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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리차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1부 쪽글

힐데 2016.09.26 15:10 조회 수 : 526

4주차
 
타자의 공간과 서사화 전략
 
리차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1부
 

박예지



 

리처드 커니는 타자와 이방인에 대한 현대적 논의들을 전개하며 우리가 어떻게 이방인 중 신과 괴물을 구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인류는 사회적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타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박해해 왔다. 희생제의는 사회에 만연한 악에 대한 책임을 이방인에게 뒤집어 씌워 내부 구성원들의 죄책감을 덜고 내부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여 재통합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이런 희생양 신화는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는데, 실제로 악의 책임은 외부가 아닌 사회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타자는 이방인이고, 괴물이고, 악마이고, 에일리언이다. 그것들은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 내부에서 소외되고 억압되어 있던 것들의 귀환이다. 리처드 커니는 <에이리언>의 괴물과 <지옥의 묵시록>에서의 커츠대령의 예를 통해 우리 내부에 있던 것이 어떻게 괴물화되어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희생양화의 순환을 끝내기 위해선 우리 내부의 괴물들을 이해하는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괴물과의 화해를 위해 커니는 타자에 대한 현대 이론의 두 갈래를 탐색한다. 한 갈래는 해체주의-레비나스,데리다-이고 다른 한 갈래는 정신분석-프로이트, 줄리아 크리스테바-이다. 해체주의자들은 타자에 대한 환대를 이야기한다. 환대는 오직 그 행위의 주체가 선한 타자와 악한 타자를 구분하려는 욕망에 저항할 때만 정당하게 이뤄질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인에게는 상대를 포함시키거나 배제시킬 권리가 있고, 누군가를 고르고 걸러내고 배제하는 선택의 과정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대가 모든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악한 이방인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 것인가? 커니는 해체주의자들의 환대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취약성을 지닌 이방인이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선하고 무고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타자는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사는 집의 대문을 두드린 자는 환대받을 자격이 있는 타자일 수도 있고 우리를 침략하러 온 에이리언일 수도 있다.


커니는 해체주의자들의 환대이론이 선한 이방인과 악한 이방인을 구분해야 하는 우리의 정당한 의무를 가치절하하고 있다며 비판한다. 해체주의적인 비도덕판단주의는 정의와 불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해석학의 실천적 지혜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 가능한 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판단의 윤리학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기묘한 낯설음(Unheimliche)’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지만 억압의 과정을 통해 소외되어 버린 것이다. 이방인의 악마화는 과거에 억압되어진 것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악마화된 타자의 모습에서 우리를 가장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거울이미지다. 크리스테바는 리가 바로 이방인들이다. 우리는 분열되어 있다말한다. 우리의 유한성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이방인들 중 가장 궁극적인 이방인이다. 죽음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공포와 다른 것이 아니다.


커니는 해체주의가 너무 성급하게 동일자를 타자에게 종속시키고자 하는 것이라면, 정신분석학은 너무 급하게 타자를 동일자에 종속시키려 한다며, 3의 길인 비판적 해석학을 제안한다. 그것은 환대받을 자격이 있는 타자우리를 침략하러 온 에이리언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는 방법론이다.


선한 타자와 악한 타자 신과 괴물을 구분하기 위해 그는 4장에서 악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커니는악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인 신정론과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론을 검토한 후 숭고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괴기 연구로 넘어간다.


숭고란 재현불가능한 것의 현시이자, 인간의 인식능력을 넘어선 압도적인 현상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신성한 것에 의해서도 유발되지만 기괴한 것들에 의해서도 유발될 수 있다. 두 양극단 모두 재현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근본적 이질성의 영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리오타르, 크리스테바, 지젝과 같은 몇몇 포스트모던 저술가들은 이 양자의 유사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커니는 성스러운 것과 기괴한 것이 동등한 숭고의 감정을 자아낼 수 있다는 방식의 사유를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의 형언불가능함이 공포와 숭고의 감정을 자아낸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그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것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불가능하다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은 악에 대해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커니는 이를 윤리적인 실천의 임무를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악에 대한 실천적 이해를 통해 악에 대항하여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악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즉 선과 악을 어떤 방식으로도 구분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악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악에 대항하는 진정한 투쟁의 방법으로 그는 다시 비판적 해석학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해석학적 이해는 칸트의 실천이성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위한 판단의 형식을 정초하는 것이다.


