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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관련 텍스트 내용 및 의견 정리하고, 수업 듣고 나서도 이해되지 않는 내용은 질문으로 정리해서 올립니다. 참고로 번역어는 해러웨이, 도나 J.(2022), 『종과 종이 만날 때』, 최유미(역), 서울: 갈무리, 를 토대로 하되 영어 원문을 참고하여 일부 수정해봤습니다. () 안의 쪽수는 모두 해러웨이, 도나 J.(2022), 『종과 종이 만날 때』, 최유미(역), 서울: 갈무리, 의 쪽수입니다. 3강 쪽글도 차차 올리겠습니다.  

 

1.관계론적 존재론과 동물 윤리

해러웨이는 관계론적 존재론에 입각해 동물 윤리를 주장한다. “종간 상호의존성은 지구에서 세계를 사는 게임의 이름이고, 그 게임은 응답response과 존중respect의 하나여야만 한다.”(32)

유기체/기술, 인간/동물 등의 이분법을 비판하는 해러웨이는 ‘반려’ 개념, ‘종’ 개념, 종과 종의 관계로서의 ‘존중’의 관계 즉 ‘반려종’의 관계를 제시한다. 반려(companion)란, 라틴어 cum panis(“빵을 함께하다”)를 어원으로 한다(29). 빵/밥을 함께 먹는 동료는 식사와 관련하여 반려이고, 이러한 반려의 의미는 식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종(species)은 친척(kin)과 종류(kind) 모두를 의미한다. 종과 종의 관계는 친척으로서의 관계 즉 (마굴리스 식의 공생발생적인)생물학적 관계와 종류로서의 관계 즉 일과 놀이를 통해 묶이는 관계 두 가지 의미 모두를 함축한다(30 역주). “종은 친척kin과 종류kind를 잇는 춤에 관한 것이다.”(30) 그리고 종과 종의 관계로서의 윤리인 존중(respect)을 해러웨이는 제시한다. 종(species)의 어원인 라틴어 스페체레(specere)는 ‘보다, 응시하다’라는 의미이고, 라틴어 레스페체레(respecere)는 ‘뒤돌아보다, 다시 보다’라는 의미이고, 레스페체레(respecere)는 존중(respect)의 어원이다. 서로를 뒤돌아보고 다시 보고, 존중하며 존중받고, 관심을 주고받고, 만지고 만져지며, “종”들이 “반려”의 관계 즉 “반려종”의 관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함께 되기”의 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만남을 통해 관심과 존중으로 반려와 종을 함께 묶는다는 것은, 함께 되기의 세계, 누구who이고 무엇what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다.”(32)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이 “반려종”의 관계가 된다는 것, “함께 되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해러웨이는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와 과타리를 비판하며 그 의미를 분명히 한다. 첫째, 데리다에 대한 비판이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데리다는 구체적 존재와의 관계로 들어가지 못했으며 “함께 되기”를 실천하지 못했다. 대신, 서양 철학과 문학의 경전으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고통’을 느끼는 대문자 동물에 천착하고 이러한 동물에 대한 ‘연민’에 몰두했다(35). 데리다 옆의 바로 그 고양이와의 관계 속에서 ‘놀이’를 통한 ‘기쁨’은 간과되었다(36). 이것은 데리다가 호기심이 아닌 고양이가 벌거벗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수치심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 반면, 해러웨이가 인용한 스머츠는 구체적 존재와의 관계로 들어가며 “함께 되기”를 실천했다. 처음에 스머츠는 ‘객관적’, ‘중립적’ 연구자로서 개코 원숭이라는 연구 대상을 관찰하기에 머물렀다. 하지만 개코 원숭이와의 관계 속에 들어갔을 때, 연구 주체와 연구 대상의 관계가 허물어졌을 때, 비로소 개코 원숭이에 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39). 개코 원숭이가 인간의 기준에서 사회적 존재인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연구자가 개코 원숭이의 기준에서 사회적 존재인지를 인정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둘째, 들뢰즈와 과타리에 대한 비판이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프로이트를 비판하며 야생과 가축의 이분법에 기초해 늑대와 개를 대립시키지만, 프로이트 옆의 차우차우와 같은 구체적 존재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없었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43, 44). 반면, 해러웨이가 인용한 로웰의 양들은 ‘가축화’되었지만 야생성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49). 그리고 로웰은 22마리의 양들에게 23번째의 그릇을 놓아줌으로써 22마리의 양들 사이의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는 양이 머물 공간을 마련해준다(50, 51).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늑대와 개는 프로이트를 비판하기 위한 철학적 도구였다면, 로웰에게 양은 관계를 맺는 구체적 존재였다.

