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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발제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건축함에 관한 사유는 건축에 관한 상념을 발견한다거나 혹은 건축함에 규칙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유를 시도하는 것은 존재하는 각각의 모든 것이 속해 있는 영역으로까지 건축을 추적해 들어가려는 시도이다. 이 영역은 넓은 의미에서는 만물이 하나로 어우려져 공속하는 존재의 진리의 열린 장이자 사방세계로서의 열려 있음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죽을 자로서의 인간 각자가 그때그때마다 거주하며 살아가는 거주 영역, 저마다의 생활세계이다.

우리는 묻는다. 1. 거주함이란 무엇인가?

2. 어느 정도로 건축함은 거주함에 속하는가?

우리는 건축함을 통해 비로소 거주함에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건축함은 거주함을 목표로 삼는다. 모든 건축물이 거주물(주택, 가옥)은 아니다. 다리, 비행장 등은 건축물이나 거주물은 아니다. 건축물들은 우리의 거주 영역 안에 서 있다. 트럭 운전사는 고속도로에서 늘 일하지만 거기에서 숙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주물이 아닌 건축물들도 그것들이 인간의 거주함에 봉사하고 있는 한 거주함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거주함은 모든 건축함에 앞서 있는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건축함은 단지 거주함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다. 건축함은 그 자체가 이미 거주함이다.

건축하다를 뜻하는 고대 독일어인 “buan”은 거주함을 의미한다. 건축하다라는 동사의 본래적 의미는 거주하다이나, 이 의미는 상실되었다. 거주함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다양하게 관계를 맺는 여러 가지 삶의 태도와 실천적 방식을 표상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하고 저기에서 거주한다. 우리는 단순히 거주하지 않는다. 단순한 거주란 거의 비활동성(무위함)과도 같을 것이다. 즉 우리는 직업에 종사하며, 장사를 하며, 때로는 여행을 하면서 그 도상에서 거주한다. 그러므로 건축함이란 근원적으로는 거주함을 의미한다. 건축하다는 “있다(bin)”이다. “나는 있다(ich bin)” 혹은 “너는 있다(du bist)”라는 것은 나는 거주한다 혹은 너는 거주한다를 의미한다. 우리 인간, 죽을 자들이 이 땅 위에 있는 방식은 거주함이다. 고대어 bauen은 인간은 그가 거주하는 한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돌본다, 보호한다, 밭을 갈다, 포도를 재배한다 등을 의미한다.

건축함(bauen)은 삼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1. 건축함은 본래 거주함이다.

2. 거주함이란 죽을 자들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3. 거주함으로서의 건축함은 성장을 돌본다는 의미에서 Bauen으로, 또 건축물을 건립한다는 의미에서 Bauen으로 전개된다.

 

우리는 건축해 왔기 때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거주하는 한에서만, 즉 거주하는 자로서 존재하는 한에서만, 건축을 하며 또한 건축을 해왔던 것이다. 거주함은 그것의 본질 안으로 소중히 보살피는, 자유로운 영역 안에 울타리 쳐진 채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거주함의 근본 특성은 이러한 보살핌이다.

거주함이 우리에게 자신을 내보일 때는 죽을 자들로서 이 땅 위에 체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거주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사유하고 있을 때이다. 하지만 “이 땅 위에서”란 “하늘 아래”를 의미한다. 이는 “신적인 것들 앞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며, “인간이 서로 상호 간에 귀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은 근원적인 통일성으로 하나로 귀속된다. 땅, 하늘, 신적인 것, 죽을 자들을 명명할 때, 우리는 이미 다른 셋을 함께 사유하나, 넷이 하나로 포개짐(사방)을 사유하지 않는다. 죽을 자들은 거주하고 있기에 사방 안에 존재하며, 거주함의 근본 특성은 소중히 보살핌이므로 거주하는 보살핌은 4중적이다. 죽을 자들은 땅을 구원하는 한에서 거주한다. 땅을 구원함은 땅을 지배하지도 않고 땅을 복종케 만들지도 않는다. 죽을 자들은 하늘을 하늘로서 받아들이는 한에서 거주한다. 밤을 낮으로 만들거나 낮을 고달픈 부산함으로 만들지 않는다. 죽을 자들은 신적인 것들을 신적인 것들로서 기다리는 한에서 거주한다. 불행 속에서도 죽을 자들은 아직 뒤로 물러났던 행복을 기다린다. 죽을 자들은 그의 고유한 본질인 죽음을 흔쾌히 맞이할 능력, 즉 훌륭한 죽음이 존재하도록 이끄는 한에서 거주한다. 땅을 구원하는 가운데, 하늘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가운데, 죽을 자들을(훌륭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거주함은 사방의 사중적인 보살핌으로서 스스로 생기한다. 소중한 보살핌이란 사방을 그것의 본질 안에서 수호함을 의미한다.

