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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10주차 쪽글

효영 2017.11.15 14:20 조회 수 : 119

4장 차이의 이념적 종합

 

5절

구조는 미분비와 미분적 요소들로 이뤄진 어떤 체계다. 발생의 관점에서 구조는 이 요소들에 준해 의미를 성립시킨다. 그래서 구조와 발생은 대립개념이 아니다. 이념과 대립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재현뿐이다. 재현은 본질과 비본질적인 것, 일자와 다자 등의 대립항을 설정하는데, 이념의 부차모순의 절차들은 이런 재현의 용어로는 결코 표현될 수가 없다. 재현이 개념과 본질, 재인에서 비롯되는 앎 등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이념은 우연, 사건 의미 등의 뜻으로서만 본질이란 말을 사용한다. 앎 대신에는 배움을 지시한다. 앎과 배움은 무엇이 다른가? 앎이 어떤 의식의 차원에서 해를 찾아가는 심급이라면, 배움이란 애초에 무의식적인 것, 문제제기적인 것이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작가, 배우, 관객의 동일성이 있고 각본대로 펼쳐지는 재현된 사태의 연극과 달리 다양체들의 연극은 문제들의 연극, 언제나 열려있는 물음들의 연극이다. 무의식에 따라 배움의 운동으로, 그 실재적인 운동으로 관객과 배우 무대마저도 끌려들어가는 문제들 자체가 이런 배움과도 같은 다양체들의 연극이고, 구조주의가 호소했던 새로운 연극이었다.

그런데 왜 이념들은 의식의 명제에 있지 않고, 언제나 명제 외적인 것, 무의식적인 특성을 가질까? 이념이 경험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념이란 주체가 스스로 그 한계에 직면할수록 더 잘 발견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성은 지성, 공통감을 구성하는 모든 인식능력들을 배제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사유 불가능한 것이지만 사유되어야만 하고, 오로지 사유밖에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념이어떤 최소한의 소여를 끌고 들어와야 한다면, 그것은 결국 유한한 지성과 무한한 지성의 이분법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 아닐까? 칸트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결국 그의 비판철학은 공통감이라는 인식능력들의 조화로 귀착됐다. 반면 그것은 마이몬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인식능력들이 조화로운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할 때, 우리의 순수사유의 무의식은 무한한 지성 속에서 실현된다. 공통감에서 해방된 어떤 특수한 인식능력의 초월적 실행, 그곳에서 미분들은 허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실재적이다. 따라서 이것은 공통감의 형식을 전혀 취하지 않는다. 대신 그 반대로 간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능력들의 부조화는 각각의 능력이 포착하는 초월적 대상의 배타성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 초월적 관점에서 각각의 인식능력들은 탈구적인 실행을 감행한다. 그렇기에 그 인식능력들의 부조화는 어떤 조화를 함축한다. 이른바 부조화의 조화! 이것은 또한 공통감이 제시하는 어떤 수렴이나 동일성이 아니라, 각각의 능력들에게 도화선이 되는 폭력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공통감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을 정의하는 것도 역설감 안에 있는 이 경험불가능성, 그렇기에 명제 외적임, 또는 비현실적임이다. 가령 재현적인 앎과 대립하는 이념적이 배움이란, 어떤 인식능력을 초월적이고 탈구적인 사용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거다. 문제들만 펼쳐져있고, 해란 찾을 수 없는, 혹은 찾아야 한다는 목적도 없이, 그만의 변이성과 특이점들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이념이 관계하는 것은 통합된 자아, 동일한 코기토가 아니라, 분열된 코기토이고, 초월적 실행에 놓인 능력으로서의 사유, 그 보편적 근거와해이다. 이념들은 끊임없이 외출한다. 바르게 정렬된 인식능력들의 조화에 부조화를 던지고 폭력을 전염시킨다. 그렇다면 결정적으로 이념의 초월적 실행에서 문제삼는 문제란 뭘까?

