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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르케이즘의 정치학]

디포 2022.01.06 15:05 조회 수 : 15

「안아르케이즘의 정치학」 에세이

2022.01.06. 로라

 

공격 본능 속에 피어난 협력 본능

 

 

1. 들어가며

 

사회적 혼란의 순간에 그리고 혁명의 전선 속에서 언제나 선두에 서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소식을 접했을 때 그 들의 헌신적인 행동은 가슴 깊이 진한 감동을 남겼지만 그 폭풍이 지나가고 권력의 재배치가 일어날 때에 권력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취를 감추며 자신의 이름을 혁명의 영광 속에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감동을 넘어 전율을 일으켰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도 이회영, 신채호 등과 그들에게 영향 받은 의열단원들 그리고 무명인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진정한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이회영의 경우 비록 민족 해방이라는 목적을 가진 과정으로서 아나키즘과 함께 고달픈 여정을 보낸 것이지만 아나키즘는 애초부터 그가 가지고 있던 사상이었다.

아나키스트는 아니었지만 쿠바 혁명의 영웅이었던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의 성공 이 후 짧은 관료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곧 콩고 무장혁명을 지원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넘어가 익숙하지 못한 기후와 조건들 속에서 싸우다가 다시 볼리비아의 혁명을 위해 라틴아메리카로 넘어 온 후 게릴라 활동으로 갖은 고투를 벌이다가 결국 볼리비아의 깊은 산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체의 행적은 거의 예수 수준이어서 그가 행했던 영웅적인 헌신은 보편적인 인간이 흔히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체 게바라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존경과 초월적 경외심으로 남았었다.

그러나 이회영과 크로트포킨을 위시한 많은 아나키스트의 행적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신적 행위로 또 다른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개체의 안녕과 유지를 위해 생존하라는 자연의 명령을 거스르며 자신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다른 삶을 선택하고 실천 하도록 이끌었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성향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주었던 충격은 초월적인 숭고함이 아니라 인간이 진화적 시간을 거쳐 오는 동안 선택하고 선택당하면서 키워온 특질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기대 같은 충격을 말한다.

크로트포킨은 인간 도덕 감정의 기원이 연대의 감정 속에서 습관으로 변하고 유전으로 전달되었으며 이러한 상호부조의 원리들을 적용하는 법을 배운 종에게 승리를 보장했다고 하였다. 또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세계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확고한 근거가 늘 존재했는데 그것은 본성의 욕구 속에, 종족의 보존 속에, 궁극적으로 개별적 개체에게 가능한 존재의 층계 속에 있다고 하였다.

(아나키즘의 도덕적 기초 P199)

한편, 본질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진화론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논하는 것은성립 불가능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진화론의 비본질주의적 세계관은 무엇보다도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를 지양하게 되므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본성이라는 개념을 진화 과정 속에서 형성된 성향적 속성들의 집합으로 규정한다면 인간이 키워온 장점 같은 것을 논하는 것 정도는 가능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에게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전형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는 인간의 형질들 중 하나인 협력하는 성향들을 일종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크로포트킨의 주장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 오래되고도 식상할 수도 있는 인간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하는 것은 초기 다윈주의자들의 열성적으로 전파했던 ‘적자생존’이라든지 ‘약육강식’같은 절망적인 해석에 좌절하다가 크로트포킨의 상호부조론을 읽고 민족 해방과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동시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는 빛을 발견했던 한국의 초기 아나키스트들을 기억해내기 위한 길이었다고 변명해본다. 또한 그들이 왜 친일파들이나 밀정이 걸었던 꽃길을 마다하고 그 험난한 고난의 여정을 선택했는지, 인간들은 어떻게 이렇게도 다른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방법이기도 하다.

 

2. 본질essence과 본성 natur논란에 대하여

 

플라톤 이 후 존재론의 양대 산맥이 되어 온 본질주의 essentialism과 반본질주의

anti-essentialism 사이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반본질주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제시했다. 다윈은 자연선택에서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만족되어하는 조건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가 제시한 3가지 조건은 변이 조건, 차별적 적합도 조건, 대물림 조건이 그것이다.

