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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근대소설의 두 장면을 재밌게 대비해 볼까요? 

우선 이광수의 ‘무정’에서 형식이 근대적 자아로서의 자아를 되찾는 장면을 보죠. 

 

“형식의귀에는차의가는소리도 들리거니와 지구의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고 무한히 먼 공중에서 별과 별이 마주치는 소리와 무한히 작은 ‘에테르’의 분자의 흐르는 소리도 듣는다. 메와 들에 풀과 나무가 밤 동안에 자라느라고 바삭바삭하는 소리와자기의 몸에 피 돌아가는 것과 그 피를 받아 즐거워하는 세포(細胞)들의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의 정신은 지금 천지가 창조되던 혼돈한 상태에 있고 또 천지가 노쇠하여 없어지는 혼돈한 상태에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장차 빛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려고 고개를 기울이고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는 양을 본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결심을 다하고 나서 팔을 부르걷고 천지에 만물을 만들기 시작하는 양을 본다. (중략) 자기는 목숨 없는 흙덩이였었다. 자기는 숨도 쉬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던 흙덩어리였었다. 자기는 자기의 주위에 있는 만물을 보지도 못하였었고 거기서나는소리를듣지도못하였었다. 설혹만물의빛이자기의눈에들어오고 소리가 자기의 귀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는 오직 ‘에테르’의 물결에지나지못하였었다. ”

 

여기서 형식은   ‘자기는 목숨 없는 흙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가, 

이제 비로소 하느님이 ‘천지에 만물을 만들기 시작하는’ 듯한 창조적 혼돈의 경험 속에서 자기 주위의 만물을 비로소 보고 듣게 되지요. 

 

우리는  형식이 자기 자신을 ‘다시-주어진 것’(219)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 때 자신은   ‘흙덩어리’에 불과했었는데 이제는 창조적인 혼돈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형식이 다시 발견된 자아를 향유하는 것은  ‘내면의 빛과 같은 은총의 느낌’으로 자신을 반조하는(219)하는 가운데에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장면에서 근대적 주체로서의 자각을 목격하게 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단히 특수한 코기토’(219)로서, 즉 ‘신과 자아를 공통의 부활 안에서 재발견’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서일 것입니다. 

 

들뢰즈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이광수의 ‘무정’에서 서사화되는 것은 어쩌면 

‘ 다시 발견된 자아와 다시 주어진 신의 약혼’(219)일지도 모릅니다. 

 

조건을 박탈당한  ‘비극적 죄인’으로 살아가다가 

결정적인 한 순간을 체험한 후에는 모종의 ‘소명’을 실행하는 희극배우로서 살아가는 것. 이, 신앙인의 이 두가지 모습은 ‘무정' 전체에서 형식의 삶을 가르는 서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형식에게서 자아의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 치유하면서 신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반복해가는 근대적인 주체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 근대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그 반복 아래에는 또  다른 반복이 포효하고” 있습니다. 

‘무정’의  형식이 기차 안에 앉아서 기차 밖 풍경과의 조화로운 율동 속에 자기를 재발견했다면 

이상 소설 ‘12월12일’의 주인공은  달리는 기차에 몸을 내던져서 자신의 신체를 산산조각 내버리는 길을 택합니다. 

좀 길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으니 한번 읽어 보시요 ㅎ 

 

“ 그는 지금 모든 세상에 끼치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받지 못하였던 모든 거룩한 성도(聖徒)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새로운 우주의 명랑한 가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 었다. 

그의 눈에는 일상에 볼 수 없었던 밝고 신선한 자연과 상록수(常綠樹)가 보였고 그의 귀에는 일상에 들을 수 없었던 유량 우아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가 호흡하는 공기는 맑로 따스하고 투명하였고 그가 마시는 물은 영겁을 상징하는 영험의 생명수였다. 그는 지금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선택되어 심판의 궁정(官廷)을 향하여 걷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후에 그의 머리에 얹혀질 월계수의 황금관을 생각할 때에 피투성이 된 그의 일신은 기쁨에 미쳐 뛰었다. 대 자유를 찾아서 우주애(宇宙愛)를 찾아서 그는 이미 선택된 길을 걷고 있는 데 다름 없었다.

그러나 또한 생각하여 보면 불을 피하여 선로 위에 떨고 섰던 그는 과연 어디로 갔던가. 

