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원자료 :: 인사원의 과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줄인다고 줄여도 이정도 입니다.^^ 중간에말을 빼면 의미가 달라져서리...

 

 

 

 

17. 미셸 푸코의 주요 개념들에 대하여 20190425

 

발제: 박연희

" 나 자신이 내가 사유하지 않는 것이기 위해서는, 나의 사유가 내가 아닌 것이기 위해서는 사유하는 나, 나의 사유인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되어야하는가? (p. 458)

 

* 푸코의 문제의식: 사유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적인 것은 지층화된 모든 형성들을 가르키지만 그에게 있어서 사유하기란 띠들(지층들)사이에서 또는 간격들 속에서 지층화하지 않은 어떤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역사적 형성들을 접으며 역사적 형성들을 통해 작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형성들과 유사하지 않은 사유의 생성이 존재한다. 분명히 사유하기는 외부로부터 사유에 도래하며, 동시에 내부로부터, 지층들 아래에서, 지층들을 넘어서 발생한다. 푸코에게 사유가 그 무엇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나는 것 즉 “다르게 사유하기”는 다음의 세 축을 따라서 푸코의 저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역사적 형성들로서의 지층들(고고학), [지층들을 넘어선] 저기로서의 외부(전략), 기층으로서의 내부(계보학).

 

1. 지층 또는 역사적 형성: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지식)

 

* 지층들은 사물과 말, 보기와 말하기, 가시적인 것과 진술 가능한 것, 내용과 표현으로 형성된다. 여기서 내용은 형태와 실체를 지닌다. 예를 들어 (형태로서의) 감옥과 (실체로서의) 감옥에 감금된 이들이 그렇다. 또한 표현도 형태와 실체를 지닌다. 예를 들어 (형태로서의) 형법과 (실체로서의) 범죄행위가 그렇다. 표현의 형태로서의 진술 가능성의 장(범죄행위에 대한 언표)을 정의한다면, 내용의 형태로서 감옥은 가시성의 장소(자신은 보이지 않으면서 매순간 모든이를 감시하는 원형감옥과 같은 (일망 감시 구조 panoptisme)를 정의한다.

 

* 『광기의 역사』에서 가시성의 장소인 수용소와 언표의 장인 정신의학이 거론되고 『레이몽 루셀』에서 기계를 따른 가시성의 발견과 “기법”을 따른 언표의 생산을 보여준다.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임상의학과 병리해부학이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사이에서의 가변적인 분할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층화의 두 요소 즉 내용[가시적인 것]과 표현[진술 가능한 것], 또 비담론적 형성들과 담론적 형성들에 대하여 일반화된 이론과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지식의 고고학』에서였다. 이에 따르면 지층화 되는 것은 지식을 구성한다. 이 지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지층화는 고고학에 속하는 것이다. 즉 고고학은 과거가 아니라 지층들이다. (p.438)

 

* 푸코는 표현의 형태로서 “언표”와 내용의 형태인 가시성을 건설한다. 가시성은 대상의 형태가 아니며 빛 그 자체에 의해서만 창조되는 사물이나 대상을 오로지 섬광으로만 존속하도록 하는 빛남의 형태이다. 따라서 고고학의 과제는 이중적이다. 말과 랑그로부터 각 지층에 대응하는 언표들을 추출하고 동시에 사물과 보는 것에서 가시성들 또한 추출해야만 한다. 푸코는 가시성에 대한 언표의 우위를 언급한다. 하지만 가시성은 환원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언표와 분명이 구분된다. 눈과 목소리, 이 둘 모두가 푸코에게 즐거움의 필수 요소이다. 푸코는 듣고 읽기를 통해서 매혹되는 만큼 보는 것을 통해서도 똑같이 매혹되었다 (p.440)

* 언표는 언표로 만드는 조건들, 언표 자신을 ‘언표라는 초석’위에 등록시키는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독해와 진술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조건이란 [각 시대 또는 각 지층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조건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표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조건에 도달하면 우리는 각각의 시대가 그 시대가 사용하는 언어를 따라 그 시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은 가시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시성 또한 조건을 지니며 이런 조건들이 없으면 결코 가시적이지 않게 된다. 여기에서 조건이란 각각의 지층을 따라서 빛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빛이 이러저러한 지층 위에서 나타나는 방식을 파악하기 위하여 사물과 대상을 개방해야한다. 이처럼 그 어떤 것도 직접적으로 가식적이거나 독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이란 없다.

