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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영원회귀] 7강 예습 쪽글

floor 2018.10.25 09:54 조회 수 : 76

제 2장 적극적인active 것과 반동적인 reactive 것                           2018.10.25. floor(기름 짜내듯 능력너머의 것을 짜내고 있습니다. ㅠㅠ)

1.신체란 무엇인가

⦁신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신체보다 의식이 우월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류임을 말하고자 한다. 니체가 생각하는 의식은, 열등한 것과 열등한 것이 종속된 우월한 것 사이에서 <열등한 것>이 갖는 의식이다. 스피노자는 과학과 철학에 새로운 출로direction을 마련해 주었는데 정신의 모든 발전에서 신체만이 문제임을 제시하였다. 의식의 노예성, 곧 의식은 우리가 의존하는 어떤 존재와 관련해서 나타난다.

⦁신체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간의 관계이다. 모든 힘의 관계가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힘관계를 생산해내는 권력의지는 신체 이전에 존재하고 신체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힘의 원초적 성질들은 관계 속에서, ⓵지배적인 힘들은 Active한 성질을, ⓶열등하거나 지배받는dominated 힘들은 Reactive 한 성질을 갖는다. 이와 같이 양에 따라 성질이 부여되는 힘들의 차이가 위계 Hierarchy이다.

 

2.Reactive 힘과 Active 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명령은 양보가 가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반작용들 자체가 Active 한 힘이 없으면 reactive한 힘이 될 수 없다. 작용하는 힘과의 관계에서 반동적 힘은 자신이 힘의 양이 상실되지도 않고 그것의 구조와 목적을 유지한 채로 자기의 힘을 작동시킨다. 반작용의 힘들은 타협과 조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표현한다. 반작용의 힘은 적극적인 힘에 종속적이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이고 신체가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Reaction은, 작용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힘의 유형임을 잊으면 안 된다. 힘의 원초적 성격은 reactive하지만 이 반동적인 것은 적극적인 것과 관련해서만 그 자체로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3. 힘들은 각각의 질Quailty과 그 질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평가해야한다.

⦁모든 힘의 질을 양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광기이다. 모든 양은 질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주된 괸심은 양 그 자체의 관점에서 양적 차이를 균등화 할 수 없음이다 양적 차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양의 환원 불가능한 요소이다, 질은 관계 속에 있는 각각의 힘 속에서의 양적 차이에 해당된다.

⦁우리는 모든 우연도 긍정하고 모든 힘의 관계도 긍정한다. 이때 우연이란 연속체가 아니다. 동시에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 우연의 만남에서 각각의 힘은 그것의 권력을 충족시키는 성향을 그대로 받아들이다. 그 관계 속에서 각각의 힘들의 성질과 그 성질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평가해야 함이 중요하다.

 

4. 영원회귀는 Adiaphoria(차이의 부정)가 아니다.

⦁과학은 양들을 균등화시키고 불균등은 벌충하려는 방식으로 양적 차이를 축소reduce 하고 부정deny하며 현대 사유의 허무주의에 참여한다. 과학의 이런 부정의 노력은 삶을 부정하고 현존을 비하하며, 죽음을 약속하는 우주는 죽음 안에서 파멸해간다. 그럼 점에서 과학은 금욕적 이상에 속하며 여기에 봉사하고 있는 셈이다.

⦁과학은 그것이 놓이는 관점에 따라 영원회귀를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한다. ⓵ 기계론적 해석에서는 영원회귀는 긍정하지만 가역적 체계의 최초상태와 최종생태는 균형을 이룬다고 본다. 곧, 양적차이는 무화된다. ⓶ 열역학적 해석에서는 영원회귀를 부정은 하지만 양적 차이들은 체계의 최종상태 속에서 서로서로를 무화시킨다. 미분화된 최종 상태에서 동일성을 상정하고 그것을 최초 상태의 것과 대립시킨다.

⦁이 두 입장은 최종상태, 생성의 최후 상태에 대한 인정이다. 그러나 니체는 말한다, 생성에는 최종 상태란 없다고. 영원회귀는 과학이 말하는 그런 동일자의 사유가 아니다. 종합적 사유이며 절대적 차별자의 사유이다. Adiaphoria 가 아니다. 영원회귀에서 회귀자는 차별자이며 차이나는 하나The one 이다.

 

5. 영원회귀의 첫 번째 측면인 우주론 그리고 물리이론으로서의 측면이다.

⦁우주에 과연 최종상태라는 것이 있을까? 우주에는, 생성에는, 최종상태나 균형상태라는 건 없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인간들이 죽은 뒤 천국가는 것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나라는 것(존재)은 더 이상 어떤 것으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무한하고 생성이 하나라면 그 생성은 최종 상태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p99 존재에 대한 사유를 중단하기 위해서라도 영원회귀의 사유는 필요하다. 불교에서의 무아 無我도 영원회귀의 사유이다.

