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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우|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 승인 2015.02.01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경제적 산업화, 그리고 1980년대 후반을 넘어 1990년대에 이르러 정치적 민주화를 법제도적으로 이루면서 이제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일상생활의 민주화’가 시대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와 맞물려 우리 일상생활의 이면에서는 폭력 범죄가 개인들 간의 대인관계 수준을 넘어 그 폭력적 또는 억압적 권력표상이 이미 우리 문화의 짜임새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유모씨 등 희대의 연쇄 살인마 등장, 청소년 떼강도 출현, 가정파괴 존속 살인,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묻지마 폭력 및 살인 행각 등 일상생활의 폭력 범죄가 사회문화적 증상으로 문제시되고 있다. 이는 폭력 범죄가 단순히 산업화와 형식적 민주화의 후과(後果)로 나타나는 경제적 빈곤이나 사회적 차별에 연유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빈곤 또는 결손 가정이 폭력 범죄의 직접적 원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빈곤하지 않은 ‘정상적’ 가정 출신자가 더 많이 범행을 저지르거나 또는 이전과 같이 가해자와 희생자와의 단순 ‘원한’에 사무친 대인관계의 범행에 그치지 않고 불특정인이 희생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폭력 범죄의 발생 원인이 너무 교묘하게 가장되어 사회문화적 층위에 스며들어 있어 마치 살인 등이 가해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동인에 의해이끌려지는 듯하다.

증오의 감성은 라캉의 ‘향락’과 맞닿아

폭력 범죄에 대한 정신분석적 접근은 폭력행위가 증오의 감성을 실행하면서 일상생활의 대인관계를 지배-종속의 권력관계로 고착화한다는 데 1차적 초점이 있다. 이러한 증오의 감성은 많은 일급살인 범죄 사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원초적 방어기제(분열, 부인, 투사적 동일시 등)를 통해 선망, 탐욕, 그리고 질투와 같은 참기 어려운 부정적 정동(affect)이 드러나면서 실행된다. 이렇게 증오의 감성은 부정적 정동을 유발하는 결여된 무언가에 대한 인지이고, 강렬한 (불)쾌와 고통의 정신역동, 즉 자크 라캉이 말하는 향락(jouissance)이며 강력한 충동적 폭력행위이다. 증오의 감성은 그 동안 우리의 일상생활에 편재하고 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감성의 사회적 발생 원인과 배경을 추적하는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이되지 못하고 무시되어 왔다. 심지어 증오의 감성은 특히 유전성의 문제로 돌려지곤 했다. 여성성을 증오하여 젊은 여자의신체 일부를 훼손하고 죽였다는 엽기적인, 그리고 어린 소녀를 강간하고 불구로 만들었다는 신문기사를 볼 때 그 ‘살인마’는 틀림없이 ‘나쁜’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추측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폭력 범죄 ‘유전자’의 발생학적 근원을 색출하고자 하는 정신생물학적 입장도 개진되고 있다.

하지만 폭력 범죄를 둘러싼 문제의 핵심은 사회학적 또는 정신생물학적 환원이 아니다. 증오의 감성이 실행되면서 선망, 질투, 탐욕 등 부정적 정동이 개인적 일상사를 넘어 사회관계 또는 문화과정으로 침윤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의례, 관습, 법률 및 문화형태들을 통해 가장된 증오의 감성을 숨기는 다양한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폭력 범죄 가해자에게 그방식은 폭력행위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증오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절호의 기회이고, 희생자에게는 증오가 제도나 문화형태 그 자체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증오, 나아가 반사회적 행위의 표현으로써 폭력 범죄를 불러오는 실재적 근원은 무엇인가?