 

* 푸코의 사유와 신칸트주의의 두 가지 차이: 먼저 조건들은 실재적인 경험의 조건들이지 가능한 경험의 조건들이 아니다. (첫 번째 차이) 따라서 조건들은 여기에서 “대상” 쪽으로 가 있지 결코 보편적인 “주체” 쪽으로 가 있지 않다. (두 번째 차이) 말하자면 조건들은 후천적인 종합에 근거하는 것이지 선천적인 종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푸코에게 신칸트주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푸코의 사유가 언어의 자발성과 빛의 수용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푸코에게 있어서는 칸트주의적인 오성의 자발성과 코기토가 언어의 자발성(언어의 “있음”)에 의해서 그리고 칸트주의적인 직관의 수용성이 빛의 수용성(시간-공간)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여기서 언표는 “결정을 행사하는” 역할을 하지만 가시성은 환원이 불가능하다. 결국 본성상의 차이가 나는 두 형태 간 상호 적응의 문제가 제기된다.

*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사이에는 본성상의 차이가 있었다. 『감시와 처벌』에서의 논증에 따르면 새로운 형벌의 언표 체제에 의존하는 “범죄행위”에 관한 언표들, 새로운 가시성의 체제에 의존하는 내용의 형태로서의 감옥, 이 둘이 서로 만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둘은 본성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이 둘이 서로 다른 발생과 근원적인 이질성을 지님에도 어떤 지층 위에서 서로 전제하는 일, 또 다른 어떤 지층에서 떠나는 일이 일어난다. 가시성의 장소로서의 수용소, 언표 대상으로서의 정신병, 이 둘이 서로 다른 발생과 근원적인 이질성에도 어떤 지층 위에서는 서로를 전제하고 다른 지층 위에서는 서로의 매듭을 풀어헤친다.

언어와 빛은 언표들이 산재되고 가시성들이 분산되는 그런 외성의 공간 또는 외성의 형태를 이룬다. 언표가 보기의 간격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는 이유, 그리고 가시성이 말하기의 간격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외성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 외성 때문에 동시에 말하고, 본다. 비록 이것들이 본성에 있어서 차이가 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하나의 지층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지층으로 넘어가면서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은 동시에 변환된다. 단 그것들이 서로 이질적인 한에서 그렇지만 이 이질성이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끼어들기를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2. 전략 또는 지층화되지 않는 것(권력): 외부의 사유

 

*권력이라는 새로운 축에서는 ‘힘들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이 힘들의 관계는 힘의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권력이라는 것은 “모든 점에서 생산되는 것, 어떤 한 점이 다른 점과 갖는 모든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권력은 지배자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를 통해서도 작용한다. 우리는 힘들의 전략과, 그 힘들의 전략으로부터 유래하기만 하는 형태들의 지층화를 구분해야 한다.