들뢰즈는 문제와 물음을 구분한다. 들뢰즈는 먼저 물음에 담긴 존재론적 함량을 보고자 한다. 물음에는 물음에 응답하고 그 물음을 유지, 반복, 되새기는 응답하는 자가 있다. 이것이 바로 문제틀과 물음의 발견. 문제틀과 물음은 어떤 초험적인 지평이다, 이 초험적인 장에서 우리는 전에 알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문제 앞에서 우리의 기억, 언어, 사유를 초월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부조화하기에 능력끼리 소통한다. 그리고 이 때 이념이 행사하는 폭력에서 동반되는 역설감을 통해 우리는 자꾸 반복한다. 앞서 물음이란 설사 해가 나타난다고 해도, 제거되거나 극복되지 않는다고 했다. 해의 발견 여부와 무관하게 물음은 이처럼 계속해서 반복을 통해 존속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답을 다시 취하면서 스스로 강화한다(부조리라는 첫 번째 역량). 물음의 역량은 물음의 대상 뿐 아니라 묻고 있는 자와의 관계를 결코 끊지 않는다(수수께끼라는 두 번째 역량).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물음에 상응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이는 묻고 있는 자도 아니고, 물음의 대상도 아니다. 이 존재가 중요하다. 이 존재가 바로 오히려 대상과 주체를 분절화하는 차이(개체화하는 차이)를 통해 하나로 묶는 존재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물음에서 문제로 나아간다. 중요한 것은 물음들이 어떻게 이념 안의 문제들로 개봉되는가, 그리고 이 문제들이 다시 어떻게 사유 안의 물음들로 봉인되는가를 모색하는 거다. 그런데 서양철학사는 적어도 플라톤부터 칸트 이후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사유의 진정한 운동과정을 알지 못했다. 혹은 그저 스쳐지나갔기에 역설적으로 진정한 운동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버렸다. 가령 플라톤의 문답법은 가설들을 도약판처럼, 즉 문제들처럼 이용해 비-가설적 원리로 상승한다. 아름다음이란 무엇인가? what it is? 회의에서 확실성으로 나아가는 데카르트의 작업도 이와 유사하고, 칸트가 첫 번째 비판서에서 세 번째 비판서로 이행할 때의 방법도 그처럼 가능한 경험의 가설적 형식에서 원리의 순수한 필연성의 발견으로 나아간다. 피히테나 헤겔에 이르기까지 그 후대까지도 다 그랬다.

우리는 거꾸로의 과정을 상상한다. 가설적인 것에서 필증적인 것으로hypothetical to apodictic 가는게 아니라, 문제제기적인 것에서 물음으로problematical to the question 나아간다. 별로 차이가 없어보일 수도 있다. 물음이나 필증적인 것이나 어떤 명법과 분리될 수 없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제제기적인 것과 가설적인 것 사이의 차이에는 어떤 심연이 있다. 물음과 필증적인 것 사이도 마찬가지다. 문제제기적인 것은 명제 정립적인 것thetic이고, 물음들은 문제들과 그 문제들이 유래하는 명법들 간 관계를 표현한다. 심문을 당한다고 해보자. 고문당하는 사람에게 묻는 건 경찰관이 아니다. 분열된 내가 나한테 묻는거다. 그리고 이 분열된 나가 바로 문제를 표현하는 물음들, 우리의 궁극지가 되는 물음들이다. 그래서 문제들은 어떤 자유로운 결단과 분리될 수 없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결정능력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의 본성안에 근거를 두고, ‘체‘와의 관계에 따라 문제가 풀리는가, 안 풀리는가가 결정된다. 이는 곧 어떤 임의적인 양을 덧붙이는 무한한 역량이고, 이 행위 자체는 놀이이다.

