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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 [죄인/할렐루아] 우정

박소원 2022.10.23 10:48 조회 수 : 61

조르주 바타유,<죄인/할렐루아>,신용호옮김,고려대학교

 

 

 

우정

 

발제(박소원)

 

 

1.밤(21)

 

 

 

나는 자주 취할 정도로 마신다. 술을 마시고 마음에 드는 것을 먹으면 삶에 충실해진 느낌이 든다. 삶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며, 잔치이며, 축제이다. 짓누르는 꿈, 알 수 없는 꿈이지만 내가 한껏 맛보는 어떤 매력으로 인해 풍요로워진 꿈이라고나 할까. 삶은 어쩌면 운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내게 어려운 운명에 직면해 볼 것을 요구한다. 운은 이론의 여지없는 하나의 광기인즉, 그렇지 않은 운은 운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환시록>는 글을 몰랐던 성녀를 대신한, 아르노 사제가 대필한 책이다. '환시와 가르침'인 <환시록>은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말의 부족함을 격렬히 드러내는 책이라는 점, 안젤리나는 영주였던 남편과 아들 잃은 후인 37세 때에 교단에 몸을 담았다는 점, 안젤리나의 이야기는 그녀가 처음으로 죄의식을 가졌던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바타유는<죄인>,<내적 체험>에서도 수차에 걸쳐 안젤리나의 이야기를 빌리고 있다.

 

신비체험은 충만한 성취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에로티시즘과는 다르다. 에로티시즘 성향의 과도함은 심리적 침체, 역겨움으로 귀착되며 또 참고 지속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린다.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다. 윙거가 전쟁에 대해서 한 말, 잔해 속 식탁 밑에서 깨어남, 이는 단지 언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상의 문제로서 바로 전쟁과 에로티시즘 즉 공포와 황홀감 간의 본질적인 상응성을 시사한다. 잔해, 즉 폐허는 전쟁과 에로티시즘에 공통된 진실이다. 그리고 이 진실에 의한 깨어남은 취기로 몽롱해진 눈빛이 말해주는 폐허 속의 깨어남, 즉 몽롱한 의식 속의 깨어남이다. 이 깨어남은 곧 폐허 속에서의 물음이다.

 

파안대소나 애무는 개념을 낳지는 않지만 반면 대상을 조작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관념보다는 한층 진실되게"그 무엇으로 있는 것"에 이르는 길을 마련해 준다.--웃고, 사랑하고, 나아가 격한 감정을 못 이겨 울어버리거나 지적 무력함에 울어버리거나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인식 수단이다.

 

죽음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내가 있던 곳에서 나는 사랑을 찾았으나 더 이상 사랑을 찾아내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까지 이끌고 갔던 사랑마저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사랑 아닌 사랑이 되어버렸다.--"신이 나에게 보낸 형용할 수 없는 그 수많은 우정의 표시, 그리고 신의 갖가지 부드러움과 베풂, 또한 신의 말과 행위, 이 모든 것들은 광활한 어둠 속에서 내가 주시하는 그분에 비하면 왜소하기 이를 데 없다......"(폴리뇨의 안젤라,<환시록>,제26장 '크나큰 어둠')

 

바타유는 에로티시즘의 조건을 사유의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남'은 곧 나의 '사유의 출구'임을 표명한다.

 

 

 

2. 충족된 욕망(35)

 

"나는,한 아내에게서 찾고 싶으니,

 

뭇 사람들이 창녀에게서 찾아내는

 

충족된 욕망의 증표를

-(윌리엄 블레이크)

 