사물들은 그것들 자신이 사물들로서 그것들의 본질 안에 초연히 내맡겨질 때에만 사방을 간직한다. 죽을 자들이 성장하는 사물들을 돌보고 보호함으로써, 또한 성장하지 않는 사물들을 제대로 고유하게 건립함으로써 소중한 보살핌이 일어난다. 보호함(돌봄)과 건립함은 좁은 의미에서의 건축함이다. 거주함은 사방을 사물들 안으로 참답게-보존하는 한에서 건축함이다.

 

어느 정도로 건축함은 거주함에 속하는가?

다리는 강 위에서 “가벼우면서도 힘차게” 흔들린다. 다리는 오직 눈앞에 있는 강가를 결합하는 것이 아니다. 다리를 건너갈 때 비로소 강가는 강가로서 출현한다. 다리는 양쪽 강가를 마주 놓여 있게끔 하고 다리를 통해 강가의 양쪽이 서로 대조된다. 다리는 강, 강가 그리고 토지를 서로 이웃이게끔 엮어준다. 다리는 강 주변의 풍경인 땅을 결집시킨다. 다리는 강물에게는 그것이 흘러갈 수로를 허용해주고 동시에 죽을 자들에게는 그들이 강변의 양쪽 토지를 오고 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준다. 다리는 강물과 협곡을 더 나아가 삶과 죽음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행통로로서 신적인 것들 앞으로 땅과 하늘과 죽을 자들을 모아들인다. 다리는 자신의 방식대로 땅과 하늘과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을 자기 곁에 결집하여 모아들인다. 결집은 “사물(thing)”과 같은 의미다. 다리는 사방의 결집으로서 하나의 사물이다. 우리의 사유는 옛날부터 습관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너무나 궁핍하게 평가한다. 그러나 다리는 고유한 양식의 사물(결집)이다. 다리는 다리 자체에 의해서 비로소 장소가 성립한다. 하나의 터전을 허락하는 장소들로서의 사물(결집)들을 우리는 이제 건축물이라고 부른다.

건축물이라 명명하는 사물들의 본질을 명확히 밝히고자 다음 질문을 제시한다. 첫째, 장소와 공간은 어떤 연관 안에 서 있는가? 둘째, 인간과 공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리는 하나의 장소이다. 그러나 사물로서의 다리는 땅과 하늘과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이 그 안으로 들어오도록 마련된 하나의 공간을 허락한다. 다리에 의해 허락된 공간에는 다리와 가깝거나 먼 자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자리들은 단순한 수학적 위치들로 측정될 수 있으며, 측정된 곳을 “저” 공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공간 안에서는 결코 장소들을, 즉 다리와 같은 양식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 공간들은 장소들에 의해 마련된다. 공간들의 본질은 건축물과 같은 양식을 지닌 사물들에 근거한다.

인간과 공간을 언급한다면, 마치 인간은 한쪽에 서 있고 공간은 다른 쪽에 서 있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있고 그 밖에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을 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은 곧, 죽을 자들이 거주하면서 사물들과 장소들 곁에서 체류하며 공간들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죽을 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본질에 따라 공간들을 이겨내고 있기 때문에 공간들을 통과할 수 있다. 우리는 캡슐화된 육체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다(그 공간을 이미 이겨내면서 나는 거기에 있다)는 방식으로 공간을 통과할 수 있다. 죽을 자들은 “자신에게로 들어갈” 때조차, 사방에로의 귀속성을 떠나지 않는다. 인간과 공간들과의 연관은 거주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장소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의 하나로 포개짐을 하나의 터전 안으로 들여보내는데, 이는 장소가 그 터전을 공간들 안에 설립하기 때문이다. 장소는 이중적 의미에서 사방을 마련한다. 장소는 사방을 허용하고(장소 안에 사방이 들어오도록 허락해주고) 또한 장소는 사방을 설립한다. 즉 장소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허용함과 설립함이 공속한다. 이러한 장소들과 같은 양식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은 인간의 체류를 위한 거처를 제공한다. 이러한 사물들을 산출하는 활동이 건축함이다. 건축함의 본질은 거주하게 함이다. 죽을 자들로서의 우리들 각자가 그 안에서 살아가며 거주하고 있는 땅의 참된 의미와 이 땅에 거주하는 거주함(있음)의 참된 의미를 회복할 때에만 비로소 고향 상실의 참다운 극복이 실현된다. 고향상실은 죽을 자들을 거주함 안으로 부르는 유일한 말 건넴이다.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시인의 말은 인간의 거주함에 관해 말한다. 거주함과 시 지음은 본질을 사유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평소에 인간의 실존이라 부르는 것을 거주함으로부터 사유한다. 휠덜린은 “시적인 것”을 본질적으로 이해된 거주함과의 관계로부터 통찰한다.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라는 말은 시 지음이 거주함을 하나의 거주함으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을 통해 거주함에 이르는가? 건축함(짓기, 지음)을 통해서다. 우리는 이중적인 요구 앞에 서 있다. 첫째는 인간의 실존이라 부르는 것을 거주함의 본질로부터 사유하라는 요구이고, 둘째는 거주하게 함으로서의 시 지음의 본질을 탁월한 건축함으로서 사유하라는 요구이다.

