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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의 고원」 14장 “미학적 모델”

 

 

노마드 예술(야만, 고딕, 근대 포함)은 ⅰ)원거리상과 구별되는 근거리 상, ⅱ)광학적 공간과 구별되는 촉감적 공간의 개념으로 정의해볼 수 있다. 우리는 매끈함을 근거리 상의 전형적인 대상이자 촉감적 공간의 요소로 간주한다. 반대로 홈패임은 보다 원거리에 있는 상, 광학적인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근거리 상을 갖는 촉감적이고 매끄러운 공간의 첫 번째 측면은 자신의 방향, 자신의 표지, 자신의 상호결합이 연속적으로 변이한다는 것이다. 방향은 일정하지 않아 섭생, 점유, 급함(완급?)에 따라 변한다. 거기서 표지는 서로 교환될 수 있고, 그 표지들은 외부 관찰자와 결부되어 있는데 이 관찰자가 서로 간의 촉각적인 관계를 갖는 유목민이다. 상호결합은 동일한 거리의 분할에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정렬된 차이에 따라 구성될 것이다. 방향, 표지, 상호결합이라는 문제는 유목민 예술의 가장 유명한 작품 속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단자론적인 관점’은 유목적 공간하고만 상호결합될 수 있다. ‘단자들’이 그 자체 닫힌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점차적으로 직접적인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상정한다면, 순수하게 단자론적인 관점은 불충분한 것으로 밝혀지는데 이를 ‘유목론’이 대신해야만 한다. 반대로 홈패인 공간은 원거리 상의 요구에 의해 정의된다. 방향의 일정함, 관성적인 표지의 교환에 따른 거리의 불변성, 주위 환경에서의 흡수에 의한 상호결합, 중심적 투시법의 구성으로 설명된다.

홈패임과 매끈함은 단순히 포괄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처럼 단순하게 대립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포괄적인 것이 아직도 상대적인 반면에 다른 경우에는 국지적인 것이 이미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유목민은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는 국지적 통합으로 존재하며, 방향의 결합 및 방향 변화의 무한한 계속을 통해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한다.

리글, 보링거, 말디니는 이집트 예술과 그리스 예술이 처음부터 변이의 지점에서, 이미 공간에 홈을 파는 데 봉사하는 조건에서 촉감적 공간과 조우했다. 광학적인 것은 그 홈패임을 좀 더 촘촘하게 만든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제국으로도, 민족이동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트족, 힉소스족, 힛타이트족 등의 유목민이 존재했다.

제국에 포섭되거나, 이주민들 사이에 포함되거나, 한쪽에 동화되거나, 그들 자신의 예술에 대한 ‘의지’를 부정하면서 너무 빨리 결과에 따르는 유목민적인 특수성이 있다. 그렇지만 매개지대가 자신의 절대적 특수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며, 매개물이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부인한다. 물론 그들은 그러한 역할을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직 생성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매끈한 것과 홈패인 것은 하나의 혼합된 상태로서, 촉감적인 것은 홈파는 데 복무하고, 매끄러운 성분을 다른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식으로 매끄럽게 하는 데 복무한다. 따라서 매끈함과 홈패임은 자체로 정의되어져야 한다. 촉감적인 것과 광학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간의 상대적인 구별은 거기에서 파생된다.

보링거는 추상적인 선을 예술의 출발 또는 예술적 의지의 최초의 표현으로 보면서, 그 개념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추상기계로서의 예술). 반면 우리에게 추상적인 선은 일차적으로 ‘고딕적인’ 것, 유목적인 것이지 직선적인 것이 아니다. 유목민의 선은 복수적인 방향성을 갖고, 점과 형상 및 윤곽 사이를 통과하기 때문에 매끄러운 공간의 정동이지 홈패인 공간에 호소하는 감각이 아니다.

글이 추상적인 역할을 할 때 선은 필연적으로 구상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 제국의 선은 이미 추상적 선을 변질시키고, 매끄러운 공간에서 떼어내고 구체적인 어떤 가치를 부여했다고 믿는다. 어쨌든 추상적 선은 출발선에 있기 때문에 정착민 예술의 제국적인 선과 상호작용하고, 대립할 때조차 유목민 예술의 독창성과 환원불가능성 안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추상적인 것이 직접적으로 구상적인 것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구상적인 것은 그 자체로 ‘예술의지’에 귀속되지 않는다. 구상적인 것(모방, 표상의 선)은 선이 어떤 형식을 가질 때 그 선들이 갖는 특징으로부터 생겨난 결과다.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으며, 어떤 윤곽도 그리지 않는 선은 더 이상 점에서 점으로 이행하지 않고, 점 사이를 통과하며, 수평선과 수직선에 대해 끊임없이 기울어지며, 항상적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대각선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선은 외부도 내부도 없고, 형태도 배경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이 변이하며, 연속적인 변이만큼 살아있는 선이다. 이런 선이야말로 진정 추상적인 선이며 매끄러운 공간을 그린다.