증오로 충만한 폭력 범죄는 일차적으로 심리적 의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 하지만 폭력 범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가해자의 심리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무엇이 무엇을 일으켰는가 하는 인관연쇄만이 초점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이 폭력 범죄를 인식하는 방식은 가해자의 심리가 어디로부터 유래하든 간에 진지하게 그 심리를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심리는 ‘전범주적(pre-categorical)’이라고 할 수 있다. ‘전범주적’이라 함은 자기와 타자의 기본적 차이를 포함하여 도덕성을 가능케 하는 범주에 우선한 마음의 경험을 지시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모사(模寫)의 영역이자 외부 세계가 내부 심층으로 경험된 반영의 세계이다. 내부 세계가 외부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증오와 파괴적 충동은 필요한 여과장치도 없이 직접적으로 대상에게 지향된다. 폭력의 전범주적 심리는 주체와 대상, 안과 밖의 정상적 차이를 지워버린다. 그러므로 한순간 가해자는 역설적으로 대상이 극도로 사악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자신은 그 악이 가져올 위험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여긴다.

현대 클라인 학파의 대표적인 정신분석가, 토마스 옥덴은 주체의 가장 원초적인 존재양식으로서 ‘자폐-인접적 위치(autistic-contiguous position)’를 말한다. 서로 접촉하는 두 표면이 아니라 둘이 하나인 것, 즉 그 접촉이 하나의 현실을이루는 두 개의 표면이기 때문에 자폐-인접적인 것이다. 그는 의자에 앉아 의자도 느끼지 못하고 엉덩이에 가해지는 압력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을 거론한다. 물론 이 경우, 의자도 엉덩이도 없고 ‘인상’만 있다. 안과 밖, 그리고 장소도 없고 느낌만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자폐-인접적 경험인 것이다. 그 경험의 패러다임은 모아(母兒) 관계이다. 유아는 자신의 표면이 어디에서 끝나고 어머니의 표면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모른다. 다만 유아는 경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그 경계는 유아 자신의 경험인 동시에 타자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틀(frame)’ 없는 형태이다.

이러한 심리적 위치는 언어를 초월하는 또는 언어의 이면에 존재하는 반사회성의 영역이자 순식간에 자아가 상실되어 불안으로 퇴거하는 영역을 의미한다. 이름 하여 이것은 ‘형태 없는 불안’이고, 자폐증적 경험을 따라 발생‧유지된다. 이러한 불안은 기존의 문화적 상징체계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자 사회적 연대의 파괴이고 포용의 상실이다. 여기서 자기와 타자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사물에 대한 인식은 파편화된다.

폭력범죄는 형태 없는 불안배설행위

이러한 관점에서 폭력 범죄는 증오의 감성을 타자에게 실행하면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형태 없는 불안’을 배설하고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기도(企圖)라고 할 수 있다. 희생자는 배설된 불안과 해소된 두려움에 상징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해자는 살아있음을 또는 삶의 의미를 느끼고자 타자를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에 ‘형태 없는 불안’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서 대상을 이용하는 데 폭력행위의 근원이 존재한다. 타자를 테러하고 희생함으로써 불안을 타자에게 부과하고 그 불안에 형태를 부여한다. 타자는 불안을 형상화하는 틀임에 틀림없다. 그 형상은 가해자가 불안을 상기하지 않도록 나중에 파괴되어야 할 그림이다. 가해자는 증오의 감성을 실행하면서 타자를 파괴하거나 또는 파괴의 환상을 전개함으로써 타자에게 불안의 원(原) 상징 형태를 부여한 후,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라캉은 폭력 범죄의 발생을 모아관계에서 어머니와의 동일시 경험으로 추론함으로써 앞에서 말한 옥덴의 ‘형태 없는 불안’의 배설을 보다 구조적으로 설명한다. 모아관계에서 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여 자신을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인 ‘상상적 남근(imaginary phallus)’과 동일시한다. 어머니의 남근이 되고자, 즉 어머니의 결여를 자기가 메움으로써 어머니의 삶에 필수적으로 동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공동(void)’ 또는 ‘무(nothing)’가 된다. 이러한 분리의 거부가 바로 ‘남근적 어머니’의 절대적 힘이 투사된 자기애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를 아이가 받아들이게 되면 ‘모성적 이마고’가 등장한다. 이 모성적 이마고가 아이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게 되므로 이로부터의 분리는 심적 외상을 낳게 됨에 따라 이 외상이 절대 향락으로 치환되어 폭력 범죄라는 형태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모 씨는 어머니가 음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부인(denial)하여 남근적 어머니를 마음속에 새긴다. 그는 어머니의 거세사실을 이미 알고는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억압하지 않는다. 아버지 법의 금지를 전제하지만 이를 부인하는 것이다. 도착증적 분열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도착증자는 아버지 법의 금지와 한계, 즉 거세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유모 씨는 실제로 경찰관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가 아버지 법을 수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도착증적 주체의 태도 또는 위치는 타자의 외부나 타자를 넘어선 그 무엇을 설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스스로 대타자의 위치에 자리하고자 한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에 “나는 어머니에게 결여된 그것(상상적 남근)이다”라고 대답한다. 도착증자는 자신을 대타자에게 결여된 어떤 것으로 구성한다. 그는 스스로를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이자 원인인 오브제아(objet a)로 정초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캉은 “모든 도착증은 근본적으로 잃어버린 오브제 아를 찾으려는 페티시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a A a(오브제 아, 상상적 남근) = (도착증적 주체, 폭력 범죄 가해자)