그는 확실히 새로운 우주의 가로를 보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그의 영락한 육체 위로는 무서운 「에너지」의 기관차의 차륜이 굴러 넘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의 피곤한 뼈를 분쇄시키고 타고 남은 근육을 산산히 저며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기관차의 「퍼스톤」은 그의 해골을 이끌고 그의 심장을 이끌고 검붉은 핏방울을 칼날로 희푸르러 있는 선로 위에 뿌리며 십리나 이십리 밖에 있는 어느 츤락의 정거장까지라도 갔는지도 모른다. 모닥불을 쪼이던 철로 공사의 인부들도, 부근 민가의 사람들도 황황히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까에 불을 히하여 달아나던 그의 면영은 찾을 수도 없었다. 떨어진 팔과 다리, 동구(瞳球), 간장(肝臟), 이것들을 차마 볼 수 없다는 가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새로운 우주의 가로를 걸어가는 그에게 전별의 마지막 만가(輓歌)를 쓸쓸히 들려주었다. 

그 사람은 그가 십유여 년 방랑생활 끝에 고국의 첫발길을 실었던 그 기관차 속에서 만났던 그 철도국에 다닌다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너무나 우연한 인과(因果)를 인식치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알거나 모르거나 인과는 그 인과의 법칙에만 충실스러이 하나에서 둘로, 그리하여 셋째로 수행되어 가고만 있는 것이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이 말을 그는 그 같은 사람에게 우연히 두 번이나 물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십이월 십이일!」 이 대답을 그는 같은 사람에게서 두 번이나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그들에게 다만 모를것으로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인과에 우연이 되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인과의 법칙 가운데에서 우연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하면 그 바퀴가 그의 허리를 넘어간 그 기관차 가운데에는 C간호부가 타 있있다는 것을 어떻게나 사람은 설명하려 하는가? 또 그 C간호부가 왁자지껄한 차창 밖을 내어다보고 그리고 그 분골쇄신된 검붉은 피의 지도(地圖)를 발견하였을 때 끔찍하다하여 고개를 돌렸던 것은 어떻게나 설명하려하는가? 그리고 C간호부가 닫힌 차창에는 허연 성에가 슬어 있었다는 것은 어찌나 설명하려는가? 이뿐일까, 우리는 더우기나 근본적 의아에 봉착(逢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지금 이 C간호부가 타고 있는 객차의 고간이 그저께 그가 타고 오던 그 고간 뿐만 아니라 그 자리까지도 역시 그 같은 자리였다 하면 그것은 또한 어찌나 설명하려느냐? 

북풍은 마른 나무를 흔들며 불어 왔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참새들은 전선 위에서 배고픔으로 추운 날개를 떨며 쉬이고 있었다. “ 

 

위에서  무엇보다 충격적이었을 장면은 ‘그’의 신체가 기차에 뛰어들어 산산조각나는 장면일겁니다. 

흩어진 장부들을 하나씩 꼽아 가면서까지 매우 상세하게 파괴된 신체를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염상섭이나 김동인과 같은 선행하는 작가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음직하고 또한,  당대 유행했다던 해부학적인 지식들에 의지하는 바도 컷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파괴된 신체에 대한 묘사가 ‘심판의 궁정’을 향하는 ‘그’의 영혼에 관한 묘사와 대칭을 이루면서 서술자의 강렬한 물음들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요? 

 

우선, ‘심판의 궁정’을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흡사 이광수의 ‘무정’에서 형식이 경험했던 창조적 혼돈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선택된 길’을 가고 있는 자로서의 ‘대자유’에 들떠 있고 ‘우주의 명랑한 가로’를 걷는 그의 영혼의 발걸음은 지극히 가벼워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서술자의 시선은 지상에 남겨진 그의 육체에 더 밀착되어 있습니다. 

서술자는 그의 찢겨진 신체를 응시하면서 '그'가 기차에 치어 죽는 그 순간에 

개입해 들어왔을 수도 있는 우연의 반복과 겹침을 떠올리니까요 

 

우연의 반복이 아니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물음들이 향하는 곳은 

결국  인과의 법칙에 대한 '근본적인 의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신체가 기차에 찢겨지는 것과 더불어 

인과의 법칙도 우연의 반복에 의해서 찢겨져 나가고 있는 장면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지의 분열로 증언하는 분열된 자아와 

우연의 반복에 대한 긍정으로 드러나는 신의 죽음.  

들뢰즈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상이 1910년 경술년생이고 들뢰즈가 1925년 을축년생이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었을 겁니다만 ㅎ) 

 

"우리는 거기서 죽은 신과 분열된 자아의 약혼, 흡사 장례식에 가까운 약혼들을 본다” (219)

 

‘무정’과 ‘12월12일’은 우리 근대 소설에서 현현의 형식으로 표현된 

반복의 두 양상을 극명하게 대비시켜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과 영원회귀의 길. 

 

성급한 일반화일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한국 근대문학의 잠재적인 두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죠 ㅋ 

상실-되찾음의 계기를 반복하는 경로가 한쪽에 있다면 

분열-변신의 계기가 들끓는 우주를 향한 또 다른 경로가, 

잘 주목받지 못했던 그런 경로가 분명히 있었던 겁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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