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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삶

 

6장 마르티 하이데거와 시적 사유

 

 마르틴 하이데거와 현상학의 작업과 더불어, 예술로서의 삶은 단념과 개혁에서 긍정으로 그리고 경험의 개방으로 그 강조점이 변경된다.

 현상학에서 시는 그 나타남을 위한 조건을 규정하지 않으면서 체험 안에서의 느낌과 앎의 수용성을 의미화하는데  이르러 우리가 살아가고 사유하는 방식을 다시-구상해 내는 강력한 방식으로 이해된다. 예술과 사유 간의 관계는 단일한 과정, 곧 시적 사유에 합류하게 된다. 미학적 이성이 성좌적인 사유 안에서 발견되는 부정성의 윤리학과 더불어 예술의 자율성과 불화를 통합시켰던 것처럼, 시적 사유는 성찰적인 사유의 형식을 따라서 시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개방되는 공간을 병합해 내고, 윤리적이고 인식론적인 성향을 지닌다.

 

 현상학은 미래에서의 개혁이 아니라 손상되기 이전의 경험의 토대를 추구함으로써 작동된다. 그 토대를 찾아감에 있어서는 객관성을 넘어섬으로써, 세계-내-존재인 인간을 위한 더 근원적인 원천을 찾는다. 특수한 사유방식과 존재방식을 통해서, 현상학은 잃어버린 세계와의 원천적 접촉우리의 경험을 통해 변형되고 경험 안에서 우리가 거주하는 곳-‘세계’ 내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표현하려고 한다. 

 

사유

 

초기 하이데거: 복잡한 문제

 

그의 초창기 주요 저작인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를 존재 물음 내지 세계에 관한 물음을 탐구해 들어가는데 “어떤 우월성”을 갖는 “예시적 존재”로, 타자를  앞서 정의하지 않고서는 주어질 수 없거나 분석될 수 없는 존재로, 인간과 세계 간의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한다. “만일 현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도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도구적’ 존재로 ‘내다봄’이라는 말을 도입한다. 내다봄은 사물과사물의 잠재적 사용을 향한 선-반성적 방향설정을 나타내는데 유용한 일로 제시된다. “둘러보는 멀리 내다봄은 손 가까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신에, 그것은 주위세계 내에서 방향을 잡는다.” 우리의 세계는 사태가 구체적 가치와 의미의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관되는 방식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는 시적인 것을 통해 일어나야만 하고 들려져야 한다. 여기서 존재는 시적인 것을 통해서, 숨겨져 있지 않음으로, 알아 들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초래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핵심용어인 로고스와 언어로서의 인간은 탈은페로부터 존재를 해방시키는 ‘기묘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폭력의 작용과 연관된다. 

“이 힘을 통해 존재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열어주며 발견되며, 인간은 존재하는 것들 그 안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지명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시적 폭력과 사유 안에서 존재를 산출하는 현존재의 능력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다. “탈은폐는 그것이 작품을 통해 성취될 때 일어난다. 인간의 조작은 이를 통해 세계가 보여질 수 있는 수단으로 특권화되며, 연장을 통해서, 인간의 조작-흔히 폭력-이 존재가 사유와 예술 안에서 초래되는 수단이 된다. 폭력의 강압적 사용을 통해서, 인간은 존재의 강제적 드러남을 위한 유일한 자리가 된다. 하이데거의 초기 사유에서, 모든 개념적 원천은 존재를 경험하기 위해 세계에 대한 폭력적 강압을 지시한다.(230)

 

부름과 응답으로서의 사유

 

하이데거의 초기사유는 인간의 관심 및 개념화와 무관한 세계를 보존하는 데 실패한다. 1938년 작성된  <철학에의 기여>에서 인간을 명백하게 특권화하거나 인간과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모호하게 하는 일을 경계하며 회피하는 방식으로 존재 , 세계, 예술, 그리고 사유을 해명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에서 존재의 진리로 ‘던져진’ 자”이며, 이렇게 우리는 “존재의 목동”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말해질 수 있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의 초점은 [현존재의] 초월 자체를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현존재가] 존재의 진리에 속하는 방식을 파악하는 문제로서의 ‘존재자와 존재의 단순한 하나로 겹쳐짐’이라는 표현과 관련한다.

 

인간은 손을 댐, 사용, 거주함을 통해 존재라는 출처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와 세계는 더 이상 인간 조직에 독립되어 종속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존재에 ‘속한다.’ 인간은 존재에 넘겨져 있으며, 존재 인식이나 이해에 있어 (폭력적으로 능동적인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수용적인 인간이 된다.

사유는 흔히 존재의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정의된다.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면서 사유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우리의 사유가 존재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다. 이제 인간은 존재의 부름을 받는 자가 된다.