비판적 해석학의 방법론은 실천적 지혜(phoronesis, 아리스토텔레스)와 판단(Urteilung,칸트)을 접합시킨 것으로, 리쾨르가 이야기한 서사에 있어서의 윤리적 역할에서부터 빌려온 것이다. 애도 서사의 카타르시스는 악이 묵인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행동들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서사적 카타르시스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강박적 집착에서 우리를 분리시켜주고 덜 억압된 미래를 향한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악의 낯설음에 저항하고 우리의 행동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순환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우리는 비판적 해석학을 통해 어둠 속에서 문을 두드리는 이방인이 괴물인지 신인지 구별하고, 우리는 압도시키는 숭고의 경험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숭고의 경험은 서사적 상상력에 의해 이해되고 극복된다.

 

이런 커니의 문제의식은 9.11 테러에 대한 독해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보드리야르의 글을 인용하며 911 테러가 현대의 희생양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뉴욕 쌍둥이 빌딩이 공중에서 날아든 항공기로 폭파되는 장면은 스펙타클이며 압도적인 경험이다. 테러는 끔찍한 일인 동시에 숭고한 것이다. 사람들은 비탄에 젖는 동시에 그 숭고한 스펙타클에 매료되어 몇 번이나 사고영상을 돌려 보았다. 커니는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단언한다.

 

911 테러리스트 범죄자들과 그 희생자들을 도덕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우리의 집단 무의식 안에 숨어 있든 간에 다른 이들보다 더 무고한 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보다 더 큰 죄가 있다. 기괴한 22-행동은 기괴한 판타지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양자 모두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222-223)

 

환대할만한 타자침략하러 온 에이리언’ / ‘괴물의 구분은 여기에서 작동된다.

테러리스트들은 분명 미국사회의 희생양이긴 하지만,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죄가 있다는 것이다. 알 카에다는 환대할만한 타자가 아니다. 미국 사회를 파괴하러 온 에이리언이다. 그는 앞서 자신이 대안으로 제시한 비판적 해석학의 판단의 형식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단순히 9.11 테러리스트의 범죄자와 그 희생자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양자를 비교하여 무고한 이를 구분한다. 이는 그 자체로 데리다가 말한 주인의 폭력이 아닌가? 환대는 오직 그가 악인지 선인지를 판단내리려 하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게 아니었던가?

 

그의 비판적 해석학중도의 길을 걷는다고 하면서 실상 해체론자의 윤리와 정신분석학의 윤리 모두를 동시에 철회하고 있다.

이방인은 우리의 내부의 악을 구현하는 자들이며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환대해야 하는 대상(데리다), 또는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인 대상(크리스테바)이다. 때문에 타자를 선함악함으로 구분짓고 배제하는 선별행위는 성립할 수가 없다. 그것은 또 다시 타자를 주체의 입장에서 동일자로 환원하거나 배제하려는 폭력이며, ‘선별된 타자에 한해서 희생제의를 지속하겠다는 포고이다.

 

이는 리처드 커니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발상이다. 타자에 대해 사유하면서 환대라는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의 주체인 유럽백인들에게서나 가능한 일이다. 세계의 주인됨의 위치, 이미 자신이 차지한 공간 제국- 안에서 새롭게 인권을 부여받은 타자 이주민, 난민등-을 맞이하는 입장에서 가능한 사유이다. (타자-여성, 3세계인, 성소수자, 장애인-들은 타자성에 대해 사유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사유한다.) 어두운 밤에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데리다 같은 프랑스인이나 리처드 커니 같은 미제국의 부르주아들이 따듯한 방 안에서 사유하기 위하여 쫓아냈던 혹은 착취하고 억압했던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대는 무조건적으로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가 단순히 환대할 만한 타자든 그들을 죽이러 오는 테러리스트이든 상관없이 그들은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타자와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공간은 원래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약탈하고 정복한 것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가난과 고통과 비극에 연관되어 있다. 우리와 상관없는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리처드 커니 같은 제국의 백인 남성에게라면 더욱 더 그렇다. 그렇기에 그는 에일리언의 침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가 공포문학이라는 사이먼 크리츨리의 비판은 아주 적확하다. 환대는 그것을 베풀기를 요구받는 주체에게 공포스러운 일이다. 타인의 고통받는 얼굴 앞에 주체는 인질로 사로잡힌다.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 얼굴에 응답하여 마땅히 윤리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받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마주칠 얼굴이 천사의 것일지 악마의 것일지를 선택할 수 없다.

