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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4주차 쪽글

효영 2017.09.28 16:44 조회 수 : 170

1장 차이 그 자체

 

4절

차이와 망아적 재현: 무한대와 무한소

차이가 행하는 선별이란, 일의성 안에서 다의성이 나타나고 스스로 펼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성립한다. 이 때 무한대와 무한소라는 큼과 작음은 이러한 다의성의 하나의 선택지이기에 거꾸로 한편에서 큼과 작음은 동일성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이러한 큼과 작음의 상호 동일성을 발견할 때, 재현은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115)의 모습을 취한다. 큼부터 작음까지, 무한대부터 무한소까지 모든 것으로 온갖 변신을 취할 때, 그 전체로서의 개념은 ‘규정을 근거fondement의 자리에 놓는 가운데 순수한 차이로 재현한다.‘(116) 여기서 유기적 재현의 형상과 구별되는 망아적 재현의 ’근거‘란 무엇인가? ’형상’이 동일성의 요구들이라면, ‘근거‘는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향한다. 형상이 어떤 제한을 뜻한다면, 근거는 무한한 생성이다.

 

이유로서의 근거

그래서 망아적 재현의 원리로서의 근거는 무한 또는 극한과 상통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이나 헤겔의 변증법에서 한계가 어떻게 기묘하게 ‘극한‘으로 탈바꿈을 하는지 발견한다. 양자의 목적지는 ’근거를 향한 수렴‘이다. 따라서 헤겔과 라이프니츠는 적어도 망아적 재현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망아적 재현의 무한이라는 요소는 언제나 유한한 규정 속에 존재한다. 유한한 규정이 막 사라질 찰나에 무한으로 태어날 그 순간에 망아적 재현은 위치한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다시 무한한 두 과정 사이에서, 무한하게 작은 것과 무한하게 큰 것 사이의 양자택일에 다시 부딪힌다.

 

헤겔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모순

헤겔은 차이를 충분하게 멀리 밀고 나아갈 때, 상이성은 대립으로, 모순으로, 마침내 모든 실재성이 절대적 모순 그 자체로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즉 차이의 절대적 최대치로서 차이인 모순에 도달하면 그것은 스스로 해소된다. 그러나 앞서 서론에서도 들뢰즈는 헤겔의 변증법을 ‘거짓된 추상적 운동’(45)이라고 비판한 바 있듯 그것은 무한의 도입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지점을 갖는다. 모순은 내면성의 운동이거나 외면성의 운동을 형성하는데, 전자가 부정을 통한 정립된 모순이라면, 후자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즉자적인 모순이다. 우리가 어떤 ‘내생적, 본질적, 질적, 종합적, 생산적인 차이’를 발견하는 지점은 전자이다. 즉 타자에게 무관심한 상태 혹은 배제하는 상태에서의 긍정적이지만 즉자적인 상태의 모순을 견뎌내고 지양할 때, 우리는 스스로는 자신이 배제했던 그 타자가 되어야 하고, 이러한 선별적 시험을 통해 차이는 근거로까지 이끌려간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를 갖는 칸트식의 무한과 상통하는 헤겔적 무한은, 결국 본질적인 것에서 출발해 본질적인 것으로 되돌아오며, 타자를 본질적으로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반면 동일한 신학적 의미의 무한을 도입하지만, 무한을 유한 내에 도입하는 라이프니츠는 본질적인 것이 타자를 본질 안에 포함하지 않고, ‘부수적 속성 안에, 개별적인 경우 안에 포함하고 있’(123)음을 보여준다. 들뢰즈는 그래서 라이프니츠식의 ‘무한소’가 헤겔식의 ‘무한’과 구별되는 지점은, 이러한 부수적 속성들의 고유한 독창성, 즉 본질에 안지 않고 그것을 부수적 속성 또는 하나의 경우로 껴안음에 주목한다. 본질적인 것이 비본질적인 것을 자신의 본질 안에 포섭하려고 할 때, 비본질적인 것은 그러한 본질적인 것을 하나의 ‘경우’로 포함한다. 본질에 담느냐, 그것을 단지 여럿 중 하나의 경우로 담느냐. 들뢰즈는 이를 ‘부차모순vice-diction’이라고 이름붙인다.