해러웨이는 결론에서 관계 맺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관계 맺을 때 비로소 관계에 대한 (설명 및 응답)책임을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분리되어 있을 때는 매듭이 없지만, 관계를 맺을 때 즉 접촉할 때, 만남이 이루어질 때, 만지고 만져질 때, 관심을 주고받을 때, 존중하고 존중받을 때, 뒤돌아보고 다시 볼 때, “함께 되기”를 할 때, 매듭이 생김으로써 연결된다. 그래야만 그 매듭에 대한 우리의 책임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 매듭에 대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를 논의할 수 있다. “나의 전제는 접촉이 설명책임accountability의 지엽을 넓히고 설명책임의 모양을 만든다는 것이다.”(52) “우리는 끝없이 계속되는 상호 응답하는 복잡성의 층들에서 서로를 형성하는 많은 종들의 매듭에 위치해 있다. 응답도, 존중도, 이런 매듭에 위치함으로써, 그리고 뒤죽박죽인 역사로 끈적끈적해진 동물과 사람이 서로를 돌아봄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59) 덧붙여, “복잡성”(59)을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60)이 필요하며, “더 많은 것”은 반려종이 놓여있는 “구체적 상황”(60)과 관련되어 있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함께 놀이를 통한 기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해러웨이의 통찰은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에서 기쁨으로의 이행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고 여기에는 동물을 저항의 주체로 바라보는 관점의 도입이 필요해 보인다. 위에서 언급했듯, 해러웨이는 데리다가 대문자 동물이 느끼는 고통에 천착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연민에 몰두했다고 지적하며, 구체적 존재와의 놀이를 통한 기쁨도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35-36). 이러한 지적은 고통받는 존재와 고통에 연민하는 존재와의 권력의 비대칭성이 존재하지만, 놀이에 참여하는 존재들 사이에는 권력의 비대칭성이 덜 존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적이다. 하지만 한국의 개 농장과 개 도살장 안의 개와 미국에서 어질리티를 하는 개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 농장과 개 도살장에서 고통받는 개는 구조되어 어질리티를 하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수나우라 테일러는 동물권 운동의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voice for the voiceless”라는 구호를 장애학의 관점에서 비판하며, 고통받는 존재로서의 동물을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동물로 새롭게 바라본다[1].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voice for the voiceless”라는 구호에서 “목소리 없는 자”는 동물이고, 목소리 없는 동물을 위해 “목소리”를 대신 내는 이는 동물의 권리를 지지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테일러가 지적하듯이, 인간의 음성 언어 중심으로만 동물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이지, 동물은 몸짓으로 자신의 언어로 이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기서 동물은 고통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이다. 그래서 동물을 고통 받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로 바라볼 때, 동물권 운동은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동물‘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함께’ 투쟁할 수 있게 되고, 그 투쟁이 개 농장과 개 도살장의 철폐라는 성과로 이어질 때, 개 농장과 개 도살장에서 고통받던 개는 어질리티를 하며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테일러가 동물권 운동의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라는 구호를 비판할 때, 동물권 운동이 이러한 구호를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동물을 수동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점, 동물권 운동가들은 동물이 의사 표현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짚어가며 비판한다.)

 

2.“살아있는 자본” 체제에서 개라는 상품의 가치 : “만남의 가치”, 재생산, 생의학적 생식 기술과 상품화에 대한 긍정

해러웨이는 “살아있는 자본” 체제 아래에서 새롭게 재/생산되는 상품(특히 개)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 식의 사용가치, 교환가치에 “만남의 가치”를 더하고 개와 인간의 다양한 관계성을 통해 설명하는데, 이러한 만남의 가치가 성립되기 위한 핵심은 재생산이라는 점을 짚으면서 동시에 이러한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생의학적 생식(재생산) 기술과 상품화를 긍정한다.

해러웨이는 마르크스 식의 사용가치, 교환가치에 “만남의 가치”를 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해러웨가 인용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를 교환가치, 사용가치로 나누었고, 이것은 곧 어떠한 관계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도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64). 그러면서 해러웨이는 “살아있는 자본(Lively Capital)”(64)의 체제에서 새롭게 재/생산되는 상품은 기존의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며, 상품의 가치로서 교환가치, 사용가치에 “만남의 가치”(64)를 추가한다(63-64). 이러한 만남의 가치는, 종과 종의 만남 즉 관계성을 의미하고 해러웨이는 인간과 개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한다.

그렇다면, 해러웨이에게 살아있는 자본의 체제에서 개라는 상품에서 종과 종의 만남의 가치 즉 인간과 개의 새로운 관계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해러웨이는 개와 인간의 상호관계가 부모와 어린이의 관계,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 소유자와 재산의 관계가 아니고(69), 주인과 노예의 관계,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의 관계도 아니라고 말한다(74). 대신, 반려견은 반려 인간과 같이 “가족”(71)을 이루며 소비하는 “소비자”(85, 87)이다(66-71). 동시에 혈통 데이터 관리 시스템과 브리딩 시스템을 통해 재생산이 통제되는 즉 기호와 육신 측면 모두에서 소비되는 “상품”(71)이다(71-72). 목양 산업에서 목양견은 가족은 아니지만 여전히 상품이면서, 임금을 받지는 않지만 가축을 지키는 노동을 하며 부가가치는 생산하는 “노동자”(74, 75)이다(74-76). 행동유전학 분야에서 개는 게놈 서열을 밝히기 위해서 DNA 샘플을 제공하는 “기술생명체biotechnology”(75)이자 “지식 생산의 매개자”(75)이다(76-77). 생의학 분야에서 인간의 혈우병 치료를 위해 혈우병 “환자”(77, 78)인 개는 혈우병 연구의 피험자가 된다(77-78). 감옥의 개 훈련 프로젝트를 통해 반려견이나 보조견/치료견으로 재사회화되기 위해 개는 감옥에 수감되는 “수감자”(83)가 되는 동시에 인간 수감자로부터 훈련받는 “학생”(83)이 된다(82-85). 기존의 방식과 다른 개에 대한 호명은 기존의 관계성과는 다른 개와 인간의 “자연사회적 관계성”(87)(“목양견”-“양치기”, “지식 생산의 매개자”-“연구자”, “피험자”-“연구보조원”, “환자”-“요양사”, “수감자”-“수감자”, “학생”-“교사” 등)을 의미하고, 이것이 해러웨이가 말하는 “살아있는 자본의 자연문화”(65)에서 새롭게 재/생산된 상품이 갖는 만남의 가치이다.

