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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6주차 쪽글

효영 2017.10.26 18:27 조회 수 : 483

2장 대자적 반복

 

4절

1절 시간의 첫 번째 종합: 살아있는 현재- 습관, 수축, 응시

2절 시간의 두 번째 종합: 순수 과거-기억

3절 시간의 세 번째 종합: 시간의 텅 빈 형식-영원회귀

4절은 다시 앞서 1~3절에서 다뤘던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심리학적/물리적 체계에 기반해 반복 전개한다.

첫 번째 종합은 하비투스의 종합, 묶기이다. 요소적 반복을 수축하는 차이로서의 흥분을 묶는 것, 이것은 리비도 집중이다. 이 때 묶기에 상응하는 통합의 주체는 나르키소스적인 자아, 응시하고 수축하는 자아이다. 자아가 흥분, 리비도를 묶으면서 생기는 만족감을 자아가 갖는 환각적 만족감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처럼 습관을 쾌락에 종속시키는 습관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쾌락원칙에 지배되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첫 번째 수동적 종합은 쾌락 원칙에 선행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왜? 쾌락원칙은 종합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이다. 묶기의 효과다. 묶기는 흥분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수용적 자아와 수동적 자아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칸트가 수용성으로만 수동적 자아를 정의하려고 했을 때, 그는 이런 수동적 자아의 종합의 능력을 박탈해버린 셈이다. 반면 들뢰즈는 수용적 자아와 구분되는, 수동적 이고 국소적이만 응시와 수축을 통해 종합을 수행하는 자아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수동적 종합은 두 갈래길, 이중의 계열로 발전해간다는 점에 있다. 수동적 종합위에 성립하는 능동적 종합은 묶인 흥분을 하나의 정립된 대상에 관계시키려고 한다. 이른바 대상적 주-객관계. 수동적 자아가 국소적 적분이었다면 능동적 자아, 현실원칙에 따르는 큰 자아는 총괄적 적분을 시도한다. 이렇게 한 갈래가 뻗어간다.

두 번째 종합은 에로스와 므네모시네의 종합, 잠재적 대상들과 현실적 대상들의 원환이다. 앞서 쾌락원칙이 현실원칙으로 이행하는 한 계열이 있었다면, 두 번째 종합에서 전개되는 것은 또 다른 계열을 보여준다. 현실원칙, 현실적 대상 대신에 또 다른 방향에서 수동적 자아는 잠재적 대상을 향한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그것이 자아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두 계열은 모두 대상적/객체적이다. 사실 이 두 계열은 닮은데가 없지만 동시적으로 이뤄지고, 엄밀하게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양계열이 상호보충적임을 넘어, 서로 차용하고 양육하는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양자의 본성은 당연히 다르다. 전자의 상관항이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이라면 후자의 상관항은 잠재적 대상들의 계열이다.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들뢰즈는 여기서 베르그송의 8자 도식을 옆으로 뉘인 이미지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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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들뢰즈는 잠재적 대상을 제 자리에 없어야만 하는 것, 자신이 없는 곳에서만 탐색되는 것으로 사유하면서, 앨런 포우의 잃어버린 편지, 도서관의 분실된 책을 떠올린다. 이러한 비유는 매우 적확한 것인데, 오로지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것, 제자리에 없는 것, 라깡이 제시하는 상징적인 것이 이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어떤 것으로서만 실존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언제나 과거적인 것이지만, 재발견됨으로써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잃어버림이 재발견이라는 목적으로 회귀되어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 잠재적 대상의 본성은 거꾸로 그 망각과 상실의 한 가운데에 자리한다는 것이고, 끊임없이 순환하며 자리를 바꾸는 것이며, 그 상실된 것의 자격에서 현실에 언제나 선재하는 순수과거의 것이다. 이 잠재적 대상이 현실적 대상의 계열 안으로 박힐 때, 혹은 꽂힐 때,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 안에서 현재가 지나가게 된다. 그래서 잠재적 대상의 자리바꿈, 전치는 어떤 고유한 속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반복은 오로지 이 위장들과 더불어서만 구성된다. 프로이트가 원초적 억압으로 이해했던 이 잠재적 대상의 전치라는 위장의 결과 나타나는 반복의 선후관계를 오인한 데서 비롯했다. 억압하기 때문에 위장하는 게 아니다. 위장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것이고, 위장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거다. 때문에 위장에게 어떤 고정된 장소나 동일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잠재적 대상의 본성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 가면을 벗기면 뭔가 드러날 거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라는 두 현실적 계열의 항에서 자리바꿈을 하는 잠재적 대상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고, 그에게 벗길 가면이란 없다. 가면은 전치를 의미하고, 전치는 자재적 대상의 본질에 해당할 거다.

