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는 숭고로서의 예술, 즉 비참여적인 예술과 수용자 참여 예술과 같은 참여로서의 예술에 대한 이분법적 자세에 대해서 사실은 이 둘의 긴장이 오늘날의 미적체제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랑시에르는 쉴러를 불러내면서, 예술은 자유로운 놀이로써 혁명에 대한 약속을 한다고 말한다. 즉, 두 흐름이 서로 각을 세울 건 아니라는 거다.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냐에서 숭고예술 vs 참여예술 식의 이분법은 곤란하다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싸움은 너무나 오래되었다. 많은 비평가들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작품을 지지면서 진영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정치와 예술을 다르게 개념화하는 방식으로 논쟁에 참여한다. 예술은 그것을 식별하는 가시성과 담론, 또한 예술을 정치의 특정한 형태와 연결시키는 감성의 분할이 없다면 예술은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특정한 체제에서만 예술이 된다고 보는 것인데, 랑시에르가 굳이 엄밀하게 구분하진 않아도 오늘날의 예술의 체제인 “미적 체제”에서 예술은 사회에서 위치지어지고 분배하는 감성의 분할을 중지시키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술이 정치적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사회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기능에 대해서 흐트러뜨리고 다시 분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배적인 감각 중추를 다시 분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예술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예술은 사회적인 기능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예술이라고 주장한 아도르노의 말이나 숭고로서의 예술이 말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증언만을 하게 된다는(랑시에르 식으로 말하자면 윤리적 해체) 것에 대한 보충 증언으로 보인다. 우리가 흔히 미술관에서 보게 되는 참여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랑시에르는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재현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정치”를 수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이미 윤리적 체제 안에서 머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랑시에르의 전략은 일견 비참여적으로 보이는 순수예술을 윤리적 타자론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해방의 정치와 연결시키는 일일 것이다. 즉, 말레르메와 말레비치를 정치적 해방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작품들은 말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언어, 형상)에 대한 전율을 표현하는 작품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감각을 분할하는 권력에 맞서 그러한 분할을 중지시키고 새롭게 분할하려는 특정에서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남는 문제는 실제로 어떤 작품들 혹은 작품의 군들이 그러한 감성의 재분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번역된 책의 랑시에르만 훑어봤을 때는, 분석적 언어로 감성의 재분할로서의 예술의 정치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