

 

 이 산문은 말라르메가 시(운문)를 바라보는 예술론일까? 

 

 프랑스의 시는 각운에 우위를 부여하였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시는 한동안 빛나다가, 그것을 소진하고, 기다린다. 소멸, 그보다는 씨실 날실이 드러내는 마모, 쓸데없이 되풀이. 시를 지으려는 욕구가, 가지가지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유례없는 르네상스와 비교될 만한 거의 한 세기의 주기적 진탕만탕 주연을 격고 나서, 혹은 어둠과 냉각을 요구하는 순번을 맞아서, 이건 전혀 아니다! 그 광휘를 변화시키고, 지속시킨다. 여느 때는 숨겨진 담금질이, 이런저런 감미로움을 수단으로 삼아, 공개적으로 행해진다. 그는 시가 소멸하며 스스로 새로워 지길 바란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 가지 처방을 얘기한다. 

 

 1. 각운을 맞추는 육각시구(六脚詩句)인 알렉상드랭을 예를 들며 열두 개의 울림의 그 안에서 가능한 모든 조합을, 홀로, 식별하는 기쁨에 대해 얘기한다. 

 2. 알렉상드랭을 따르되 11번째 음절에서 사라지게 하거나 여러 번 13번째 음절까지 넓혀가는 방법. 

 

 이 두가지 방법은 전통적이라 식상하지만 전통적이기에 새로울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3. 자유시. 다형적. 

 

 세 번째는 전통선율이 고창되는, 보편적이고 세기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과 경합하여, 하나의 악기를 새로 만들자고 얘기하고 있다. 그는 영혼은 제각기 하나의 멜로디이며, 그것을 엮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며 그러라고 저마다의 플루트나 비올라가 있듯 새로운 방식을 창조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고 시의 언어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하나 그또한 언어이므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를 묶는 일정한 형식이 있음을 설명한다. 

 

전위(Transposition)와 구성(structure) 

 

 그는 작시법 보다는 우리의 정신 상태에 더 많이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위와 구성을 제시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말한다는 것은 사물의 현실에 교환적(상업적)으로만 관계한다. 문학에서, 그것은 사물을 암시하거나, 그 특질을 추출하여 어떤 관념을 구현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작품이 작품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꿈꾼다.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화자(話者)로서의 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인은 낱말들에게 주도권을 양도한다. 

 운문으로 된 책의 배열은 저절로 혹은 어디에서나 나타나서, 우연을 제거한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책을 꿈꾼다. 

 

- 세상에는 그 법칙으로 – 모든 국민이 그 법칙을 흉내 내듯이 단 한 권의 경(經)이 있을 뿐이리라. 

 

 우선 대중들이 언어를 다루는 것과 같은 용이하고 표상적인 정화(正貨)의 기능과는 반대로, 말은, 무엇보다도, 꿈이자 노래가 되어, 허구에 바쳐진 예술의 구성적 필연성에 의해, 시인에게서 스스로의 잠재력을 다시 발견한다.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말라르메의 경험」

 

 거친 말은 “사물들의 현실에 관계한다”.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묘사하는 것” 또한 사물들을 현전 가운데 “표상한다.” 

 본질적인 말은 사물들을 멀어지고 사라지게 한다. 언제나 빗대어 말하는 본질적 말은 암시하고 환기한다. 

 

 그런데 거친 말은 전혀 거칠지 않다. 거친 말이 표상하는 것은 현전하지 않는다. 말라르메는 “정묘한 종이에…… 나무들 무성한 본래의 숲을 담으려 하지” 않는다. 일상어에서 사용하는 나무라는 말보다 나무에 더 낯선 것은 없다. 아무것도 이름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고, 아무것으로도 남지 않는 말, 하나의 말이기는커녕 놀랍게도 그 용도 가운데 순식간에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말. 이보다 더 본질적인 것에 적합하고, 이보다 더 침묵에 가까운 것이 있겠는가? 사실 그렇다, 말은 ‘쓸모 있다’. 겉보기에 모든 차이는 여기에 있다. 말은 사용하는 것이고 일상적이고 유용한 것이다. 말을 통하여 우리는 세계에 속하고, 세계의 삶으로 보내진다. 즉, 목표가 말하고 그것을 마무리하려는 염려가 생겨나는 곳으로. 분명 아무것도 아닌 순수함, 무 그 자체, 하지만 행동하는 그것은 움직이고 일하고 짓는다 ― 부정적인 것의 순수한 침묵이 임무라는 소란스러운 열기에 이른다. 

