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원자료 :: 인사원의 과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니체의 영원회귀] 8강 예습글

유택 2018.11.06 18:34 조회 수 : 87

질문1).

니체가 왜 그리스 비극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가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 번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충분히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잘...

니체의 초기 비극관과 후기 비극관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질문2).

니체의 두 선배님, 쇼펜하우어와 칸트에 대해서 모르니

그들과 대결하는 니체, 그리고 그 니체를 말하고 있는 들뢰즈의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156쪽에 쇼펜하우어가 의지철학 시작하지 못했다 하면서

의지를 사물들의 본질로, <안에서 보인 세계> 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

 

제 3장 비판      2018-11-08

 

1). 인간과학들의 변화

 

사람들이 인간과학에 몰두하게 됨에 따라 그들은 현상들의 반응적이고 부정적인 해석의 발전에 참여하게 된다. 사실이란 하나의 해석이다. 어떤 유형의 해석인가? 진리는 하나의 의지를 표현한다. 누가 진리를 원하는가? 그리고 <나는 진리를 찾고 있다>라고 말하는 자,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행동 action, 적극적인 모든 것에 대한 몰이해가 인간과학들 속에서 터져 나온다. 적극적 언어학은 말하는 자, 명명하는 자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새로운 문헌학처럼 적극적 개념들에 의해서 이해된, 참으로 적극적인 과학은 어떠할 것인가? 적극적 과학만이 현실적 활동들 뿐 아니라, 힘들 사이의 현실적 관계들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 가지 형태로 제시된다. 징후학, 그것은 현상들을 해석하고 그것들을 징후들로 다루며, 그 징후들을 낳는 힘들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유형학, 그것이 적극적이거나 반응적인 힘들의 성질의 관점에서 그 힘들 자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계보학, 그것이 힘들의 고귀함이나 저속함의 관점에서 그 힘들의 기원을 평가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권력의지 속에서 또 그 의지의 성질 속에서 그것들의 선조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수동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중단할 때, 그것은 실증주의이길 중단하고, 철학은 그 실증주의를 보상하는 활동에 대한 몽상, 즉 유토피아이길 중단한다. 철학 그 자체는 징후학적이고, 유형학적이고, 계보학적이다. 사람들은 <미래의 철학>의 니체적 삼위일체를 알아본다. 즉 의사인 철학자(징후들을 해석하는 것은 바로 의사이다), 예술가인 철학자(유형을 만드는 것은 바로 예술가이다), 입법자인 철학자(서열[위계], 계보학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입법자이다)의 삼위일체.

 

2). 니체에게서의 의문의 정식

 

형이상학은 <무엇...?>이라는 형태 아래서 본질의 의문을 정식화 한다. 어떤 점에서 <무엇...?>이라는 의문이 특별한 사유 방식을 전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플라톤으로 되돌아가 보아야만 한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정의로움이란 무엇인가?>등을 묻는다. 그는 그러한 형태의 의문에 모든 다른 형태의 의문을 대립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 플라톤에게서 본질과 외관의 대립, 존재와 생성의 대립은 우선 질문하는 방식, 의문의 형태에 의존하고 있다.

히피아스라는 소피스트는 <누가?>라는 의문이 최선의 의문이고, 본질을 결정하는데 가장 적절한 것으로 생각했다.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정의로움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혹은 누가] 아름답고 무엇이[혹은 누가] 정의로운지를 묻는 것은 원초적 본질의 입장 그리고 변증법에 대립하는 소피스트적 기술의 전부를 함축하는 완성된 방법의 결실이다. 그것은 경험적이고 복수적인 기술이다.

우리는 <누가?>라는 의문에 의해서만 본질로 인도된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은 사물과 유사한 힘들에 의해서, 힘들과 유사한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게다가, 우리가 <무엇?>이라는 의문 제기할 때, 우리는 최악의 형이상학으로 추락할 뿐 아니라, 사실 우리는 비록 서투르고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모호한 식으로라도 <누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그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이는지를 묻는 것이다. 어떤 힘, 어떤 의지인가? 그것은 비극적 의문이다. 게다가 심오하고 전적인 그 의문은 디오니소스를 향한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는 자신을 숨기고  자신을 표명하는 신이며, 디오니소스는 의욕이기 때문이다.