어떤 개체군 내에서 유기체들이 가지는 변이는 진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데 처해있는 환경에 대하여 개체마다 다양한 변이로 문제해결을 하지 않으면 변화하는 환경에 더 적합한 개체들이 되물림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이성은 자연선택이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변이’가 가지는 위상은 더 이상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중심 그 자체가 된다. 개체군 내에서의 개체들은 서로가 이질적이어야 진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속적인 변이는 이 사태가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보다는 이제 시작이라는 절망을 안겨주지만 우리가 그러한 변이의 산물이라는 자각을 현실적으로 깨우쳐 주기도 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한 후 서구의 오래된 본질주의적 세계관은 ‘개체군 사고’라는 비본질주의적 세계관으로 대체되었다고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는 주장했는데 이러한 개체군 사상은 생물종의 구성원들에게는 비생물 물질들처럼 공유되는 본질이 없으므로 더 이상 자연종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까지 밀고 나가는 생물철학자 (David Hull)도 나오게 되었다. 데이비드 헐의 주장은 생물종의 존재론적 지위를 ‘개체’로 본다는 것인데, 우리 종 역시 호모 사피엔스들 만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특정 생물 종에 대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 역시 보편적 일반화를 할 만한 법칙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념 불분명의 혼란 속에 있는 생물학이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다른 과학자들의 비웃음을 생물학은 ‘법칙이 없다’는 법칙으로 정면 돌파할 수 있다. 데이비드 헐은 또 한 가지 근거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생물종이 대물림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된 시공간적 연결로 구분된 존재자이지 공통적 속성을 가진 구성원의 속성 집합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물림 가능성은 한 계체군의 유기체들이 시공간으로 연결(예를 들면, 부모와 자식들로)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제한적인 시공간을 가지는 개체들에게 시공간을 관통하는 법칙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생물 종은 자연종이라 할 수 없다. 비생명 물질들만이 속성을 가지는 자연종이라는 그의 말은 이런 의미이다.

진화론적 세계관이 본질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에는 기꺼이 동의할 뿐 아니라 유형론적 사고와 같은 본질주의에 대항해온 다윈의 혁명적인 업적을 당연히 받아들이지만 각 생물종이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해온 현재의 속성들까지 논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캄브리아기 대 폭발 때의 생물들 중에는 눈이 5개인 것들이 있었던 반면 현재의 거의 모든 생물 종들은 눈이 2개이다. 모든 생물종에게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은 없었으나 소위 ‘수렴 진화’라고 할 수 있는 경향성은 있다.

본질과 구분된 어떤 성향들을 본성이라고 말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분리하려는 과학철학자들은 “인간 본성이 인간 구성원 모두에게 꼭 보편적일 필요는 없다. 전형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으면 그 종이 가지는 성향적 속성들을 그 종의 본성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해서, 인간이 가진 상향적 속성들을 포함하는 형질들의 집합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자. 그 것은 인간이 삶의 전 기간 또는 특정 기간 동안에 인간 종 진화의 결과로 얻어진 상향적 속성(기질?)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물론 어떠한 특성이 진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회적 산물일 때도 많기 때문에 인간 본성이 빈 서판으로 태어난다는 ‘백지’이론도 있다. 또한 이를 비판하는 진화 심리학적 인간관도 있다. 인간의 적응 문제는 문화적인 영향의 강조로 인해 좀 복잡해지는데, 진화 심리학적 해석에는 유전자 중심적인 배경이 강하게 깔려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제외하고 인간의 진화적 배경을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로 묶어 두고 일단 넘어가자. 인간의 진화 조건은 너무나 복잡해서 한마디로 간단히 정리하기가 어렵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인간종이 공격성을 줄이고 연대의 감정을 키워왔으며 그러한 성향이 선택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3. 인간 공격성의 기원에 대한 진화적 고찰

 