프로이트의 갈등 모델은 억압뿐 아니라 충동 이론에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같은 시선에서 무의식은 부정적인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반면 들뢰즈는 무의식의 욕망, 그 욕망은 물음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힘, 물음의 역량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전적으로 물음과 문제들은 어떤 살아있는 활동들이고, 無라는 비-존재가 아닌 ?-존재 또는 (비)-존재다. 문제들은 영원한 위장과 관련되고 물음들은 영원한 전치와 관련된다. 모든 대답을 침묵시키는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끊임없이 자리 바꾸기뿐이다.

세 번째 종합은 타나토스의 종합이다. 잃어버린 대상인 잠재적 대상과 위장된 대상인 현실적 대상은 둘다 나르시시즘을 끌고 가는 강력한 동기가 되고, 리비도가 자아로 역류하거나 회기할 때, 자아는 두 노선과 분리될 수 없다. 두 계열은 직물처럼 얽혀, 자아의 양태변화, 어떤 균열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균열된 나를 단지 시간, 순수하고 텅빈 형식으로서의 시간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한 편으로는 어떤 결핍의 양태, 이드의 양태를 반복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적 자아의 고유한 양태, 초자아의 양태를 반복한다. 앞서 보았듯, 순수하고 텅빈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빗장이 풀린 시간, 그래서 뒤죽박죽 비가역적인 계열을 이루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은 정확히 죽음본능에 대응하지만, 이 때 죽음본능이란 에로스와 적대적이거나 상호보완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에로스와 므네모시네의 종합이 이제 타나토스의 종합으로 대체된다. 들뢰즈가 강조하는 바, 프로이트가 설정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원론적 갈등 모델은, 타나토스를 헐벗은 반복의 역량과 동치시킬 뿐이다. 그것은 죽음을 어떤 물질의 객관적 규정으로 환원하는 것일 뿐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무의식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물음과 문제를 이루는 구조일 뿐이고, 위장과 전치 안에서 반복이 직물처럼 짜여갈 뿐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죽음 역시 차라리 이러한 문제틀의 마지막 형식이고, 문제와 물음들의 원천이며, 항구적으로 존속하는 동시에 생명체 안에서 주관적이고 분화된 경험으로 현전하는 것이다.

 

 

5절

영원회귀에 의해 변용되는 체계는 한편으로 유사성을 조건으로 갖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를 조건으로 한다. 두 번째 정식에 따르면, 차이는 그 자체로 분절화이고 묶기이다. 스스로 나뉘는 차이. 이 심급에서 차이는 더 이상 조건들이 아닌 차이에 의한 효과들이 된다. 그리고 이 효과들이 바로 변질된 재현의 세계를 표현한다(재현의 범주들 안으로 떨어진다). 이 두 정식은 전적으로 다른 체계에 대응할까? 결코 양립불가능한 두 해석을 의미하는 것일까?

체계의 첫 번째 특성은 회집, 유기적 조직화이다. 차이에 의해 서로를 인식하고, 차이들끼리 모이고 묶인다. 그래서 차이 그 자체가 자신을 숨기는 것과 재현의 범주들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똑같은 조건들하에서 일어나는거다. 그렇다면 차이 그 자체가 재현을 넘어서 차이나는 것을 회집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바로 이 회집에서 일군의 차이들이 다른 일군의 차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 그래서 차이들의 차이들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두 번째 등급의 차이들, 분화소의 역할스스로 나뉘는 차이을 하는 차이들이다. 이를 물리학적 개념들로 표현하면 <짝짓기-내적 공명-강요된 운동>이 된다. 이 때 차이들, 어떤 강도들인 차이들은 한 계열 안에서 성립하기도 하고,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이어지면서 성립하기도 한다. 그래서 계속 차이는 차이를 낳는다. 강도적 본성은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단어들(미학 체계), 개념들(철학 체계). 뭣보다 세 차원은 프시케의 종합에서 잘 드러난다.

묶음 개체입니다.

 

묶기(하비투스)-짝짓기

에로스-내적 공명

 

죽음본능-강요된 운동

 

 

그렇다면 차이나는 것들끼리 관계는 어떻게 맺을까? 어떤 매개가 있을까? 최소한 차이를 묶어주는 어떤 유사성이나 동일성이 전제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들뢰즈는 어떤 번개침(차이나는 강도들의 번쩍임) 이전에 드리우는 어두운 전조를 상상해본다.