(해러웨이가 “살아있는 자본”과 “자연문화”를 함께 붙여서 사용하는 이유는, “살아있는 자본” 체제에서 새롭게 재/생산되는 개의 “기술생명체”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기존에는 유기체와 기술을 각각 자연과 문화에 이분법적으로 대응시켜 설명해왔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인용한 러셀은 유기체와 기술, 자연과 문화를 서로 교차시켜 다루는데, 이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인간에 의해 형성된 생물학적 인공물”로서의 “기술생명체(biotechnology)”이다(75). 예컨대, 황우석을 비롯한 한국의 연구자들과 미국의 연구자인 제럴드 섀튼이 생의학적 기술을 통해 복제한 복제견 스너피가 기술생명체의 한 예시이다(73). 그런데 이러한 기술생명체는 이미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유기체와 기술을 각각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적 범주에 대응시키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러셀의 유기체와 기술의 경계를 허무는 “기술생명체”라는 개념을 빌려와, “살아있는 자본”의 “자연문화”에서 재/생산되는 상품으로서의 “기술생명체”인 개를 설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덧붙여, 이러한 개념은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형상을 제시하며 유기체와 기술의 이원론을 해체하려고 했던 작업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이 해러웨이는 살아있는 자본의 자연문화와 기술생명체를 바탕으로 상품의 가치에 만남의 가치를 새롭게 추가하면서, 이와 함께 그 만남을 가능케 하는 재생산에 주목하는 동시에 그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생의학적 보조 생식(재생산) 기술과 상품화를 긍정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친척 만들기의 핵심은 재생산이다. “친척 만들기의 매력은 재생산이라는 이 약속 게임의 이름이다.”(88) 그런데 재생산은 여태까지 신체적 착취라고만 간주되었고, “살아있는 자본과 그것의 “순환하는 기술생명체들””(85)을 바탕으로 상품의 가치에 만남의 가치를 새롭게 추가한다면 재생산을 착취 이상의 무언가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85-86), 그러면서 해러웨이는 톰슨의 “재생산의 생의학적 양식biomedical mode of reproduction”이라는 개념을 인용하며, 이것이 살아있는 자본 체제에서도 핵심이라고 말한다(86). (기술과 유기체의 관계를 러셀이 논의했다면 기술과 재생산의 관계를 논의하는) 톰슨에 따르면, 생의학적 보조 생식(biomedical assistance reproduction)이라는 기술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만들기, 자식과 부모의 만들기가 성립된다. 그리고 톰슨이 보조 생식에 대한 상품화 등을 비판하지만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주장한다고 해러웨이는 요약한다. “실천의 목적이 차이를 만든다.”(86) 이를 해러웨이는 본인의 방식으로 바꿔 표현하는데, ‘살아있는 자식을 만듦으로써 살아있는 부모를 만든다는 것이 실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적절히 잘 되면, 살아있는 아기는 자신의 대상화에 만족하는 살아있는 부모를 만든다.”(87). 정리하면, 해러웨이는 살아있는 자본 체제 아래에서 생의학적 보조 생식 기술을 통해 (인간뿐만 아니라)비인간 동물의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새로운 만남 즉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자연문화적 관계성이 가능할 수 있다면, 그러한 생의학적 보조 기술을, 생의학적 보조 기술을 통한 상품화를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는 인간과 인간의 일부에 대한 상품화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분노의 응급조치를 구하는 사람들이 발견하는 종류의 이들이 아닌 것도 많이 있다. 적절히 잘 되면, 살아있는 아기는 자신의 대상화에 만족하는 살아있는 부모를 만든다.”(87) “친척-만들기의 존재가 인간만이 아닐 때, 문자 그대로의 아이들과 부모가 문제가 아닐 때, 나는 이런 일에 관심이 간다...거기다 살아있는 자본이라는 체제에서 인간과 동물을 여러 갈래의 복잡한 모습으로 묶고 있는 반려종 세계의 자연사회적 관계성의 더 많은 확산이 추구될 것이다.”(87)

 