인간에 대한 믿고 싶지 않은 진실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가 가진 기억이 나의 욕구과 믿음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교묘히 조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번으로 충격적이었던 것이 인간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종’이라는 사실이다. 급속히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종내 살해로 매년 40만 명이 죽는다. 학대 또는 포식으로 인한 종 밖 살해는 셀 수가 없다. 좀 교묘하게 변형되었을 뿐이지 인간은 동물들이 가진 공격성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공격성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본능인 것이다. 어떤 때는 아무 자극이 없어도 공격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원초적 공격성은 반응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조건이다.(박한선, 진화와 인간 행동)

자연계에서 공격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포식행위를 위하여, 포식자에 대한 반격을 위하여, 짝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 때문에, 그리고 영역을 지키기 위하여 등등이 있다. (이유 없는 무차별 공격도 추가해야할까)

포식행위를 위한 쫓고 쫓기는 행동은 동물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다큐에서 흔히 접했을 것이다. 뒤쫓아 오는 치타를 피해 도망치면서 높이 뛰기 실력을 보여주는 가젤은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포식행위는 종 간 공격이지만 보통의 공격성과는 다르다. 포식자는 배가 부르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매우 사나와 보이지만 정육점 고기 앞에서 군침을 흘리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초식 동물은 공격적이 않고 평화로운가? 포식하지도 않으면서 동료를 공격하여 뼈와 살이 너덜거리고 결국에 죽게 만드는 초식동물은 어쩌면 육식동물보다도 더 잔인한 공격자 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포식과 공격성은 구분되어야 할 개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식자에 대한 피포식자의 반격은 훨씬 더 공격적이다. 약한 피포식자가 그냥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재빠르게 강력한 힘으로 반격도 한다. 간혹 성공하더라도 피포식자는 포식자를 먹지 않는다. 방어를 위한 공격인 것이다. 그리고 피포식종은 포식자를 상대로 무리 공격을 한는데 약한 종은 흩어지면 먹히지만 뭉치면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덩치가 큰 육식동물은 무리 지어있는 피포식종을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무리에서 이탈된 약한 동물을 노렸다가 잽싸게 잡아 먹는다.

인간도 반격을 위한 공격에서는 더 잔혹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건의 정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확한 예는 아닐 수 있지만 1977년 에 일어났던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23살의 청년 박흥숙은 철거반원 4명을 망치로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0년 12월 4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던 사건이다. 철거반원들이 자신의 움막에 불 지른 것에 대한 분노를 참고 몇 번 인내하고 받아들이다가 이웃 병자 할아버지 집이 불타는 것을 목격하고는 꾹꾹 눌러왔던 분노가 터져버려 매우 심한 공격을 하게 된 것이었다. 오갈 데 없던 철거민도 일용직 용역으로서 철거를 하러 온 철거반원도 모두 군부독재의 무분별한 개발에 희생된 사건이었다.

간혹 결사적 반격이 성공하기는 하지만 반격자는 목숨을 걸어야한다. 몇 십년간 남편으로부터 구타당하다가 부엌 칼로 남편을 살해한 아내, 아버지로부터 상습폭언과 폭행을 당하다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토막 유기한 사건, 등등 약한 자의 반격도 뉴스를 뒤져보면 얼마든지 나온다.

그렇다면 인간의 공격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공격의 몇 가지 이유가 모두 관여되지 않았을까. 그 중에서도 영역에을 지키기 위한 공격은 적어도 수렵채집 생활 때에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부딪히는 일이 별로 없었으니 공격해야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농경 생활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 이후에는 토지를 쟁취하기 위한 영역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선점의 권리와 위계라는 질서가 어느 정도 공격성을 억제 하였겠지만 선점과 축척, 그리고 대를 이은 승계는 권력을 생산하고 착취와 억압을 유발하게 되었다.