많은 공적, 그러나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

건축물과 건축된 것은 단지 건물들일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손에 의해 인간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모든 작품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방식의 Bauen(짓기, 지음)에 의해 이루어진 공적들이 거주함의 본질을 채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다. 이러한 공적들은 거주함에 대해 자신의 본질조차 거부한다. 인간이 거주할 능력을 갖는 것은, 오직 그가 이미 다른 방식으로 지어왔고 또한 짓고 있으며 짓기 위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일 뿐이다. 시인은 시적인 거주함은 “이 땅 위에서”의 거주함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시 지음은 인간을 비로소 땅을 향해, 땅에게로 가져오며 이로써 인간을 거주함 안으로 가져온다. 시 지음과 사유함은 결정적으로 그것들의 본질의 상이함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동일한 것 안에서 조우한다. 동일한 것은 결코 꼭 같은 것과도, 단순히 똑같은 것의 공허한 단조로움과도 합치하지 않는다. 꼭 같은 것은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일치할 수 있는 그런 차이 없는 것에 항상 몰두한다. 이해 비해 동일한 것은 차이를 통해 모아진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서로 다른 것의 공속이다. 차이가 사유될 때에만, 동일한 것은 말해질 수 있다. 동일한 것은 꼭 같은 것으로 평균화하려는 모든 열정을 추방한다. 동일한 것은 차별적인 것을 근원적 합일성에 향해 모아들인다. 이에 반해 꼭 같은 것은 단지 동형일 뿐인 일자의 맥 빠진 통일성으로 분산된다.

오직 고된 수고뿐인 삶이라도,

인간은 우러러보며 이렇게 말해도 되는가?

나도 존재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 아직 자애로움이,

즉 순수한 자애로움이 마음에 지속하는 한,

인간은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을

신성에 의해 가늠한다. 신은 미지의 존재자인가?

신은 하늘처럼 드러나 있는가?

그렇다고 나는 차라리 믿는다. 인간의 척도란 그런 것.

많은 공적, 그러나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 허나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별들이 가득한 밤의 그림자가

신성의 형상이라 불리는 인간보다 더 순수하지 않은가.

대지 위에 척도가 있는가?

아무런 척도도 없다.

오로지 고된 수고일 뿐인 삶 속에서 이러한 영역을 관통하여 하늘의 것을 향해 우러러보는 것이 인간에게는 동시에 허락된다. 우러러봄은 위로는 하늘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나 아래에선 대지 위에 머무른다. 이러한 사이가 인간의 거주함에서 할당된다. 하늘과 땅의 사이를 여는, 철저하게 측정되어 할당된 것을 우리는 이제 차원이라고 부른다.

휠덜린의 시어에 따르면 인간은 하늘의 것들에 따라 자신을 가늠함으로써 차원을 철저히 가늠한다. 인간은 이러한 철저한 가늠을 때때로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철저히 가늠하는 가운데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철저한 가늠을 멈출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고 손상시킬 수도 있지만, 이것을 회피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거주함을 섬세히 가늠하는 한에서만 자신의 본질에 맞게 존재할 수 있다. 섬세한 가늠은 자신의 고유한 척도를 가지며,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운율을 가진다. 섬세한 가늠은 거주함의 시적인 측면이다. 시 지음이란 하나의 탁월한 가늠함이다. 시 지음이란 척도의 획득이며, 이러한 획득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본질이 펼쳐지는 너비(광대한 지평)에 대한 척도를 수용한다. 인간은 죽을 자로서 본래 존재한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죽음으로서 흔쾌히 받아들일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단지 인간만이 죽는다. “시적인 것”의 본질은 휠덜린은 척도의 획득 안에서 통찰하고 있는바, 이러한 획득을 통해 인간존재에 대한 섬세한 가늠이 수행된다.

