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원_ 2016년1학기_ 이데올로기와 주체_ 정정훈선생님
자율성을 소환하라
-『스피노자와 정치』 중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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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율성 소환의 의의
루소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맑스의 정치의 타율성에 의해 지양된다. 맑스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타율성은 이후 유럽의 정치 사상을 지배하게 되지만,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하고 맑스주의가 위기를 맞게 되면서, 그것은 성찰의 대상이 된다. 발리바르는 타율성을 성찰하는 관점의 하나로서 자율성을 소환한다. 이 ‘소환’은 타율성에 대한 단순한 반작용적 회귀가 아니다. 루소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명시적으로 제시했을 때부터 내포하고 있었던 그러나 타율성으로의 전도 과정에서 맑스가 보지 못했던 것의 재발견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이렇게 재발견된 자율성은 타율성의 성공적 실현을 위한 조건이 되어줄 수 있기에, 발리바르의 언명에 근거하여 자율성의 개념적 요소들을 분석하는 작업은 그 의미가 있게 된다.
2. 자율성의 개념적 요소들
루소의 사회계약 사상에 따르면 입법은 인민주권의 표현으로서 내재적인 것이 된다. 주권은 통치와 분리되고, 정치는 규칙들의 집합이나 통치기술로부터 단절된다. 정치는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포함한 그 어떤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민 스스로의 입법 활동과 인민 스스로 구성한 권력에 기초한다. 이런 점에서 발리바르는 루소를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의 탁월한 대표자”(『스피노자와 정치』, 234. 이하 쪽수만 표시함)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정치의 ‘진리’와 ‘현실성’은 그것의 고유한 영역 속에 그것의 고유한 자기의식이나 활동에 존재하는 것”(234)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맑스는 루소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타자를 발견함으로써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관점을 제시”(234)하고 정치 외부의 경제 영역에서 새로운 정치의 장소를 찾는다. 그에 따르면 정치는 그 자체의 바깥에, 그 ‘외적’ 조건들과 대상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에게 정치의 과정은 그것의 타자, 곧 넓은 의미에서 경제적 모순들의 발전이었다. 물론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동일한 관점에 서더라도, 스피노자에게 타자가 ‘상상과 정서의 영역’인 것처럼, 그 ‘타자’을 무엇으로 보는지는 사상가마다 다를 수 있다.
이상 자율성과 타율성에 대한 개괄적 의미를 바탕으로 자율성 개념의 세부적 요소를 분석해 보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타율성의 긍정과 자율성의 근원성.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이 타율성의 관점 내지는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에 서더라도 정치의 타율성을 긍정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타율성에 대한 자율성의 ‘최종적’ 지위, 즉 자율성의 근원성으로서의 지위만은 분명하다. 이 점을 발리바르는 다음처럼 말한다. 자율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정치는 조건들을 가질 수 있으며, ‘정념들’과 ‘이해관계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사회적 소재와 관계할 수 있지만, 그것은 최종 분석에서는 인민과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활동 또는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자기 자신 위에 합리적으로 기초한다.”(233)
둘째, 타율성과의 공통 지반으로서의 ‘능력’적 의미의 자율성.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그 현실화의 조건으로서 인민 그 자체의 능력을 요청하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의 자율성을 인민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사회계약 사상이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 혁명으로 표현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발리바르 역시 이 점에 주목하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프랑스 혁명 및 미국 혁명과 더불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또 다른 자율성, 곧 집단적 주체로 생성하고 영속적인 ‘봉기’ 행위 속에서 인민 주권을 강제하는 ‘인민’ 그 자체의 자율성을 표현하는 경우에만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점이 분명해 진다.”(234) 이런 의미에서 맑스 역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이는 앞서 언급한 자율성과 타율성을 변증법적 관계로 보자는 주장의 근거가 되어줄 수 있다.
셋째, 타율성의 자율성을 향한 개방성. 앞의 두 가지 요소와 달리, 타율성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것은 자율성에 자신을 열어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맑스가 정치의 자율성을 규정하는 타자로서 경제를 제시했을 때, 그 말을 경제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초월적 지위, 곧 최종 심급의 지위를 갖는”(진태원의 해제, 323) 의미로 단정지을 수 없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타자가 꼭 한 가지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정치의 타율성은 두 측면에 대해 자신을 열어 놓는다. 한편으로는 ‘자율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타율성 자체 내의 서로 다른 타자들에. 바로 여기서 자율성은 타율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 될 수 있고, 나아가 자율성을 타율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장치로서의 활용할 가능성을 보게 된다.
3. 타율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로서의 자율성
발리바르는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실패하게 만든 것 ‧‧‧그것은 단지 혁명의 적들의 막강함이나 혁명 당시의 불리한 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혁명의 내적 취약함”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들의 무기력의 근본 원인들 중 하나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혁명들이 발생했던 폭력 상황의 반작용 및 도착적 효과를 이론적·실천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절대적 무능력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폭력과 시민다움』, 난장, 157) 정치의 타율성의 관점의 현실적 표현이었던 사회주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난 것은 혁명의 주체인 인민이 자본주의 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 혹은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에 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혁명의 실패에서 온 맑스주의의 위기는 어쩌면 자율성의 지평 위에서 타율성을 성찰하고, 또한 인민의 ‘권력 구성 능력’으로서의 자율성 확보 방법을 발명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 극복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로 이것이 한편으로는 타율성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성의 현실화 조건의 측면에서 자율성의 개념적 요소를 살펴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