A(타자, 절대 향락 추구 대상, 폭력 범죄 희생자)

도착증자는 상상적 대상에 향락을 고정하고 집착하며, 그 대상을 통해 향락을 얻으려고 한다. 이것은 상상적 남근의 우월성을 ‘작품화’한다고 볼 수 있는 바, 상상적 남근의 형태로 결여를 메꾸고 거세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욕망을 조직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치 유모 씨의 ‘살인의례’에서 보여주듯이, 도착증자는 대체된 남근 기표를 통해 ‘대타자의 향락’, 즉 영원하고 이상적인 완전한 쾌락 및 폭력행위 가해자와 희생자 간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절대 향락을 추구한다. 신경증자는 대타자의 향락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도착증자는 절대 향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신경증자는 도착적 환상을 가지고 그저 바라볼 뿐이지만 도착증자는 그 환상을 언어적 의사소통으로 해소하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화(acting out)’한다.

이러한 도착증적 절대 향락 추구, 즉 극단을 추구하는 폭력 범죄는 “나는 남을 죽여야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식의 자폐증적 경험의 적나라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곧 폭력행위는 융합과 연대에 적대하는 사회적 방어이다. “나는 그 날 밤에 누군가가 죽어갔다는 것을 안다. 허나 죽은 자가 나인지 그들인지는 잘 모른다”고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을 살해한) 한 정신분열병 환자가 말했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폭력행위를 동기화하는 불안은 자폐-인접적 위치를 통해 작동하는데, 그것을 임상적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불안이 증오의 감성을 실행하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사회문화적 원리와 방식이다. 즉 가해자들이 꾀하는 병리적 투사가 문화형태를 일종의 ‘인지적 고통’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조증 문화(manic culture)’의 형성을 지적할 수 있다. 사회관계는 가해자들의 병리적 투사에 의해 왜곡되고, 이에 기초한 국가 정책들이 범람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주관적인 심적 현실이며, 증오의 감성이 아로새겨진 문화형태이며 폭력행위의 사회문화적 효과이다. 도착증의 사회적 대응물로서의 조증 문화가 짜여지는 것이다.

