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지만 후기를 올립니다.
"과학 기술 없는 인문학은 원숭이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라투르의 과학인문학편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입니다. 라투르의 글을 읽기 전, 과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고작해야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 정도가 아닐까 했죠. 가령, 과학의 역사라든가,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에 숨겨진 이야기 같은...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과학인문학은 과학과 인문학의 단순한 접합이 아니었습니다. 과학인문학은 과학에 덧붙여져 있는 '자율성', '이성적', '객관적', '진리'와 같은 수식어를 제거하여, 과학이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과학과 기술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장 노트북이 없었다면 전 후기를 작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수기로 작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동학들과 공유하긴 어렵겠죠. 또 노트북으로 문서작성을 하는 것이 익숙해져버려 수기로 글을 쓰는 것이 불편하기도 합니다. 라투르는 이처럼 대상으로 인식되어 우리의 삶에서 분리된 채 존재했던 과학기술을 삶의 일부로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더하여 과학기술을 신성시하지 못하게 만들었죠. 고장과 시험을 통해, 과학기술의 '과정'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말이에요. 발명은 관념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장이 지시한다!
(유미쌤께서 우리의 몸에 고장을 일으켜 봄으로써 여성의 몸에 대해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셨는데, 몸을 어떻게 고장낼 수 있을 지 잘 모르겠습니다...)
과도하게 부여된 과학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은 발화체에 인용문을 넣는 것입니다. 어떤 가설(논의)을 제시한 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밝힘으로써 가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말풍선을 명확히 함으로써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입장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단 하나의 불변하는 무언가가 아닌 다수로 인식하기. '코기토에서 코기타무스로'가 핵심적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간 원숭이 놀음에 지나지 않는 인문학에만 관심을 가져온지라, 책을 읽기 전부터 잔뜩 겁을 먹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까봐요. 그러나 생각보다 쉽게 읽혔습니다.
라투르 덕분에 생소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대상이었던 과학이 조금은 친숙하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과학을 공부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어느 때보다 과학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따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