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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5주차 쪽글

효영 2017.10.11 14:54 조회 수 : 160

2장 대자적 반복

1절
  반복되고 있는 대상은 반복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은 같은 것이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그 반복을 응시하는 정신은 변화를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차이있는 반복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때 반복을 외부로부터 응시하는 정신은 이미 즉자를 떠나 대자적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반복의 대자적 측면’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본성은, 들뢰즈가 흄의 언급을 참조하는바, 상상력에 가깝다. 여기서 상상력이란 수축의 능력이라고 정의된다. 이 때 정신은 반복자체를 의식하고 있을까? 적어도 이는 지성이나 기억과 같은 반성에 앞서는 것이다. 그래서 수동적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응시하는 정신은 그의 수축의 능력을 통해 과거의 순간들을 수축, 현재로 끌어들이고, 기대와 예상을 통해 미래를 수축, 현재로 다시 끌어들인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들의 지속succession은 시간을 형성한다기보다 와해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있는 것은 응시하는 주체라는 수동적 주체의 주관성과 그의 수축에 의해 와해되고 현재로 불려오는 과거와 미래, 그래서 현재의 차원으로 소환되는 순간의 연속들이다.

  들뢰즈는 시간을 세 가지의 종합, 현재-과거-미래의 순으로 전개한다.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살아있는 현재다. 앞서 전개한 정신 이전의 단계, 응시하는 주체의 상상력과 그것의 수축능력이 와해시키는 시간은 상상력의 수동적 종합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후에 기억이 자신에게 고유한 시간과 공간 안에 그 순간들을 다시 위치시킬 때, 우리는 그것들을 재생하고 반성하고 계산 가능한 것으로 다룰 수 있다. 이것이 지성의 능동적 종합이다. 반복을 구성하는 세 가지 층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동적 종합
  1) 즉자적 층위: 대상안에서 고찰되는 반복
  2) 대자적 층위: 주체안에서 고찰되는 반복  

능동적 종합
  3) 반성적 재현의 층위: 우리에 대하여 고찰
 
  예를 들어보자. 틱틱틱틱틱...의 반복(베르그송)과 틱톡틱톡틱톡....의 반복(흄)이 있다. 전자는 틱이라는 요소의 반복을 통해 보여주는 차이의 일반적 형태라면, 후자는 틱톡이라는 쌍의 반복을 통해 보여주는 특수자 안의 차이다. 전자가 요소들의 반복이라면 후자는 경우들의 반복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은 경우들 자체의 반복이다. 그러나 경우들의 반복은 언제나 요소들의 반복을 요구한다. 반면 요소들의 반복은 경우들의 반복을 통해서만 스스로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 그래서 수동적 종합안에서 양자는 서로 의존하는 관계다.
  이처럼 서로 갈마다는 관계에 있기에 반복의 두 형식의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상호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가이다. 우리가 대상을 감성적으로 수용하고 지각하기 전에 이미 지각된 대상속에는 어떤 지향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성질이 있다. 우리가 느끼기도 전에 이미 대상 안에 수축되어 있는 것들로서, 우리의 감성 이전의 차라리 원초적 감성에 의존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들뢰즈는 아름다운 표현을 한다.
  ‘우리는 수축된 물, 흙, 빛, 공기이다.(...) 모든 유기체는 수축, 파지, 기대들이 어우러진 어떤 총합이다. 생명이 숨쉬는 이 원초적 감성의 수준에 주목해보라‘(175)