어두운 전조는 두 계열을 소통하게 만든다.

1)첫번째 계열: 어두운 전조에는 불가피하게 가상적인 동일성과 유사성이 있다. 왜 가상인가? 그것이 어떤 선행조건이나 전제가 아니라, 어두운 전조 자체가 갖고 오는 통계적 효과내지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가상은 불가피한가? 차이를 재현의 범주에 입각해 사유하는 것은 우리의 고질적인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허상을 드러내고 보이는 것, 실재하는 것은 불균등하고 공명하는 계열들이다.)

2)두번째 계열: 차이들의 계열이 주어지면, 전조는 차이들의 분화소로서 행동한다. 그런데 전조의 궤적은 잘 안보인다. 자신이 유도한 현상들에 뒤덮이고, 그 자신이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두운 전조는 어떤 ‘결여’의 자리에 있고, ‘제 자리에 없는’ 대상=x가 된다. 이 지점에서 어두운 전조는 제자리에 없기에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는 것위장 또는 전조이기에 ‘계속되는 불일치’라 명명된다. 여기서 이 불일치 또는 불균등을 지우고, 균등하고 이완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차이에 있어 차이가 크다 혹은 차이가 작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큼과 작음이 있다면,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런 분화소로서의 차이들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겨나갈 수 있는가, 그 능력인 <분열가능성>을 향해 서만 있다. 거꾸로, 차이의 큼 작음 보다 중요한 것은 차이는 언제나 <내적>이라는 점이다. 유사성은 크든 작든 언제나 바깥에 있지만, 차이는 언제는 체계의 핵심에, <안>에 있다.

어두운 전조의 두 계열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 차이는 어떻게 메울 것인가? 혹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들뢰즈는 여기에 문학작품을 끌어온다. 레이몽 루셀의 동음이의어, 유사 동음이의어(billard-pillard)는 겉으로 보기에 유사하다. 반면 그것은 오직 b와p라는 기의간의 차이, 이 기의들의 분화소에 의해 구별된다. 여기서 결과적으로 유사성이 산출된다. 그래서 유사성은 언제나 선행하는 것 또는 조건짓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의 결과물일 뿐이다. 루셀의 이 동음이의어라는 낯선 이야기는 그 자체 차이들로 분화되는 언어를 보여준다. 조이스의 작품도 그렇다. 울퉁불퉁 불균등한 것들을 한데 회집하고, 거기서 차이의 분화소로서 오두운 전조가 기능하게 만든다. 그러면 어두운 전조의 활동에 힘입어 서로 공명하는 계열들이 발생하고, 강요된 운동의 진폭과 더불어 일체를 이룬다. 강요된 운동 혹은 죽음본능은 어떤 無, 없음, 부정이 아니다. 긍정의 극한, (비)-존재에 답하는 것이다. 어두운 전조가 언어체계에서, 재현의 영역의 언어법칙이 지시하는 것과는 구분되는, 어떤 <의미>를 언명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비)-존재에 대한 대답에 해당하는 것일 거다. 그런 면에서 어두운 전조는 일종의 메타언어다. 또 동시에 한 단어의 의미는 오직 다른 한 단어에 의해 언명되기 때문에, 재현의 관점에서 보면 뜻없는 단어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전조는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언명하되 무의미한 후렴으로 재현하고, 자신의 의미를 무의미한 후렴으로 재현한다. 이 이중의 상태는 의미의 영속적인 전치와 위장을 잘 보여준다. 의미를 무의미를 통해 표현하고, 말하는 동시에 침묵하며,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는 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떤 역동성들이 터져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조리한 재현에서 역동성이 빠져나가는 곳, 죽음본능을 만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카오스=코스모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요점은 발산 자체에 대한 긍정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이루는 총체성에 있다. 라이프니츠는 관점주의를 통해 단 하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수많은 관점을 제시했지만, 우리는 그것이 단 하나의 세계라는 것보다는,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절대적 의미의 발산. 카오스는 지극히 실증적이고, 그것은 그것을 펼치고설명expliquer 함축하고impliquer 복잡화compliquer하는 삼위일체의 운동을 통해 발산한다. 그리고 이 발산하는 계열들은 곧 일체를 이루는 체계의 총체성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발산하는 계열들 전체를 통해 유지되는 동시성, 동시간성, 공존성이다. 왜 동시간성, 공존성이 중요한가? 이러한 개념들이 두 계열을 원형/모상, 근원적/파생적, 일차적/이차적이라는 대립적인 구도하에서 보지 말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두 사태 혹은 계열은 동시적이고,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열은 없다. 차이만이 유일한 기원이다. 가령 프로이트가 사춘기 이후의 생식기 계열과 구분하는 유아기 계열은 오직 성인계열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효과를 미친다. 이 때 유아기 계열은 영원한 전치와 영원한 위장이라는 비밀로, 계열들의 무의식안에 공존한다. 이처럼 유아기계열을 지연시키고 이전과 이후를 공존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간의 순수형식일 거다.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환상을 어떤 계열들 밖으로 넘치는 것, 궁극적 실재의 것을 예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유년기의 장면은 상상적인 것, 비현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경험적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어린아이가 어두운 전조로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두 계열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동등하고 동시적인 두 계열은 비로소 영원회귀하는 그 자체, 순수한 차이의 세계에서 함축하고 펼치고 다시 돌아오는 복합운동을 펼친다. 이 총체성은 오직 지정가능한 기원이 없음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반대로 기원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차이 뿐이다. 바꿔 말하면, 영원회귀는 어떤 근원적인 차이의 당연한 귀결이다.