 

 본질적 말은 이 점에서 상반된다. 본질적 말은 그 자체로서 위엄있고, 위엄으로 주어지나,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다. 모든 사유와는, 끊임없이 요소적 어둠을 물리치는 사유와는 진정 거리가 멀다. 시구는 “흩어져 무시된 채 떠도는 모든 광맥을 캐고 끄집어내어 생생하게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말은 다시 ‘요소들’이 되고, 그리고 밤(nuit)이라는 말을 그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밤의 내밀성이 된다. 

 

 거친 말은 거칠지도 즉각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그 말은 존재의 환영(幻影)을 제공한다. 그것은 극도로 심사숙고한 것이요, 역사의 무게로 무겁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통상적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이 시간의 기관이요 생성의 감시자라는 것을 알 수 없기에, 말은 즉각적으로 주어진 계시의 장소와도 같고, 진리란 즉각적이고, 언제나 한결같으며 연제나 다룰 수 있는 것임을 알리는 표시와도 같다. (중략) 

 통상적 말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이 즉각적인 것은 가려져 있는 먼 것, 습관적으로 주어지는 절대적으로 낯선 것, 우리가 언어라는 가림 때문에, 단어라는 환영의 습관 때문에 익숙한 것이라 여기는 기이한 것이다. 

 말에는 말 가운데 말을 숨기는 순간이 있다. 말은 이와같이 스스로를 숨기는 능력 때문에 매개가 자발성과 신선함과 근원의 순진무구함이 되는 힘을 갖는다. 

 

 말라르메가 본질적 언어를 말할 때, 때로는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익숙한 것에 불과한 즉각적인 것의 환영과 보증을 제공하는 일상적 언어에 대립시키고, ―그때 그는 사유의 말을, 즉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리라는 그리고 이러한 분리를 현실화하여 세계를 만들리라는 결정을 보여주는 침묵의 움직임을, 그 자체가 의미의 작업이자 말인 침묵을 다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사유의 말은 그럼에도 또한 ‘일상의’ 말이다. 이 말은 우리를 언제나 세계로 돌려보내고, 우리에게 세계를 때로는 무한한 임무와 노동의 위험으로서, 때로는 우리가 확실한 장소에 있다고 믿을 수 있는 확고한 입장으로서 보여 주고 있다. 

 

 시적인 말은 그때 단지 일상적 언어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언어와도 대립된다. 이 말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세계로, 피난처로서의 세계로도, 목표로서의 세계로도 보내지지 않는다. 거기서 세계는 뒷걸음질치고 목표는 중단되었다. 거기서 세계는 침묵한다. 

  

 그리하여 말하는 자는 말라르메가 아니다. 언어가 스스로를 말한다, 작품으로서의 언어와 언어의 작품을. 

 

중심점

 

 한편으로, 작품 가운데, 이 지점은 작품이 실현하는 것, 거기서 작품이 긍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어떤 빛나는 명료함을 수락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지점은 작품의 현전이요, 작품만이 이 지점을 현전하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지점은 “한밤의 현전”, 이곳, 여기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시작될 수 없는 곳, 존재의 무위에서 오는 공허한 심연이다. 출구도 보존도 없는 이 지역에서 작품은 예술가를 통해 그 근원에 대한 끝없는 염려가, 탐구가 된다. 

 

(중략)

 

 하지만 모든 말들이 끝날 때, “벼락같은 순간”, “번개같은 섬광”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모든 말들이 그 말 속에 빛나고, 창공의 투명함 위로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는 꽃 속으로 죽어 가는 순간”). 