충만감을 만끽할 수 있는 호기가 내게 왔다는 데 행복해져 나는 글을 쓴다. 다시금,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삶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정적 속에서, 별이 빛나는 검은 하늘 앞에서, 검게 물든 언덕과 나무들 앞에서, 나는 내 마음을 재로 뒤덮인 잉걸불로, 하지만 내적으로 타오르는 잉걸불로 만들어버린 것을 되찾았다. 황홀함을 통해 스며드는 일종의 벼락의 침묵이랄까, 어떤 개념으로도 축소될 수 없는 무슨 현존에 대한 느낌이랄까. 마치 내 삶이 하늘의 먹물을 가로지르는 유유한 강물이 되어 흐르기라도 하듯, 나는 자아 밖으로 한없이 달아난다. 그럴 때면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서 빠져나온 것은 하나의 경계 없는 현존을, 나 자신의 상실과도 같은 이 현존을 꼭 껴안아 그 껴안음에 의해 이 현존에 도달하고 또 그 껴안음 속에 이 현존을 가두어버린다. 그것은 더 이상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 그러나 입술의 한계가 없어지는 깊은 애무는 바로 이러한 황홀함으로 이어진다. 하늘의 상실을 가로지르는 땅의 흐름만큼이나 이 애무는 어두우면서도 또 우주의 성질을 띠고 있다.

 

황소도 죽여 버릴 정도로 심한 혼돈 속에서, 견고한 농부의 머리같은 내 머리는 지탱해 낸다. 술기운이 내리치는 망치질은 이제는 내게 하나의 "충족된 욕망"에 대한 내면적 표시일 따름이다.

 

 

3. 천사(41)

 

 

에로티시즘은 가혹한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참담한 빈곤을 야기하고 또 완전한 탕진을 그 요구 조건으로 내세운다. 에로티시즘은 너무나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이 고행과는 연관되지 않는다. 반면 신비체험, 황홀함의 체험은 물질적 또는 도덕적 몰락을 초래하지는 않지만 또한 자기 학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황홀경이 어떠한 것인지를(불완전하게나마) 보여주는 한 이미지를 글로 옮겨본다."하늘에 한 천사가 나타난다. 밤의 두께와 어둠을 지닌 반짝이는 점 하나가. 천사는 내면의 빛처럼 아름답다. 천사는 감지할 수 없는 떨림 속에서 수정검을 치켜든다. 하지만 그 ‘수정검’은 부서져버리고."

 

이 천사는 바로"범세계의 운동"이다. 하지만 나는 이 천사를 다른 존재들과 유사한 어떤 존재처럼 사랑할 수는 없다. 이 천사는 상처 또는 균열 그 자체이다. 한 존재를 "부서져 나가는 수정"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숨겨진 상처, 숨겨진 균열 말이다. 나는 이 천사를 한 명의 천사처럼 사랑할 수도, 하나의 개별적 실체처럼 사랑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이 천사가 내게 알려주는 것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욕망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야 할 필요성을 고취시키는 내면의 움직임은 시작된다.

 

 

4. 황홀함, 그 찬란한 점(52)

 

 

나는 황홀함을 원했고 또 찾아냈다. 나는 내 운명을 사막이라 부르며 또 이 메마른 신비에 짓눌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가 닿았던 이 사막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달 가능한 것이기를 바란다. 아마 그들 역시 이 사막의 결핍을 절감하고 있을 게다.

 

나로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내가 어떤 길들을 통해 황홀함을 만끽했었던가를 말하고자 한다. 삶은 불안정, 불균형의 산물이다. 하지만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뭇 형태들의 고정성이다. 운동이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한 욕망에서 다른 욕망으로, 침체에서 흥분된 기장으로 급박하게 전개되면, 단시 폐허와 공허만이 있을 뿐이다.---균형의 파괴, 즉 '희생'은 그 대상이 균형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수록, '완성된 것'일수록 그만큼 더 그 정도가 커진다. 이러한 원칙들은 교대운동을 적대시하는, 따라서 획일적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도덕'과는 대립한다. 이러한 원칙들은 '낭만주의적 무질서의 도덕'뿐만 아니라 그와 상반된 도덕을 함께 '붕괴'시킨다.

 

'황홀함'은 두 한정어 간의 소통이다. (이 한정어들이 반드시 규정지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소통은 한정어들이 지니지 못한 효력을 지닌다. 소통은 한정어들을 소멸시킨다. --별빛이(서서히) 별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과 같이.