보링거는 추상적인 것은 유기적인 것을 대립시킨다. 추상적인 것은 유목적인 선으로, 비유기적이지만 생기있고, 기하학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모두와 구별된다. 또 기계론적인 관계를 직관의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추상작용에 고유한 생기있는 힘이 매끄러운 공간을 그리는 것이다. 추상적인 선은 매끄러운 공간의 정동이며, 유기적 표상작용은 홈패인 공간을 주재하는 감각이다. 촉감적/광학적, 가까운/먼의 구별은 이제 추상적인 선과 유기적 선 사이의 구별에 종속되어야 한다.

현대 예술에서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을 제한하지도 않는 가변적인 방향의 선... 어떤 식으로든 모든 예술은 추상적이며 구상적인 것은 추상의 어떤 유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어느 선이 추상적이며, 추상을 그 자체로 실현하는가가 문제된다.

홈패임과 매끈함의 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이행 내지 조합이다. 공간에서 행사되는 힘의 구속 아래, 공간은 대체 어떻게 끊임없이 홈이 패이는가? 그것은 어떻게 다른 힘을 전개하며, 홈패임을 통해 새로운 매끄러운 공간을 토해내는가? 가장 홈이 패인 도시조차 매끄러운 공간을 토해낸다. 물론 매끄러운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매끄러운 공간이 우리를 구하는데 충분한 것도 아니다.

 

 

2. 「철학이란 무엇인가」 7장 “지각, 정서, 개념”

 

 

사물 혹은 예술작품은 감각들의 집적, 말하자면 지각들과 정서들의 복합체이다. 예술작품은 하나의 감각 존재이며, 스스로 존재한다. 그것은 감각들의 구성물들이 자체적으로 스스로 보존되는 바로 그 행위만을 의미한다. 지각들로서의 감각들은 대상을 반영하는 지각작용들이 아니다. 만일 그것들이 무언가와 닮아있다면, 그것은 그들 고유의 방법들이 만들어낸 유사함이다. 예술작품에 유사함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감각이 오직 재료에만 관계되기 때문이다. 

감각은 재료 자체의 지각이며 정서이다. 감각은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재료와 동일하지 않다. 재료는 단지 사실상의 조건들만을 구축할 뿐이다. 자체적으로 보존되는 것은 지각이나 정서이고, 재표는 감각에게 짧은 지속과 함께 공존하는 영원함 속에서 존재하며, 자체적으로 보존될 능력을 부여할 것이다. 재료가 감각이나 지각 혹은 정서 속에 완벽하게 스며들지 않고서는 감각이 재료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 

예술의 목적은 재료의 방법들에 의해, 지각작용들로부터 지각을 떼어내는 것이며, 감정작용들로부터 정서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감각 구성물의 ‘다양함들’의 특징으로는 진동, 껴안음(혹은 몸과 몸의 어우러짐), 물러섬, 분할, 이완이 있다.

지각들이 자연의 비인간적인 풍경인 것처럼 정서들은 정확하게 바로 이러한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들이다. 체험된 지각작용들을 지각으로, 체험된 감정들을 정서로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스타일이 필요하다.

지각작용들, 감정들, 견해들만을 가지고 예술을 할 수 있는가? 예술가는 모름지기 체험의 지각적 상태들과 감정상의 전이들을 넘어서 있다. 그는 견자이며 생성되어가는 자이다. 문제는 언제나 삶을, 그것을 가두어 놓는 곳으로부터 해방시키거나 불확실한 투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어떻게 세계의 한 순간이 지속하도록 혹은 제 스스로 존재하도록 할 수 있는가? 각각의 원자를 충족시킬것, 쓰레기, 죽어버린 것, 잉여적인 모든 것을 제거할 것, 일상적이고 체험된 지각작용들에 묻어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지각을 부여해주는 충만함만을 간직할 것, 순간 속의 부조리, 사실들, 비열함을 포함시키되 투명하게 다듬어져야 할 것, 거기에 모든 것을 담되 더더욱 충족시킬 것.(버지니아 울프)

지각이 지각작용들을 넘어서듯이 정서는 감정들을 벗어난다. 정서란 체험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의 전이가 아니라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이다.