인간과 존재 모두 서로를 상호적으로 부른다. 여기서 고유한 사유방식은 오로지 기대와 응답 중 하나이다. 인간은 사유 자체라는 이름으로 사유를 ‘우리 자신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유에 자신을 내어준 선물을 통해서 사유한다. 사유를 실천하는 것은 나타나는 것에 자신을 넘겨주는 일일 수 있다. 인간은 이전에 사유했던 것과는 다른 것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성찰적 사유의 해방

 

우리는 어떻게 하이더게에게 지속적인 주제였던 존재론적 차이의 사유에 다다르게 되는가? 어떻게 해서 나타남에 “자신을 바치는가?” 어떻게 해서 책임이라는 적합한 태도를 도야하는가? 하이데거가 위의 물음을 던지는 방식은 ‘존재케함’이다. 후기 사유에서 존재케-함은 계산적 사유로부터 물러서는 “성찰적 사유”의 한 형식으로 사유초점, 인내의 이미지, 세계로의 열림을 호소하고, 세계를 주체와 구별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해주는 것이다. 사유의 과정을 보호하고 나타남을 가능성에 복종하는 윤리로서의 거주와 물러섬으로 감추어지는 거주함은 그것이 존재 부근에 머무르고 표상적 사유 자체를 의문시하는 한에서 성찰적 사유이다. 

 거주함으로서의 사유는 능동적 이미지다. 사유는 조작하거나 행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들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관리한다. 사유는 사태를 다루고 조작하고 또는 개념화한다는 의미에서의 실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태와 나타남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그것들은 스스로를 내어준다. 거주함으로서의 사유와 존재케함이 직접적으로 탈은페의 작용에서 서로 연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은폐는 내다봄과 공명하는 언어로, 하이데거의 초기 작업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것은 이제 ‘현전하게 함’으로서의 사유를 통해 확인된다. 여기서 존재는 사유를 통해 분명해지는 공간이다. 

사유에 대한 후기 하이데거의 성찰은 존재론적 차이를 희생시키지 않는 존재를 표현하려고 함에 있어 물러섬을 통해 성찰적 사유에 도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내다봄을 통해 지시되는 것이 아니라 성찰적 사유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시와 시적 사유

 

언어는 존재가 나타나는 장소/때로서의 사건에서 동시에 보존되고 열린다. 따라서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는 그 안에서 우리의 존재와의 마주함이 요약되고 열리며 보존되는 결정적 장소가 된다. 사유 안에서 우리는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언어 안에서 이 관계는 보존되고 보호된다.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최고의 예술 형태-그리고 언어의형태-인 시는 일관적으로 “현전이 탈은폐하게”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언어와 시는 존재의 나타남을 통해 존재론적 차이의 사유를 가능하게하고 나타남을 해방시키는 수단이다.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말함은 “보여줌이 지배하는” 장소다. 나타남 내지 나타나지-않음을 단순하게 받아들임에 있어, 언어는 존재가 스스로 나타나는 조건을 수립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말하는 주체와 세계 사이의 차이가 유지된다. 명명함에 있어, 시는 그 나타남을 계산하거나 정의하지 않고서 명명된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존재로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존재의 나타남을 보호한다. “......명명은 말 속으로 부른다. 부름은 부름 받은 것을 더 가까이 데려온다.....부름은 도래하도록 부른다. 따라서 부름은 이 전에 부름 받지 않은 것의 현전을 가까움 속으로 데려온다.” 명명함에 대한 하이데거의 규정적 정의는 나타나는-존재하는-것을 위한하는 나타남에 대한 초대 없이 나타나는 것을 부르거나 초대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명명함과 초대함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시다. 기술함 없이 명명함으로써, 시는 존재를 나타나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시는 보여줌, 아직 보이지 않는 봄 내지 의식으로 일어나는 능력이다.

 

사중주의 거주와 드러냄

 

후기 하이데거의 언어와 시에 대한 설명의 중차대한 성격은, 명명함의 능력이다. 시와 사유에 있어서, 세계는 그것이 나타남을 허락해주기 때문에 나타난다.

거주, 건축, 그리고 사중주에 대한 하이데거의 가장 추상적인-그러므로 논쟁을 초래하는-사유는 그의 후기 사유에 한 자리를 점하는 건축물 내부에 존재한다. “시가 먼저 거주함이 되기 위한 거주를 초래한다.... 우리를 거주하게 하는 시적 창조는 일종의 건축이다.” 이 공간은 부름과 초대함이라는 시적 작용을 통해 ‘건축되고’, 또는 준비된다. 건축과 거주는 열린 장소 가까이에 머물고 나타남을 보호하는 능력에 기인하는 시와의 유익한 개념적 유비관계를 갖는다. 또한 부름과 명명이 일어나는 것으로서의 나타남에 가까이-머묾이라는 작용으로 시적인 것을 형성한다.