 

3). 니체의 방법

 

그 같은 의문의 형태로부터 하나의 방법이 파생한다. 어떤 개념, 어떤 느낌, 어떤 신념이 주어질때, 사람들은 그것들을 어떤 것을 원하는 어떤 의지의 징후들로 다룰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 <나는 진리를 추구한다>라고 말하는 자들,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 의욕하는 것은 다른 것들처럼 하나의 행동이 아니다. 의욕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 감정, 사유의 기원적인 동시에 비판적인 심급이다. 방법은 어떤 개념을 [그 의지] 없이는 그것이 사유될 수조차 없을 어떤 의지의 징후로 만들기 위해서, 그 개념을 권력의지와 비교하는 데 있다. 그 같은 방법은 비극적 의문에 상응한다. 그것 자체는 비극적 방법이다.

한 의지가 원하는 것은 어떤 대상, 어떤 목표, 어떤 목적이 아니다. 목적들과 대상들, 동기들조차 여전히 징후들이다. 자신의 성질에 따라서 한 의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거나 차이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한 의지가 원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질, 상응하는 힘들의 성질이다.

비극화의 방법은 그렇게 니체의 계획과 그가 제기하는 의문들의 형태에 적절한 단 하나의 방법, 즉 미분적이고 유형학적이며 계보학적인 방법으로 제시된다. 만약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비극화의 모든 방법은 힘들의 다른 관계를 표현하는 다른 유형들의 발견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뉘앙스들을 전환할 수 있는 권력의지의 다른 성질의 발견을 목적으로 삼는다. 니체는 <비인간적인 것과 초인간적인 것>을 말한다.

 

4). 자신의 선배들에 반대해서

 

<권력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의지가 권력이길 원한다는 것도, 어떤 목적으로서 권력을 욕망하거나 추구한다는 것도, 권력이 그것의 동기라는 것도 의미하진 않는다. <권력을 욕망한다>라는 표현은 <살길 원한다>라는 표현만큼 부조리하다. 니체는 권력의지를 그 자신이 창조해서 철학 속에 도입한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권력이 의지가 의욕했던 것이기라도 한 듯이, 그런데 그 같은 입장은 적어도 의지철학을 전체적으로 위태롭게 만드는 세 가지 오해를 함축하고 있다.

(1). 그때 사람들은 권력을 하나의 표상의 대상으로 해석한다. 표상이란 개념은 철학을 독살시킨다. 그것은 바로 노예의 산물이고, 또한 노예들의 관계의 산물이며, 권력에 대한 최악의 해석, 가장 빈약하고 가장 저속한 해석의 본질을 이룬다.

(2). 의지철학에 있어 최초의 오류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 자신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의지로 이해된 권력의지는 필연적으로 주어진 사회 내에서 현행하는 가치들(돈, 명예, 권력, 명성)을 자신에게 결부시키는 의지이다. 바로 거기에 의지철학 속에서 순응주의,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로서의 권력의지에 대한 절대적 몰이해가 징후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3). 우리는 또 기존의 가치들이 어떻게 부여되는지 질문해야만 한다. 홉스에서 헤겔까지의 권력의지는 전투에 임한다. 그 이유는 바로 전투가 현행 가치의 이득을 챙길 자들을 결정한다는 점에 있다. 투쟁, 전쟁, 경쟁의 개념, 그리고 비교의 개념조차 니체에게서, 또 의지철학의 입장에서 얼마나 낯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투쟁은 결코 힘들의 적극적인 표현이 아니고 긍정하는 권력의지의 표명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의 결과는 주인이나 강자의 승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투쟁은 약자들이 강자들을 이기는 수단이다.

 

5). 염세주의와 쇼펜하우어에 반대해서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쇼펜하우어는 새로운 의지철학을 시작하지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본질로 만족하지 못하며 그는 의지를 사물들의 본질로, <안에서 보인 세계>로 삼는다. 의지는 일반적이고 즉자적인 본질로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 것(그것의 객관화)은 표상, 일반적인 외관이 된다. 의지로서 또 표상으로서의 세계, 사람들은 여기서 칸트와 더불어 시작한 어떤 신비화의 발전을 알아본다. 의지를 세계의 본질로 삼는 쇼펜하우어는 계속해서 세계를 하나의 환상, 외관, 표상으로 이해한다.

 

6). 의지철학을 위한 원리들

 

니체에 의하면, 의지철학은 과거의 형이상학을 대체해야만 한다. 의지철학은 즐거운 소식을 만드는 두 원리를 가지고 있다 : 의욕=창조, 의지=기쁨.