 

라이프니츠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부차모순(연속성과 식별불가능자들)

그렇다면 오직 부차적 속성들에만 관계한다는 것은 차이를 보다 작은 것, 무한히 작은 것으로 만드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미분적 관계 앞에서 차이는 결국 소멸해버린다고 말해야 할까? 들뢰즈는 이 때 사라지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직관이라고 말한다. 들뢰즈가 즐겨 인용하는 라이프니츠의 파도의 비유와 같이 우리는 비록 물방울 입자 하나하나의 소리는 구별하지 못하지만, 그 소리들이 모여 구성한 전체의 소음으로서의 파도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거의 0에 수렴하는 미미한 것이라고 해서 미분비 앞에서 차이가 소멸한다고 말해선 안된다. 반대로 그것들이 있기에, 이 미분비가 모여서 변이의 등급들을 우리가 지각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상호적 규정’이라면, 우리는 두 번 째 ‘완결된 규정’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들뢰즈는 여기서 ‘완결된 것complet’과 ‘전체적인 것l’entier’을 혼동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가령 미분비는 곡선의 본성에 의해서만 규정되고, 나머지 부분은 적분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미분비는 완결된 규정이지만 부분일 뿐이라는 점에서 전체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분에 대한 적분의 역할은 그것을 현실적으로 실존하게끔 구성한다는 점에만 한정된다. 거꾸로 말해, 미분은 꼭 적분에 기댈 필요 없이, 자신 스스로의 극한 속에서 완결됨과 동시에 전체적임을 획득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미분비들의 극한은 ‘변이의 등급들’에 있다고 보았고, 이 각각의 등급에서 특이점이 바로 급수의 극한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미분비는 누승적 잠재력의 순수한 요소’(125)가 된다.

여기서 들뢰즈는 연속체 안에 있는 비본질적인 것의 두 범주를 구분한다. 본질들 자체를 형성하는 예비라는 점에서 중요한 비본질적인 것들은, 특이한 것과 평범한 것, 혹은 독특한 것과 규칙적인 것의 구별을 통해 형성된다.

라이프니츠의 입장에서 비본질적인 것을 지배하는 것이 연속성의 법칙이라면, 본질들 전체를 이루는 것이 식별불가능자들의 원리이다. 연속성의 법칙이란, 인간과 동물 혹은 다른 생물의 차이를 영혼의 존재여부로 구분하지 않고, 모든 존재에 영혼을 부여함에서 온다. 책상에도 영혼은 있다. 다만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책상과 같은 존재자는 의식활동이 미미할 뿐 혹은 0으로 수렴하는 상태일 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부수적 속성들, 변용들, 혹은 완결된 경우들을 지배’한다. 한편 ’자연에는 서로 완전히 동일하고 내적인 또는 고유한 명칭에 근거한 차이가 발견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별불가능자들의 원리가 있다.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에서는 기초개념(모나드들)이 모여 김효영, 책상 등을 구성하고, 이것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표현한다. 이 때 ‘각자의 방식’을 들뢰즈는 ‘특정한 미분적 관계’라고 보았고, 이런 의미에서 각 모나드들의 세계 표현 이전에 이러한 ‘미분비와 특이점들’이 이미 연속체 안에 실행되는 함축을 가지고 있음을 지시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수적 속성들의 연속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개체적 본질들의 구성에 권리상 선행한다’(127)고 들뢰즈는 말할 수 있는 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와 세계의 관계이다. 세계가 각각의 모나드에 내재되어있듯, 주어에는 술어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술어들이 각각의 주어에 내재하기에 앞서 이 모든 주어들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의 공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127)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공가능한 세계 개념에서 그의 미분비와 특이점들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얻는 듯 보인다. 무수히 많은 가능한 세계라는 개념은 ’매번 어떤 특정한 관점을 통해 봉인‘되고, ’거꾸로 이 중심들은 전개되고 개봉되기도‘ 한다는 그가 제시하는 표현적 중심들에 적절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연속성의 법칙에 따라 세계가 지닌 부수적 속성은 봉인과 개봉에 따라 세계로 나타나고, 그 결과물이 식별 붕가자들의 원이라는 본질들에 대한 원리가 된다. 그리고 양자를 매개하는 중요한 차이, 즉 어떤 세계를 ‘선별’할 것인가는 충족이유에 관계된다.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어떤 차이의 철학을 발견한다면 이 충족이유율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해석일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충족이유율이 어떤 비교급으로서의 선별이유가 아니라, ‘차이를 절대적 최대치에 이끌어가는 최상급’으로서의 선별이라고 본다. 표현된 세계에 드러나는 유한한 차이 뿐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무한한 차이가 만들어내는 가능한 세계로서의 바탕, 이 두 가지 방식에서 들뢰즈는 망아적 재현을 본다.