주사위 던지기를 떠올려보자. 열린 공간인 하늘 전체에 특이점들이 그려진 주사위, 물음 자체인 주사위를 던진다. 던지는 건 명법the imperative이다. 그리고 그 주사위 던지기, 물음 자체의 명법의 결과로 문제제기적인 조합들이 따라나온다. 알다시피 주사위 던지기는 언제나 우연적이지만 어떤 문제에 대한 결정들을 이미 갖고 바닥에 떨어진다, 3! 6! 이렇게 이미 떨어진 결정들, 그래서 명법적인 것들을 긍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게 중요하다. 그 우연을 처음부터 긍정할 것. 던지기는 처음부터 우연들을 긍정하고, 던지기를 반복한다는 것은 우연을 어떤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거다. 주사위 던지기를 통해 들뢰즈는 이념들의 명법적인 기원-주제정립적인 것과는 구별되는-을 이 우연의 긍정, 우발점에 두고자 한다. 이것은 그저 자의적으로 긍정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연의 추방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긍정하는게 아니다. 단번에 우연들을 긍정한다는 것은 불균등한 것들의 공명에서 문제를 형성한다는 거다. 이렇게 해서 명법들과 명법들에서 비롯되는 문제들 사이에 순환적 관계가 형성된다. 작가들이 작품을 쓸 때에도 작품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건, 이 명령하고 물음을 던지는 맹점, 우발점에서부터다. 이 명법이나 물음들은 결코 나로부터도, 신으로부터도 오지 않는다. 신들조차도 우연(아낭케)에 종속되어 있다. 언제나 명법들은 존재에서 오고, 모든 물음들은 존재론적이고, 문제들안에서 ‘존재자’를 분배한다(그래서 앞서 중요한 것은, 물음에 응답하는 자도, 물음의 대상도 아니라, 이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존재론은 ‘주사위 놀이’다. 균열된 나들과 어떤 관계 맺기, 그 균열된 내가 던지는 물음을 처음부터 긍정하고 또 그것을 반복하기, 초월적 실행의 관점에서만 사유될 수 있는 사유의 미분들, 순수사유들을 형성하기. 그래서 블랑쇼의 비인칭적인 죽음에 가까이 간 듯, 이 우발점 앞에서 자아는 실어증에 걸리고, 머리도 없어지고, 맹목적이 된다. 한 마디로 무능력하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무능력하기에 동시에 역량으로 전환될 지점에 서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유의 무의식에 해당하는 균열된 나가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를 시작한다. 오히려 무능력만이 최고의 역량으로까지 고양될 수 있다. 니체가 무기력해지라고 자꾸 외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무능력해짐, 분열된 나가 던지는 문제들에 나를 내맡기기, 운명이라는 커다란 돌덩이, 막 허공에서 떨어질 주사위에 새겨진 번호들처럼 이미 문제들에 대해 내려진 결정들, 그 우연을 처음부터 긍정하기는 곧 최고의 역량으로 가는 어떤 권리일 거다.

 

6절

그러면 처음부터 이 물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물음 자체가 표현하는 문제들, 명법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물음은 오직 반복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일까? 닭인가, 달걀인가? 그러나 주사위 놀이라도 나쁜 주사위 놀이, 필패로 귀착되는 주사위 놀이가 있다. 처음에 제기한 문제가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오면 그렇다. 반면 좋은 주사위 놀이는 반복해서 언급되듯, 우연을 긍정하는 거다. 그리고 반드시 원래 것과 차이나는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물음과 반복은 한 몸이다. 이 물음-반복 쌍은 이념들이 놓이는 막-주름운동perplication의 원천에 있다. 미분법안에는 본래 어떤 되풀이 기법이 있고 ,문제들 안에도 어떤 반복이 있다. 그래서 이념의 미분적 차이와 주사위 놀이의 반복은 분리될 수 없다. 앞서서 어떤 무능력이 곧 최고의 역량으로의 고양이라고 말했다. 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초험적인 장 안에서 생각하고, 그 문제를 반복하는 것, 그자체가 바로 역량의 고양이기 때문이다. 주사위를 반복해서 던지는 것, 그 반복 속에서 특이점들이 상호간에 재취합되고 응축되는 거다.