⦁<순수생성의 사유>가 영원회귀의 기초가 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생성되고 있는 것의 존재, 생성을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않는 존재란 무엇인가? 엄밀히 말하면 이런 표현들은 모순적이다.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를 최대한 접근시키는 일이다. 순간, 현재의 자신, 지나간 것으로서의 자신, 도래할 것으로서의 자신은 종합적 관계이고 이것이  순간과 다른 순간들의 관계를 기초 짓는다. 이처럼 영원회귀는 passage (지나감)의 문제이다.

⦁되돌아옴 Returning은 존재가 아니다 . 단지 존재를 구성할 뿐이다. <되돌아오는 것>은 하나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그 자체는 자신을 차별자로, 다수로 인정하는 하나이다. 차이나는 것을 위해 돌아옴이다.

6. 힘의 의지는 무엇인가?

⦁The will to power(힘의 의지)는 ⓵관계 속에 놓여있는 힘들에서 발생하는 양적 차이와 ⓶ 그 관계 안에서 각각의 힘에 귀결된 quality , 이 둘을 야기하는 요소element 이다. 이는 계보학적 요소이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항상 조형적plastic이고 변신 중이다.

⦁힘과 의지를 사람들은 혼돈한다. 힘의 의지와 힘은 분리되어야만 한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고 힘의 의지는 원하는 것이다. 힘과 힘의 관계는 지배의 관계이다. 지배하고 지배받는다. 우주조차도 이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이런 힘의 관계에 하나의 보완complement이 니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내적 의지 internal will이다. 만약 이런 내적의지가 없다면 힘들의 관계는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내적의지가 힘들의 관계에 더해질 때 권력의지가 발생한다. 그래서 힘의 의지는 힘들의 종합의 원리이다. 이 종합이 영원회귀를 형성한다.

 

7. 힘의 의지는 해석하는 것이자 평가하는 것이다.

⦁해석하기는 사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평가하기는 사물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힘의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의 가치는 하나의 계보학을 가지고 있기에, 계보학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에서 <의미의 의미화>와 <가치들의 가치>가 나온다. ⓵어떤 의미의 의미화는 <힘의 질quality> 속에 있고, Active 하거나 Reactive 하다. 어떤 <가치의 가치화>는 상응하는 사물 속에 표현된 <힘의 의지의 성질> 속에 있고, Affirmative 하거나 Negative하다.

⦁우아함과 저속함은 계보학에 의존하고 있다. 하나의 가치 속에서 우아함을 표현하는지, 저속함을 표현하는지는 결국 계보학만이 밝힐 수 있다. 계보학의 미분적 요소가 가치의 개념에서 모든 의미들을 제거하는데, 이 가치의 개념을 뚫고 나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우아한 것>이다.

 

8. Reactive한 힘의 기원은 자신의  전복 顚覆 된 이미지를 내포한다.

⦁반동적reactive  힘은 복종할 때 조차, 적극적 힘을 제한하고 그것에게 부분적인 제한과 한계를 강요하며, 그것은 부정의 정신에 의해 점유되고 통제된다. 차이는 부정되고 긍정은 모순이 되고 만다.

⦁귀족적(니체식의)인 적극적 힘들은 반동적 힘들에 의해서 반영된 <평민의 이미지> 앞에 서 있다. 이 <Reactive 한 힘들의 거울> 앞에 서면 귀족 계급도 자신을 거꾸로 본다. 그것들은 적극적 힘들이 파생하는 미분적 요소를 전복invert 시키고 그것의 일그러진 이미지를 제공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발전을 하고 가치들을 전복시켜 버린다. 반동적 힘들이 결국 승리를 차지한다. 이들의 승리는 결코 가상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도 반동적 힘에 쉽게 승복하고 <부정적 의지와 무의 의지>로 나아가는 자신을 쉽게 발견하지 않는가?

⦁ Reactive 한 힘들의 승리는 그 힘의 우월성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박탈subtraction과 분할division을 통해서 승리를 이룬다. 그렇다면 승리한 반동적 힘들은 더 큰 힘을 형성하여 적극성을 취하게 될까? 하지만 그들은 적극적 힘을 이길 때도 적극성을 취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반동적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끝까지 갈 수 있어도 그 대상을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 Reactive 한 힘들의 승리는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반동적 힘들은 뺄셈의 연산을 한다. 적극적 힘에게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분리시키고 차이를 부정하는 뺄셈이다.

 

9. 힘들의 측정은 결국 해석의 문제이다.