 

망아적 재현 혹은 무한한 재현의 불충분성

유한한 재현은 불충분하다. 유라는 동일성안에 갇혀있고 유사성 안에서 이런 종속을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한 재현 역시 불충분할 수 있다. 무한한 재현은 질료인 바탕과 형상인 본질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나 무한한 재현에서 보편자가 무한한 연속인 부수적 속성들로 간주되지 않고, 본질들로 간주되어 봉인될 때, 차이의 사유는 본질들의 단순한 유비나 부수적 속성들의 단순한 상사성으로부터 해방되기 어렵다.

왜 그런가? 종국에 ‘무한한 재현은 재현의 전제조건인 동일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130) 동일성이 무한으로 사유되어도 사정은 그렇다. 무한소라는 관점은 충족이유로, 무한대라는 관점은 모순으로 귀결되어 동일성에 봉사한다. 물론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와 헤겔이 비록 무한한 재현을 도입, 차이를 개념 일반에 꾸겨넣지 않고, 광대한 범위로 사유했다고 본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동일성에 종속된 것으로서의 차이에 대한 접근, 상사성과 유비안에 갇혀 있는 차이에 대한 사유였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를 ‘동일자의 휴식과 평온을 전혀 깨뜨리지 못하는 거짓 광기’라고 평한다.

 

5절

차이, 긍정, 부정

제한이나 대립 앞이나 안에서 우리는 어떤 우글거리는 차이들, 누승적 잠재력을 띤 다양체로서의 차이들을 경험한다. 물론 이 차이들은 동일자 안에서 해소될 것인데, 그러한 해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불균등한 것들을 하나의 다양체 안에서 분배하는 데 있다.’(132) 만약 제한이 일차원의 단순한 역량에 대응한다면, 대립은 이차원의 역량을 재현한다. 이 때 종합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표면에 국한된 것이다. 들뢰즈는 이에 반하는 ‘원천적이고 강도적인 깊이’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어디서든 차이의 깊이가 일차적이기에, 이 깊이를 긍정하는 것은 결코 밋밋한 부정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투쟁과 같은 거짓된 깊이에 속아서는 안된다. 차이들은 유희하는 공간이다.

들뢰즈는 다시금 라이프니츠에 주목한다. 라이프니츠가 ‘바탕 안에서 한 다양체의 특이점과 미분적 요소들을 분배하고 세계 창조 안에 어떤 유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만 라이프니츠는 발산(깊이로서의 차이)을 발견해놓고, 그것을 다시 부정적 제한, 수렴의 조건에 묶어버렸다. 들뢰즈는 아쉬워한다. 그가 발산 자체를 긍정했더라면, 혹은 비공가능성들이 하나의 세계, 영원회귀라는 단 하나의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차이는 대립을 가정하지 않는다. 대립이 차이를 가정할 뿐이다. 모순 역시 차이로 환원되지 않는다. 모순은 밋밋하다. 차이가 밋밋한 평면에 투사되는 것은 오직 차이가 미리 설정된 어떤 동일성에 강제로 놓일 때이다. 차이는 자신만의 고유한 공간의 깊이 안에 있고, 언제나 특이점들로 구성된 것들로서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이러한 운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차이의 재현을 본 것일 뿐이다. 들뢰즈가 주목하는 바, ‘특이점의 주체는 알아보거나 재인하지 않는다.’(136)

 

가상으로서의 부정적 사태

그렇다면 모든 규정적인 것은 다 나쁜가? 그렇기에 다 배척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들뢰즈는 힘 주어 말한다. ‘차이는 본질적으로 긍정의 대상, 긍정 자체이다.’(136) 규정 아니면 무규정이라는 양자택일, 이항대립이여 물러가라. 그럼에도 긍정 자체인 차이에서 곧바로 아름다운 영혼을 떠올려선 곤란하다. 들뢰즈는 서론에서도 순수한 차이들을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으로 전락시키는 위험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만약 아름다운 영혼에게 순수한 차이들을 일깨워주려면,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두 가지의 방식이 있다. 하나는 시인의 방식이다. 시인은 창조적 역량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에게 모든 질서와 재현이 전복되는 가운데, 본연의 차이 자체는 긍정된다. 또 다른 방식은 정치가의 방식이다. 그는 일탈적인 것, 차이나는 것을 부정하고, 질서 확립에 몰두한다. 직관적으로 전자는 우리가 지향할 것, 후자는 지양할 것처럼 읽히지만 사정은 복잡하다. 정치가의 부정이 나쁘다면 그러한 부정을 다시 부정하는 것은 긍정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있을까? 니체는 아니라고 외친다. 그가 모든 부정에 “예”라고 답하는 당나귀를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거다. 당나귀는 차이는 본래 악이고, 부정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짐을 진다는 속죄함을 통해서만 사할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인다. 그러나 부정에 부정으로 응답하는 당나귀는 부정성을 띤 모든 것을 보존할 뿐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다를까? 그는 무한한 원환을 보여주지만,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때에 선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오직 ‘짊어지는 자와 짐이 된 자를 위해 봉사하는 선별’일 뿐이다. 차이의 선별은 정확히 반대로 간다. 동일한 변증법을 들뢰즈가 택한다고 해도, 역량으로서의 변증법이 헤겔의 변증법과 차이를 두는 지점은, 거대한 전체의 보존을 택하는가, 그것을 깨뜨리고 원환을 일그러지게 만드는가에 있다.