현대의 인간들에게 영역이란 매우 복잡한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나름의 영역이 있고 보이지 않는 영역 싸움이 미묘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4. 인간성의 기이한 이중성

 

국가의 폭력을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사랑하며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공동체를 이상으로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가 아나키즘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었을 때 가장 많이 듣게 되었던 비판은 인간 본성에 대해 아나키들이 너무나 낙관적이고 지나치게 순진하다는 것이었다. 인간성의 선한 본성 쪽으로 기울어진 관점은 아나키스트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보인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에 대해서 논할 때 우리의 사회적 행동이 생물학에 의해 상당부분 결정된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성향이 유전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선함과 악함 중에서 선함을 기본으로 생각하는지 악함(공격성)을 기본으로 하는지가 다른 전통적인 설명이 있다. 이 두 관점을 대표하는 고전적인 주장은 장-자크 루소의 선한 선천성과 토머스 홉스의 악한 선천성이다.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랫동안 둘 중 하나의 관점을 선택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양 쪽 모두 장단점이 있으며 어느 누구도 한 가지 경향이 다른 경향보다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거나 진화적으로 더 강한 경향성을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한 쪽, 혹은 나쁜 쪽을 선택해야하는 혼란스러운 논쟁보다는 이 논의가 타당한지 먼저 물어보아야 할 듯하다. 누구나 인정하듯 인간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종에서 어떤 종들은 덜 공격적이고 어떤 종은 더 경쟁적이기도 한데 인간의 경우는 사회적 상황에서 매우 복잡하게 나타난다. 어떠한 조건에서는 매우 온정적이다가도 어떤 상황에서는 누구 하나 죽일 듯 공격적으로 변한다. 특히 원한의 감정과 복수에 대한 욕망이 개입되면 그 어느 종보다 잔인해진다. 인류의 수많은 전쟁과 복수, 약탈이 증명하듯이 말이다.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자면 아돌프 히틀러를 추천한다.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으로 수 백 만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버지같이 친근감 있는 사람이었고 채식주의자이면서 생태주의자에 동물애호가였다. 동물보호법을 창시하기도 했다. 그가 반려견 블론디와 함께 있는 사진에서는 블론디를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사랑스럽다. 혼란스러운 인격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상반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럴 것이다. 이 말은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에서만 이러한 복잡한 성향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과정에서 언제나 나타났던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잔인함과 폭력의 역사가 더 크게 인식되어서 부각되어 보인 것이지 인류가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합리성과 친절, 상호부조와 협동을 바탕으로 훌륭한 기술과 문화를 이루어 내었다.

인간성의 아주 기이한 점은 인간의 도덕적 범위가 말할 수 없이 사악한 데서 애끓도록 관대한 데까지 라는 것이다. (리처드 랭엄, 인간 본성의 역설,2020 을유문화사)

랭엄은 “만약 우리가 착하게 진화되었다면 우리는 왜 악하기도 한 것 인가? 또는 만약 우리가 사악하게 진화되었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온화한 것인가?”라고 묻는다.

최근의 고고학 적 자료를 근거로 보자면 구석기 시대의 선조들이 가장 평화로웠다고 한다. 수렵 채집인들이 음식을 나누고 서로 도왔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 증거들이 많다. 물론 그러면서도 잔인한 약탈, 고문, 처형, 강간 등의 만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가지는 인격의 모순성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우리는 양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우리의 관용과 폭력 모두 우리가 현재 상태에 이르는 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응적 경향이다. (리처드 랭엄, 인간 본성의 역설 (The goodness paradox),P25)

 

인간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랭엄은 위에 언급된 그의 책에서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연구 결과를 우리와 사촌 관계의 영장류인 보노보와 침팬지의 연구를 토대로 펼친다. 이 책의 핵심은 인간이 보여주는 사회적 관용과 공격성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관용은 동물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공격성향 즉, 반응적 공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진화되어 미덕으로 형성된 것인 대신에 주도적인 공격성향은 어느 동물보다도 더 키우도록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도적인 공격 성향은 인간을 치명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전쟁과 학살 같은 공격성은 주도적 공격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반응적인 공격성향을 줄이게 된 진화적 전환의 증거를 보노보의 자기 길들이기에서 찾는다. 보노보는 인간과 침팬지가 공동 조상으로부터 갈라진 이 후 챔팬지와 다시 갈라진 종이므로 분명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스스로 길들이기를 한 것이다. 보노보의 두드러진 특징은 침팬지 사회와 달리 공격적인 수컷 행동이 협동하는 암컷들의 단결된 행동에 의해 억제된다는 것인데, 보노보의 자기 길들이기는 암컷이 공격적인 수컷을 벌함으로써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랭엄은 말한다.