⦁우리는 힘의 어떤 체계의 사실 상태에서도 <힘들의 투쟁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적극적 혹은 반동적 상태>에 관심을 기우리지 않는다. 승리하는 힘의 성질이 열등한지 우월한지, 반동적인 것인지 적극적인 것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해석의 문제이다. 어떤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존재한다. 사실이란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차이와 질을 해석하는 기술로 힘들을 측정할 수 있다. 이 기술은 매우 어려운 기술이다.

⦁자신의 능력 끝까지 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적극적이다. 그런 면에서 법은 힘이 끝까지 가지 못한다. 차라리 <자연>이 이 더욱 그러하다. 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는 반응적 힘이고 그러기에 더 강한 힘을 구성하지 못한다.

 

10. 니체에게 위계Hierarchy란?

⦁누가 귀족이며 누가 노예인가? 자신의 우월한 힘을 형성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자가 귀족이며 주인이다. 그렇다며 노예는 그런 우월한 힘을 형성하지 못하고 적극적 힘을 분리시키고 전복시키는 자들이다. 이처럼 적극적 힘과 반동적 힘의 차이가 분명히 있고 그런 적극적 힘들이 가지는 우월성superiority 이 위계Hierarchy이다. 이런 위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서의 여러 힘의 관계에서도 형성이 된다.

⦁자유로운 사유자Free Thinker들은 과연 귀족적일까? 그들은 실증주의와 인본주의에서의 인간적 사실을 표방하지만, 사실 숙명주의자들이고 해석에서 무능하며, 힘의 성질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자들이다.

⦁니체는 hierarchy 속에 들어 있는 <불변의 내재적 지위>에 대해 언급한다. 또 위계는 ⓵ Reactive 한 힘들이 승리하고 전염되는 곳, ⓶ 강자들이 감염된 곳, ⓷ 노예이길 그만두지 않은 노예들이, 주인이길 그만 노예들을 정복한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위계는 법, 도덕, 종교에서도 하나의 이론을 형성한다. 그런 위계 이론은 <교회, 도덕, 국가>를 위계의 담지자keeper로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에게 마땅한 이런 위계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바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우리는 위계를 니체와 반대로만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니체가 보는 노예는 그의 힘이 어떻든, 그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자, 곧 약자이다. 그들은 강하지 못해도 끝까지 간다. 곧 약자들도 성공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의 본질이지 그 승리의 본질은 아니다. 그 승리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그것이 적극적인 것인지 반동적인 것인지를 고려해야하고 힘이 드러내는 힘의 의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해석해야 한다. <노예의 반동적 힘>은, ⓵ 적응의, 부분적인 제한의, 실리를 목적으로 하는 힘이고, ⓶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며 적극적 힘을 분리시키는 힘이며, ⓷ 자기 자신을 부인하거나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힘이다.

 

11. 힘의 의지는 힘들의 생성 이라고 할 수 없고, 힘들의 감각적 생성이다.

⦁힘의 의지란 힘과 힘의 관계 속에서 힘들의 성질을 생산하는 미분적, 계보학적 요소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힘들의 관계>는 서로 다른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한에서만 규정되는 관계이다. 그래서 힘의 의지는 영양받을 수 있는 능력 capacity for being affected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의지는 ⓵생성의 관점에서 힘들의 관계를 규정도 하지만, ⓶ 자신의 고유한 표명의 관점에서 관계 속에 있는 힘들에 의해 규정도 되는데 이는 힘의 의지의 이중성이다. 규정하는 동시에 규정되는 것이다. 이런 규정되는 것, 영양받을 수 있는 능력은 절대 수동성이 아니다. 그것은 <감수성, 감성, 감각>이다.

⦁물체는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을수록 보다 많은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 권력이란 니체 이전에는 감성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래서 <권력감정>이라 표현됬다. 권력의지를 힘의 감성으로 표명했던 것이다. 이런 힘들의 움직임, 곧 Affection은 힘이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을 소유하게 됨에 따라 열등한 힘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함에 적극적이다. 이런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은, 상응하는 힘들 자체가 어떤 감각적 생성 속으로 들어가야만 충족이 된다. 적극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의 대립만으로 권력의지가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즉 힘들의 생성이 힘들의 성질과 같지 않다. 단지 힘을 힘의 의지에서 떼놓을 수 없고, 힘의 성질들(힘의 의지)을 이들의 생성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12. 우리는 왜 반응적 생성만을 느끼고 인식할까?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적극적이다. 반동적이지 않다. 그런데 왜 반응적 생성만을 인식할까?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은 심리적 특징이 아니라 <인간 속의 인간성의 토대>이다. 반응적 생성이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동적 생성만을 느낀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심각하여 영원회귀를 위태롭게 한다. 영원회귀 자체가 <불안, 혐오>의 대상이 된다. 적극적인 힘들이 되돌아올 때조차 그것들은 반동적이 된다. 반동적 힘들의 영원 회귀가 이루어진다.