 

부정적인 것의 배제와 영원회귀

이러한 긍정의 환영, 대용품같은 환영만을 산출하는 짐을 내던져, 가볍게 해야 한다. 당나귀는 짐 지우는 것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답해야 한다. 그러나 아니오라고 답해도 당나귀는 노예일 뿐이다. 반면 “예“라는 답으로부터 부정과 파괴적인 귀결을 끌어내는 것은 주인의 관점이다. 이는 부정의 부정으로서 도달하는 것과 구별되는 긍정 그 자체이다. 담배 피지 말라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본래 비흡연자로서 사는 것과 매우 다르다. 바꿔 말하면 노예가 복종하는 확립된 가치들과 주인이 긍정하는 창조 사이에는 본성적 차이가 있다. 부정을 끝까지 밀고 나간들, 그것이 긍정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평균적 형상들을 무한으로까지 끌고 간다고 해서 극단적 형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극단적 형상이란 차이남의 일이성이고 비형상, 즉 ‘변신과 변형들을 거쳐가는 영원한 비형상’(141)이다. 참된 선별이란 영원회귀는 전체의 보존, 거대한 기억 안에 보존할 것을 거부한다. 영원회귀의 독창성이란 능동성을 띠는 망각에 있다. 망각이란, 부정하는 모든 것을 축출하는 것, 때로 폭력적인 원심운동을 통해 ‘영원회귀의 시험을 견뎌내지 못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영원회귀의 원환은 본연의 차이이며, 같음은 끄트머리에 위치할 뿐이기에 이 원환은 끊임없이 일그러지고 이탈하는 원환의 모습을 갖는다.

다시, 부정은 결코 긍정의 발동 장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긍정적인 미분적 요소들이 있을 뿐이다. 만약 차이의 결과로서 부정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차이를 분만하는 역량이나 의지의 그림자’, 즉 환영일 뿐일 거다. 재현 앞에서 세계는 어떤 것도 끌어들이거나 움직이지 못한다. 반면 운동은 다원적인 중심들을 함축한다. 그래서 차이의 운동이 원심력이라면 재현의 운동은 구심력일 거다.

재현 역시 재현의 재현을 중복한다고 해서 재현 이하의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 자신의 중심에서 기형화되고 이탈되고 강탈될 때에만, 그래서 분화의 길로 들어설 때에만, 무엇보다도 그리고 이러한 발산과 중심이탈을 긍정할 때에만, ‘차이지으면서 나아가는 차이’(144)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재현의 영역을 떠나고 있는 예술 작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예술은 ‘체험’되기 위해서는 ‘초월론적 경험론이나 감성적인 것에 대한 학문이 되기 위해’ 재현의 영역을 떠난다.

일단 재현을 제거하고, 감성적인 것 안에서도 오로지 감각밖에 할 수 없는 것, 그 때 경험론은 실로 초월론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차이들로 가득한 강렬한 세계 속에서 감성적인 것은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바꿔 말하면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래서 영원회귀란 모든 변신들 안에 이미 현전하고, 동시적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니체가 보여주었듯 이러한 차이와 영원회귀는 구별되는 사태가 아니다.