 

'소통'에 필수적인 것은 어떤 결점, 어떤 "갈라진 틈"이다. 소통은 죽음처럼 갑옷이 갈라진 틈을 파고든다.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개의-나의 내면에서의, 그리고 타인의 내면에서의—찢겨짐 간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서로에게 이끌린 남녀는 육욕의 향연을 통해 서로 맺어진다. 이 둘을 뒤섞는 소통은 이들의 적나라한 찢겨짐에서 비롯한다. 둘 사이의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서로 상대방에게서 상대방의 존재를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상대방의 상처를, 자신을 상실하고 싶은 욕망을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뿐인 존재가 또 다른 상처뿐인 존재에 대해 갖는 욕망, 이보다 더 큰 욕망은 없다.

 

 

가소로운 우주,ㅡ

전라의 여인,

극형,

 

 

여기에는 일종의 동일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모두는 내게 나 자신을 상실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 역시 국한된 고찰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익숙한 질서를 변화시키는 일이며, 또 궁극적으로는 균형의 여지를 없애는 일이려니...

 

인간에게 죽음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매, 인간은 공포의 먹이가 되기보다는 '공포를 목격'함으로써 '해방'된다. --나는 '찌겨짐'을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킨다. 극형 장면은 내게 심한 충격을 가했으나, 곧바로 나는 그것을 덤덤하게 대하였다. 잔인할 정도로 나는 상처를 늘여 당긴다. 그 순간, 나는 '황홀점'에 가닿는다. 연민, 고통, 황홀함은 상응한다.

 

 

5. 공범(71)

 

 

'운'은 매혹적인 술이나, '운'은 말이 없다. 기쁨이 절정에 달할 때 운을 '감지하는'자는 그만 숨이 끊긴다.

 

나의 행복한 웃음, 기쁨에 찬 나의 밤, 그리고 나의 호전적인 짓궂음, 찢긴 채 바람에 실려가는 이 구름은 어쩌면 어떤 기나긴 통곡에 불과할지도. 이 구름 속의 나는 '가닿을 수 없는<여기서 '가닿을 수 없는' 다시말해 '불가함','있을 수 없음''용납할 수 없음',어찌할 수 없음'등--바타유 전반에 걸쳐 사유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단어이다.> 나체들에 대한 욕망'에 버려진 채 얼어붙어 있다.

 

한계는 오직 한계일 뿐이다. 사전에 설정된 한계란 없다. 한계는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는 인간이 불가함에 봉착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염원 속에서 불가함에 봉착한다. 평화를 염원하는 자에게 전쟁은 불가함이요, 사랑을 염원하는 자에게 사랑은 부가함이듯이, 인간의 염원은 불가함을 창조하는 실로 진정한 힘이다. 더불어 불가함은 인간에게 (내면의)'항변'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항변'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담겨있으니, 하나는 '염원'이고 또 하나는 '애원'이다.

 

불가함의 먹이가 되라. 이는 사랑하는 존재에게 해야 할 요구 사항이다.

 

정의를 말하는 자는 곧 자신이 정의이며, 정의를 말하는 것은 곧 어떤 심판자를, 어떤 아버지를, 어떤 인도자를 추천하는 것이다. 나는 정의를 추천하지는 않는다. 나는 '공모'의 우정'을 제공한다. 축제에, 향락에, 어린애의 즐거움에 빠져든 듯한--그 악마에 홀린 듯한-기분을.

 

오로지"존엄한"존재만이 '황홀함'을 체험한다. 만일 '황홀함'이 신의 동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즉, 자기 자신의 눈에 밝혀진 자기 자신. 이러한 '밝혀짐'은 도덕적 제어 장치로는 멈추게 할 수 없는 어떤 음란함, 어떤 가혹함을 상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그냥 음란할 따름이고 그냥 가혹할 다름인 인간에게 주어지는 '행복한 우정'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채 자신 앞에 선 인간에게 법은 곧 자기 자신이다. 신 앞에 선 신비주의자는 '신하'의 자세를 취하였다. 반면, 자신 앞에 존재를 위치시키는 자는 '군주'의 자세를 취한다.