  이 원초적 감성의 차원에서 체험되는 현재는 이미 과거와 미래를 구성하고 있다.
미래는 욕구 안에서 나타난다. 과거는 세포의 유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심리-유기체적 기억은 지성의 능동적 종합안에서 다시 자신을 펼쳐간다. 그래서 수동적-능동적 종합의 구분, 요소들-경우들 반복의 구분을 넘어 중요한 것은 그 각각의 수준들의 구별이다. 기호들의 영역은 이 모든 것에 의해 형성된다. 기호란, 불균등하고 불규칙한 요소들과 질서의 체계(신호) 안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어떤 것이다(66). 그래서 수동적 종합들 안에 구성, 수축되어있던 기호의 다질성points de tapisserie(페기의 글쓰기 방식)은 지성의 능동적 종합들 안에서 해석되고 펼쳐진다. 반복의 성격을 이해하는 네 측면을 기억하자.
 1) 반복의 형식들의 조합: 경우의 반복과 요소의 반복의 상호 의존 관계
 2) 이 조합들이 정교화되는 수준들: 유기체적 종합-감성의 수동적 종합- 지성의 능동적 종합 
 3) 이 수준들의 연관성: 요소의 반복의 일반성을 넘어서는 특수성 제시, 다시 필연적으로 생생한 일반성이 태어남. 새로운 무한
 4)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들의 상호 간섭: 기호의 구성과 펼침 

  들뢰즈는 여기서 우리가 유기체적 종합까지 나아가게 된 것은 습관의 문제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지적하는 습관은 통념과는 다르다. 습관은 심리학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듯, 내성적으로 신체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므로 물리쳐야 할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습관을 응시로, 그러한 응시를 자아의 본성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어떤 것이 계속/뒤따라올 것에 대해 우리가 구성하는 기대가 습관을 형성한다. 그래서 습관을 수축이라고 부른다면 이렇게 뒤따올 것으로 기대되는 한 요소, 그 순간을 언급하는 것이고, 습관은 이에 대한 응시를 통해 그 정신 안에서 형성되는 반복이다.
  그렇다면 응시하는 자아는 왜 이런 기대를 갖게 될까? 응시 속에서 자아는 ‘반복에서 새로운 어떤 것, 곧 차이를 훔쳐’내기 때문이다. 반복에서 새로운 어떤 것, 차이를 훔쳐내는 것은 상상이고, 응시하는 정신이다. 들뢰즈는 반복은 본질상 상상적이라고 본다. 상상만이 반복적인 힘의 연속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참된 반복은 상상에서 온다. 그래서 응시란 일종의 미신, 상상, 주제넘은 믿음,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향한 한없는 신뢰, 그로 인한 자기만족이다. 이를 미신으로 치부해선 안된다. 이를 통해 응시는 우리의 정신이 구성하는 충만한 일반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신에 가까운 믿음은 중요하다. 버틀러 지적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그런 신뢰나 믿음이 없다면 밀은 무력해질 것”이고 우리 역시 그럴꺼다. ’(구체적으로 응시를 통해 훔쳐내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러한 미신에 가까운 믿음과 희망, 기대 등이다. 궁극적으로 그런 기대나 희망에서 오는 자기만족적인 쾌락, 기쁨의 정서적인 분비들이다. ‘여기서부터 나르키소스적인 자아가 자라난다.(김상환)’ 그러나 이것은 상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인 종합의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수축은 밀알도 한다.) 우리가 습관들로 이뤄져 있다면, 이는 우리가 수축하기 때문이고, 수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응시 때문이다. 나아가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응시하기 때문에 실존한다. 수축하기 때문에 존재한다.’(178) 쾌락이 우리의 심리적 삶을 지배하는 어떤 최고의 원리라면, 쾌락 역시 어떤 ‘충만한 응시의 흥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수동적 종합의 지극한 행복이 있다.