폭력행위의 사회적 표상으로서 ‘우리(가해자들)’와 ‘그들(희생자들)’이라는 대명사의 사용은 ‘좋음’과 ‘나쁨’을 분리하는, 국민을 대리하는 전 사회적 형상에 ‘나쁨’을 못박는 조증 기제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탐욕적이고 선망의 노예이며 질투심에 가득 차 있다. ‘조증 문화’는 이러한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정신병적 인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인성들은 수없이 감추어진 형태로 지속적으로 묘사된다. 만약 문화형태가 증오로 물들여진다면, ‘조증 문화’는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 지배의 권력관계로 구조화된 문화형태에 순응하여 행동하는 가해자들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에게 가학적 ‘부모’로 기능하나, 통제되지 않는 자들을 교화하면서 희생자들을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조증 문화는 실제적 행동과 상상적 위협 모두를 포함한다. 가해자들은 마치 개인적 증오를 반영하는 거울로 국가를 비추어 대상들을 이용한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들은 과장된 ‘위기’에 대응하고자 권력을 적극적으로 환상화한다. 이러한 환상화를 통해 대상들에게 자신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투사하는 것은 제도화된 폭력행위가 나선형으로 증가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 과정은 국가의 위기관리를 두고 절정에 이르기 마련이다. 가학적 통치자와 이에 동조적인 언론매체로 조직화된 대중은 ‘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현존 권력을 환상화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적 사실은 가해자들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희생자들 또한 그 사실에 다가가게 된다. 결국 가해자들은 집단적 불안의 투사적 인격체로서 증오와 파괴적 충동으로 충만한 국가와 그 정책들의 대응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널드 위니컷이 ‘이행대상(transitional objects)’이라고 명명한 것의 정치적 기능, 즉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공유된 변형권력을 유지하여 자기와 타자의 상보성에 기여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행대상이 우리가 내적 몰두(자기애와 유아기의 전능성)로부터 벗어나 상보적 대상관계를 형성하게끔 한다고 주장한다. 이행대상이 우리의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의 가교라면, 자폐증적 경험체계에 대립하여 사회적 합의의 심리적 기초를 중시해야 하는 것이다. 지배권력의 환상을 가로질러 ‘조증 문화’를 해체‧재구성하는 것은 분열되고 양극화된 증오의 감성과부정적 정동을 포용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치료공동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는 치료의 문제가 아니라, 무의식적 권력작용이 감정과 사고에 미치는 영향의 문제이다. 일상생활을 민주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우리의 1차적 고립을 지탱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다가 상보성의 영역에서 만족을 얻는것이다. 상보성의 쾌락을 경험하고 절망을 초극하며 그리고 자율적인 존재로 타자를 간주하는 것이다. 즉 자기경험의 유독한 측면을 포용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내부 세계로부터 외부 세계로 이행하는 이러한 심리적 적응은 일상생활의 대인관계 폭력뿐만 아니라 국가의 제도화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적 정치의 개화에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폭력행위 또는 폭력 범죄를 바라는 두 가지 유형의 ‘도덕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은폭력 범죄의 가해자는 범행의 ‘무게’에 입각하여 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모씨는 악마이고 그의 범행은 고귀한 생명에 대한 파괴적 폭력행위인 셈이고, 그것은 철저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폭력행위는 인간을 악마로 만들기 때문에 인간(善)과 폭력(惡)은 어떤 형태로든 어울릴 수 없는 것이며, 나아가 폭력행위를 말하는 것조차 금기이다. 그러나 선와 악의 실체적 구분에 입각한 이러한 강박적 도덕주의는 도덕적 기초를 무너뜨리는 폭력을 논리적으로 ‘절대화’하여 오히려 문화적 불균형을 초래한다. 이러한 논지는 상식과는 달리 폭력행위의 발생 맥락과 의미작용에 대한 파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폭력 범죄에 대응하는 데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두 번째 유형은 폭력 범죄와 가해자라는 인간을 구분하여 사회적 관용을 유도하자는 것이다. 물론 폭력행위의 가해자도 우리에게 동정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도 역시 현재의 ‘미덕’ 이하로 취급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와 폭력 범죄의 구분 또는 범행 시기와 지금 현 상태의 구분은 폭력행위의 의미작용과 관련하여 진실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러한 구분은 시간을 초월하는 폭력행위와 폭력 범죄의 현존을 간과하고 있다. 가해자가 더 이상 사악하지 않고 범행을 반성한다고 해도 그의 범행은 특정한 조증적 문화형태와 연결되어 미래까지 반향될 뿐만 아니라 미래는 과거를 적절히 보상해줄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의 논리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신비화에 불과하다. 이 역시 폭력행위의 심리적 의미작용과 사회문화적 효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폭력범죄에 증오의 감성 포용해야