하이데거는 이런 물음의 반복이 전개되는 방식을 잘 보여줬다. ‘물음의 반복=문제와 반복이 서로 연계된 가운데 전개됨‘이다. 문제들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의 본래적인 내용, 그 문제를 문제이게 하는 내부적인 힘, 그러나 문제에 의해 은폐되었던 것들, 이것의 가능성들이 드러난다. 그럼 이 문제의 한복판에 숨어있는 가능자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이것은 이념의 잠재력, 어떤 역량의 거듭제곱, 이념의 규정가능한 잠재성이다. 그렇게 우연을 긍정하게 하고, 계속해서 반복하게 하는 내적인 힘이 무언가? 바로 이 역량의 증가다. 역량들이 서로 취합되고 다시 취합되고 고양되어 가는 거다. 그래서 모든 기원은 어떤 전-개체적인 특이점이고, 이 특이점은 평범점 위에서 일어나는 시작이 된다. 무릎을 치며, 해보자!

비-존재는 결코 부정의 대상이 아닌 처음부터 긍정의 대상인 존재, 문제제기적인 존재이다. 이 비-존재는 문법형식 not(ne)안에서 발견된다. 문법적으로는 허사일지라도, 그것은 어떤 명제 외적인 문법적 심급을 증언한다. 문제들 안에서 개봉되는 물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해가 나타나자마자 문제는 가려지고, 문제는 변질된 가운데 표현된다. 이것이 문제가 가설로 번역되는 순간이다. 가설적 긍정은 다른 한 쪽 편에 부정의 그림자를 늘 동반한다. 이것이 실재적 대립인지 논리적 대립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립을 제한으로 번역해도 마찬가지다. 그보다 우리는 이런 가설적인 대립과 제한의 무차별성을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체 안에서는 일자와 다자가 무차별하고, 변이성 안에서는 질서와 무질서가 무차별하다. 대신 언제나 시작은 이념적/미분적/문제제기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떤 부정적인 항이나 결합관계를 포함하지 않는 것, 이념을 특징짓는 미분적 메커니즘들. 이 가벼움 쪽에서 언제나 빠져들 수 있는 무겁고 우둔한 변질들을 감시해야 한다.

언어학적 이념의 예를 살펴보자. 앞서 구조는 미분비와 미분적 요소들로 이뤄진 어떤 체계이고, 발생의 관점에서 구조는 이 요소들에 준해 의미를 성립시킨다고 했다. 언어학적 이념은 이 구조가 지닐 수 있는 모든 특성에 부합한다. 언어학적 이념은 1)연속적인 음성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는 미분적 요소들인 음소들을 갖는다. 2)이 음소들을 다시 완결되게 규정하는 특이점들이 있다. 3)음소들이 그럼으로써 갖게 되는 특이적인 가치들이 있다. 4)이렇게 구성된 언어는 다양체/문제제기적/의미작용 형성/문제를 객관적으로 나타내기를 실행한다. 5) 요소들과 비율적 관계들은 잠재적이고 무의식적 성격을 지닌다. 동시에 요소들은 현실적으로 분절화된 음성들에 대해 초재적/내재적인 이중의 상태에 있다. 6)언어들 속에서 미분적 요소들과 미분적 관계들은 이중으로 구현된다. 이 때 특이점이 구현된다. 7)이 현실화를 통해 수동적 발생이 드러나고, 앞서 보았던 구조와 발생의 상호적임이 드러난다.

이렇게 구조적인 모든 특성을 갖췄음에도 언어학자들은 그러한 음소들 간의 미분적 관계를 대립의 관계로 환원시켜버린다. 혹은 대립은 나쁜 게 아니라고, 대립은 실은 상관관계를 의미한다고 반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트루베츠코이의 분류법에서는 그렇다. 대립은 그의 이론에서 마구 주름잡히는 변별화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음운론을 어떤 미분적인 요소들과 그것들간의 관계로 보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매력적인 거다. 여기서 부정이나 대립은 어떤 실증적인 다양체의 문제제기적인 장과 관련되어야 한다.