noname01.png  한 반복 안의 어떤 질서에서 다른 질서로의 이행이 수평적 구도에서 전개된다면, 한 반복에서 다른 반복으로의 이행은 수직적 구도에서 전개된다. 이른바 같음의 반복은 언제나 외피이며, 그 중핵에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 역으로 반복이 또한 두 차이 사이에 있다. 그래서 반복은 차이의 한 질서에서 다른 질서로 이동하게 만든다. 이는 외부적 차이들로부터 내부적 차이들로 이행하는 것, 요컨대 개체적 차이(differentication)을 만들어내는/선재하는 개체화하는 차이(differenciation)이다.
  그렇기에 반복의 질서는 언제나 질적 변용을 갖는다. 그러나 응시적 영혼들이 발휘하는 수축의 자연적 범위에 따라 현재적 지속이 달라진다. 영혼이 자신이 응시하는 것을 더 이상 수축할 수 없을 때, 그러한 국면을 피곤이라 한다. 이 때 응시와 수축은 와해된다. 이는 욕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종합의 한 관점일테다. ‘반복은 본질적으로 욕구 안에 기입되어’ 있고, 이런 욕구와 그에 대한 감당하지 못함의 상태인 피곤은 모두 응시들로부터 정의된다. 그리고 응시하는 주체의 습관의 형성과 수축은 기호들, 언제나 현재에 속하는 기호들로 정의된다. 과거와 미래의 순간들은 모두 현재에 수축되는 바, 현재의 다른 차원들에 불과하다. 여기서 기호는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자연적인 기호로 현재를 드러낸다. 다른 하나는 인공적인 기호로 이것은 과거와 미래를 드러낸다. 전자가 수동적 종합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능동적 종합을 함축한다. 이러한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 기호를 넘어 막바로 인공적 기호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욕구 그 자체는 능동성 이전에 수동적인 응시의 토양으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부정이 아닌 응시의 유한한 긍정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두 번째 종합으로 나아가기 전, 시간의 첫 번째 종합, 살아있는 현재에서 우리는 모든 심리적 현상들이 파생되는 정초지점으로서 습관, 그리고 그것의 형성하는 응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수용성, 수동적 자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감각 작용 이전에 유기체 자체를 구성하고 수축하는 응시이다. 거지 몰로이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그의 보잘 것 없는 재산들처럼, 이 응시하는 주체의 소유, 주제넘은 자만, 어떤 기대나 권리 표명은 때로 자기만족을, 때로는 피곤하도록, 또 때로는 조소를 자아내는 것들 속에서 분열된 자아를 구성하고 있다. 

 

2절
  살아있는 현재라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현재 속으로 수축/구성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지나가버리는 현재이다. 이른바 수축의 유한성, 습관의 종합은 시간의 정초이지만 시간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정초가 대지라면, 근거는 그 대지의 전유(專有)를 밝히는 하늘이다. 여기서 두번째 시간의 종합, 과거에 근거지어지는 기억이 제시된다.
  훗설의 용어 파지retention에 따르면 과거는, 특수성을 통해 현재에 속하는 무매개적인 것, 직접적인 과거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와 반대로 기억의 재생reproduction의 측면에서 일반성을 띠게 되는 과거를 제시한다. 과거의 특수한 것이 현재에 불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현재가 과거 일반 안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고, 사라진 현재가 현행적 현재 안에 재현전화represente되어 있다. 여기서 사라진 현재가 현행적 현재 안에 재현된다는 것은 두 가지 상이성을 요구한다. 하나는 사라진 현재가 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시에 현행적 현재가 반성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반성/반조reflexion란, 빛이 반사되어 되쪼이는 것, 즉 주체의 자기인식을 함축한다. 그래서 수동적 종합 아래, 현재가 수축을 통해 구성한 시간을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다시 재배열한다. 이 때 배치, 어떤 ‘서로 끼워 맞추는emboilment’ 방식의 조건이 과거의 순수 요소이다. 이는 선험적인 과거이다. 그래서 그것은 습관의 수동적 종합이 아닌 그 자체의 고유한 수동적 종합에 근거한다. 그 순수과거를 축으로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를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그 순수과거란 무엇인가?
  여기서 잠시 주의할 것은, 순수과거가 그렇다고 해서 두 현재 사이에 끼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선 안된다는 점이다. 새로운 현재의 출현으로 뒤로 밀려나는 것이 과거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는 지나가는 현재에 선재한다. 각각의 과거는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고, 과거 전체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거리를 둔 현재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는 재현되지 않는다. 재현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이다. 수동적 종합은 동시간성, 공존, 그리고 선재라는 이 세 가지의 관점에서 순수 과거와 관계한다. 반대로 능동적 종합은 현재의 재현이며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의 반성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이뤄진다.