인간을 가늠하기 위한 척도는 무엇인가? 신인가? 아니다! 하늘인가? 아니다! 하늘의 드러나 있음인가? 아니다! 척도는 미지로 남아 있는 신이 하늘을 통해 이러한 신으로서 드러나는 그 방식 안에 존립한다. 하늘을 통해 신이 현상함은 스스로를 은닉하고 있는 것을 보이게 하는 드러냄 안에 존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드러냄은 은닉된 것을 밖으로 끌어내려고 시도함이 아니라 은닉된 것을 자기 은닉 안에 보호함으로써 보이게 한다. 이렇게 미지의 신은 미지의 존재자로서 하늘의 개방 가능성을 통해서 현상한다. 이러한 현상함이 인간이 스스로를 가늠하는 척도다. 이 특이한 척도를 손에 넣기란 단순하다. 집중된 받아들임-즉 귀 기울여 들음-안에서 척도를 획득할 때, 우리는 이 특이한 척도를 손에 넣는다.

인간은 차원을 견지하고 있는 한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그때그때마다 섬세히 가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차원 전체에 동시에 들어맞는 하나의 척도가 요구된다. 이러한 척도를 꿰뚫어 보는 것, 이러한 척도를 척도로서 획득하는 것, 바로 이런 것이 시인에게 시 지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 지음을 사유하기 위해, 시 지음 안에서 획득된 척도를 언제나 우선 숙고해야 한다. 시 지음에 있어 척도란 무엇인가? 신성, 따라서 신인가? 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먼저 신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 우리는 우선 신이 무엇인지 묻는다.

신은 무엇인가?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하늘의 얼굴은 신의 완전한 속성들이다. 말하자면

번개는 신의 노여움이다. 보일 수 없는 것일수록

그것은 자신을 낯선 것 안으로 보낸다......

신에게 낯설게 남아 있는 것, 즉 하늘의 모습, 이것이 인간에겐 친숙한 것이다. 인간에겐 친숙한 것이지만 신에겐 낯선 것이다. 시인은 미지의 신이 스스로를 “보내오는” 그런 낯선 것으로서의 하늘의 현상들에 순응하는 가운데 하늘의 모습들을 말함으로써 척도를 획득할 때에만, 시를 짓는다. 형상의 본질은 어떤 것을 보이게끔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각종 모상과 복제상은 이미 보일 수 없는 것을 모습으로 보이게끔 하며 본래적인 형상의 변종들이다. 시 지음은 비밀스러움으로 가득 찬 척도를 획득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하늘의 얼굴에서 그러한 척도를 획득하기 때문에, “형상들” 안에서 말한다. 결코 단순한 판타지나 환상이 아니라 오히려 낯선 것을 친숙한 것의 모습 안에 보일 수 있게 간직해 넣은 것이다.

“밤의 그림자”- 밤 자신은 그림자다. 그림자로서의 어두움은 빛에 대해 신뢰적 관계에 있고 빛에 의해 던져진 채 남아 있기 때문에 결코 암흑이 아니다. 시 지음이 확득하는 척도는 보일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본질을 그 안에서 보살피고 있는 저 낯선 것으로서 자신을 하늘의 모습이라는 친숙한 것 안으로 보낸다. 이 때문에 척도는 하늘의 본질적 양식을 지니고 있다. 하늘의 지고한 광채는 그 자체가 모든 것을 간직하는 하늘의 광대한 어두움이다.

시 지음은 인간의 거주함을 비로소 그것의 본질 안에 들어서게 한다. 시 지음은 근원적으로 거주하게 함이다. 시 지음은 거주함의 차원을 본래적으로 가늠하는 활동으로서 시원적인 건축함(짓기)이다. 인간이 건축하는(짓는) 한에서만 거주한다는 이 명제는 이제 자신의 본래적 의미를 보유하게 되었다. 인간이 농부로서 성장을 돌보고 동시에 건축물을 건립함으로써 땅 위에서 그리고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체류를 조정하기만 한다고 해서, 인간이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시를 지으며 이미 척도를 획득한다는 의미에서 짓고 있을 때에만, 인간은 이러한 건축함(짓기)을 할 능력이 있다.

우리는 시적으로 거주하는가? 아마도 우리는 철저히 비시적으로 거주한다. 거주함이 본질적으로 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시적으로 거주한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우리가 시적인 것을 주목하고 있을 때에만 기대할 수 있다. 시 지음은 인간적인 거주함의 근본 능력이다. 본래적인 시 지음은 항시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자애로움이 마음에 지속한 한” 인간이 신성에 의해 자신을 가늠하는 것은 성공한다. 이런 가늠함이 스스로 생기할 때, 인간은 시적인 것의 본질로부터 시를 짓는다.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인간답게 거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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