인간 사회의 경우, 성인 남성이 처벌자역할을 해왔는데 호모 사피엔스 출현 이 후에는 사형의 선택적 힘을 통해 자기 길들이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화-유전자의 공진화론자라면 이러한 사형 문화가 사회 규범에 복종하는 온순한 남성이 되도록 길들이기를 했을 것이고 그 것이 온순한 유전자를 선호하는 선택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의 자기 길들이기에는 사형제도 뿐 아니라 사회적 평판이나 신용, 믿음 등 여러 가지 기제가 작동했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역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인간의 선함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가.

 

 

5. 공감 능력의 강화와 발전

 

호모 사피엔스의 생태적 성공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형성해온 초사회성(ultra-sociality),(장대2017 “울트라 소셜”. 휴머니스트)의 영향이 크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다. 개미나 벌의 진사회성(eusocilaity)과는 구별되는 이 사회성은 개체들의 본능적 반응이라기보다는 사회 생활 속에서 형성된 개인의 진화된 심리 상태를 매개로 집단 지향성을 발휘하는 훨씬 더 복잡해진 성향을 말한다. 사회성에는 물질적인 조건보다는 정신적인 조건이 더 중요한데 그 것이 바로 인간의 탁월할 공감 능력이다.

공감은 정서적인 공감과 인지적 공감이라는 두 기작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흔히 감정이입이라고 하는 정서적 공감은 거의 모든 포유류도 가지고 있는 감정 능력인 반면, 역지사지, 즉 관점 전환을 할 수 있는 인지적 공감은 추론 능력이 탁월한 인간만이 가능하다고들 말한다. (현재까지는)

정서적인 공감은 영장류(원숭이 실험)에서도 발견되었던 거울뉴런계의 작용에서 시작된다. 거울뉴런계는 시각 정보를 곧바로 운동 신호 형식으로 변환시켜 운동을 수행할 때 활성화되는 뉴런 영역들이 활성화되면서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는 하는 기전이다. 지각과 운동이 연동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해한 행동이 공감으로까지 발전하려면 정서적 과정 즉, 감정 중추와 연결되어야하므로 감정 중추인 변연계와도 연결되어야 가능해진다. 변연계와 거울뉴런계가 뇌도(insula)라는 해부학적 기관으로 연결되어있음이 밝혀졌고 그 이 후의 실험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얼굴을 보고 있을 때 거울 뉴런계, 뇌도, 변연계가 동시에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 했다. 일종의 미러링 과정이 공감에 필수적인 것이다. 고통을 이해하는 기전의 경우는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난다고 인지과학분야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타인의 감정과 고통을 내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도덕관념의 시작이다. 도덕 관념이 문화에 따라 다소간 차이를 보일 수 있으나 기본적인 도덕 법칙들은 보편적이며, 그러한 것들은 대체로 타인의 감정 및 고통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고통을 직접 보고 듣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의 뇌는 타인을 향해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신경적으로 네트워킹 되어 있다는 징표이다. 이러한 형태의 거울 반응은 우리의 도덕 능력에 영향을 주었고 우리가 영장류 사회를 넘어 더 큰 사회조직으로 진화할 수 있게끔 우리를 신경적으로 연결해주었다. (장대익)

 

그러나 이러한 해부학적 기관들의 작동으로 일어나는 정서적 공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끝낸다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최근까지 인간만이 공감하고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되어 온 사실이 동물들의 사회에까지 확장적으로 이해되면서 인간 중심적 사고를 깨어가는 것에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나 정서적 공감만으로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일들과 사건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이 그렇게 공감 능력이 탁월했다면 어떻게 잔인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인종청소를 빌미로 아무런 저항을 못하는 사람들을 집단 학살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물리적 힘이 약한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은 현재 진행형이고 제도가 수용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하루는 여전히 힘겹다.