noname02.png  습관의 수동적 종합과 기억의 수동적 종합을 비교한다면 반복과 수축의 할당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전자에서 현재는 서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후자에 현재는 모든 과거 전체와 공존을 이룬다. 베르그손의 유명한 원뿔의 비유는 이러한 현재와 과거 전체의 공존을 잘 보여준다. 현재 세계인P에 접하는 꼭지점S는 사실 그 위에 A-B, A’-B’, A’‘-B’‘...등으로 무한히 쌓인 과거와 공존한다. 단지 무한하게 상이한 이완과 수축의 정도들에 따라 공존한다. 여기서 계속 이어지는 현재들의 반복, 똑같은 삶을 펼친다는 인상을 주는 반복, 운명이라고 불리는 반복은 사실 위와 같은 현재들 사이에 함축하는 ’어떤 정위 불가능한 연관들, 원격 작용들, 재취합과 공명과 반향의 체계들, 객관적 우연들, 신호와 기호들, 공간적 상황과 시간적 계속성들을 초월하는 어떤 역할들‘과 가깝다. 따라서 운명은 결정론보다 오히려 자유와 매우 잘 부합하게 된다.
  두 가지 반복이 있다. 하나는 물질적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반복이다. 물질적 반복은 서로 독립적인 요소들의 반복, 살아있는 현재 안으로 수축되는 반복이지만 서로 무관심한 순간들의 수축, 부분들의 반복인 헐벗은 반복이다. 반면 정신적 반복은 공존하는 전체의 반복, 그 자체로 이완이나 수축의 상태에 있는 전체 안에서 미분적 차이differentiation를 보이는 옷 입은 반복이다. 헐벗은 반복은 옷입은 반복의 외투, 겉봉투에 불과하기에 물질적 반복은 정신적 반복의 수준들 중에서도 지극히 이완된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양자는 모두 재현 이전의 사태, 수동적 종합에 해당하고, 재현되자마자 동일성, 유사성에 종속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즉자 존재로서의 과거 전체를 현재로 환원하지 않고 그 자체를 살려낼 수 있을까? 사실 대답은 플라톤의 상기론에 의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주어져 있었다. 프루스트의 콩브레, 이 비-자발적 기억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비자발적인 것, 수동적 종합으로서의 즉자 존재의 출현은 ‘본연의 망각’에 힘입어 발생한다. ‘망각이 경험적으로 극복되는 한에서 사라진 현재들은 망각 저편의 능동적 종합 안에서 재현된다.’ 더불어 모든 상기는 에로스의 성격을 띤다. 어째서? 이를 알기 위해서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이 펼쳐진다.

 

