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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_1학기 인사원: 아감벤 정치철학

효영 180521

아감벤, <남겨진 시간>, 2일 크레토스소명받다

 

 

kletos는 사명받다는 뜻이다. 바울로에게 크레시스(소명,klesis)은 메시아적 삶을 정의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전문적인 의미를 지난다. ‘각각의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십시오.’(고리토인들에게 보낸 첫째편지 7:17-22)

 

 

베르프소명=직업

이 문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크레시스는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익 그 자체를 선으로 간주하는 마음 상태인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청교도들의 직업윤리의 세속화를 의미한다. 루터는 크레시스를 베르푸beruf로 옮긴다. 여기서 메시아적 크레시스는, 소명에 덧붙여 ‘직업’이라는 근대적 의미를 획득한다. 루터는 (베버가 크레시스 해석으로 제시했던)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의 공동체에 ‘종말론적 무관심’의 태도를 공유헸지만, 어느 순간부터 구체적인 직업의 중요성을 새롭게 평가한다. 그에게 소명이란, 신이 부여한 것, 현세의 지위에서의 직무달성이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베버는 바울로의 편지 7장에서 크레시스라는 용어를 ‘순수한’ 종교적인 의미와 베르프라는 용어의 근대적 의미를 이어주는 것으로 해석한다. 아감베은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1)과연 크레시스가 종말론적 무관심의 표현인가? 아감벤은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크레시스는 거의 모든 개별적인 현세적 상태에 그것이 ‘소명받음’으로써 발생되는 변화, 즉 매우 내면적인 위치이동과 같다. 공동체 역시 이런 점에서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메시아적 소명의 총체이다. 2)종교적인 소명에서 직업이라는 의미의 이동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소명은 어떤 구체적 내용을 지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실적인 상태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할례여부, 노예와 자유인등의 기존의 구별이 무화되는 지점을 제공하는 것이 이 소명이다. 여기서 ‘그대로 유지’하라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다. 메시아적 소명의 어두반복적 행위이다. 이는 ‘소명받은 것을 소명 받는 것’의 운동일 뿐이다.

 

 

소명과 기각

아감벤은 이와 관련해 바울로의 편지에서 ‘없는 것처럼’을 생의 공식처럼 제시하는 부분(고리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7:29-32)에 주목한다. 이 생의 공식은 크레시스의 최종적인 의미이다. 소명은 어떤 것이나 어떤 장소를 향해 요청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사실적 상태와 합치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감벤은 다시 그렇기 때문에 소명은 그 사실적 상태를 철두철미하게 기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메시아적 소명은 곧 기각이라는 공식이 나온다. 소명은 소명 그 자체를 호출하는 것이며, 내부로부터 그것을 향하여 촉발시키는 절박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안에서 다신을 양육하고 그 안에서 거처하는 행위로부터 그것을 무화시켜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크레시스 안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다.

바울로의 어휘집에서 매우 중요한 전문용어인 ‘~이 아닌 것처럼’는 사람을 자기자신과의 긴자 속에 위치시킨다. 이는 다른 어떤 곳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대립물과의 사이에서 무관심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특정한 사실적 상태는 그 상태 자체와의 관련 속에 놓인다. 모든 것들은‘~이 아닌 것처럼’의 형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고, 단순한 제거가 아닌 통과로서, 그것의 종말을 준비한다.

 

 

크레시스사용

소명인 동시에 기각이라는 크레시스의 의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바울로는 크레사이(chresai, 이용하라, 사용하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노예였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마음 쓸 것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자유로운 몸이 될 기회가 생기면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하십하시오.”(고리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7:21). 여기서 메시아적으로 산다는 것은 크레시스를 ‘사용하는’ 것, 단지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아닌 것처럼’에서의 부르심에 머무르는 것은 어떤 것의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용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한 실천과 단순한 사용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하십시오”는 율법을 벗어날 수 있는 지대로 재파악된다. 그래서 메시아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 아닌 것처럼’이라는 형태 안에 존재하는 것, 그래서 모든 법률적이고 사실적인 소유권의 박탈을 의미하게 된다. (법학자 삭소페라토가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에 관하여,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생’에는 시민법을 적용시킬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유사하다. 그들은 법적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생의 형태의 이념을 암암리에 보여준다.)

