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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4주차 쪽글

선우 2017.09.28 13:51 조회 수 : 108

손끝이 기억하기를 바라며!^^

4절

선별은 유기적 재현의 요구들에 따라 평균적 형상들을 측정하고 할당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의적 존재의 단순한 현전 안에서 극단적 형상들이 나타나고 각기 자신을 펼쳐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115)

극단은 큼이나 작음 안의 무한에 의해 정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무한은 심지어 큼과 작음의 상호 동일성, 극단들의 동일성까지 의미한다. 자기 자신 안에서 그런 무한을 발견할 때, 재현은 더 이상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의 모습을 취한다.(115)

개념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르기까지 온갖 변신을 취하는 규정을 따라다니면서 그 규정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 그리고 그 규정을 근거의 자리에 놓는 가운데 순수한 차이로 재현한다. 이 근거가 중심이 될 때, 상대적 최소치나 최대 앞에 있는지의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116)

근거는 하나이면서 언제나 똑같은 ‘총체적’ 계기이다. 근거는 또한 차이가 소멸하는 동시에 생산되는 계기, 사라지는 동시에 나타나는 국면이다.(116)

망아적 재현은 차이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차이를 선별하지만 차이를 근거와 관계짓는 무한을 도입하는 가운데 선별하기 때문이다.(118)

종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독특성뿐 아니라 유에서 벗어나는 참된 보편성이 동시에 하나의 매개항 안에 보존되기 때문이다. 망아적 재현의 원리는 근거에, 그 재현의 요소는 무한에 있다. 반면 유기적 재현의 원리는 형상에, 그 재현의 요소는 유한에 있다. 규정을 사유하고 선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무한이다. 따라서 차이는 이제 규정에 대한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으로 등장한다.(118)

하지만 왜 망아적 재현에는 여전히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선택지가 남아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한이 유한한 규정이 사라져버린 장소가 아니라는 데 있다.(118)

망아적 재현이 자기 자신 안에서 무한을 발견한다면, 단지 유한한 규정을 존속하도록 내버려둘 때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119)

큼과 작음이 무한 안에서 서로 동일해진다는 것을 사실이다. 하지만 무한이 유한을 통해 언명되는 한에서 무한하게 작은 것과 무한하게 큰 것은 새롭게, 그리고 보다 엄격하게 분리된다.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각기 큼과 작음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무한하게 작은 것과 무한하게 큰 것 사이의 양자택일에 다시 부딪힌다. 그렇기 때문에 망아적 재현은 어떤 이원성을 향해 열려 있다.(119)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극단적이거나 상반적인 것들의 대립을 통해 차이를 규정한다.(120)

헤겔은 평온한 재현 안에서 무한하게 큰 것의 도취와 불안을 발견한다. 라이프니츠는 유한하고 명석한 관념 안에서 무한하게 작은 것의 불안을, 도취, 현기증, 소실, 심지어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안을 발견한다. 헤겔과 라이프니츠 사이의 차이는 유기적 질서를 넘어서는 두 가지 방식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120)

헤겔의 출발점은 유라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무한은 유 안에 분열을 낳고 종 안에서 분열을 제거하는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는 자기 자신이면서 종이고, 전체는 자기 자신이면서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은 본질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 타자를 본질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현상들에 관한 한 비본질적인 것-운동, 동등하지 않은 것, 차이나는 것-에서 출발한다.(120-121)

극한은 수렴에 의해 정의된다. 한 함수의 수치들이 지닌 극한은 미분비에 있다. 미분비들의 극한은 변이의 등급들에 있다. 그리고 각각의 등급에서 특이점들은 급수들의 극한인데, 이 급수들은 서로의 안에서 해석적으로 접속되고 확장된다. 미분적 관계, 곧 미분비는 누승적 잠재력의 순수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극한은 연속체의 역량이며, 마찬가지로 연속성은 극한들 자체의 역량이다.(125)