들뢰즈는 그래서 칸트의 철학이 철학사에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시한다. 제한이든 대립이든, 분석이든 종합이든, 무한한 실체이든 유한한 자아이든, 차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동일자에 종속시킨다는 점에서 앞뒤는 무차별적이다. 반대로 니체가 신의 죽음을 통해 자아의 와해됨을 외칠 때, 이 존재는 차이들을 통해 언명된다. 만약 칸트에게 주목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꼭 한 지점에 국한되어서인데, 칸트의 코기토에 ‘일종의 불균형, 큼새나 균열, 권리상 극복 볼가능한 어떤 권리 소외를 도입’했다는 점에 한해서이다. 들뢰즈의 칸트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들뢰즈에게 칸트의 주목할 만한 지점은, 선험적 주체의 발견이나 실천이성의 도덕성을 위해 요청되는 자아, 세계, 신의 일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나와 그를 규정짓는 나 사이의 분열, ‘어떤 권리적 차원의 분열증’에 있다.

 

6절

플라톤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현대철학의 과제가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의성에 모든 차이를 종속시킨다는 점에 대한 전복이다. 거꾸로 플라톤주의 자체는 이미 차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데아를 아직 차이 그 자체의 순수한 개념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도한 플라톤 비판역시 이러한 이데아의 가치(대체 불가능함)을 발견하였다는 점에서 ‘차이의 변증술’이라는 고유한 방법은 하나의 특이점으로서 다른 특이점으로 도약하는 힘을 갖는다. 플라톤은 개념을 그대로 두지 않고 계속 나눔을 실행해가는데, 이 나눔은 오히려 개념 일반의 요구들보다 이데아의 영감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묻고 있는 거다. 플라톤 주의는 반드시 보완되거나 대체되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나눔의 방법은 진정한 차이의 철학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기법이 아닐까?

 

나눔의 방법에 등장하는 것들: 지망자와 근거의 시험, 물음과 문제, (비)-존재와 부정적인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해석과 달리, 플라톤의 나눔은 본래 합리적인 이유를 갖지 않는다. 플라톤은 합리적 이유없이 나눈다. 들뢰즈에 따르면 만약 이러한 나눔의 절차에 결여된 것이 있다면, 매개이다. 즉 중간항 구실을 하는 개념적 동일성의 결여이다. 문제는 종별화가 아니라 선별이다. 줄세우기가 아니라 순수한 계통 찾지가 관건이다. ‘금 찾기 바로 이것이 나눔의 모델이다.’ 그래서 플라톤에게 차이란, 혼합물 속에서 불순한 것과 순수한 것을 가려내는 차이의 순수한 개념이지 결코 개념 일반 안에서 매개된 차이가 아니다. 들뢰즈는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을 한다. 플라톤이 의도하는 목표란 지망자들의 시험이다. 실제로 대화편에서는 자신의 순수함, 진짜임을 주장하는 많은 지망자들이 등장한다. 당연히 이러한 플라톤의 나눔의 절차는사물과 허상간의 선별이다.

앞서 중요한 것은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이러한 나눔의 방법에 힘입어 우리는 어떻게 일한 차이를 만들 수 잇을까? 그런데 플라톤의 선별의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다. 오직 신만이 자격이 있다. 물론 지망자간의 우열이 없지는 않기 때문에 그 중에 누가 참된 지망자이고 참된 참여자인지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신을 끌어들이는 신화적 유희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럼에도 들뢰즈는 플라톤 사상의 양대축이지만 곧 힘을 잃어버리는 변증술과 달리 나눔 자체는 신화를 통해 힘을 얻고 이분법을 극복한다고 본다. 신화의 구조가 원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플라톤을 영원회귀의 주창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들뢰즈는 플라톤의 신화를 통해 구성하는 순환의 모델에 주목한다. 그 모델 안에서 지망자들을 선별하는 적합한 근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분유’라는 개념은 이러한 근거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오직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만이 근거 자체이다. 그러나 지망자들은 경쟁적으로 그 근거에 호소한다. 들뢰즈는 근거가 차이를 측정하고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라고 지적한다.

나아가면 여기서 우리는 신플라톤주의가 전개한 삼항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분유 불가능한 것(이데아/근거를 갖는 자), 분유되는 것(이데아의 속성/근거), 분유자(지망자들/근거에 호소하는 자). 아버지, 딸, 구혼자의 관계가 한 예가 된다.