이 부분에서 장대익은 공감 능력의 반경 범위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감정의 전염으로 인한 공감의 힘은 인접한 쪽은 강하지만 밖으로 갈수록 힘이 약해진다. 공감의 안쪽에 있는 ‘우리’와 공감의 밖에 있는 ‘그들’을 구분하게 되고 내집단(ingroup)인 우리에게서 더 강한 공감이 일어날 때 편 가르기, 파벌, 다른 집단에 대한 편견과 고정 관념, 폄하 등이 나타나고 복수나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를 내집단 중심주의라고 하며 이는 “공감의 구심력”을 통한 작동인 것이다. 감정이입은 이 때 그 반경에 작용하는 구심력이 된다. 이렇게 공감을 통해 형성된 사회 집단 간의 미시적 작동은 공감의 구심력의 작동을 통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장대익 강의 화면 )

 

그렇다면 인간들이 전쟁을 억제하게하고 폭력의 사용을 자제하게하며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을 커지게 하는 힘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구심의 반대적인 힘 즉 원심력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즉, “공감의 원심력”이 그 것 이다. 이것은 인류 스스로 칭찬할만한 일인데 인류는 정서적 자동 공감 장치 외에도 다른 사람의 상황과 생각을 추론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즉 관점 전환 능력 (크로트포킨이 언급했던 己所不欲, 勿施於人)을 키워 왔는데 이는 다른 영장류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질이다. 인간의 사회 인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른 개체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인간의 마음 읽기 형식을 다른 동식물에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에 그 주장은 언제 어떻게 깨질지 알 수는 없다.

어쨌든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진화한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마음은 혹독한 자연환경과의 싸움에서 자라나온 것이 아니라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종의 개체들 사이에서 풀어내야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중에 형성된 능력이 아닐까하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러한 능력은 더 배가되었을 것이다.

공감 능력을 갖춘 것 자체보다 인간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공감 능력 반경 확장이라는 장대익의 설명은 인간성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민족 해방운동에 헌신했던 아나키스트들이 민족해방 전선의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이념으로 받아드렸다는 것은 그들의 공감 능력이 지역이나 국가 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 범위가 세상의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에서 그 의미가 있다. 그들의 헌신이 아나키즘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민족 해방운동에서 끝났더라면 해방 이 후 힘이 키워진 다음 제국주의 행태를 닮은 폭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싹을 스스로 자르지 못했을 것이다.

 

6. 나가며

아나키스트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론보다는 실천의 윤리를 사상의 본질로 삼으며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을 목숨처럼 여기며 필연적으로 권력과 관계 맺는 정치의 유희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으면서도 혁명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최선봉에 섰던 사람들.

언제나 분열되고 배반당하면서도 위험한 일들을 자처하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삶을 던지는 사람들.

새로 등장하는 권력의 횡포를 언제나 재빨리 알아채고 항거하는 사람들.

씨앗을 뿌리되 수확을 거두어들이지는 않는 사람들.

그 모든 불가능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강의를 통해 아나키즘 이해에 첫 발을 들였지만 단지 아나키스트들의 인간적인 성향에 매료되어 나는 아나키즘이라는 빙산의 일각만 본 것일 것이다.

크로트포킨이 남긴 감동을 인간 진화사에서 인간이 형성해온 공감 능력과 협력의 힘으로 연결하고 싶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언제나 전위에 서서 인류의 출구를 찾아내었듯 인류가 앞으로 강화해야 할 것들을 진화적 과정에서 찾으려한 의도였다. 그것은 아마 우리 종이 선택 당한 그 이유가 앞으로 우리가 존재하게 될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하는 기대가 반영된 의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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