 이 벼락같은 순간은 작품의 용솟음처럼, 작품의 총체적 현전처럼, 작품 “자체의 비전”처럼 작품으로부터 솟아난다. 이 순간은 동시에 “문학이 존재한다”는 “술책”에 존재와 실존을 부여하기 위해 작품이 모든 것의 배제를 선언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작품 자체도 배제된다. 시의 힘에 의해 “모든 현실이 용해되는” 이 순간은 또한 시가 용해되고,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것은 분명 이미 너무도 모호한 것이다. 그러나 모호함은 보다 본질적인 것에 가닿는다. 왜냐하면 작품의 작품과도 같은 이 순간은, 모든 의미를 벗어나, 역사적·미학적 주장을 벗어나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 순간은, 작품이 작품 속에서 언제나 미리부터 작품을 무너뜨리고, 작품 속에서 언제나 무위의 헛된 과잉을 되살리는 시련을 받아들이면서만 가능한, 그러한 순간이다. 

 

무위의 깊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면서 예술가는 결코 그 대상을 용도에서 벗어났을 때의 모습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대상을 작품의 요구가 스치는 지점으로 삼아, 결과적으로 가능한 것이 미미해지고 가치와 효용의 개념이 사라지며 그리고 세계가 ‘용해되는’ 순간으로 삼는다. 그것은 그가 이미 어떤 다른 시간에, 별도의 시간에 속해 있고, 시간의 작업을 벗어나 매혹이 위협하는 본질적 고독의 시련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근원적 소속감에서 작품의 요구에 응하면서 그가 일상 세계의 대상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그 용도를 중성화하여 그것들을 정화시키고, 지속적 양식화를 통해 대상들이 화폭이 되는 순간적 균형 상태로 고양시키는 것 같은 그러한 지점에 다가섰기 때문이다. 

 

 근원으로서의 작품에 속해 있지 않은 자는, 작품이 그 본질에 대해 염려하는 또 다른 시간에 속해 있지 않은 자는 결코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시간에 속해 있는 자는 또한 존재와 관련하여 결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러한 무위의 공허한 깊이에 속해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쓴다는 것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지점으로의, 숨김의 한가운데서 말을 한다는 것이 아직 말의 그림자에 불과한 그 지점으로의 접근일 때 비로소 시작된다. 말의 그림자 그것은 아직 그 자체의 이미지에 불과한 언어, 이미지라는 언어, 이미지라는 것의 언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 결국 자신을 들려주려고 한다면 침묵을 부과해야 할 끊이지 않고 끝나지 않는 것의 웅얼거림이다. 

 

▶ 질문 

 

1. 나는 블랑쇼가 말하는 글을 쓴 적 있는가? 쓴 적 있다면 어떤 형태의 글인가? 

 

 나는 블랑쇼가 말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지점으로의 출발을 했을까? 그랬다면 이광호 교수의 ‘문학비평론’ 수업에서 미셸 푸코의 철학을 정리했을 때 글을 쓴다는 사실도 잊고 글을 썼던 것 같다. 글을 쓰면서는 이런 순간이 찾아오지만 온전히 이런 순간으로 글을 쓰거나 이런 순간으로 시작을 한 적은 글쎄 그때와 테베3부작에 대해 페이스북에 쓸 때 아니었을까? 

 

2. 우리나라에 말라르메의 시와 비슷한 시가 있는가? 

 

 잘 모르겠다. 서정주 시인이 떠오른다. 

 

3. 말라르메는 ‘우리는 물질의 허망한 형식에 불과하지만 신과 우리의 혼을 창조했을 만큼 숭고한 형식인 바 ― 진리인 허무(Rien) 앞에서 영광스런 거짓말들을 선언’ 한다고 하며 절대(絶對)에 다가가려 했다. 현대 작가들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과거에는 신이 있었다. 시인은 절대자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존재였다. 신이 죽고 우리는 한낱 물질의 허망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말라르메 같은 시인은 언어에 집중했다. 오늘날 현대 작가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까? 역사적 관점에서 인식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고, 시스템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고, 인간의 관계로 세계를 인식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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