권력의지는 의지가 권력을 원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지는 그것의 기원속에, 그것의 의미속에, 그것의 본질속에 어떤 인간적 형태도 함축하고 있지 않다. 권력의지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권력은 의지속에서 원하는 것이다. 권력은 의지속에서 기원적이고 미분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그래서 또 권력은 표상에 의해서 저울질되지 않는다. 그것은 해석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이며 원하는 것이다.

긍정은 왜 부정보다 더 가치로운 것인가? 우리는 해답이 영원회귀의 시련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되돌아오는 것, 되돌아옴을 견디는 것, 되돌아오길 원하는 것이 <보다 더 가치롭고> 절대적으로 가치롭다. 그런데 영원회귀의 시련은 반응적 힘들을 살아남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부정의 힘이 살아남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영원회귀는 부정적인 것을 전환한다. 분명 비판은 새로운 형태 아래서의 부정이다. 즉 파괴는 적극적이고 되고, 공격성은 긍정과 깊이 관련된다. 비판은 기쁨으로서의 파괴이고, 창조자의 공격성이다. 가치들의 창조자는 파괴자와도, 죄인과도 비판자-즉 기존의 가치들, 반응적 가치들, 저속함에 대한 비판자-와도 분리되지 않는다.

 

7). <도덕 계보학>의 구상

 

<도덕 계보학>은 니체의 가장 체계적인 저서이다. 첫번째 논고는 원한을, 두번째는 가책을, 세번째는 금욕적 이상을 다룬다.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은 반응적 힘들의 승리의 모습들이고, 또 허무주의적 형태들이다. 우리는 반응적 힘들이 어떤 허구에 의지하면서 승리함을 알고 있다. 그것들의 승리는 항상 가상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부정적인 것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적극적인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킨다.

니체가 <도덕 계보학>에서 <순수이성비판>을 다시 쓰길 원했다고 결론지어야만 한다. 영혼의 오류추리, 세계의 이율배반, 이상의 신비화. 니체는, 비판적 관념은 철학과 단지 하나일 따름이지만 칸트는 분명 그 관념에 있어 실패했고, 그가 적용뿐 아니라, 원리에서부터 그것을 위태롭게 만들고 망가뜨렸다고 생각한다. 칸트에 있어서의 비판은 비판을 할 수 있는, 실제적으로 적극적인 심급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타협 속에서 고갈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결코 인간, 자기 인식, 이성, 도덕, 종교 속에서 표현되는 반응적 힘들을 극복하도록 하지 못했다.

 

8). 원리의 관점에서의 니체와 칸트

 

칸트는 비판을 비판인 한에서 전면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는 비판을 인식 자체나 진리 자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진리에 대한 열망들에 근거함이 분명했던 어떤 힘으로, 그리고 도덕 자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열망에 근거함이 분명한 어떤 힘으로 이해했다. 그 때문에 전면적 비판은 타협책으로 돌아선다. 칸트의 비판은 정당화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그것은 자신이 비판하는 것을 믿으면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관점주의 perspectivism>이라고 명명한 것 속에서 전면적 비판의 가능한 유일 원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나 도덕적 현상은 없지만, 현상들의 도덕적 해석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식의 환상은 없지만, 인식 자체는 하나의 환상이며, 인식은 오류이고 설상가상으로 왜곡이라는 것이다.

 

9). 비판의 실현

 

기원적이고 계보학적인 원리로서, 입법적 원리로서 권력의지만이 내적 비판을 실현할 능력이 있다. 입법자인 철학자는 니체에게서 미래의 철학자로 등장한다. 입법은 가치들의 창조를 의미한다. 철학자인 한에서 철학자는 현자가 아니며, 철학자인 한에서 철학자는 복종하길 중단한다. 또 그는 명령에 의해서 낡은 지혜를 대체하며, 과거의 가치들을 부수고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한다. 그 점에서 그의 모든 학문은 입법적이다. 철학인 한에서의 입법적 철학의 관념은 비판인 한에서의 내적 비판의 관념을 완성하러 오는 바로 그 관념이다.

