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험의 빈곤
“경험의 빈곤화 과정은 이미 매뉴팩처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그것의 발단은 상품 생산의 시작과 때를 같이 한다.”
(마르크스, 《자본》 1권, 코르쉬 편, <베를린, 1932년>, 336쪽)
: 벤야민이 말한 '경험의 빈곤'은 '인류의 경험의 빈곤'을 가리키며, "새로운 야만성"을 가리킨다면,
'경험'은 무언가 숭고한 것,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요?
포도밭의 우화에서는 성실함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기회 혹은 성실하게 축적되고 지속되어온 지혜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2. 경험과 체험의 차이
“경험은 노동의 열매이고 체험은 무위의 날을 보내는 자의 환등상이다.”
“환등상은 체험에 있어 지향적 대상이다.”
: 경험과 체험의 구별이 필요하다면, 경험은 지속되고 축적된 지혜/혜안과 같은 생산적인 것이라면,
체험은 일회적이고 무의미한 의미를 지닌 비생산적인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무위의 날을 보내는 자"는 '명상자' 혹은 '산책자'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체험하는 자(산책자)와 경험하는 자(노동자)는
대비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3. 흔적과 체험과 경험 : 흔적 = 체험 / 흔적 ≠ 경험
흔적에 의해 ‘체험’에는 새로운 차원이 부여된다. 체험하는 자는 모험이 이끄는 흔적을 따라가면 된다.
경험이 체험의 언어로 번역될 때의 독특한 양태를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은 흔적을 쫓아가는 자에게는 값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냥은 처음부터 경험이 존재해야 하는 유일한 노동 활동이다. 흔적을 쫓는 자의 경험은 어떠한 노동 활동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그것과는 거의 무관하거나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경험은 어떠한 결과도 초래하지 않으며 체계도 없다. 경험은 우연의 산물이며 본질적으로 미완결성을 띠고 있다. 이것이 하릴없는(無爲) 자가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의무의 특징이다. 가치가 있는 수집은 완전불가능하며, 이용 가능성은 우연의 여하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완전 불가능성의 원형은 연구이다.
: 흔적을 따라가는 것이 체험이라면, 흔적을 지워야 하는 것이 경험일까요?
(흔적을 추적하는 탐정소설 = 체험으로서의 성격)
부르주의의 방에는 많은 흔적이 잔존해 있기에, 이 방을 나가려면 브레히트의 말대로 '흔적을 지워야'만 한다는 구절과
유리와 철로 '흔적을 남기기 어려운 공간들'을 만들었다는 구절이 상응한다고 볼 때,
유리문화는 반부르주아적, 반귀족적인 대중문화의 시작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까요?
4. 체험과 만국박람회
“인간이 ‘총체적 체험’을 하도록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로의 감정 이입이 아닐까?”
“만국박람회는 소비에서 밀려난 대중이 교환가치로의 감정 이입을 학습할 절호의 학교였다. ‘어떤 것이든 보는 것은 좋으나 만져서는 안 된다.’”
: 총체적 체험은 경험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인지요?
(체험 = 흔적 = 실내 장식)
1.2.
벤야민은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데요. 그에게서 경험은 세대를 거쳐 축적되어 지속적으로 전달가능한 형태로 전수될 수 있는 것을 지칭합니다. <경험과 빈곤>에서 정확히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체험의 경우에는 경험과 달리 일회적이면서 개인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체험조차 상품화되어 경험을 모방하고 재현하려고 하지만 이는 결국 소외된 경험에 그칠 따름입니다. 벤야민은 오늘날의 파편화된 경험과 체험이 드러내는 ‘새로운 야만성’으로부터 근대를 넘어설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찾아내고자 시도합니다.
3.
경험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경험을 갖는다는 것은 흔적에 대한 ‘소유’의 기억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경험의 전승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체험은 그러한 흔적을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체험이 기존의 경험들과 만남으로써 체험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산출해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것은 무위의 산책자들이 갖는 진정한 특권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편, 부르주아에게서 흔적은 폐쇄된 자아의 소유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유리문화는 이러한 부르주아의 폐쇄된 흔적을 지우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대중들에게 부추기면서) 대중문화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4.
본문을 다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벤야민이 언급한 ‘총체적 체험’이 의미하는 바가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교환가치로의 감정이입을 통해 형성된 총체적 체험이란, 일종의 상품 물신성에 의해 형성된 부르주아적 자아와 세계상을 갖는 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경험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