2장에서 해러웨이의 논의 특히 재생산에 관한 논의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해러웨이는 재생산 관계와 관련된 주체의 범위를 협소하게 보고 있는 듯하다. 해러웨이는 친척 만들기의 핵심이 재생산이라고 말하면서, 재생산이 생의학적 생식 기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생산의 결과가 상품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뉘앙스로 말한다. 살아있는 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살아있는 아기를 태어나게 만듦으로써 살아있는 부모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말이다(86-87). 하지만 비인간 동물 ‘새끼’와 인간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해러웨이는 논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해러웨이는 거기에 선행하는 비인간 동물 ‘새끼’와 비인간 여성 동물의 관계, 비인간 여성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왜 논의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강아지’를 태어나도록 만들기 위해서 번식장에서 인간에 의해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만 하는 여성 개들, ‘자돈(子豚)’을 태어나도록 만들기 위해서 스톨에 옴짝달싹하지 못한 상태로 자본에 종속된 기술을 통해 인간에 의해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만 하는 여성 돼지들은 왜 논의하지 않는가? 해러웨이가 말하는 그 “만남”의 가치에, 비인간 여성 동물과의 만남이 아닌 재생산을 위해 행해지는 비인간 여성 동물을 향한 ‘폭력’도 ‘가치’로 반영되어 있는지, 반영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해러웨이는 개와 인간의 “공동형성”(83)의 관계에 집중하느라 어떠한 경우에는 재생산 문제 자체를 누락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감옥에서의 개 훈련 프로젝트를 통해 개 수형자는 반려견이든 보조견/치료견이든 간에 “시민-노동자”(84)로 거듭나고, 인간 수형자는 “자유와 자기-존중”을 경험하고 “자유를 위탁받을 수 있는 복종하는 자, 일하는 주체”로 거듭난다(85). 여기서 개에 대한 전제는 주로 노동하는 개이다(이에 대해서는 76에서 상세히 서술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하는 개에 대한 인간의 수요는 개의 공급을 수반하고, 개의 공급은 다시 개의 재생산 문제를 수반한다. 미국과 한국의 상황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개들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버려지는 문제, 동물보호소가 포화되고 개들이 ‘안락사’ 당하는 문제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의문이다. 한편, 수나우라 테일러는 보조견의 재생산 즉 번식 문제를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물 교배는 더 많은 동물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그 동물들이 보호소의 수많은 동물들에게 주어질 수도 있었을 집들을 차지하게 만듦으로써 문제를 가중시킨다. 이런 사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나는, 훈련받은 개를 거절하고 베일리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2] 재생산 문제를, 재생산 관계와 관련된 다양한 주체들과 사회 전반의 돌봄의 네트워크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3.실험실에서 인간 실험자와 동물 피험자의 관계와 윤리 : “노동” 속에서의 “비대칭적인 고통과 죽음”의 관계, 고통 나누기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기 그리고 응답능력 키우기

해러웨이는 실험과학의 현장인 실험실에서 인간 실험자와 동물 피험자의 도구적 관계 즉 “노동”(바꿔 말하면 고통 가하기와 죽이기)이 문제가 아니며 도구적 관계에서의 불평등 즉 노동 실천 속에서의 “비대칭적인 고통과 죽음”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비모방적인” 고통 나누기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기’를 바탕으로 돌봄과 구체적인 신체들과 절합이라는 실천을 제시하며 이러한 실천이 바로 응답능력을 키우는 실천 즉 책임을 다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해러웨이의 3장 논의에서 핵심은 동물실험 행위 그리고 인간 실험자와 동물 피험자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이다. 해러웨이는 인간의 동물에 대한 실험 행위를 “과학적 실천scientific practices”(91, 107, 114)이라고 명명하고, 생물학자의 의견을 인용하며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한 실험의 필요성을 긍정한다(91). 이것이 해러웨이가 동물실험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다.

그렇다면, 동물실험과 관련한 이해관계자들 즉 인간 실험자와 동물 피험자의 관계를 어떠한 성격으로 규정할지가 다음 논점이 된다. 이를 위해 해러웨이가 착안한 개념이 맑스의 “노동” 개념이다. 해러웨이는 맑스의 노동 개념이 휴머니즘의 틀 안에서 다루어졌다고 지적하며,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을 “노동자worker”(96)의 자리에 새롭게 위치시킨다. 여기서 핵심은 동물 피험자가 인간 실험자와의 관계 속에서 “노동하는 대상worked objects”일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주체working subject”로 자리매김 된다는 점이다(104). 그래서 인간 실험자와 동물 피험자의 관계는 억압의 주체와 억압의 대상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닌(93, 96), 둘 다 노동의 주체가 되는 상호관계로 거듭난다. (이러한 관계의 상호성은 2장의 “요양사”/“환자”의 관계(78), “시험대상” 인간/실험용 쥐의 관계(89)라는 서술에서 반복해서 확인된다.) 이것이 인간 실험자와 동물 피험자의 관계가 “도구적 관계”(93)이지만 “일방적인 사용 관계”(93)는 아니라고 해러웨이가 규정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 상호관계란 불평등을 내포한 관계이다. 여기서 불평등이란 고통과 죽음의 불평등이다(97).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도구적 관계에 언제나 고유한 것인 노동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비대칭적인 고통과 죽음이야말로 언제나 절박한 질문이다.”(101) 이와 같이, 해러웨이가 동물실험 행위를 과학적 실천으로 보는 관점, 노동 개념을 통한 인간 실험자와 동물 피험자의 (불평등한) 상호관계에 대한 규정을 이해해야만, 해러웨이가 고통 가하기와 죽이기 자체를 긍정하고, 그 전제 위에서 고통 없애기와 죽이지 말기가 아닌 고통 나누기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기를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이해 가능하다.

이를 바탕으로 해러웨이는 비모방적인 고통 나누기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기를 통한 응답 능력 키우기를 동물 윤리로 제시한다. 앞서 말했듯, 해러웨이는 인간과 동물의 불평등한 도구적 관계를 인정하며, 이러한 불평등이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고 따라서 인간은 죽일 수 있고 동물은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상황’에서가 아닌 “노동 실천”에 있다고 지적하며, 복수 종들의 노동 실천이 더 책임 있는 실천 즉 모든 노동자들이 덜 죽고 덜 고통을 경험하며 더 자유로워지는 실천이 될 수 있는 데에 관심을 둔다고 말한다(100-101). 그러면서 해러웨이가 제시하는 동물 윤리는 고통의 비모방적인 나누기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기이다.

첫째, 고통의 비모방적인 나누기이다. 고통의 “비모방적인 나누기nonmimetic sharing”란, 동물 피험자의 역할을 인간 실험자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실험자는 동물 피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해를 기반으로 실험자가 고통을 최소화하며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다(98, 107). 그것은 동물에 대한 돌봄을 수행하는 것이고(107-108) “존재론적인 열림”이다(110).