니체는 칸트적 관념을 다시 취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왜 칸트를 <철학의 노동자들>, 미래 철학자의 반대인, 현행 가치들의 목록을 만드는데 만족하는 자들 가운데 배치시키는가? 이성은 우리를 합리적 존재로 만드는 우월성을 표현하는 만큼이나 우리의 노예 상태, 우리의 복종을 표현한다. 실천 이성이라는 미명 아래서, <칸트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성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경우들을 위해 아주 의도적으로 하나의 이유를 만들어냈다. 다시 말하자면 바로 마음의 필요, 도덕, 의무가 말할 때이다>. 결국 입법자이자 신민인 그 유명한 칸트의 통일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가? 부활된 신학, 프로테스탄트적 취향을 가진 신학 이외의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칸트에게서 능력들의 올바른 사용이란 이상하게도 그 기존의 가치들, 즉 참된 인식, 참된 도덕, 참된 종교 등에 맞물린다.

 

10). 결론의 관점에서의 니체와 칸트

 

우리가 비판에 대한 니체적 입장과 칸트적 입장의 대립을 요약할때, 우리는 그것이 다섯 가지 점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 소위 사실들을 위한 단순한 조건인 초험적 원리들이 아니라, 믿음들, 해석들, 그리고 평가들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기원적이고 조형적인 원리들이다. (2). 자신의 이성에만 복종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입법자로 생각하는 사유가 아니라, 이성에 반대해서 사유하는 사유이다. (3). 칸트적 입법자가 아니라, 계보학자이다. 계보학자가 참된 입법자이다.  (4.) 누가 비판하는가? 비판적 관점은 무엇인가? 비판적 심급은 권력의지이며, 비판적 관점은 권력의지의 그것이다. (5). 비판의 목적은 인간이나 이성의 목적이 아니라, 결국 초인, 극복되고 추월된 인간에 있다. 비판에서는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것, 즉 다른 감성이 문제이다.

 

11). 진리의 개념

 

<진리는 항상 본질로서, 신으로서, 최상의 심급으로서 상정되었다.... 그러나 진리의지에는 어떤 비판이 필요하다 – 우리의 임무를 그렇게 정의하자 – 이번만은 진리의 가치를 검토하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니체는 개념으로서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개념이 권리상 어떤 힘들과 성질이 부여된 어떤 의지를 미리 전제하고 있는지 묻는다. 니체는 진리에 대한 허위의 열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 즉 이상으로서의 진리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진리의 개념은 어떤 세계를 참된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참된 세계는 그것이 중심으로 지시하는 참된 인간을 전제한다. – 누가 참된 인간이며,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만약 누군가 진리를 원한다면 세계인 바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세계가 아닌 바의 이름 아래서이다. 그것은, <삶은 길을 읽게 하고, 속이고, 감추고, 현혹시키고, 눈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진리를 원하는 자는 우선 이 고귀한 거짓의 힘을 비하하길 원한다. 그는 삶을 하나의 <오류>로, 그 세계를 하나의 <외관>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는 삶에 인식을 대립시키고, 세계에 또 다른 세계, 저 세상, 소위 참된 세계를 대립시킨다. 인식과 삶의 대립, 세계들의 구분은 그것들의 참된 특징을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도덕적 기원의 구분, 도덕적 기원의 대립이다. 속이기를 원하지 않는 인간은 최선의 세계와 최선의 삶을 원한다. 그래서 속이지 않으려는 그의 모든 이유는 도덕적 이유이다. 다른 세계, 다른 삶을 원하는 자는 보다 더 심오한 어떤 것을 원한다. 바로 <삶에 반대하는 삶>을. 도덕적 대립 뒤에 그처럼 어떤 다른 종류의 모순, 즉 종교적이거나 금욕적인 모순의 윤곽이 드러난다.

금욕적 이상의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 삶을 부인하는 자는 여전히 축소된 삶, 퇴화하고 축소된 자신의 삶, 자기 유형의 보존,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자기 유형의 권력과 승리, 반응적 힘들의 승리와 그것들의 전염을 원하는 자이다.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은 금욕적 이상을 구성하는 두 요소이다. 그러므로 해석은 인식, 도덕, 종교의 세 층을 뚫고 지나가면서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로써 참됨, 선함, 신성함을 발견한다.

 

12). 인식, 도덕, 종교

 

우리는 진리의 개념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해서 진리에서 금욕적 이상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도덕이 독단인 종교를 대신했고, 과학이 도덕을 점점 더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종교는 순응된 형태를 생존시키고 수용하기 위해서 자주 자유로운 사유자를 필요로 한다. 도덕은 종교의 연속화이지만 다른 수단에 의해서이다. 또 인식은 도덕과 종교의 연속화이지만 다른 수단에 의해서이다. 도처에 금욕적 이상이 있지만, 수단은 바뀌고, 그것들은 더이상 동일한 반응적 힘들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나 자발적으로 다양한 반응적 힘들 사이의 결산과 비판을 혼동한다.