이 본질적인 가까이 머무름과 은닉함이란 대지, 하늘, 인간(아마도 거주를 준비하는), 그리고 신성의 나타남을 보호하고 불러내는 거주의 능력을 나타내는 용어로, 하이데거의 애매모호한 ‘사중주라는 개념 안에서 가장 통렬하게 의미를 나타낸다.

사중주의 네 요소는 사유, 시, 그리고 거주의 논리를 견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이 없다면, 성찰적 사유와 시적 거주가 보존해야하는 존재론적 차이를 존속시킬 수 없다. 땅, 하늘, 인간, 그리고 타자들은 자유나 독립이 위반되지 않는 서로 다른 것과의 해결할 수 없는 긴장 안에 정립되어야만 한다. 사중주의 각 요소는 문자적으로 모두 다른 것(땅과 하늘, 죽을 자와 신성)에 의존해야만 한다. 시적이고 성찰적인 드러남의 본성을 통해 요구되는 것으로써, 그것들은 서로를 파괴하거나 고립시킬 수 없다. 따라서 한 요소가 다른 것에 앞서지 않는다. 그것들은 차이 나는 것으로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다.  하이데거이 초기 작업에서 세계가 적합성의 총체를 암시했던 것처럼 현존재는 적합성의 총체 안에서의 내다봄, 시적 거주를 통해 개현되는 사중주를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사중주는 인간이 빠지게 되는 곤경 속에 일어나는 관계의 상호의존적 결합이다. “땅과 하늘, 신성과 죽을 자의 단순한 단일체를 이루는 놀이를 반영하는 전유를 우리는 세계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시적 거주를 통해 존재론적 차이를 보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작업에서 사중주와 그에 연계된 은유로 초기 작업의 세계를 형식적으로 변경시켰다. 시적 거주는 그것을 통해서 존재가 고유한 타자성 안에서 초대되고 보존되는 수단 역할을 한다.

시 그리고 사유와 더불어 나타남을 보존하는 윤리적 요구의 도래는, 사중주와 책임에 대한 공통적 헌신에 의거해서 시와 사유를 연결시킴으로써 하이데거는 예술로서의 삶 안에서 시적 거주를 핵심적인 것으로 만들고, 인식적이고 시적인 본래성을 조건으로 하는 존재의 구원을 형성해낸다.

 

전유와 사건: 시적 사유를 통해 명백해진 공간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는 성찰적 사유에서 거주로 이행한다. 사중주와 세계는 시와 성찰적 사유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지 내다봄이나 시적 폭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탈-유신론적, 탈-데카르트적인 사유로, 시적 거주 내에서 나타나는데 이르는 방식을 문제로 구체화된다. 존재는 곧 도래하는 것으로 시인들의 예언자적 능력을 통해 묘사되는 어떤 것으로 환기된다. 존재는 존재가 출현으로 나타나는 것, 사유와 시 안에 머무르고 도래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인 한 사유 및 시와 연관된다. 시와 사유가 존재의 나타남을 보호하는 방식에 관한 물음을 열어줌으로써 하이데거의 시간적 은유는 중요한 핵심을 제시한다. 존재나 사중주가 나타나고 머무는 한, 은폐로의 퇴락에서, 시적 거주 및 성찰적 사유를 통해 주어진 공간에서 그것들이 일어나는 사태를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다. 

‘드러나는 일어남’처럼, 사건은 밝힘/부름/보호함 및 존재의 나타남/현시라는 동시다발적인 함께 도래함을 의미한다. 인간과 존재는 시간적이라기보다 시적인 사건을 통해 연결된 것으로 말미암아 통합된다. 인간과 존재는 그러한 사건 없이는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인정한 것처럼 사유(시와 마찬가지로)는 사건에 의존한다. 사건은 비이성적이고 공간적이거나 시간적이지 않은 장소인 공간 안에서 인간과 더불어 존재자를 통해 존재를 허용한다. 만일 표상적 의미가 사건에 주어질 수 있다면 체계적 시도를 넘어서 정립되는 의미에서 “사건은 본질적으로 타자이다.”사건은 인간과 존재가 시적 사유와 성찰적 사유 안에서 서로 드러나게 되는 우연한 발생을 의미하고 본래적인 시와 사유는 사건 바깥에서는 사유될 수 없고 오로지 사건을 통해서 사유될 수 있다. 사건은 사유와 시의 형식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사유하고 시적으로 거주하는 것은 존재의 발생을 초대하고 유지하기 위한 능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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