둘째,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기이다. 해러웨이는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기 말기’를 말하기 전에 데리다를 다시 인용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데리다가 강조하는 핵심은 동물이 말을 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닌 동물의 응답의 의미를 인간이 아는지 여부, 응답reaction과 반응response를 식별하는 방법을 인간이 아는지 여부이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이러한 식별 방법의 문제가 죽이기와 사용관계라는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103). 해러웨이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죽이기의 내부에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에 살아가는 것처럼 구는 것과 죽이면 안 되는 존재와 죽여도 되는 존재를 구분하는 것 둘 다 잘못됐다고 지적하며, “그대, 죽이지 말지어다Thou shalt not kill”는 계율을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Thou shalt not make killable”는 계율로 바꾼다(103-104). 여기서 해러웨이는 비거니즘 운동을 비판하며 죽이기 자체를 부정해서도, 희생의 논리를 비판하며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하며 대신에 인간과 동물이 노동 주체로 서로 얽힌 관계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노동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가 논의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104-105), 책임 있는 방식으로 죽이기와 죽임 당하기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106). 그것은 신체와 신체를 절합하는 방법의 문제, 신체가 “다른 신체”가 아닌 구체적인 “몇몇의 신체”와 절합하는 방법의 문제이다(115). 그 예로는, 실험실에서 실험동물, 실험노동자, 실험과학장비들의 정신과 신체의 관계들을 재배치시키는 방법이 있다(115-116). 그리고 “실천”의 변화는 “열림”을 가져오고, “열림”은 “응답”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117). 즉, 고통의 비모방적인 나누기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기 말기 모두 불평등한 도구적 관계를 회피하지 않고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고통 가하기와 죽이기의 관계에 “열림”으로 임하고 “책임”을 다하는 행위이다. 바꿔 말하면, “복잡성과 함께하기”이다(108).

 

해러웨이의 동물 윤리는 ‘죽이기 자체는 인정하고 고통을 줄이자’는 소위 동물복지론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지만, 관계론적 존재론에 입각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개체주의적 존재론에 입각한 동물 윤리와 이론적으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해러웨이의 죽이기의 인간 중심성이다. 앞서 언급했듯 해러웨이는 죽이기 자체를 부정해서도,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며 책임 있게 죽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해러웨이의 “죽이기”에는 인간의 동물에 대한 죽이기만 있고 동물의 인간에 대한 죽이기는 없다. 해러웨이는 “책임 있게 죽이기to kill responsibly”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책임 있게 죽임을 당하기to be killed responsibly”도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만(106), 책임 있게 죽임을 당하기에 대한 언급은 이후에 없다. 해러웨이가 계속 강조하는 관계의 상호성이 정말로 상호적이라면, 인간의 동물 죽이기뿐만 아니라 동물에 의한 인간 죽임당하기를 해명할 수 있어야만, 맑스의 “노동”이 휴머니즘의 틀 안에서 다뤄졌다는 해러웨이의 지적과 같이 해러웨이의 “책임 있게 죽이기”가 휴머니즘의 틀 안에서 다뤄졌다는 지적에 반박 가능하다.

둘째, 해러웨이의 고통의 비모방적인 나누기의 한계이다. 고통 나누기가 “비모방적”이라 함은, “실험 대상으로서 그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이 아닌 “실험동물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98). 인간 실험자가 그 동물 피험자가 궁극적으로는 될 수 없음에도 마치 동물 피험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러웨이의 고통 나누기는 고통 ‘체험’은 아니다. 하지만 동물 피험자의 고통을 이해한 후에, 그 전과 가해지는 고통의 정도는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인간 실험자와 동물 피험자의 관계 즉 고통 가하기와 고통 가해지기의 관계로 회귀한다는 점이 한계를 갖는다. 이것은 해러웨이가 동물실험의 필요성 자체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가진 근본적 한계이고, 그래서 샤론이 “동물들이 엄청난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아무리 돌보고 있다고 해도, 결국 동물들은 사회의 이익을 위해 당신이 가한 고통을 최종적으로 겪을 것입니다”(113)고 지적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해러웨이의 책임 있게 죽이기와 고통의 비모방적인 나누기와 다른 동물 윤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해러웨이는 J.M.쿳시의 『추락』을 인용하며, 거기서 등장하는 인물인 데이비드 루리가 수없이 버려지고 병든 동물들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밀했던 동물에게조차 수의사를 통해 “안락사”를 행하지만 이것을 “인도적인 죽음”과 같은 언사로 포장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루리의 책임 있는 죽이기를 “계산 불가능한 도덕적인 응답”이라고 규정한다(105). 죽이기의 대상을 희생의 논리에 따라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죽이기가 반드시 행해져야 하느냐는 질문으로까지 뻗어나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한편, 한국의 모 대학병원에서 고양이들을 대상으로 동물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실험동물이 처한 열악한 환경과 절차상의 하자가 있다고 추정되는 ‘안락사’ 행위가 연구원의 제보에 의해 2020년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3]. 기사에 따르면, 제보자가 제보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동물 실험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건강한 동물을 실험 종료를 이유로 굳이 죽여야 하는 점과 실험실에서 강하게 버텨왔던 고양이들이 안락사로 허무하게 죽은 것이 안타깝다.” 제보자는 죽이기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 제기했다. 죽이기의 방식이 어떠하든, 죽이기를 희생의 논리로 정당화하든 정당화하지 않든 간에 죽이기의 대상이 죽여진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제보자는 동물 실험의 필요성은 인정했는데, 동물 실험 자체의 비윤리성 때문에 동물 대체 실험에 대한 논의가 이후에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4].