3절
  들뢰즈는 시간 이론에 있어서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칸트적 코기토에 주목한다.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칸트는 데카르트가 무매개적으로 내린 규정, 규정되지 않은 실존을 사유하는 존재자의 실존으로 규정하는 것 사이에 ‘규정 가능한 것’을 덧붙인다ajouter. 그리고 그 규정될 수 있는 형식이 바로 시간의 형식이다. 곧 ‘시간 안에서 출현하는 수동적이거나 수용적인 현상적 주체의 실존으로 규정된다.’ 이 때 규정가능한 것으로서의 시간은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을 갖는다. ‘내 안의 어떤 틈이나 균열, 자아 안의 어떤 수동성, 바로 여기에 시간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
  데카르트에게 코기토의 순간마다 변하지 않음의 동일성은 신 자신의 동일성으로 확보된다. 칸트는 반면 자아와 신의 본질적인 비유사성을 내세운다. 들뢰즈가 발견하는 칸트의 위대한 발견은, 이러한 ‘죽은 신, 균열된 나, 그리고 수동적 자아’를 의미하게 되는 이 ‘순수하고 텅 빈 시간의 형식’이다. 그리고 여느 해석, 수동성을 종합을 결여한 단순한 ‘수용성’으로 치부하지 않고, 수동적 자아에게서 순수한 시간의 공허를 발견한다.
  그러나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을 칸트의 발명품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플라톤의 상기, 그것은 본유성과 대립한다. 본유성에는 없는 상기만의 구분, 상기의 이전과 이후가 있다는 점이다. 상기는 한차례의 망각(첫 번째 시간)과 그것의 상기(두번 째 시간)의 도입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데아 자체를 정의하는 순수과거는 현재의 관점에 표현되고, 여기서 므네모시네의 모호성이 드러나고, 근거의 불충분성 역시 이 점에서 드러난다. 근거는 자기순환논증의 오류와 같이, 근거를 자신에게서 끌어온다. 그래서 근거는 원환을 만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즉자 존재의 가상을 폭로하는 세 번째 종합, 에로스적 효과의 파기가 요구된다.
  시간의 세 번째 종합, 시간의 순수하고 텅빈 형식이란 무엇일까? 여기서 시간은 결코 원환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펼쳐나간다. 어떤 균열과 각운의 중단, 그래서 이미지 안에서 행위가 규정되고 동등하지 않은 부분들의 회집rassemble이 발생하고, 그 상징적 이미지가 어떤 시간의 집합을 구성한다. 이러한 상징적 이미지에서 시간의 계열 안의 모든 것은 반복이다. 과거는 결핍에 의한 반복, 현재는 변신에 의한 반복이다. 여기서 반복을 가려내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으로부터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산출되기 위한 조건으로 그것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반복은 ‘반성의 개념이기 이전에 행위의 조건’(212)이라고 말한다. 한번은 과거를 구성하는 반복, 다음 번에는 변신의 현재 안에서의 반복 그리고 세 번째로 이제는 과잉에 의한 반복, 영원회귀에 해당하는 미래의 반복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행위의 조건인 세 번째 반복 후에 어떤 행위자도, 조건도 돌아오지 않는다. 거꾸로 반복은 그들을 추방한다. 그래서 생산된 것 자체, 생산물의 자율성, 작품의 독립성을 구성한다. 그래서 영원회귀에서 발견되는 일관성은 자아의 동일성, 신의 동일성이 아닌 비밀스러운 일관성이다. 이름 없는 자, 평민만이 되돌아온다. 이렇게 원환이 와해되고, 비밀스럽고 찌그러진 원환을 통해 구성되는 시간의 순서, 계열은 매순간 깨뜨리고 다시 생성된다. 오로지 있는 것은 그렇기에 영원회귀 안의 비형상, 그렇기에 이것은 동시에 근거가 어떤 무-바탕, 보편적 근거와해로 나아가고 동시에 극복하는 과정이다.

*세 가지 반복에 대한 주석
  들뢰즈가 다른 역사가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맑스의 반복에 관련된 유명한 구절.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 중,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 다음에는 익살극으로. 라고 말할 때, 후자가 희극이 되는 이유는 반복이 어떠한 것도 새로움의 생성에 이르지 못하고 일종의 퇴화에 빠지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은 반성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 행위 자체의 조건임을 재확인한다.
  들뢰즈는 햄릿, 오디푸스(이에 대한 횔덜린의 해석),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서 공통된 삼항 구조를 발견한다. 이는 ‘이전-각운의 중단-이후‘이다. 이전 단계에 행위는 자아에게 버겁고 벅차다 그러나 각운의 중단 단계에 어떤 변신의 계기, 전조가 드러나고, 마침내 이후 단계에서 주체는 그것을 감당하고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반성적 유비에서 조아키노가 발견하는 것과 같은 순환 주기 안의 반복이나, 비코가 신/영웅/인간들의 시대로 구분하여 두 순환 주기 사이의 유비에 의해 확립되는 순환적 반복과는 다르다. 오히려 앞의 두 반복(순환 주기 안의 반복, 순환적 반복)은 영원회귀가 실제로 생산되기 위한 조건들을 표현한다. 그리고 영원회귀의 생성과 함께 이 조건들은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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