비본질적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가장 심층적인 것, 보편적인 질료나 연속체를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본질들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사실 라이프니츠의 입장에서는 연속성읠 법칙과 식별 불가능자들의 원리 사이에 결코 모순이 성립하지 않는다. 연속성의 법칙은 부수적 속성들, 변용들, 혹은 완결된 경우들을 지배한다. 식별불가능자들의 원리는 본질들, 곧 전체를 이루는 개체적 기초개념들로 파악되는 본질들을 지배한다.(126)

무한한 재현은 일차적 질료인 바탕, 그리고 주어, 자아 혹은 절대적 형상인 본질을 모두 포함한다. 무한한 재현은 본질, 바탕 그리고 그 둘 간의 차이를 동시에 근거나 충족이유에 관계 짓는다. 여기서는 매개 자체가 근거가 되었다.(129)

라이프니츠가 헤겔보다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라이프니츠에게서 바탕이 더 큰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에서 훨씬 깊은 심층, 훨씬 황홀한 망아적 축제나 바쿠스적 광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 두 경우에서도 무한한 재현은 불충분한 것 같다. 왜 그런가? 이는 결국 마지막에 가서 무한한 재현은 재현의 전제 조건인 동일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에게서 무한한 재현은 여전히 계열들의 수렴이라는 조건에 굴복한다. 헤겔에게서는 원환들의 단일 중심화라는 조건에 굴복한다. 무한한 재현은 근거를 끌어들인다. 근거는 물론 동일자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근거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동일률을 각별히 중시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130)

무한한 동일성 그 자체가 분석적으로 정립되는지, 아니면 종합적인 것으로 정립되는지의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차이는 여전히 동일성에 종속되어 있다. 차이는 부정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있으며, 상사성과 유비 안에 갇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재현 안에서 광기는 미리 형성된 광기, 동일자의 휴식과 평온을 전혀 깨뜨리지 못하는 거짓 광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한한 재현은 유한한 재현과 똑같은 결함을 지닌다. 그 결함은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차이의 기입과 혼동하는 데 있다. 개념 일반의 동일성 안으로 차이를 기입하는 것과 차이의 개념을 혼동하는 것이다.(131)

 

5절

힘들의 대립이나 형상들의 제한이 명확하게 윤곽을 띠기 위해서는 우선 훨씬 심층적인 어떤 실재적 요소가 필요하다. 이 요소는 형상을 띠지 않고 누승적 잠재력을 띤 다양체로 정의되고 규정된다.(132)

제한은 일차원의 단순한 역량에 대응한다.

대립은 이차원의 역량을 재현한다.(132)

어쨌든 거기서 우리가 놓치게 되는 것은 원천적이고 강도적인 깊이다. 이 깊이야말로 공간 전체의 모태이자 차이의 일차적 긍정이다. 그 안에는 어떤 것이 자유로운 차이들의 상채로 살아 우글거리고 있다.(133)

차이는 대립을 가정하지 않는다. 대립을 가정하는 것이 차이가 아니라 차이를 가정하는 것이 대립이다. 그리고 대립은 차이를 해소하기는커녕, 다시 말해서 근거로까지 끌고 가기는커녕, 차이를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우리는 즉자적 차이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차이는 모순으로 환원되거나 소급되는 것이 아님을 또한 말하고 있다. 모순은 깊이가 얕고 차이만큼 깊지 않기 때문이다.(134)

차이는 본질적으로 긍정의 대상, 긍정 자체다. 긍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차이다. 그러나 여기서 차이의 철학이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운 영혼으로 드러날 우려는 없는가? 사실 아름다운 영혼은 도처에서 어떤 차이들을 발견하고 불러들인다. 하지만 역사가 피비린내 나는 모순들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생성하는 곳에서, 그가 불러들이는 것은 존중해줄 만하고 화해시킬 수 있으며 연합 가능한 차이들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전쟁터에 내던져진 평화의 심판자인 것처럼 처신한다. 용서 없는 싸움에서 의견 차이로 인한 단순한 분쟁이나 차라리 오해로 빚어지는 갈등만을 보려는 것이다.(137)