 

종합하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고통에 초점을 맞춰 억압-피억압의 관계로만 환원하는 것이 아닌 기쁨에 초점을 맞춰 상호주체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해러웨이의 관점은 의의도 있지만 한계를 갖는다. Zipporah Weisberg에 따르면, 해러웨이는 “제도화된 폭력(institutionalized violence)”과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을 뒤섞는 “치명적인 윤리적, 정치적 실수(a fatal ethical and political mistake)”를 행한다고 비판하는데[5],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다. 어질리티라는 놀이에 참여하며 기쁨을 나누는 인간과 개의 관계와, 약물을 계속해서 주입하는 인간 실험자와 팔, 다리의 혈관이 헐거워질 정도로 주삿바늘을 통해 약물을 계속해서 주입당하며 고통을 겪는 동물 피험자의 관계는 그 관계성이 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해러웨이의 종(species) 개념에 함축된 종류(kind)에 따르면, 놀이뿐만 아니라 (폭력이 아닌)“노동”으로도 인간과 동물은 하나로 묶인다.) 동물을 고통받는 존재로만 재현시킴으로써 동물의 주체성을 박탈시키는 것도 문제적이만, 동물에 대한 인간의 제도화된 폭력을 인간과 동물의 (노동자) 상호주체성으로 혼동시키는 것은 동물이 처한 현실을 왜곡시키고 현실 변화의 급진성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폭력을, 노동에 기반한 상호주체성을 통해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1] 테일러, 수나우라(2020), 『짐을 끄는 짐승들』, 유리, 이마즈ㆍ장한길(역), 파주: 오월의봄.

[2] 테일러, 수나우라(2020), 『짐을 끄는 짐승들』, 유리, 이마즈ㆍ장한길(역), 파주: 오월의봄, 366쪽.

[3] 「한겨례」, 2020.04.23., "사람 위해 귀 멀고 죽어간 실험실의 고양이들", https://www.hani.co.kr/arti/animalpeople/human_animal/941720.html.

[4] 「한겨례」, 2022.01.21., "“동물대체시험 기술, 2030년까지 선진국 수준 확보”",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028279.html.

[5] Weisberg, Zipporah(2009), "The Broken Promises of Monsters: Haraway, Animals and the Humanist Legacy", Journal for Critical Animal Studies, 7(2), pp.60.

 

 

<<<질문들>>>

1장

*형상figure

1-1.해러웨이의 “형상figure” 개념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맥락에서의 형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의 맥락에서의 형상과 전혀 다른 의미인 것 같긴 한데, 그 의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2-1.해러웨이의 “형상” 개념과 물질-기호론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형상이 물질과 기호 둘 중 하나를 함축하기보다는 둘 모두를 함축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긴 한데, 이해가 분명하게 되지 않아 여쭤봅니다. “형상은, 표상도 교훈적인 예시도 아니고, 여러 갈래에 걸치는 신체들과 의미들이 서로를 형성하는 물질-기호론적인 결절점 내지는 매듭이다.”(13) “나에게 형상은 언제나 생물학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혹은 예술적인 것들과 체험된 현실의 모든 힘이 만나는 장이었다.”(13)

1-2-2.해러웨이의 “형상” 개념과 신체, 의미와의 관계도 궁금한데요. 형상은 “신체들과 의미들이 서로를 형성하는 물질-기호론적 결절점 내지는 매듭”(13)이라고 하는 반면, 형상은 “나의 신체 자체”(13)라고도 합니다. 1-2-1과 상통하는 질문이긴 한데, 형상이 신체만을 함축하는 개념인지 아니면 신체와 의미 모두를 함축하는 개념인지 궁금합니다.

 

*정보이론

-해러웨이는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역사적 세 개의 상처를 개괄한 프로이트를 인용하며, 네 번째 상처로 “정보 이론 혹은 사이보그론”을 제시하는데요(23). 사이보그론은 인간 유기체와 기계의 이원론에 대한 해체로서의 이론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정보 이론”은 여기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목적론

-1장 : 해러웨이가 유기체와 기술/기계의 이원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무릎 위에 랩톱과 랩독 둘 다를 올려놓기 위해서는”) “목적론과 인간예외주의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23), 여기서 ‘인간예외주의에 대한 배척’은 이해가 가는데 ‘목적론에 대한 배척’은 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2장 : 해러웨이는 맑스가 “휴머니즘적 목적론을 벗어날 수 없었다”(63)고 지적하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3장 : 해러웨이가 동물실험 관련하여 인간과 동물의 도구적 관계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고 반려종이 무엇이냐가 문제이고, “위, 아래, 앞, 뒤로부터의 목적론적인 용도라는 편안함은 없다”(97)고 하는데, 여기서의 “목적론적인 용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1장, 2장, 3장에서 비슷한 얘기가 반복되는 듯해서 함께 정리해서 여쭤봅니다..!

 

*친척kin

-종과 종의 관계가 “친척kin”의 관계라고 할 때, “친척kin”의 용법이 궁금한데요. 종과 종의 관계가 친척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마굴리스 식의 공생발생적인)생물학적 관계를 함축한다고 이해했는데요(30 역주). 그런데 해러웨이의 kin의 용법 중에 “Make kin, not babies!(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라는 구호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여기서의 kin은 이성애 관계와 재생산 관계로 묶이는 혈연관계가 아닌 다른 성격의 관계를 의미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전자의 생물학적 의미와 후자의 비생물학적 의미가 다르게 이해되는데, 어떠한 의미가 맞는지 혹은 문맥에 따라 각각의 의미로 다르게 이해하면 되는지 궁금합니다.