진리의지는 여전히 금욕적 이상에 속하고 그 방식은 항상 기독교적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다른 것, 즉 이상의 변화, 다른 이상, <다르게 느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현대 세계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진리 자체는 비판될 수도 있고 신의 권리에 속하지도 않으며, 비판은 진리 자체의 비판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이상을, 다른 인식 방식을, 다른 진리 개념을, 다시 말하자면 진리의지 속에 전제되어 있지 않지만 완전히 다른 의지를 가정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원한다.

 

13). 사유와 삶

 

니체는 인식이 삶에 대립하고, 삶을 가늠하고 심판하며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길 열망한다고 비난한다. 인식은 삶에 대립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이 삶에 반대하는 삶, 인식 자체 속에서 그것의 유형을 보전하고 승리하게 만들 수단을 발견하는 반응적 삶을 표현한다는 점에 있다.

인식이 자신을 입법자로 만들 때,. 바로 사유는 진정한 복종자이다. 인식은 사유 자체이지만, 이성 속에서 표현된 모든 것으로서의 이성에 복종하는 사유이다. 그러므로 인식의 충동은 사유이지만, 그것을 독점하거나 정복하는 반응적 힘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유이다. 삶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갈 사유, 삶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데리고 갈 사유. 삶에 대립하는 인식 대신에 삶을 긍정할 사유. 삶은 사유의 적극적 힘일 것이지만, 사유는 삶의 긍정하는 능력일 것이다. 사유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인식이 그것에게 규정한 한계들을 넘어서지만, 사유는 삶이 그것에게 규정한 한계들을 넘어선다. 사유는 셈ratio 이길 중단하고 삶은 반작용이길 중단한다. 사유자는 사유와 삶의 멋진 관련성을 <사유를 적극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삶, 삶을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사유>로 표현한다. 니체에게서 그 일반적 관련성은 특히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의 비밀로 나타날 뿐 아니라, 예술의 본질로 나타난다.

 

14). 예술

 

예술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비극관이다. 예술은 <사심 없는> 활동과도 반대이다. 예술은 <권력의지와 자극제>, <의욕의 흥분제>이다. 그것은 예술의 모든 반응적 입장을 고발한다. 니체는 창조의 미학, 피그말리온의 미학을 요구한다.

예술은 거짓의 가장 고귀한 힘이며, 그것은 <오류인 한에서의 세계>를 확대하고, 거짓말을 신성화하고, 속이려는 의지를 우월한 이상으로 만든다. 거짓의 힘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선택되거나, 중복되거나, 반복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보다 높은 어떤 힘으로 고양되어야만 한다. 거짓의 힘은 속이는 어떤 의지에까지 도달해야만 한다. 그 의지는 바로 유일하게 금욕적 이상과 경쟁하고 그 이상과 성공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예술가의 의지이다. 예술가에게 있어 외관 Apparence 은 더 이상 이 세계 속에서의 현실적인 것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선택, 수정, 증가, 긍정을 의미한다. 그때 진리는 아마도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진리는 외관이다. 진리는 힘의 실현, 가장 고귀한 힘으로의 상승을 의미한다. 니체 저작 속에서, 우리 예술가들=우리 인식이나 진리의 추구자들=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고안해 내는 자들이라는 등식을 발견한다.

 