필연적 파괴를 불러들이는 두 가지 방식. 1) 시인의 방식: 이 역량은 모든 질서와 모든 재현을 전복하는 가운데 본연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 2) 정치가의 방식: 이 방식은 우선 일탈적인 것, ‘차이나는’ 것을 부정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역사 안에서 확립된 질서를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혹은 이미 세상에서 자신의 재현 형식들을 부추기고 있는 역사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이다.(137)

차라투스트라의 당나귀의 예스는(긍정한다는 것은) 짊어지고, 떠맡고, 감당한다는 것이다. 이 당나귀나 변증법적 황소에게는 책임감을 향한 지독한 도덕적 취향과 도덕적 향수가 있다. 이를 보면 마치 속죄에 기대서만 긍정할 수 있는 듯하고, “예‘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분열과 찢김의 불행들을 통과해야만 할 것처럼 보인다. 마치 본연의 차이 자체가 악이고 또한 부정성을 띠고 있어서, 오로지 속죄할 때만, 다시 말해서 부정된 것과 부정 자체의 무게를 동시에 감당할 때만 긍정을 산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138-139)

긍정은 차이, 거리를 긍정한다. 차이는 가벼운 것, 공기 같은 것, 긍정적인 것이다. 긍정한다는 것은 짐을 짊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짐을 던다는 것, 가볍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140)

니체는 당나귀의 “예”와 “아니요”를 디오니소스-차라투스트라의 “예”와 “아니요”에 대립시킨다. 이는 두 가지 관점의 대립이다. 그것은 “아니요”로부터 긍정의 환영을 끌어내는 노예의 관점, 그리고 “예”로부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귀결을 끌어내는 ‘주인’의 관점-오래된 가치를 지키는 보수주의자들의 관점과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창조자들의 관점-사이의 대립이다. 니체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분명 역량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력은 현행 가치들의 귀속 관계에 의해 판명되기 때문이다. 노예가 권력을 잡는다고 해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140)

참된 선별의 운영은 영원회귀의 소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균적 형상들을 오히려 배제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한 형상”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극단성은 상반적인 것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차이남의 일의성일 뿐이다. 우월한 형상은 무한한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원회귀 자체의 비형상, 변신과 변형들을 거쳐가는 영원한 비형상일 뿐이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만든다’. 왜냐하면 우월하고 월등한 형식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영원회귀의 독창성은 기억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낭비에 있고 능동성을 띠게 된 망각에 있다. 부정성을 띤 모든 것, 부정하는 모든 것, 부정적인 것을 짊어지고 있는 모든 평균적 긍정, “아니요”에서 비롯하고 잘못 빠져 들고 있는 모든 창백한 “예”, 영원회귀의 시험을 견뎌내지 못하는 모든 것, 이런 것들은 부정되어야 한다.(141-142)

만일 영원회귀가 어떤 원환이라면,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본연의 차이며, 같음은 단지 가장자리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 순간 중심을 이탈하고 끊임없이 일그러지는 원환으로서, 단지 비동등성의 주위만을 맴돌고 있다.(142)

부정은 차이다. 그러나 작은 쪽에서 본 차이, 낮은 곳에서 본 차이다. 이와 거꾸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다시 바로 세워놓고 보면, 차이는 긍정이다. 이 명제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령 차이는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 긍정 자체는 다양체의 성질을 띤다는 것, 긍정은 창조라는 것, 그뿐 아니라 긍정은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의미한다. 긍정은 차이를 긍정하는 긍정으로, 그 자체가 차이인 긍정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부정적인 것을 결코 발동 장치가 아니다.(142)

재현 앞에서는 차이를 통해 긍정된 세계는 달아나기 마련이다. 재현은 단 하나의 중심만을 지닌다. 단일하고 회피적인 원근법만을 지니며, 따라서 거짓된 깊이만을 지닐 뿐이다. 재현은 모든 것을 매개하지만, 그 어떤 것도 끌어들이거나 움직이지 못한다. 반면 운동은 다원적인 중심들을 함축한다. 거기에는 포개지는 원근법들, 뒤얽히는 관점들, 재현을 본질적으로 기형화시키면서 공존하는 계기들이 함축되어 있다.(143)