 

*“유비”적 vs “교차적”

-“유비”적으로 사는 것과 “교차적”으로 사는 것의 차이가 궁금한데요. 해러웨이가 종(species)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현재의 종 개념에는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하며, 이러한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유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교차적”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데요(31). 이에 대한 부연설명이 1장 후주22에 나와 있긴 한데, 읽어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여쭤봅니다..!

 

*자연문화

1.해러웨이의 “자연문화”의 용법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1-1.“개코원숭이와 인간을 상황 속의 역사, 다시 말해 상황 속의 자연문화-모든 행위자가 관계 맺기의 춤 속에서 행위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장, 무無로부터가 아니라 이 조우 이전과 측면 모두에서 때로는 합쳐지고 때로는 분리되는 유산들의 각종 패턴으로 넘치는 장-에 함께 위치시켜 버리는 것은 어쩌면 나의 편집광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40).

1-2.“체현된 비언어적 소통의 진실과 정직은 중요한 타자에 대한 뒤돌아보기와 인사하기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진실과 정직은 동물만이 가질 수 있는-반면에 인간은 명시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판별할 수 있다는 행복한 잘못에 의해 규정하는-꾸밈없고 환상적인 종류의 자연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진실 말하기는 협동적으로 구성되는 자연문화의 춤과, 존중하고 호혜적으로 뒤돌아보는 자에게 열리는 관심에 관한 것이다.”(41-42)

해러웨이 따르면, “자연문화”는, “모든 행위자가 관계 맺기의 춤 속에서 행위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장”, “진실 말하기”가 가능해지는 장이라고 말하는데요. 기존의 자연/문화, 비인간/인간의 이분법에 기초해 자연 속의 비인간에 대한 문화 속의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해온 논리와, 반대되는 논리 즉 자연문화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체현된 커뮤니케이션을 해러웨이가 이야기하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체현된 커뮤니케이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 물질-기호론

1.“체현된 커뮤니케이션”(스머츠),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베이트슨)에 대한 의미가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41). 비인간 동물들 사이에서든, 비인간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든, 그 커뮤니케이션이 “체현”되었고, “비언어적”이라는 것인데요.

1-1.그렇다면,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음성언어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신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건가요..?

1-2.물질-기호론적으로 표현하면, 음성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신체들(물질) 사이에 의미(기호)를 주고받는다는 의미인가요? (“파트너들은 모두 얼굴을 갖고 있지만 이름에 의지하지 않는 물질-기호론적인 춤에 그 뿌리를 둔다는 것이다”(41))

 

*길버트 vs 마굴리스 : 자기-참조적 단위, 분화 및 차이화

1-1.길버트가 ‘자기-참조적 단위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궁금한데요. 마굴리스는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자기-구축, 자기-형성, 자기-보존) 개념을 통해 자기-참조적 단위를 상정(48)하는 반면에, 길버트는 자기-참조적 단위를 상정하지 않는다(49)고 이해했는데요. 그렇다면, 길버트가 자기-참조적 단위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개체의 유지’가 아닌 ‘개체의 발생’의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건가요..? ‘개체의 발생’의 측면에서 자기-참조적 단위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이해가 되는데, ‘개체의 유지’의 측면이라면 발생한 이후에는 개체(자기-참조적 단위)는 그 개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하거든요(스피노자 식으로 하면 “코나투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1-2.길버트에게 “분화differentiation”, “차이화differentiation”의 의미가 궁금한데요. 길버트가 자기-참조적 단위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화”의 측면에서 그렇다고 말하는데요(49). 길버트에게 “차이화”라는 명사는 항상 동사이고, 마굴리스와 세이건에게 공생발생 이론과 오토포이에시스 이론이 상충하므로 “차이화”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해러웨이는 말하는데요(49). “분화”, “차이화”가 여기에서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어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설명책임 - 응답책임

-해러웨이의 설명책임accountability과 응답책임responsibility의 관계가 궁금한데요. 해러웨이의 전제는 “접촉이 설명책임accountability의 지엽을 넓히고 설명책임의 모양을 만든다는 것”(52)인데요. 접촉/만남이 설명책임의 범위를 확장하고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구체화한다고 이해했는데요. 그런데 해러웨이가 3장에서 “응답하는 능력 즉 책임responsibility”(92)도 이야기를 하는데요. 서로 연결된 개념인 것 같은데,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2장

*살아있는 자본

-해러웨이가 2장의 제목에서도 나오고 2장의 본문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데, “살아있는 자본”(Lively Capital)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기존의 “생명자본biocapital”이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의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데(64), 정확한 의미가 와닿지 않아서 여쭤봅니다.