* 푸코의 논제는 권력에 대한 니체적 영감과 관련된다. 힘은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이중의 권력으로 정의되며 이런 이유로 다른 힘들과의 관계와 분리되어 고려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힘의 수용성과 같은 것(영향을 받는 권력)과 힘의 자발성과 같은 것(영향을 주는 권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자발성과 수용성은 지층들 위의 그것들과 다르다. 먼저 지층들 위에서는 보기와 말하기가 각각 다른 형성된 실체들과 형식화된 기능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힘들의 관계는 형성되지 않은 질료와 형식화되지 않은 기능을 뒤섞는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다이어그램[힘들의 계열의 장으로서의 도표 또는 도식]”은 힘들의 관계 또는 권력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말했을 때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 다이어그램은 지층들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그램은 그 자신이 바로 지층들의 외부이다. 외부로서의 다이어그램은 두 지층 사이에서 변이의 장소로서 있다. 형태들[표현의 형태와 내용의 형태]의 관계가 지식을 정의했다면, 힘들의 관계는 이제 다이어그램 속에서 권력을 구성한다.

*푸코의 다이어그램론에서는 힘들의 수용적인 자발성이 가시적인 형태의 수용성, 진술 가능한 언표의 자발성, 그리고 이 둘 간의 상호 관계를 직접 설명한다. 즉 푸코의 다이어그램론에서는 힘들의 관계가 지층들 속에서 직접적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이 힘들의 관계는 우선 특이점들을, 또는 변용들affects로서의 특이성들을 결정한다. 여기서 규칙성으로서의 곡선은 힘의 관계를 규정하고 정렬시키면서, 계열들을 수렴시키면서, 특이점들을 잇는 “일반적인 힘의 선”을 그리면서 힘의 관계를 실행시켜나간다. 이때 언표는 ‘언표-곡선’이 언어 속에서 그려지도록 하는 특이점들, 즉 이웃 관계를 따라 놓여 진 다이어그램의 특이점들과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다. 가시성도 마찬가지이다. 즉 특이성들을 가시적이게 하는 빛의 선을 그려나가면서 수용성의 관점에서 오는 특이성들을 조직해가는 ‘그림’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 하나의 힘이 다른 힘들에 더해지거나 다른 힘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이 외부로부터인 것이다. 푸코는 “힘의 출현은 그 어떤 맞섬의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맞섬의 장소는 오로지 간격 속에서만 작동하는 그 어떤 비-장소, 그 어떤 순수 거리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결국 다이어그램은 힘의 변화에 의해 끊임없이 요동치는 이런 비-장소, 즉 변이만을 위한 장소인 것이다. 이로써 보기와 말하기가 서로에게 외적인 외성의 형식들을 이룬다면 사유하기는 더 이상 그 어떤 형식도 지니지 않는 외부에 관계한다. 이들과 달리 사유하기란 곧 비-지층화된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때 사유하기는 말하기와 보기의 간격 속에서, 그것들의 분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외부에로의 이런 호소는 사유하기는 선천적인 실천이 아니라 [사유하기를 위해서는] 사유하기가 [외부로부터] 사유에 도래해야만 한다. 또 사유하기는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을 한 곳에 모으는 내성에 의존하지 않고, 둘 사이의 간격을 파헤쳐 들어가는 외부의 난입[끼어들기]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 고전 시대에는 힘은 인간이 아닌 신을 구성하였다. 유한한 것에 비해서 무한한 것이 일차적이었으며, 사유는 무한한 것을 통해서 사유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힘은 인간을 구성하였다. 새로운 힘이 등장하고 새로운 구성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외부는 언제나 미래의 개방이다. 힘은, 힘 자신이 취해지게 되는 다이어그램과 견주어볼 때 그 어떤 잠재력을 지닌다. 그것은 제3의 권력과도 같은 것이며 바로 ‘저항’이 그것이다. 하나의 사회적 장이 그것이 전략화되는 그 이상으로 더 큰 저항을 하는 이유, 외부의 사유가 곧 저항의 사유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앎에의 의지』

 

3. 주름잡기 또는 사유의 내부(욕구)

 

*푸코는 외적인 모든 세계보다 더 먼 외부를 거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모든 세계보다 더 깊은 내부 또한 거론한다. 푸코는 이중(중복 또는 중층으로서의 이중)의 논제로 되돌아오곤 한다. 이 이중은 발생학에서 거론되는 세포 조직의 내질과도 비슷한, 외부의 어떤 주름잡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중이라는 말은 모든 의미에서 “안으로 접힌 곳”을 의미한다. (p.457)