세계는 재현 안에서처럼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즉 세계는 완성되어 있고 무제약적이다. 영원회귀는 완성된 세계 자체의 무제약성이다. 그것은 차이를 통해 언명되는 일의적 존재다.(146)

반복은 재현에 대립한다. 여기서 접두사(re)의 의미는 바뀌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차이는 단지 동일자에 대한 관계 안에서 언명되지만, 전자의 경우는 일의적인 것이 차이나는 것에 대한 관계 안에서 언명되기 때문이다. 반복은 모든 차이들의 비형식적 존재이고 바탕의 비형식적 역량이다. 이 역량을 통해 각 사물은 자신의 재현이 허물어지는 극단적 형상에까지 나아간다. 반복의 궁극적 요소는 계속되는 불일치에 있으며, 재현의 동일성에 대립한다. 또한 영원회귀의 원환, 차이와 반복의 원환은 어떤 일그러진 원환이다. 이것은 차이나는 것을 통해서만 같음을 언명한다.(146-147)

니체는 자아가 와해될 때만 신의 죽음이 현실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듯하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존재이다. 이 존재는 차이들을 통해 언명되지만, 이 차이들은 실체 안에 있는 것도, 주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차이들은 지하에서 울리는 긍정들이다. 만일 영원회귀가 가장 지고한 사유, 다시 말해서 가장 강렬한 사유라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가장 높은 지점에서 성립하는 영원회귀의 극단적 일관성이 사유하는 주체의 일관성, 세계의 일관성, 그리고 보증하는 신의 일관성을 모두 배제한다는 데 있다.(148)

사실 칸트는 이성 신학을 법정에 세울 때, 동시에 “나는 생각한다”의 순수 자아 안에 일종의 불균형, 틈새나 균열, 권리상 극복 불가능한 어떤 권리 소외를 도입한다. 순식간에 우리는 어떤 권리적 차원의 분열증에 빠져 들고 있는 셈이다. 이 분열증은 사유의 지고한 역량을 말해주고 있으며, 모든 개념적 매개와 화해들에 반하여 차이 위에 존재를 직접적으로 개방하고 있다.(149)

 

6절

플라톤주의의 전복. 이것이 현대 철학의 과제를 정의한다. 이 전복은 플라톤적 성격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이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149-150)

이데아도 역시 차이를 어떤 개념 일반의 동일성에 묶어두기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데아는 차이 그 자체의 순수한 개념, 고유한 개념을 찾는 것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150)

차이의 변증술은 차이에 고유한 방법-나눔-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개 없이, 중간항이나 합리적 이유 없이 진행되는 무매개적 절차이고, 어떤 개념 일반의 요구들보다는 이데아의 영감들에 의존한다. 개념 안의 가정된 동일성과 비교하면, 나눔은 사실 어떤 변덕스럽고 일관되지 못한 절차이다. 하나의 독특성에서 다른 하나의 독특성으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방법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눔의 방법은 진정한 차이의 철학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모든 변증술적 역량을 집약하는 기법, 그래서 플라톤주의의 전복 가능성을 동시에 가늠하는 기법이 아닐까?(150-151)

나눔은 ‘일반화’를 뒤집어놓은 것이 아니다. 결코 종별화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종별화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별의 방법에 잇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규정된 유를 한정된 종들로 나누는 것, 혹은 순수하지 않은 소재에서 출발하여 순수한 계통들을 선별하는 것이다.(151-152)

나눔의 방법이 지닌 의미, 그것이 의도하는 목표는 경쟁자들의 선별에, 지망자들의 시험에 있다. 그것은 부정이 아닌 싸움에 있다.(152)

플라톤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유일한 문제, 학문과 기술들에 대한 플라톤의 분류를 주재하는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경쟁자들을 가늠하는 데 있다. 그것은 지망자들을 선별하는 문제이고, 유사 유나 거대 종의 한가운데서 사물과 그것의 허상들을 구별하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153)