 

 

6. 완성될 수 없는 것(79)

 

어떤 결집점(헤겔의 경우)--시간의 끝에(플라톤의 경우)시간의 밖에 위치하는 결집점—에 대한 생각을 품는다는 것은 분명 정신의 요구이다. (각주: 바타유는 1940년 1월 1일 일기에, 혼돈의 세계 어느 한 구석에서 미완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신의 실체라는 이름의 완성의 표상에 역행하여, 또 철학적으로 제시된 뭇 형태의 완성에 역행하여, 여기서 바타유는 헤겔의 절대정신과 플라톤의 이데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옮긴이))정신의 요구는 실질적인 것이다.

 

세계를 주체와 대상 간의 융해처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은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융해를 통해 주체와 대상뿐만 아니라 양자 사이의 융해까지도 지속적인 변화를 거치게 될 것인즉, 결과적으로 주체와 대상 간에는 여러 형태의 동일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대상에 부응하는 ‘인식’은 사방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또 전반적 차원에서 ‘인식’은 ‘파괴와 건설’이 동시에 행해지는 건축, 겨우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있을 뿐 전체적 일관성은 결여된 어떤 거대한 건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며, 자연은 이 거울 속에 비친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

 

말일 누군가가 ‘이 공허’한 단 하나뿐인 확신을 어떤 고집스러운 권위의 주춧돌로 삼으면서 그 위에 자신을 건립하고자 한다면, 어찌 내가 “2더하기 2는 5”라는 발상보다도 이 사람을 더 비웃지 않고 배겨낼 수 있겠는가“--하지만 “모든 대상이 내 내면에서 달아나 버림에 따라” 나는, “2더하기 2는 4”에 영원한 진실이 있다고 여김으로써 사물의 비밀에 가닿고 있다고 생각했던 때 못지않게 인식의위협하에 놓인 것에 가까이 다가간다.

 

프랑스에서 ‘무당벌레’는 또 다른 친근한 이름으로 ‘연민이 신이 내린 벌레’라 불린다. 바타유의 일기는 다음의 말을 덧붙이고 있다. “‘연민의 신이 내린 벌레’라는 이름 속에는 ‘의식의 불행’이 언어에 가중시키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의식의 불행’은 다름 아닌 회의를 뜻한다. ‘불행한 의식’은 헤겔이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모순에 빠져 모순ㅇ데 시달리는 의식이다. 자신에 대한 회의, 신에 대한 회의, 역사에 대한 회의가 말하듯, 모순에 의해 양분된 의식은 항상 갈림길에 놓여 있다. 헤겔이 유대교에서 보고 있듯이, 신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부정 그 갈림길처럼 회의는 단순한 의구심의 표현이 아니다. ‘회의’는 내면의 모순에 따른 갈등을 내포한다. 즉 회의는, 상반된 것 사이에서 그 어느 쪽으로도 향하지 못한 채 양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데 빚어지는 내면의 갈등을 뜻한다. 그러기에 회의에 따른, 내면의 모순과 내면의 갈등ㄷㅇ데 따른 ‘불행한 의식’속에는 바로 인간의 한 목소리가 담겨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불행의 목소리, 즉 신음이다. 특히 지식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식적 고통 소리’이다. 바타유는 ‘신음’하지 않는다.(옮긴이) 83쪽 각주7

 

내 사유의 흐름은 철학적 불행이라기보다는 사유의—틀림없는-도산에 대한 ‘다행스런 공포’이다. 내가 ‘술’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먼지로 더렵혀지기 위함’이다.

 

로트레아몽이나 랭보 앞에서 겸허해하는 것은 불행한 의식의 새로운 형태일 뿐이다. 이 새로운 형태는 그것을 짘녀주는 충성스런 근위병들 같은 ‘가식적 지식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다음의 말을 힘껏 강조하고 또 분명히 주지시키고자 한다. 즉, 사람들이 고립 속에서 자신을 고찰하는 곳에 진실이란 없다. 진실은 대화, 함께한 웃음, 우정, 에로티시즘과 더불어 시작되며 또 그 자체가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로 옮겨감’으로써만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고립에 연연하는 존재의 모습을 싫어한다. 나는, 자신 속에 세계를 비춘다고 자처하는 ‘외톨이 인간’을 비웃는다. 그는 자신 속에 세계를 비출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곧 성찰의 중심인 까닭에 ‘중심을 갖지 않는 것’에 부응하지 못한다.