* 고전시대에는 사유가 불가능한 것은 무한한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로는 외부를 접는 유한성의 차원을 가리킨다. 외부 접기를 통해서 어떤 “깊이”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끌어내어진 어떤 두께”를, 생명, 노동, 언어의 어떤 내부를 구성하는 유한성의 차원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 푸코에 따르면 외부의 주름잡기는 그것이 무한한 것의 주름이 되었든 유한성의 재주름이 되었든 상관없이 지층들에게 구부러짐을 부과하면서 내부를 구성한다. 외부의 안으로 잡힌 곳이 되기, 또는 『광기의 역사』가 이미 표현한 바 있는 것처럼 “바깥의 안쪽에” 있기를 성취하는 것이다.

* 힘이 외부로부터 이중의 권력을 취한다고 할 때, 힘이 외부로부터 변용시키는 권력과 변용되는 권력을 취한다고 할 때, 이중의 권력으로부터 힘이 힘 자신과 더불어 갖는 관계를 거론해야 한다. 아마도 이 관계가 곧 “저항”의 요소일 것이다.

* 자신이 자신에게 행하는 지배는 권력의 형태들인 가정, 도시국가, 웅변, 운동경기에서 행해지는 지배들에 알맞게 맞춰지도록 자기를 놔두지 않으며 추상적인 다이어그램적 기능에 의해서 포섭되도록 놔두지도 않는다. 자신과의 관계는 그것이 다른 것과의 관계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구분해낼 때만, 오로지 권력의 형태와 덕의 기능 모두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벗겨낼” 때만 전개된다.

*그리스인들에게 자신에게로의 관계가 정치, 가정, 웅변, 운동경기의 구성적인 권력에 대하여, 더 나아가 덕 자체의 구성적인 권력에 대하여 내적인 조정 원리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엔크라테이아는 결국 “다른 이들에게 행상하는 권력 속에서 행사되는 권력,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게 행사되는 권력”을 가리킨다. 힘이 다른 힘이 아닌 힘 자신에게 관계시키는 일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일 속에서 다른 이들을 다스리는 일이 반성되고 겹쳐지며 휘어진다.

**성의 측면에서 본 그리스인의 자신에게로의 관계****

 

1. 쾌락 또는 양생술과 유사한 형태에서 자신에로의 관계가 실행된다. 다른 이들을 다스리는 일을 잘할 수 있기 위하여 성적으로 자신을 다스리기이다.

2. 부인과 유지하는 보다 발전된 관계에서 자신에게로의 관계가 실행된다. 가정과 관련된 가정 관리술과 유사한 형태 아래 자신에게로의 관계가 실행되는 것이다.

3. 청소년과 유지하는 그 자체가 둘로 갈라진 관계 아래에서 자신에게로의 관계가 실행된다. 동성애나 남색과 관련된 연애술과 유사한 형태 아래에서 자신에게로의 관계가 실행되는 것이다.

 

**내부는 주름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따라서 많은 형태, 많은 양태를 취한다. 그렇다면 욕구는 내부일반이 아닐까? 욕구는 내부가 또 다른 두 심급인 외부, 지층들과 유지하는 동적인 연결이 아닐까? 외부의 주름잡기에 의해서 내부가 구성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외부와 내부 사이에는 어떤 유형학적인 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자신에게로의 관계는 외부와의 관계에 상응한 것이 되고, 내부의 모든 내용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광기의 역사』는 “바깥의 안쪽, 안쪽의 바깥”을 이야기하였다. 또 이에 대해서 『쾌락의 활용』은 이질동상異質同像을 이야기 한다. 상대적으로 외적인, 따라서 상대적으로 내적인 환경인 지층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지층화된 형성들이 절대적인 외부와 이 외부로부터 유래하는 내부를 서로 접촉시키기 때문이다.