근거의 시험은 물음/문제 제시와 이에 힘입어 앞으로 나아가는 변증술의 형식을 취한다. 문제는 해결되기에 앞서 이해를 요한다. 여기서 문제란 헤겔식의 부정적인 것이 떠안는 역할과 유사하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플라톤의 문제가 결코 부정적인 역할을 떠맡지 않는다는 데 있다. 들뢰즈가 적절하게 제시하는 바, 우리는 이 대목에서 플라톤이 스스로 제기했던 부정에 관한 성찰을 참조할 수 있다. ‘비-존재‘라는 표현에서 ’비’는 ‘반대’가 아니라 ‘다름’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비-존재를 차라리 (비)-존재라 적야 하고, 그보다는 ?-존재라고 적는 편이 훨씬 낫다’(159)고 본다. 이 (비)-존재는 변별적 차이 관계가 형성되는 지반이고, 그 지반 안에서 긍정을 자기 발생의 원리로 발견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차이의 철학에 대한 주석

들뢰즈는 이 부분에서 이러한 ‘비ne-pas’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설명하는데 꽤 긴 노트를 달고 있다. 들뢰즈가 요약하는 바 하이데거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1) 비 NIcht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표현한다.

2) 이러한 차이는 주름이다. 그것은 존재를 구성하고 있으며, 드러냄과 감춤의 이중 운동 안에서 존재가 존재자를 형성하는 방식을 구성하고 있다. 진정으로 존재는 차이의 분화소(개체화하는 차이)이다.

3) 차이는 물음의 존재이다.

4) 차이에는 종합도, 매개도, 타협도 없다. 있는 것은 오히려 분화적 차이에 집착하는 끈덕진 고집이다.

5) 오로지 차이가 사유될 때만 같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사유는 재현의 동일성에서 해방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런 듯 하여도, 하이데거가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 가하는 비판을 보면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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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순이 추상적이라고 말할 때, 들뢰즈는 단순히 의식이 모순을 살아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모순이 생산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발생의 결과물이며 따라서 발생의 동력이 될 수는 없다.’(94, Joe Hughes)

2)‘모든 영혼은 무한한 것을 인식하고, 모호한 방식으로 이긴 하지만, 마치 내가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바다의 굉장한 소음을 들을 때 난, 물론 서로 구별할 수는 없지만, 전체의 소음을 구성하는 모든 파도의 개별적인 소음들도 듣는 것처럼, 모든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호한 지각들은 바로 전 우주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들의 결과이다.’(빌헬름 라이프니츠, 윤선구 역, <자연과 은총의 이성적 원리>, 242쪽, 아카넷)

3) ‘...또한 나는, 모든 창조된 존재는, 따라서 창조된 모나드도 마찬가지로, 변화하도록 되어있고, 이러한 변화는 모든 모나드에게서 연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사실로 인정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변화의 원리 외에도 또한, 그것을 통하여 어떤 단순한 실체들의 규정과 다양성이 생기게 되는 변화하는 것의 세부 내용이 존재해야 한다. 이 세부 내용은 필연적으로 단일성 또는 단순성 속에 다수성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적인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까닭에 항상, 변화하는 것도 있고, 변화하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단순한 실체는 부분을 포함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성향들과 관계들의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빌헬름 라이프니츠, 윤선구 역, <모나드론>, 256-7쪽, 아카넷변화하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단순한 실체는 부분을 포함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성향들과 관계들의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빌헬름 라이프니츠, 윤선구 역, <모나드론>, 256-7쪽, 아카넷

4)빌헬름 라이프니츠, 윤선구 역, <모나드론>, 255쪽, 아카넷

5) ‘(...) 모든 모나드는 각각에 고유한 방식으로 우주를 표상하는 거울이고, 우주는 완전한 질서에 따라 규정되어 있으므로, 표상하는 것 안에, 즉 영혼의 지각 안에 그리고 이와 함게 또한, 그에 따라 영혼 안에, 즉 영혼의 지각 안에 그리고 이와 함께 또한, 그에 따라 영혼 안에 우주가 표상되는 육체 안에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질서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빌헬름 라이프니츠, 윤선구역, <모나드론>, 283쪽), ‘동일한 우주라도 각 모나드가 있는 위치에 따라 판명한 부분이 조금씩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모나드의 내적 상태에도 이에 상응하여 모나드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을 갖는다. 라이프니츠응 이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조망하는 경우에 비유한다. 동일한 우주를 반영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나드의 지각이 조금씩 다른 것은 동일한 도시를 바라보면서도 서 있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도시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동일한 우주의 모습이 상이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우주상에서 명석판명한 부분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 뿐이다.’ (윤선구, 333)

6) 이를 위해서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또 다른 공식, 신은 모든 가능한 세계 중 가장 최선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실재 세계 외에 신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한 세계들이 있었다. 이 때 각 세계들이 서로 모순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 세계는 ‘공가능성im-compossibilite‘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아담이 사과를 딴 세계와 따지 않은 세계는 공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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