 

 

크레시스소명와 크랏세계급

바울로의 크레시스 용어에 관한 한 주해에 따르면, 라틴어 크랏시스(classis, 시민들 중 병사로 소집된 부분)의 유래가 크레시스이다. 누구는 틀리다고 하지만, 아감벤에게 이런 어원학적 추적은 맑스 사상과 메시아적 소명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흥미롭다. 맑스는 기존의 신분을 뜻하는 단어, 슈탄트stand대신에 불어를 유용한 크랏세(klasse, 계급)이란 단어를 처음 썼다. 이는 그 자체로 모든 신분의 해체를 상징했던 부르주아를 두고, 기존의 슈탄트라는 개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부르주아지를 맑스가 크랏세로 지칭하는데서 유래한다. 슈탄트의 의미의 박탈은 곧 계급이 단순한 우연성을 의미할 뿐이라는 사태를 뜻한다. 맑스가 보기에 프롤레타이아는 이러한 분열을 스스로 체현하는 자들로, 이들은 계급으로의 분열 그 자체를 폐지하고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벤야민의 ‘계급없는 사회’라는 개념에 있어서 내렸던 정확한 지적, ‘맑스가 메시아적 시간의 개념을 세속화시켰다’는 주장을 떠올린다. 메시아적 크레시스가 ‘~이 아닌 것처럼’의 형태로 모든 법률적, 사실적 구분을 소멸, 무화시키는 것과 같이, 맑스의 크랏세는 모든 사회적 신분의 해소와 게급의 분열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명받은 자가 옛 세계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생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을 폐지함으로써만이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완전한 상실’은 전면적 구제와 합치된다.

 

 

마치~처럼as it

아도르노의 메시아적 표제를 지닌 논문 <끝나기 위해서>를 보자. 여기서 아도르노는 ‘절망을 앞에 두고 유일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철학이란, 만사를 그것들이 구제의 관점으로부터 스스로 제시된 것처럼 고찰하는 시도일 것’이라고 철학을 정의한다. 여기서 ‘~인 것처럼’의 형태는 구제의 현실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 그렇기에 메시아신앙을 탐미화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감벤은 한스 파이힝거의 <마치 ~처럼의 철학>을 인용하면서, 일종의 논리적 수단인 의제fiction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이는 과학과 철학 뿐 아니라 법과 신학에서도 중심을 이룬다. 비가시적인 증상의 경계를 다루는 정신의학에서도 그렇다. 윤리와 종교, 신과 왕국, 진리 등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는 무無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마치 그러한 것, 또는 그렇지 않은 것과는 다른 것처럼 행동함으로써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혹자의 비평에 따라 이것이 탐미화라면, 이 탐미적인 아름다움은 철학이 실현의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벌인 셈이다. 자기 실현이 순간이 결핍되어있다는 것이야말로 철학에 끊임없는 구제의 외견에 대한 의무를 지운다.

 

 

임포텐셜

호피족 언어에서 임포텐셜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사례를 잠깐 보자. ‘어느 호피족의 남자가 추적자들로부터 도망하려고 달렸지만 결국 잡혀버린 이야기를 하려면, 그는 아마 임포텐셜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 말은 추적자들로부터 결국 도망할 수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연구한 언어학자 벤야민 월프는 이를 ‘목적론적 무효과’라고 분류한다. 아감벤은 아도르노의 철학이 모두 임포텐셜로 쓰여졌다고 한다. 아도르노는 철학은 계속 실현되고 잇지만, 실현의 순간은 임포텐셜한 것으로, 즉 결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임포텐셜함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음에 머무르고, 그 자체에 대한 장 아메리의 분개를 담은 정서적 반응에 오히려 더욱 가깝기 때문에, 아감벤은 이를 절대로 非 메시아적 사상이라고 평한다.

 

 

요청

그래도 아도르노의 임포텐셜 또는 아메리의 분노가 메시아적 양상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면?

요청. 요청은 우연성을 무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마를 쫓는 것과 같은 시도도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이 생이 사실상 완전히 잊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느 것을 요청한다. 아감벤은 여기서 라이프니츠의 명제를 전도시켜 요청을 재정의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요청한다. 즉 가능한 것이 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요청이란 존재하는 곳 또는 존재했던 곳과 그 가능성의 관계에 존재하고, 이 가능태는 현실태에 후속한다.

 

 

잊을 수 없는 것

여기서 요청은 상기되어야 하는 것, 망각된 것을 지금의 기억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잊을 수 없는 것으로서 남게 되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기억되는 것보다 망각되고 상실되어 가는 것들이 더 많은 법이다. 그러나 아감벤은 잊혀버리는 것들의 무형의 카오스를 불활성적인 또는 무효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감벤이 보기에 그것은 우리들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방법은 다를지라도 의식적인 기억의 퇴적력에 지지않을 만큼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는 의식적으로 알 수 없고, 지식으로 퇴적할수도 없지만, 그것이 집요하게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지식 및 인식의 서열을 규정한다. 결정적인 것은 단지 하나인 끝없이 잊혀지면서도 잊을 수 없는 것으로서 남아있어야 하는 것, 어떠한 형식으로 우리들과 함께 머물 것을 요청하고, 게다가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형식으로 가능한 것을 요청하는 것에 대한 충실한 능력인 것이다.

 

 

**‘제3일 아포리스메노스‘는 세현님의 발제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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