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원_ 2016년1학기_ 이데올로기와 주체_ 정정훈선생님
지속에서 저항을 보다
-『재생산에 대하여』(알튀세르) 중 제1장~제8장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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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분석에 따라 알튀세르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다”(『재생산에 대하여』, 83쪽, 이하 쪽수만 표시함)라는 주장을 편다. ‘생산’은 생산수단과 노동력, 즉 임금 노동자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때 임금에 의해 만들어지는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갈취하게 되면서 착취는 실현되고, 이로써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는 착취 관계로 전환된다.”(72)
그런데 정작 대부분의 임금노동자들은 ‘갈취당하고 있다’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임금’으로서 노동의 대가를 가치대로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자유롭게’ 체결한 노동 ‘계약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생각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어울릴 뿐 노동자들에게는 기만적이고 환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착취’ 상황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알튀세르는 ‘노동’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작동으로서 이 상황을 설명한다. “생산-착취는 또한 ‘노동’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노동자들은 이 이데올로기의 효과가 나타나는 첫 대상자들이다.”(85.)
알튀세르는 “모든 계급투쟁의 운명이 결국은 생산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달려 있다”(90)고 말한다. 또한 생산-착취 관계의 지속은 이데올로기의 작동 속에서 가능한 것이기에, 그의 맑스주의 개조 작업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 위에 놓여지게 된다.
알튀세르는 계급적 이해를 실현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장치로서, ‘학교, 가족, 종교, 정치, 조합, 정보, 출판-보급, 문화’ 등을 제시한다.(132) 이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132.11)라고 부르는데, 군대, 경찰, 법원 등의 억압적 국가장치와 구분되는 국가장치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장치’는 무언가를 지속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이는 지속을 방해하는 저항과 투쟁을 전제할 때만이 존재할 수 있는 용어이다. 무언가를 파괴할 수도 있는 ‘저항’이 예견되지 않는다면 굳이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도구적 장치를 고안하고 작동시킬 이유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역시 한편으로는 ‘생산-착취’관계의 존속이라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늘 ‘생산-착취’ 관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과 파괴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지배질서의 지속과 그에 반하는 저항, 이 두 측면은 주체화의 두 가지 방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는 장치의 ‘지속 기능’을 통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예속되는 주체화의 방향, 다른 하나는 ‘저항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과정을 통해 저항의 주체를 만드는 주체화의 방향.
알튀세르는 이렇게 ‘지속’과 ‘저항’, 주체화와 비주체화라는 상반된 문제설정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사유한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대한 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기능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것은 투쟁이 있기 때문이며, 이 투쟁은 결국 계급투쟁에 때로는 가까이서, 그러나 대개의 경우 멀리서 응답하는 직접적 혹은 간접적 반응이다.”(『재생산에 대하여』, 332)
보통 맑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규정한다고 알고 있다. 이때의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위에서 언급한 지배질서를 지속시키는 기능을 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의미가 통한다. 알튀세르는 ‘지속’의 관점과 함께 저항과 계급투쟁의 장으로서도 이데올로기를 사유하려고 시도하는데, 그렇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는 반맑스적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관점이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사상으로서, 그것을 보편적인 사상인 양 갖고 있는 피지배계급에게는 허위의식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 「서문」에서 맑스는 허위의식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를 사유하고 있다. 그는 경제적 생산 조건들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인 변혁과정과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에서 일어나는 변혁을 구분하고, 경제적 생산 조건의 변혁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및 계급적 “갈등을 의식하게 되고 이 갈등을 싸워 해결하게 되는 법적·정치적·종교적·예술적 또는 철학적 형태들”(『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중원, 7쪽)로서 이데올로기를 정의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 아니라 “싸워 해결”하는 저항 혹은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맑스는 허위의식과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두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를 사유하고 있는데, 앞서의 알튀세르와 대응시켜 본다면, 전자는 지배질서의 지속과 예속적 주체화에, 후자는 지배질서에의 저항과 비주체화에 짝이 지어질 것이다. 물론 맑스와 알튀세르 사이에 이데올로기의 의식성 여부 등 논점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는 주체화/비주체화의 논점에서만 둘의 이해를 다루는데 그칠 것이다.
위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질서의 재생산 기능과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상반된 문제설정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과 맑스 역시 두 관점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사유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적어도 주체화/비주체화의 논점 아래에서는 알튀세르가 반맑스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살펴봄으로써 ‘재생산’의 관점에만 주목함으로써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서는 저항의 주체화를 사유하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가 반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특히 필자는 알튀세르의 상반된 두 문제설정 중에서도 특히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관점이 더핵심적이라고 판단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 ‘자본주의의 본질이 생산-착취관계에 있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그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생산 관계의 해묵은 효과와 이 관계가 가져오는 모든 계급 효과를 현실적으로 폐기시키는 새로운 생산 관계를 정착시켜야 한다”(90)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