원환적 구조의 신화는 어떤 정초 작업의 반복-서사이고, 이는 가장 오래된 전통과 일치한다. 나눔은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근거로서 원환적 구조의 신화를 요구하고 있다. 거꾸로 신화는 근거지어져야 하는 것 안에 있는 차이의 상태로서 나눔을 요구하고 있다. 나눔은 변증술과 신화학의 진정한 통일이다.(156)

신화는 언제나 완수해야 할 임무, 풀어야 할 수수께끼에서 시작한다. 사람들은 신탁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신의 대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제이다. 변증술(문답법)은 반어이다. 그러나 반어는 문제와 물음들의 기술이다. 반어의 본성은 사물과 존재자들을 어떤 숨겨진 물음들에 대한 각각의 답변들로 간주하고, 어떤 해결할 문제들을 가리키는 각각의 경우들로 취급하는 데 있다.(158)

좀 더 심층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바로 그와 같은 문제나 물음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은 존재이다. 존재와 물음을 서로 관련짓는 어떤 존재론적인 ‘통로’, ‘틈’, ‘주름’ 같은 것이 있다. 이런 관계에서 볼 때, 존재는 본연의 차이 그 자체이다. 존재는 또한 비-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존재는 부정적인 것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틀의 존재, 문제와 물음의 존재이다. 본연의 차이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비-존재이고, 이 비-존재는 본연의 차이, 곧 반대가 아닌 다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존재는 차라리 (비)-존재라 적어야 하고, 그보다는 ?-존재라고 적는 편이 훨씬 낫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존재의 원형 동사 esse는 어떤 명제를 가리킨다기보다 그 명제가 대답한다고 간주되는 질문을 가리킨다.(159)

부정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그림자에 불과하다. 부정은 이런 상위 원리의 그림자, 이미 산출된 긍정 옆에 머물러 있는 차이의 그림자일 뿐이다.(160)

모순의 저편은 차이다. 비-존재의 저편은 (비)-존재이고, 부정적인 것의 저편은 문제와 물음이다.(160)

 

7절

플라톤주의 전체는 ‘사물 자체’와 허상들 사이에 어떤 구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플라톤주의는 차이를 그 자체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차이를 이미 어떤 근거에 관련짓고 같음의 사태에 종속시키며, 또 신화적 형식을 통해 매개를 도입한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 그것은 모사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이며 허상과 반영들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162)

엄밀한 의미에서 영원회귀는 각각의 사물이 오로지 되돌아오는 가운데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영원회귀는 사물이 무한히 많은 모사들의 모사이고, 때문에 원본도, 심지어 기원조차 계속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영원회귀는 ‘패러디’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해진다. 즉 영원회귀는 자신이 존재하게 만드는 것에 허상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163)

근거는 원본과 파생물, 사물과 허상들 사이에 차이를 두는 심급이다. 영원회귀를 통해 우리는 보편적인 근거와해를 목격하게 된다. 근거와해라는 말은 그야말로 매개되지 않은 바탕의 자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바탕의 배후에 있는 어떤 바탕의 발견, 무-바탕과 탈-근거의 관계, 비형상적이 것과 우월한 형상의 직접적 상호 반영이다.(164)

잔혹성은 처음에 괴물을 구성하고 속죄를 치러야 하며 재현적 매개에 의해서만 누그러질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제는 이념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전도된 플라톤주의 안에서 차이의 순수개념을 형성하고 있다. 잔혹성은 가장 순수한 것, 순수함의 상태이자 그것의 메아리이다.(164)

허상은 차라리 원형이나 특권적 위치라는 생각 자체를 반대하고 전복하는 행위이다. 허상은 어떤 즉자적 차이를 포괄하는 심급,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발산적 계열들을 포괄하는 심급이다. 허상은 이 발산적 계열들 위에서 유희를 벌이지만, 여기서는 모든 유사성이 폐기되어 있다. 따라서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모상인지 가리킬 수 없다.(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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