15).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 속에서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진리가 거기서 추상적 보편자로 이해되고 있는 방식이다. 진리이기 이전에 의미의 실현이나 가치의 실현이 아닌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의미와 우리가 믿는 것의 가치와 관련해서 진리들을 소유한다. 추상적 보편자로 이해된 진리, 순수과학으로 이해된 사유는 누구에게도 결코 폐가 되지 않았다라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기존 질서와 현행 가치들이 거기서 지속적으로 그들의 최선의 지원을 발견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는 진리가 사유의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사유의 요소는 의미와 가치이다. 사유의 범주들은 참과 거짓이 아니라 사유 자체를 독점하고 있는 힘들의 본성에 의한 우아함과 비루함, 고귀함과 저속함이다. 우리의 보다 고귀한 사유들은 거짓을 고려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거짓을 고귀한 힘으로, 예술 작품 속에서 그것의 실현, 그것의 검증, 그것의 참-생성을 발견하는 긍정적이고 예술적인 힘으로 만드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진리 개념은 단지 복수적 유형학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리고 유형학은 위상학으로 시작한다. 그런 오류, 저런 진리는 어떤 영역에 속하며, 그것들의 유형은 무엇이고, 누가 그것들을 정식화하고, 그것들을 구상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진리를 저속함의 시련을 겪게 하고, 거짓을 고귀함의 시련을 겪게 하는 것은 정말로 비판적인 임무이며, <진리> 속에서 재인식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비판으로서의 철학은 우리에게 그 자체로 가장 적극적인 것, 즉 탈신비화의 기획을 말한다.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식으로 따라서 시대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며 따라서 시대를 막 넘어서서 (내가 바라는 바로는) 도래할 어떤 시대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의 요소 속에 사유를 놓고, 적극적 사유를 어리석음과 저속함에 대한 비판으로 만들면서, 니체는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사유하는 것이 어떤 능력의 자연적인 발휘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반응적 힘들이 의거해서 승리하는 허구들은 사유 가운데 가장 저속한 것이며, 그것이 비활동적인 채로 머물러 있으면서 사유하지 않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방식이다. 우리는, 사유를 적극적인, 절대적으로 적극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들, 그것[사유]을 긍정으로 만들 수 잇는 능력을 기대한다. 사유하는 것은 사유의 n 제곱이다. 그런데 만약 힘들이 그것에 어떤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제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폭력이 사유인 한에서의 그것에 가해져야만 하고, 어떤 권력이 그것을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그것을 적극적 생성 속으로 던져버려야만 한다. 그 같은 강제, 훈련은 니체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문화란 본질적으로 훈련이고 선택이다. 그것은 사유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의 폭력을 표현한다. 반응적 힘들이 문화로부터 그 폭력을 이탈시키고, 그 힘들이 그것을 반응적 힘 자체로, 훨씬 더 사유를 어리석고 저속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삼는 일이 생겨난다.

사유의 이론은 힘들의 유형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게다가 유형학은 위상학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현존이 근거하는 자리,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우리가 빈번히 만나는 요소에 의해서 우리에게 가치 있는 진리들을 가지고 있다. 모든 진리는 어떤 요소, 어떤 시간 그리고 어떤 장소의 진리이다. 사유의 장소는 열대인이 드나드는 열대 지방이다. 온대 지방이 아니며, 도덕적이거나 논리정연하거나 온건한 인간이 드나드는 곳도 아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인사원_니체 :: 너희가 니체를 알겠지?! [1] oracle 2019.01.31 664
925 에크리 발제문 file lllll 2019.11.20 120
92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강 제4편 I,II 1장 로라 2018.11.26 120
923 사랑, 존재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과제) [1] 휘파람 2018.10.13 120
922 『지젝과 무의식의 정치학』을 활용한 단편소설 발표 file 크리슈나 2018.06.25 120
921 [상상된 도시] 5강 발터 벤야민<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요약문 file 아노말리에 2017.10.16 120
920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발제 file 상빙 2016.11.07 119
91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공지 : 휴강!! [1] 케이 2018.10.31 119
918 [니체의 영원회귀] 3강 발제 [권력에의 의지] 3권 3장 사회 및 개인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 유택 2018.09.25 119
917 [차이와 반복] 10주차 쪽글 file 효영 2017.11.15 119
916 예술과 철학 8강 (3) 제발트<토성의 고리> 박소원 2021.11.01 117
915 [니체의 영원회귀] 9강 강좌 후기_4장_ 개가 짖는다, 미래의 [4] file 구르는돌멩이 2018.11.19 117
914 에세이의 형식과 본질에 대하여 손현숙 2021.11.22 116
913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3강-1 발제 [2] file 유택 2022.09.23 116
912 <예술로서의 삶> 4장 발제입니다. file 노을 2021.04.19 116
911 [차이와 반복] 12주차 발제문(앞부분) file minhk 2017.11.29 116
910 [푸코, 실존의 미학]14강 쪽글 [8] Jae 2022.06.11 115
909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1강 쪽글 [1] 사각사각 2022.09.15 115
908 [불온한 페미니즘] [시스터 아웃사이더] 쪽글 겸 후기 누혜 2019.03.20 115
907 [신유물론] 판도라의 희망 5-7장 발제 HJ 2022.05.26 115
90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갇힌 여인(2230-2306쪽) 요약 [1] 휘파람 2018.12.10 115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