 

*친숙한 것, 기이한 것

-해러웨이가 2장 도입부에서 “친숙한 것에는 기이한 것이 언제나 숨어 있다. 나아가, 그 기이한 것은 시장의 가치부여에 내재하는 모든 탈물질화와 대상화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다시 육신이 되는 곳이다.”라고 말하는데요. 여기에서 (해러웨이 식의 은유적 표현 같은데) “친숙한 것”, “기이한 것”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치”가 “육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거시-바이오테크놀로지 vs 미시-바이오테크놀로지

-둘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거시-바이오테크놀로지”는 “전체 유기류”에, “미시-바이오테크놀로지”는 “세포와 분자류”에 대응되는 것 같긴 한데(75),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해러웨이의 2장의 논의와 어떠한 관계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부분으로서의 개 vs 전체로서의 개

-둘의 차이도 궁금한데요. 위의 질문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전체로서의 개”가 “거시-바이오테크놀로지”와 연동되어 지식 생산 프로젝트 속에 있는 것처럼(77), “부분으로서의 개”도 지식 생산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는 얘기 같은데, “전체로서의 개”와 “부분으로서의 개”의 차이, 각각이 “거시-바이오테크놀로지”, “미시-바이오테크놀로지”와 어떠한 구체적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살아있는 아기를 만듦으로써 살아있는 부모를 만들어낸다’

-해러웨이가 생의학적 생식 기술을 통한 재생산 문제를 논의할 때, 이러한 표현을 계속 반복하는데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는 아기를 만듦으로써 부모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점이다.”(86) “적절히 잘 되면, 살아있는 아기는 자신의 대상화에 만족하는 살아있는 부모를 만든다.”(87)

 

*착취가 아닌 재생산인 것, 상품화가 아닌 것

-해러웨이는 재생산 중에는 착취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85), 상품화가 “아닌 것”도 있다고 말하는데(87), 그 “무언가”와 그 “아닌 것”에서 해러웨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걸 지칭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3장

*데리다의 식별의 문제 vs 해러웨이의 죽이기와 사용의 관계라는 딜레마

-해러웨이가 3장에서 다시 데리다를 인용하면서, 데리다에게 동물 문제에서 핵심은, 동물이 말하는지의 여부가 아닌 동물의 응답의 의미를 인간이 아는지 여부와 응답과 반응을 식별하는 방법을 인간이 아는지 여부인데, 해러웨이는 “이 식별의 문제가 죽이기와 사용의 관계라는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 위를 선회한다고 생각한다”(103)고 했는데, 해러웨이가 데리다를 정확히 어떠한 논점을 갖고 비판하는지가 궁금합니다.

 

*동물이 ‘노동의 주체’라는 의미

-해러웨이는 동물이 노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주체라고 말하는데요. “노동이라는 관용적인 말에서, 동물은 단지 작업 대상이 아니라 일하는 주체이다.”(104). 여기서 ‘노동의 주체’라는 것이 “감각적인 노동”(100) 즉 동물 피험자에게 자극을 가하면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노동의 주체라는 것인지, 아니면 “환자”로서의 동물 피험자가 “요양사”(78)로서의 인간 실험자에게 돌봄 노동을 수행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노동의 주체라는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책임 있게 죽이기 vs 책임 있게 죽임 당하기

-해러웨이가 죽이기를 부정해서도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기로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하며, “책임 있게 죽이기”를 배워야 하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106), 3장에서 전자에 대해 해러웨이는 충분히 논의하는데 후자에 대해서는 딱히 언급이 없어서 후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해러웨이의 임신중절 반대의 논리

-해러웨이가 샤론에게 답장하면서 생명우선(임신중절 반대) 정치에 대해 언급하며, 생명우선 정치에 반대하는 방식이 합리주의의 이분법을 따르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114). 해러웨이가 죽이기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임신중절에 찬성하는 논리를 어떻게 전개시켜나가는지가 궁금한데요. 관련한 해러웨이의 논의나 참고할 만한 텍스트가 있을까요..?

 

*“연구가 동물들에게 이익이 될까?”라는 물음

-해러웨이는 동물 실험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물 실험에 참여하는 노동의 주체이자 노동의 대상인 동물들을 어떻게 잘 돌볼 수 있는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데요. 그러면서 생물학자인 마크 베코프가 “연구가 동물들에게 이익이 될까?”라는 물음을 던졌다고 하면서, 이러한 물음이 특별한 힘을 갖고,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묻지 않는 것은 과학 실천의 범위 밖의 일이거나 범위 밖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114). 이런 질문을 묻지 “않는” 것이 과학 실천의 “범위 밖”이거나 그래야 한다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열림open

-해러웨이가 “열림open”이라는 개념을 반복해서 사용하는데요. 동물의 고통을 비모방적으로 나누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존재론적인 열림”(110)이라고 말하고, 실천이 변하면 “열림”이 나타나고 열림은 응답에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는데요(117). 여기서 열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림과 응답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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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7 [칸트의 인간학] 5강 쪽글 [1] 여여 2023.04.17 36
1436 칸트의 인간학 410-쪽글 [1] 한광주 2023.04.17 34
1435 [칸트의 인간학 5강] 칸트가 소설을 싫어했던 이유 [3] 해돌 2023.04.17 87
1434 두뇌의 질병들에 대한 시론 발제 (신정수) [1] file 초보(신정수) 2023.04.17 45
1433 칸트의 인간학 5강을 마치고 [1] 현옥 2023.04.16 43
1432 [칸트의 인간학] 5강 쪽글 네오 2023.04.15 27
1431 [칸트의 인간학] 3, 4, 5강 쪽글 [1] 진영 2023.04.14 31
1430 [푸코의 말과 사물] 6강 발제 file 사각사각 2023.04.14 22
1429 [푸코의 말과 사물] 6강 쪽글 file 동현 2023.04.14 21
1428 [푸코의 말과 사물] 6강 질문 현진 2023.04.14 12
1427 <인간학> 제5강 쪽글 [1] 앨리스 2023.04.13 21
1426 칸트 인간학 4강 쪽글 [1] 2023.04.10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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