견해들은 체험의 기능이기 때문에 감정들에 관해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정념과 그 불멸성에 관한 한 견해들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예술가는 항상 새로운 다양성들을 세계에 덧붙인다. 개념의 존재들이 변주들이며 기능의 존재들이 변수들이듯이, 감각의 존재들은 다양성들이다.

미학적 형상들과 그것을 창조하는 스타일은 수사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감각들, 다시 말해 지각들과 정서들, 풍경들과 표정들, 비전들과 생성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적 개념을 정리하는 것도 역시 생성에 의해서가 아닌가? 그러나 감각적 생성은 무엇가, 혹은 누군가가 그 자신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생성되어가는 행위이다. 반면 개념적 생성은 공통된 사건 자체가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려는 행위이다. 후자는 어떤 절대적 형태 내에서 파악된 이질성이며, 전자는 표현의 재료와 관련된 이타성이다.

기념비란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함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시킴, 즉 거기에 실체를 부여함이다. 다시 말해 사건에다가 하나의 육체를, 삶을, 우주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주들은 잠재적이지도 현행적이지도 않다. 우주들은 가능태의 실존인 반면, 사건들은 잠재태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감각보다 개념이 원칙적으로 우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감각에 대한 개념 하나라도 그 자체의 고유한 방법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며, 또 개념이 절대 형태 내에 필연적으로 존재해 있지 않는다 해도, 감각은 가능한 자기의 우주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감각은 원초적 견해, 즉 세계의 기초 혹은 확고부동의 토대인 원적견해로 동화될 수 있는가? 현상학은 체험된 지각작용들과 감정들을 초월하는 지각적이고 정서적인 ‘질료적 선험성들’안에서 감각을 발견한다.

형상은 유산으로부터 무한으로의, 영토로부터 탈영토화로의 이행과 같다.

추상예술과 개념예술은 모든 회화가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는 한 문제를 곧바로 제기한다.

어쩌면 예술은 하나의 영토를 떼내어 집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영토, 각각의 거주지는 단시 시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자질적이기도 한 자신의 구도들 혹은 단면들을 결합시킨다.

언제나 자연이 예술인 까닭은 자연은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 어쨌든 두 개의 살아 있는 요소들을 조합시키기 때문이다. 즉, 집과 우주를,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을, 영토와 탈영토화를, 선율적 유한 구성물들과 구성의 무한 구도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아무리 연장가능하다 할지라도 원대한 구성상의 구도를 여전히 필요로 한다. 즉, 탈주선들을 따라 일종의 틀로부터의 일탈을 실행하는, 오로지 우주로 향해 열려지기 위해 영토를 가로지를 뿐인 구도이다.

구성, 바로 이 구성이 예술에 대한 유일한 정의이다. 구성은 미학이며 따라서 구성되지 않은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그렇지만, 과학을 개입시키는 재료작업으로 국한되는 기술적 구성과 감각작업인 미학적 구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미학적 구성만이 구성이란 이름에 합당한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으며, 또 예술작품이란 결코 기술에 의해, 혹은 기술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미학적 구성의 구도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구도는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다. 실제로 기술적 구도는 필연적으로 미학적 구성의 구도에 의해 감싸여지거나 흡수된다.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질료는 표현적이 된다. 즉 감각 구성물이 재료 안에서 실현되건, 재료가 감각으로 전이되건 이는 결국 엄밀한 의미로서의 미학적 구성의 구도 위에 자리하기 위한 것이다.

우주가 서로 연결되거나 분리되는 것은 바로 그 자체의 탈주선들 위에서이며, 따라서 우주가 축소할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해도 구도는 하나일 수 있다. 우주가 형상 뒤에 오는 게 아니라, 형상이 우주에 대한 소양이다. 지각과 정서들로 이루어진 구성적 감각은 자연적이고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어떤 환경 내에서의 지배적인 지각작용들과 감정들을 집결시키는 견해체계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구성된 감각은 구성의 구도상에서 재영토화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구성의 구도는 감각들을 무한한 우주를 향해 열리고 트이게 하는 일종의 틀 벗어나기를 감행함으로서 그것을 보다 높은 차원의 탈영토화로 이끈다. 즉, 무한과 등가성을 이루는 것이다. 유한을 거쳐 무한을 되찾고 복원시키는 일이야말로 예술의 고유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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