첫 번째 유형과 두 번째 유형이 서로 상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는 도덕적 범주로 폭력 범죄를 바라보고 폭력행위를 ‘인간됨’에 적대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범행 속의 불안과 파괴적 충동을 제거하거나 무시해야 할 것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동일한 것이다. 남을 철저히 종속시키지 않으면 자신의 자유가 상실될 것 같은 불안, 그리고 상보적으로 교제하기보다는 시기하고 빼앗으려고 하는 충동은 일정 부분 인간됨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과 충동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고, 그것들이 증오의 감성을 실행하게 만들고 그렇지 않을 경우 두려움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덕적 정언명령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폭력 범죄에 직면하여 벙어리가 되거나 그것에 매혹되지 않으려면, 폭력 범죄와 그와 결부된 불안과 충동 및 증오와 두려움에 대한 담론을 분리시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이미 구조화된 조증 문화의 ‘결’을 걷어내려고 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범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증오의 감성을 포용해야 한다. 우리가 증오를 남에게 부과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안에 포용할 수 있도록 증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남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빼앗으려고 하거나 자신의 파멸적 운명을 외재화하려는 가해자 마음속의 증오를 포용하면, 끔찍한 살인과 같은 범행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지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폭력 범죄의 가해자들과 한세상을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답변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폭력 범죄 속의 증오와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내용을 남들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폭력 범죄 속의 증오와 불안의 ‘양’을 감소시키기 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담론의 형태로 지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증오와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폭력 범죄를 줄이는 데 전부는 아니지만 이야기하기를 포기한다면 폭력행위는 실체화되어 마치 ‘신’의 모습처럼 인간됨의 속성을 벗어 버린다. 폭력행위는 그러한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폭력행위가 그 현존과 근원에서 철저하게 인간됨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우리들 자신을 통과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독이 든 선물’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폭력 범죄는 인간됨의 병리를 의미하므로 항상 우리의삶과 함께하는 것이며, 완전히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개선되거나 변형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폭력 범죄의 가해자들은 우리들 자신의 ‘과장된’ 모습에 불과하고, 폭력 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파괴적 충동의 결과가아니라 그 충동이 문화적으로 포용되지 못한 결과, 즉 병리적 문화형태라고 볼 수 있다. 유모씨가 살인마로 돌변한 것은 포용되지 못한 그의 증오로 가득 찬 파괴적 충동을 더 이상 포용할 수 없는 문화형태가 결합된 결과이다. 심지어 ‘좋음’과‘나쁨’의 병리적 투사로 구조화된 우리의 조증적 문화형태는 폭력 범죄의 희생자들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퇴행할 수도 있다. 따라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끔찍한 폭력 범죄를 줄이거나 근절할 수 있는 실제적인 변수는 문화가 개인들에게삶의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징적 자원을 얼마나 제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 라캉이 말하듯이 타자의 주체성이 외부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이 내부적으로 인정되는, 위니컷의 ‘이행 공간(파괴적 충동의 완충지대)’이 확보된 문화형태는 폭력 행위의 가해자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을 매우 일상적인 방식으로 희생시키는 도착증적 향락의 배설통로를 열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폭력 범죄의 가해자가 희생자의 몸에 투사한 파괴적 충동을 문화적 상징형태로 승화시킬 수 있는, 즉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에 직면하여 삶의 의미에 관한 ‘분석가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이 담론이우리가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자기애적으로만 동일시해왔던 지배와 종속의 권력표상과 이 표상을 심리적으로 지탱하고있는 절대 향락 추구로부터 가능한 한 충분한 거리를 확보‧유지할 수 있도록 작동하게 만드는 일상생활 정치의 수단들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글‧이만우

사회학 박사로,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일상생활과 문화형태 및 정치행위를 분석하는 글쓰기를 수행해왔으며, 현재 국회입법조사처에서 정신분석과 사회정책의 연계를 고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신병과 권력표상>, <라캉의 재탄생>(공저), 역서로는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 <아동정신분석> 등이 있다.

출처: Le Monde Diplo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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