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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3강 후기(0921)

선우 2017.09.25 09:47 조회 수 : 133

1. 검은 무(無) 흰 무(無)

‘차이’ 라고 하면 쉽게 사물A와 사물B의 차이를 떠올립니다. 이렇게 두 사물 ‘사이’의 차이를 들뢰즈는 외생적 규정이라 부릅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차이 그 자체(본래적 규정)는 물론 이런 차이, 개체적 차이가 아니라 ‘개체화’ 하는 차이입니다. 이미 산출된 차이가 아니라, 그 개체를 산출하는 차이 말이죠. 중요한 것은 개체화하는 차이가 일차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하나로 보고, 그 존재론적 일의성 속에서 개체화하는 차이에 주목한다는 것은 존재를 ‘생성’으로 보는 들뢰즈 사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개체로 분할된 것에서는 더 이상의 변화나 생성은 없잖아요. 개체화 하는 차이는 기존의 개체적 분할, 분배마저도 와해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존재의 무차별성 한 쪽은 분화되지 않은 심연, 검은 무, 규정되지 않은 동물입니다. 다른 한 쪽은 흰 무, 다시 고요해진 표면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했는데요, 이미 규정된 양태들 또한 서로의 관계 속에서 다시 새로운 규정들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미 개체가 된 것이 뭉개지면서 다시 무규정적 상태가 되고, 다른 규정성을 향해 가는, 그 직전의 상태를 들뢰즈는 ‘흰 무, 고요해진 표면’ 이라 칭합니다. 존재는 생성이며, 차이 그 자체로서 특정한 ‘상태’가 아닙니다. 존재는 무규정적인 어떤 것이 현 개체의 규정성을 바꾸는 힘의 장 전체를 말합니다.

 

2. 종적 차이: 가장 크고 완전한 차이

차이를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점검하는데요, 주어(명사)와 관련된 종차, 술어와 관련된 범주적 차이를 다룹니다. 왜 가장 크고 완전한 차이가 종적 차이일까요? 물론 개체적 차이가 종적 차이보다 더 작다는 것은 알겠고요. 그러나 유적 차이라는 더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강의 전까지 이 ‘유적 차이’를 이해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뭔 소린지 모르겠더라고요. 종과 종을 묶어서 하나의 유로, 유와 유를 묶어서 또 그 상위의 유를 계속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이런 생각 속에 있는 것의 핵심은 바로, 제가 유를 종과의 ‘유비’로 추론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종들의 로고스가 유들의 로고스를 잡아먹은 셈이예요.^^ 유는 종차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체로서의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 동일성은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형식 안에서만 등장합니다. 우리가 종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유를 떠올리면 그 즉시 이 유는 다시 종차로 바뀌게 됩니다. 아무리 큰 범주의 유라고 해도 말이죠. 따라서 유적 차이가 종적 차이보다 절대적으로 크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종차가 됩니다. 우리는 ‘유’라는 개념이 지녔다고 ‘가정된’ 동일성에 의존해서만 종차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이를 종차로 다루는 것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들뢰즈는 말합니다. 종차는 차이가 오직 개념 일반과 화해하는 어떤 특수한 국면을 지시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는 거짓된 운반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가 본성을 바꾸지 않는다. 가장 보편적인 것과 가장 특이한 것을 각각의 직접성 안에 묶어놓은 어떤 차이의 분화소를 찾을 수 없다. 종차는 단지 상대적인 의미의 최대치를 지칭할 뿐이다. 그것은 그리스적인 눈을 위한 시력 조절점에 불과하다. 중용이라는 그리스적인 눈이란 유적 차이로 올라가지도 않고, 개체적 차이로 매몰되지도 않고, 종적 차이 안에서 차이를 식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그리스적인 눈은 개체적 차이의 선들을 뭉개면서 규정성을 다른 규정성으로 바꿔버리는 디오니소스적 운반과 변신들이 지녔던 의미를 상실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설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차이를 다만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차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뀔 뿐입니다.

미규정적인 유적 차이를 개념의 동일성이라는 규정으로 왜 몰고 갔을까요? 이 미규정성, 따라서 이 다의성을 계속 밀고 나갔으면 유를 ‘존재’의 차원으로 다룰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유를 존재를 다루듯이 다룰 수 있었던 순간에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유처럼 다룹니다. 전혀 유가 아닌 존재를 말입니다.