 

13. 의미와 가치들의 경탄할만하고 위험한 양면성

⦁Reactive 한 힘은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리시켜서 반동적(reactive)으로 만드는데, 이때 <양면적인 일>이 발생한다. ⓵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킴과 함께, ⓶ 이 Reactive 한 힘이 권력에서 우리를 분리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권력>도 준다는 것이다. 이는 위험하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처럼 경탄할만하고 위험한 일들이 반동적 생성 속에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질병으로 우리가 고통 속에 있는 경우를 보자. 우리가 그 질병에 의해 완전히 무능해지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그 고통 속에서 어느 때보다 더 건전한 개념과 가치들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어느 분이 했던, 죽지는 않을 정도로 많이 아파봐야 사람은 바뀐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병든 인간뿐만 아니라 종교적 인간에서도 이런 양면성은 나타나는데, 한편으로는 반동적 인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힘의 인간의 모습(reactive 한 힘이 active해짐)을 보여준다.

⦁이런 두 양면성의 힘은 같은 힘일까? 다른 힘일까? 즉 질병의 노예인 자와 질병을 이용하는 자는 같은 환자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계보학자의 해석이 중요하고, 작용과 긍정사이의 <관계의 발전 정도>를 해석해 내는 문제가 남게 된다. 우리 주변에서 무의지The will to nothingness를 뒤따른다는 그 이유 때문에 숭고하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반동적 힘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긍정의 능력>을 따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적극적 힘들은 몰락하고 만다. 이렇게 건강한 개념이 무엇인지, 건강한 가치들은 어느 것인지를 깨닫는 것은 부정 자체의 관점에서 긍정 자체를 판단하는 일이고 이는 계보학자의 기술art 이다.

 

14. 영원회귀의 두 번째 측면 : 윤리적이고 선택적인 사유로서의 측면

⦁영원회귀에는 이중의 생성이 들어 있다. 적극적 생성과 반동적 생성이다. 이때 적극적 생성만이 존재를 갖게 되는데, 이처럼 적극적 생성에 의해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렇게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 반동적 생성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이 될까? 이것도 우연처럼, 운명처럼 긍정되는 부분일까? 이는 <선택>의 산물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 반응적 생성 자체는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했을 때만이 사유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의 원리는 무엇인지의 의문이 든다. 그것은 영원회귀이다. <영원회귀의 두 번의 선택>이다.

⦁영원회귀가 선택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원회귀에는 두 번의 선택이 있는데. ⓵ 첫 번째는 “네가 무엇을 의욕하든,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방식으로 의욕하라.” ⓶ 두 번째는 자멸, 자기파괴이다. 결국 영원회귀는 선택하는 실천적 사유이다. 첫 번째 선택은 차라투스트라의 야심? 보다는 열등한 것이다. 그것은 반응적 힘들 몇몇을 제거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영원회귀의 두 번째 선택인 <자기 파괴>에 대해서이다. 이는 부정된 것을 부정Negation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허무주의를 부정함으로서 완전한 허무주의를 만드는 것이 그러하다. <무의 의지>를 세속적 욕망이 없는 듯 미화시키면 안된다. 이는 보편적 반동적 생성이며 힘들의 반동적 생성이다.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자기 자신으로는 항상 불완전하다. <금욕적 이상>도 삶을 보존하는 하나의 기술일 뿐이고 미봉책이다. 이런 허무주의를 완전한 허무주의로 만드는 것은 영원회귀이다. 영원회귀의 자기파괴의 표현이다.

⦁ 자멸은 적극적 부정 Active Negation , 적극적 파괴 Active destruction이다. 자신들의 몰락에의 의욕을 각오하면서, 반동적인 것을 <영원회귀의 시련>에 종속시키며 그 시련에서 자기 자신을 제거하면서 반동적인 것을 자기 속에서 파괴하는 그런 강한 정신들의 상태이다. 이처럼 적극적 부정은 그것들의 심오한 본성에서 기인한다. 이 적극적 부정은 Reactive한 힘이  Active 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원회귀의 자기 파괴는 적극적 생성을 낳는다. 이 적극적 생성에 의해 자신의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게 되는 것이 영원회귀의 윤리적이고 선택적인 사유이다. Being is selection이라는 말이 와 닿지 않은가?

 

15. 물리적 이론으로서의 영원회귀는 생성의 문제를 긍정한다. 그러나 선택적 존재로서의 그것은 그 생성의 존재를 적극적 생성에 의해서 <자신을 긍정>함으로서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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