 

구체적인 사항으로 옮겨가보면, 리처드 커니의 비판적 해석학은 이민자 거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우리가 환대해야 할 타자가 있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덜 무고한타자가 있다는 명제는 그 판단형식이 어쨌든 그 자체로 구분과 배제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는 열심히 일한 사람만 정규직으로 남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해고할 수 있다는 노동시장유연제와 다를 바가 없는 형식이다. 환대할 대상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는 주인에 의하여 언제든 내팽개쳐 질 수 있는 폭력적인 구조인 것이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가 이 이론을 접한다면 매우 기뻐하며 대선에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이다. 우리는 타자를 환대하지만 악한 타자는 받지 않는다! 미국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모두 추방할 권리에 대한 윤리적 근거를 갖게 된다.

 

절대적으로 타자를 환대한다는 것은 윤리적 분별의 모든 기준을 보류하는 것도, 타자에 대한 비분별적인 개방 안에서 선과 악을 구분할 능력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불확실한 삶>에서 리처드 커니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9.11 테러를 독해한다. 버틀러는 9.11 참사의 희생자들은 한 명 한 명씩 이름을 다 불려서 애도받는데 이라크에서는 마을 하나가 다 날라간 것이 보도조차 잘 되지 않은 것에 주목한다. 버틀러는 묻는다. ‘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무엇이 애도할만한 삶으로 중요한가?’ 이런 애도의 차별성은 어디서부터 유래하는 걸까?

 

커니가 전형적인 서구관념론의 주체입장에서 9.11 테러 사건을 주인과 이방인, 선과 악의 문제로 이해하고 또 다시 인간(환대의대상)/비인간(에이리언)을 나누는 규범적 폭력을 자행했다면 버틀러는 제1세계에 가해진 폭력의 충격을 통해 제 3세계인들이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는 폭력의 문제까지 사유를 확장시킨 것이다. 버틀러는 미국인이 9.11 사건으로 느낀 취약성을 통해 다른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서도 감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방인은 성스러운 타자이자 곧 나 자신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에서 레비나스의 얼굴의 현상학을 언급하며 타자의 얼굴은 처음부터 박해적이다라고 한다. “내 의지와는 무관한 채로 나는 타자의 부름을 받고,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바로 이런 종속으로부터 출현한다이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 무작위로 호출당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일체의 형식주의 윤리학 이전의 영역에 존재하는 윤리적 부름이다.

 

 

*레비나스와 데리다, 프로이트는 유대인이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여성이며 주디스 버틀러는 유대인 여성 레즈비언이라는 중첩된 타자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타자에 대해 사유할 때 주체의 입장에 앞서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를 전개시켜나갔을 것이다.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누구든 그 요청에 응답하여 환대하라는 윤리적 명령은 그 자신이 안에 있는 동시에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쉽사리 떠올릴 수 없는 위치성을 지니고 있다. 타자성 없는 주체의 사유엔 한계가 있다  

 

*괴물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괴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괴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닐까. 괴물이 우리 자신이 억압한 것이며 무언가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서 귀환한다는 이론은,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센스>를 상기시킨다.

괴물은 우리에게 전할 말이 있기 때문에 찾아온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떠나 보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얼굴나를 박해하는 공포스런 얼굴-에 응답하는 것이다. 나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얼굴의 폭력, 나의 삶에 내가 원치 않는 자신의 서사를 폭력적으로 기입하려는 타자의 요구에 응하는 것. 우연적인 요청에 응답하는 것.

콜 세어가 유령들의 공포스런 모습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들과 평등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었을 때 괴물들은 더 이상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괴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억눌린 것을 해결해 줄 때 괴물은 사라진다.

괴물, 타자는 das Ding 이 아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자연이나 대상이 아니라 의식이 있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주체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양철학자들은 그들이 주체일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환대의 대상(절대적 신비화)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또 다른 나 자신(자아로 환원)’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그들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해야 한다(커니..)’는 것도 그렇다.

문제는 사실 간단한 게 아닐까. 그들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보았던 비전 노동자의 책 읽기 글쓰기-,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발턴이 직접 말하게 하는 작업등. 지금까지 역사에서 주체의 자리에 있지 못했던 비체들에게 말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 부르주아와 제국으로부터 소외된 주체들에게 직접 말하게 하는 작업들. 그리고 그런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지금까지 주인의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잠깐 침묵하는 것.

이것들을 괴물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숭고

왜 커니가 악의 숭고함에 공포를 느끼며 달아나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왜 그토록 섣부르게 윤리적 불가능성을 도출해내는지도..

악이 선과 형식적으로 동등하게 숭고하다면 거기서부터 또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적 명제가 도출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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