 

세계는 고립되고 폐쇄적인 그 어떤 존재와도 상이한 것으로서 바로 우리가 웃을 때 또 우리가 사랑할 때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것”과 닮은 그런 것인 듯하다. ‘이 옮겨가는 것’을 생각할 때면 ‘광막함’이 내게 열리고, 나는 그 광막함 속에서 상실된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전기 불꽃을 일으키려면 한 극이 다른 극에 필요한 것 못지않게 명상의 수련자에게는 ‘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 황홀함이 분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그 대상은 설령 점點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된다 할지라도 가슴을 찢어놓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때로는 그것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기분을 좋게 하거나 편하게 하기 때문이라 한다.

 

나는 대상으로 ‘신’을 택하기보다는 인간을 택하였다. ‘극형’에 처해져 (무릎 뼈에 칼날이 박힌 채) 온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사진에서 본 젊은 중국 죄수를, 공포와 우정의 끈은 나를 이 불행한자에게 묶었다. 그러나 내가 일치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나 혼자만의 나로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내게서 없애버렸다. 동시에 내가 택했던 대상도 광막함 속에 해체되어 고통의 폭풍 속으로 상실되어 버렸다.

 

각자의 삶을 ‘그 밖의 모든 것’과 맺어주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을 직시하는 자라면 누구나 더 이상 자기 방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귀속시키지 않는다. 그는 다채롭게 펼쳐지는 하늘의 자유로운 놀이를 향해 나아간다.

 

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물리에서 대립 체계를 이루고 있는 ‘파동’과 ‘입자’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하자. 파동 체계는 (, 공기의 진동, 파도 등)에 의한 현상들을 가리키며, 입자 체계는 원자나 분자를 가장 단순한 복합체로 하고 있는 여러 입자들—중성자, 양자, 전자—의 세계를 형성한다. 사랑과 광파光波간에, 혹은 개인적 존재들과 입자들 간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아마도 자의적이며 억지일 것이다.

 

그러나 물리가 제기하는 문제는 삶의 두 가지 모습, 하나의 종교적이거나 에로스 지향적인 모습(열림), 또 하나는 세속적이거나 물질 지향적인 모습(닫힘), 이 둘이 어떻게 대립되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랑’은 고립된 존재에 대한 너무나 철저한 부정이어서 우리는 어떤 곤충이 불사름을 추구해 스스로를 불살라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경이로운 것으로까지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지나침에 대한 보상’을 상호 소유에 대한 의지 속에서 찾아내려 한다. 이 같은 ‘보상’의 필요성은 ‘에로티시즘의 정열’을 변질시킬 뿐만 아니라 다시금 신자와 어둠 속에 현존하는 신간에 상호 귀속 관계를 설정케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확신이 나를 억눌렀으나 나는 갈수록 힘든 길을 따라갔다. 그러자 어느 동굴 입구에 이르렀다. ‘환상적인 동굴의 바위’는 나비 날개처럼 기하학적으로 배열된 노랑, 검정, 파랑의 원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이 ‘피신처’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건축의 아름다움과 기하학적 조화가 입구 못지않는 하나의 거대한 방이었다.---자신이 발산하는 달빛 같은 ‘내면의 빛’에 흠뻑 취해있는 이 석조의 인물 앞에서, 나는 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그 ‘치명적인 유쾌함’을 나도 나눠 가질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걷잡을 수 없는 절망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유이 엄습해 옴과 동시에 내가 찾아낸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힘,’ 웃을 수 있는 힘이었다. --나의 극도의 공포와 상상할 수 없는 무모함을 비웃기에 열중인 그의 동족들과도 나는 유사한 존재라는 것을. 그 순가 s’긴장’은 극에 달했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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