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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이라는 메시아                       /                  종헌

 

  다나 해러웨이가 정의하듯 자본주의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자를 착취하고 흡혈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관계이다.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희망도 자비도 없는 제의를 지속시킨다고 말한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자본주의라는 종교운동의 본질은 종말까지 견디기, 궁극적으로 신이 완전히 죄를 짓게 되는 순간까지, 세계 전체가 절망의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견디기이다. 그것은 절망의 상태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학적 정치적 단편>에서 현존하는 상태를 해체하는 메시아를 바라야 한다고 말한다.

  벤야민이 쓴 몇 편의 글을 읽고 내게 드는 몇 가지 물음이 있다. 인간의 종교성에 관한 물음, 그리고 미래에 실현될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물음. 나는 나를 종종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주의’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는 내가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통상적인 의미의 사회주의는 아니다. 니체가 말하듯 첫 번째 판단은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시대의 판단이다. 통상적인 판단은 우리가 경험하는 삶과 세계의 양태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가정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또한 현 상황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뜻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배워온 실용적이고 냉정한 지식은 그런 유토피아적 희망에 반대한다. 사실 유토피아라는 말은 이것을 실패한 모험으로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겐 끔찍했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아직도!) 역사의 필연성을 믿는 적은 사람들에겐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인에게 유토피아란 납을 금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던 10세기의 연금술이다. 이제 유토피아는 합리적이거나 최선의 길에서 인간을 벗어나게 만들어 개인과 집단의 '진보'나 '안전'을 방해하는 관념, 역사와 무관한 관념인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이런 상상 속에서 자신의 힘을 빼앗기며 무지의 도피처에서 안주하게 된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든 다르게 선택할 수 있으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즉 어떤 상황도 정해진 과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한 가지를 초과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유토피아를 공상일 뿐이라고 취급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것이다. 이진경에 따르면 인간이란 규정성을 부정하고 바깥을 향하는 존재다. 유토피아를 반대하는 사람조차 자신을 반응하기만 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가! 어떤 미래를 그린다는 것은 미래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거나 자신의 예언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자신이 당면한 역사적 문제와 실존적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실천이다. 

  나는 시대의 낙오자이자 영원한 이방인이고 싶다. 주어진 규범에 순응한 사람들, 공부를 시험공부로, 지적 호기심을 암기로 축소시켜 궤도를 뱅뱅 도는 것에서 안도감을 가지며 결국에는 창조성을 영영 잃어버리는 보수주의자를 혐오한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완전히 결정되어있지 않다. 아우슈비츠의 강고한 규범도 위반하여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렇지 않는가. 인간은 미래의 인간이다. 과거에 저항하고, 과거에 길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과거를 상상하고 왜곡해서 새로운 미래를 낳는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말처럼 과학을 중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이 무력하다고 비난하는 것이고 삶을 중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삶이 무력하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은 ‘현실주의자’나 ‘실용주의자’가 아니라 이상이나 유토피아를 꿈꾸고 행동하는 사람인 듯하다.

  따라서 나는 유토피아를 비웃는 멍청이의 의견을 거부한다. 유토피아를 알지 못하고는 사회적 삶을 이해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유토피아는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결부시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런 세계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현학적 지식인의 세계도 아니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전위적 투사의 세계도 아닐 것이다. 유토피아는 세계-내-존재라는 인간의 조건에서 희망을 인식하는 인간적 세계이다. 다시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메시아적 세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메시아는 단절된 앎과 삶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본성적으로 자신의 현실에 비판적일 것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삶의 태도가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인간을 규정하는 힘이 크다는 인지과학자들의 실험을 논외로 해도 나는 인간의 삶이 이미 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여러 가지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것과 관계한다. 우리의 경험은 새로운 경험을 만나고 축적되어 경험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를 사람들은 가치관이나 세계관 등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누구나 경험하다시피 개개인이 살아온 역사가 있으니 개별적인 인간의 판단은 판단하는 주체의 개별적인 가치관 내지 세계관에 따라 대상을 해석한다. 이것은 개개인의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특정한 가치판단일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이는 결코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그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면 바보라고 말해야하지 않는가. 적어도 인간의 불안이나 고통의 관점에서, 즉 희망이나 행복의 관점에서 세계관 자체를 가치판단할 수 있지는 않을까?

  이 문제를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그에 따르면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다. 세계관(형이상학)은 개인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사회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암묵적인 전제에 관한 이야기다. 은유적으로 말해 우리가 속한 우주, 즉 우리의 앎의(혹은 앎은 삶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삶의) 배경이 되는 가장 추상적인 토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세계관 아래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의 종교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반성적으로 고민하고 다른 세계관을 선택할 수도 있다.

  여기서 왜 누구는 유아적이고 계산적이고 적대적으로 살지만 누구는 성숙하고 이타적이고 공생적으로 사는가에 관한 의문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다. 간단히 이해하기 위해 공자의 세계관을 빌려 쓰면 소인은 '이(利)'을 추구하고 군자는 '의(義)'를 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인의 세계관이 만들어지는 곳은 ‘현실적인’ 시장일 것이다. 시장은 모든 관계를 부의 축적으로 환원한다. 반면에 군자는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자인데,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메시아일 것이다. 군자는 무언가에 유혹되어 자유로워진 자가 아닐까? 주어진 규정을 박차고 나가며 비규정적이고 불가지적인 영역을 본 자가 아닐까? 충혈된 고래의 눈을 가진 자가 아닐까?

  세상에 규칙이 없는 곳이 없다면, 모든 곳에서 위반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유혹당하여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은 상식과 달리 도덕적 자아가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인 듯하다. 궁극적으로 유혹당한다는 것은 악해지지 않고 선해지려는 결단이리라. 벤야민이 신적 폭력이라고 말했던 것, 그 불확실한 해체의 과정은 이런 결단의 과정이 아닐까? 그러나 알다시피 자유롭게 산다는 것,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이 쉽고 편하고 간단한 삶을 위한 처방은 아닐 것이다. 만약 자유로워 지는 것이 쉬운 일이라면 자유에 대한 고민은 이미 끝났어야 했다. 차라리 이것은 위험하고 창조적이고 인간적인 것일 것이다.

  이런 세계관, 이런 삶의 태도를 나는 희망이라고 부른다. 바라건대 희망은 조금의 인간성이라도 남아있다면 인간이 존속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아니, 인간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 자체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희망은 오직 인간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메시아란 희망을 희망하는 경향을 말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여기가 휴머니티가 살아있는 거주지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규범에 순응하는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불확실한 심연에 존재하는 것일 것이다. 통상적인 규범에의 순응이 아니라 단호하고 꿋꿋하고 예외적인 저항에 있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할 수 있다. 그런 세계관, 그런 세계.

 

(더 쓰려고 했는데 힘들어서 다음으로 미룹니다. 그런데 이어서 쓰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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