***지층화된 형성들이 외부 위에서 내부를 펼친다. 모든 내부가 지층들의 경계 위해서 외부에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사유는 이런 의미에서 지층, 외부, 내부을 모으며, 따라서 사유는 스스로 분화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 어떤 합치에 해당한다.

*세 유형의 문제 또는 세 형태의 시간이 거론된다. 우선 지층들이 과거 속에 잠긴다고 할지라도 지층들은 결국 과거로부터 연속적인 현재를 뽑아낸다. 따라서 지층들은 그들 자체가 현재에 속한다. 하지만 외부와 관계는 그 자체가 미래이며, 변이의 기회에 따른 미래의 가능성이다. 반면에 내부는 반드시 연속적이지 않은 양태 아래에서 과거를 압축한다.

 

* 매 순간마다 과거가 자신에게로의 관계 속에서 쌓인다(긴 지속). 반면에 지층들은 변화하는 현재를 실어 나르며, 미래는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놀이를 한다(짧은 지속).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지층 속에서, 경계의 구실을 하는 현재 위에 자리 잡는 것을 말한다(짧은 지속). 하지만 사유한다는 것은 또한 내부 속에, 자신과의 관계 속에 압축된 과거를 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긴 지속).

* 푸코의 모든 작품은 역사의 지층화된 형성들 위에서 내부와 외부를 적극적으로 접촉시키는 유형학을 창조하면서 만들어진다. 새로운 어떤 것을 보게 하고 말하게 하는 층들을 생산하는 일이 지층들에 속하는 일이라면, 이미 성립된 권력을 문제 삼는 일은 외부와의 관계에 속하는 일이고, 주체화의 새로운 양태와 더불어 영감을 불어넣는 일은 자신과의 관계에 속하는 일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인사원_니체 :: 너희가 니체를 알겠지?! [1] oracle 2019.01.31 664
1385 칸트 인간학 1~2강 쪽글 [1] file 담묵(상혁) 2023.03.20 51
1384 칸트 인간학 1강 쪽글 [3] 미정 2023.03.20 83
1383 칸트 인간학 쪽글(1-2강) 진영 2023.03.19 63
1382 칸트 인간학 1강 쪽글 이쿠바 2023.03.19 36
1381 칸트 인간학 1강을 마치고 [2] 현옥 2023.03.19 71
1380 <인간학> 1강 쪽글 앨리스 2023.03.19 49
1379 칸트의 인간학 제 1강의 후기 [2] 초보(신정수) 2023.03.18 101
1378 칸트의 인간학 1강 후 쪽글 진~ 2023.03.17 82
1377 [칸트의 인간학] 1강 후기 겸 쪽글 [3] 누혜 2023.03.17 107
1376 '『말과 사물』 읽기' 2강 쪽글 file 바라 2023.03.17 43
1375 [칸트의 인간학] 1강 쪽글 네오 2023.03.16 58
1374 [푸코의 말과사물 강독] 2강 쪽글-질문 사각사각 2023.03.16 33
1373 푸코의 <말과 사물> 강독 2강 쪽글+질문 오나의고양이 2023.03.16 32
1372 푸코의 <말과 사물> 강독 2강 쪽글 동현 2023.03.16 40
1371 [사변적 우화 :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에세이 file 탁선경 2023.02.09 86
1370 <조르주 바타유:위반의 시학> 기말에세이 file 박소원 2023.02.05 64
1369 [사변적 우화 :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숲은 생각한다 – 인간적인 것 너머의 풍요의 윤리 (재겸) 재겸 2023.01.31 40
1368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늦은 에세이 file sora 2023.01.26 83
1367 [사변적 우화 :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에세이 (김재겸) [1] file 김재겸 2023.01.01 83
1366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기말 에세이 file 동현 2022.12.30 8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