가령 소쉬르는 “언어 안에는 오로지 차이들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소쉬르 자신도 몰랐던 차이의 의미를 아는 게 중요하다. 이 차이들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런 적극적인 항도 없는, 그래서 부정적인 차이가 아니다. 언어의 유희적 본성을 놓치지 말자. 언어학적인 주사위 놀이도 있다. 차이가 대립으로 읽힐 때 차이는 자신의 고유한 두께를 빼앗겨 버린다. 실증성도 박탈당한다. 대립으로서는 어떤 것의 본성도 알 수 가 없다. 반면 이를 잘 알았던 귀스타브 기욤은 대립의 원리를 변별적 위치의 원리로 대체했다. 가령 음소들을 선별할 때, 어떤 점진적 규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변별화의 문턱들인 형태소들이다. 기욤의 형태론은 이처럼 음소들의 선별을 규정하는 어떤 고유한 문제제기적인 가치들로서 형태소를 도입했다. 다시 not(ne)로 돌아와보자. 불균등하고 미분적일지언정, 결코 부정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 비-존재는 ne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ne은 문제제기적이다. 또한 동시에 비-존재는 부정 pas 안에서 이해되야 한다. 원천적인 의미를 담는 ne 뒤에 따라오는 pas는 ne의 파생물이자 필연적인 귀결이다. 순서가 중요하다. 부정pas이 원초적 의미ne를 끌어당겨선 안된다. 그러면 왜곡이 일어난다.

왜 순서가 중요한가? 왜 부정에서부터 원초적 심급을 끌어당겨서는 안 되는가? ne pas와 같이 양자는 짝패가 아닌가? 부정은 본래 그림자로서 발생하고 존재한다. 그래서 이 발생과정을 따라서 부정적인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순서가 중요하다. 문제제기적인 문제가 어떤 해들의 영역, 재현의 영역 안에 드러날 때, 부정적인 것은 문제제기적인 것의 분신으로 따라 나온다. 만약 이 때 차이로서의 차이 그 자체가 순수한 긍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안다면, 오히려 명제 안의 부정적인 것은 긍정쪽에 자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것은 긍정 자체를 생산하는 발생적 심급인 한에서이다. 다시 말해 이념의 잠재적 내용이 규정되는 과정을 미분화, 이 잠재성이 서로 구별되는 종이나 부분들 안에서 현실화되는 과정을 분화라고 정리한다면, 부정적인 것은 어떤 미분화나 분화의 절차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념은 부정을 알지 못한다.

 

7절

잠재적인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규정성보다 미규정성에 가깝기에 잠재적인 것은 모호한 개념이 아닐까? 현실적/실제적real인 것과 잠재적virtual인 것이 어떻게 구별되고 또 동시에 연관되는가를 살펴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먼저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심지어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 대상을 구성한다. 현행적actual인 것에 대립할 뿐이다.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의 일부라면, 어떤 부분이 도함수로 간주되어야 할까? 잠재적인 것의 현실성은 미분적 요소와 관계들 안에, 또 이것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 안에 있다. 구조는 잠재적인 것의 현실성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잠재적인 것에 현행적인 것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과 동시에 잠재적인 것이 갖고 있는 현실적인 것을 박탈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작품을 보면, 작품은 어떤 혼잡한 규정이 아니라 이미 완결적으로 규정된 구조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중심도 없고, 특권적인 어떤 관점도 없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완결된 규정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완결된 규정임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떻게 완결된 규정에 대한 말함일 수 있을까? 맞다. 부분적으로만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질적 통합성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떤 결핍으로 보인다면, 이러한 완결된 규정이 결핍하는 것은 현행적 실존에 고유한 규정들 전체다. 하나의 대상은 혹은 잠재적인 것들은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것일 t 있고, 모든 양상에서 규정된 (비)-실재 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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