 

3. 존재의 일의성, 존재의 평등성

파국으로서의 차이, 그 차이의 평면인 바탕은 존재의 일의성을 증언합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고, 단 하나의 목소리가 존재의 아우성을 이룹니다. 다양한 양태들은 모두 실체로서의 신의 속성을 표현합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돌멩이든 말이지요. 존재는 자신을 언명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단 하나의 같은 의미에서 언명됩니다. 하지만 존재를 언명하는 각각의 것들은(양태) 차이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즉 존재는 차이 자체를 통해 언명됩니다. 개체화하는 차이는 존재의 일의성에 의해 작동됩니다. 존재의 일의성을 기반으로 우리는 존재의 평등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의 평등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평등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평등도 실은 잘 경험하기가 어렵지만, 인간을 넘어 전 세계가 동등하게 펼쳐지는, 확장되는 느낌입니다.

들뢰즈는 존재의 평등, 일의적 존재에도 여전히 분배와 위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평등인데 위계라? 정착적 노모스와 대립되는 유목적 노모스에도 여전히 분배와 위계가 있습니다. 정착적 노모스에서 분배는 ‘이미’ 분배된 것 자체를 할당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할당의 정도에 따라 위계가 설정됩니다. 유목적 노모스에서 분배는 더 이상 미리 배당된 몫의 분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소유지도 울타리도 척도도 없습니다. 한계가 없는 열린 공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분배하는 할당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가능한 최대의 공간을 메우도록 여기저기 배치됩니다. 들뢰즈는 이를 ‘방황’의 분배, ‘착란’의 분배라고 말합니다. 유목적 노모스는 장벽이나 울타리를 뛰어넘는 악마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정착적 노모스에서 위계는 한계에 따라 측정되고 하나의 원리에 대한 멀고 가까움의 정도에 따라 측정됩니다. 유목적 노모스에서 위계는 역량의 관점, 즉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벗어나는 능력에 따라 설정됩니다. 여기서 한계는 사물이 자신을 펼치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나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정착적 노모스에서는 끝이었는데 말이죠. 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라, 도약하라! 엄청 도전이 되는 말이긴 하지만 늘 조금은 움츠리게 만드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주 한계(끝) 안에 갇혀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들뢰즈는 말합니다. 엄청 크게 벗어나라는 것도 아니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벗어나봐라. 그 조금이 최대치를 형성할 것이다. 니체는 말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변형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자가 고귀한 자다.

들뢰즈는 마지막으로 철학의 역사에서 존재의 일의성이 정교화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의 세 단계입니다.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는 일의적인 것으로 사유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당시 신학적 세계를 생각하면 놀라운 말이겠지요. 신과 피조물이 같다고? 이런 말이잖아요. 스코투스는 일의적 존재는 무한자와 유한자, 단독자와 보편자, 피조물과 창조자에 대하여 무차별하며 중립적이고 중성적이라고 말합니다. 공통의 존재가 중성적이 아니라면 범신론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코투스는 우선 추상적인 개념 안에서 존재를 중성화시킵니다. 들뢰즈는 말합니다. 스코투스는 일의적 존재를 단지 ‘사유’하기만 했을 뿐이다.

스피노자는 일의적 존재를 중립적이거나 무차별한 것으로 사유하는 대신 순수한 긍정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실체는 신 즉 자연이다. 모든 양태들을 신(실체)의 속성을 표현합니다. 스피노자의 논의에선 실체가 양태들로부터 여전히 독립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체는 양태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양태들은 실체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여전히 초월적이 되는 셈인데요, 양태들이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면 실체 또한 변한다는 생각이 들어오는데, 바로 니체는 실체와 양태를 이렇게 모두 하나의 내재성의 평면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회귀가 아닙니다.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은 힘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양태들의 세계 자체입니다. 차이 그 자체의 세계의 회귀! 회귀한다는 사실만이 같을 뿐입니다. 돌아오는 것은, 반복되는 것은 차이와 생성입니다. 되돌아오는 것은 특이적인 것입니다. 크건 작건 상관없이 자신의 한계 안에서 자신을 펼쳐가는 형상, 자신의 역량의 끝까지 나아가는 가운데 자신을 스스로 변형하고 서로의 안으로 이행하는 특이적인 것만이 다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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