5절을 시작하면서 던졌던 질문, 체계의 상이한 두 명제1)오로지 서로 유사한 것만이 차이를 지닐 수 있다 2)차이는 차이나는 항들을 서로 직접적으로 관계지어야 한다.로 돌아가보자. 영원회귀와 같음은 분리될 수 없을까? 적어도 다른 세가지 표현을 구분해야 한다.

1) 같은 것le meme: 영원회귀에 가정된 주체는 같은 것이라고 쉽게 오인된다. 그러나 아니다. 반대로 주체는 오직 차이나는 것, 유사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2) 동일한 것l’identique: 흉내낸 것, 차이안에서 생산된 것, 허구들, 근원적인 차이 위에 필연적으로 투사, 역투사되는 것. 차이짓는 가운데 차이나는 것으로 남아있는 어떤 것을 통해 언명됨.

3) 유사한 것le semblable: 흉내낸 것, 차이안에서 생산된 것, 허구들, 발산하는 계열들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것.

+) 영원회귀l’eternel retour: 차이나는 것의 같음, 다자의 일자, 비유사화 요소의 유사성

 

 

6절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들, 차이로 연쇄되는 차이들, 같음은 오직 차이 속에서만 존재하는 시뮬라르크, 영원회귀는 이런 허구들을 분만한다. 그래서 체계자체는 시뮬라르크, 허상, 환상들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본다. 플라톤은 원본과 모상의 구별에 각별한 중점을 내세웠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깊게 들여다보면 우리는 사태가 반대가 됨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근원적이고 월등한 원본은 논외다. 오직 그를 향한 경쟁적 지망자들간의 구별이 플라톤의 관심사였다. 거꾸로 원본의 위치는 모상들과 허상들의 선별과 축출을 위해서만 요청된다. 플라톤에게 가짜 지망자를 찾아내는 것은 일생일대의 과업. 그의 이 결단은 차이를 시초에 있다고 가정되는 같음과 닯음에 종속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이 같은 플라톤의 허상 축출 프로젝트는 성공에 이르지 못했다. 자꾸 분신이 출몰하고, 그의 대화편 안에 서 허구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왜 그랬을까? 애초에 허상과 모상의 구별이란 재현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허상은 원본과 유사성이 없는 이미지이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그것은 차이를 통해 살아가는 이미지다. 원본과 유사성이 없는, 오직 차이만이 있는 그런 이미지다. 그래서 허상은 다름 또는 사이비의 원형이라고 칭할 수 있다. 허상은 어떤 즉자적 차이의 원형. 말하자면, 플라톤은 애초에 원본이라는 같음의 원형을 전제하고, 모상과 허상을 구별했지만, 그것은 다름의 원형이라는 또 다른 원형의 탄생, 거짓된 역량의 전개를 가져왔고, 곧 자신의 이론 한 복판에 반플라톤적인 개념을 만들어낸 셈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무리 재빨리 이 거짓역량을 진압한다고 해도, 모상은 물론 원형마저 부인하는 허상의 출현으로, 원형이 파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같음과 닮음, 또는 원본은 허상의 작동방식과 더불어 사후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오히려 뒤늦게 출현한 이가 원본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원본과 모사라는 구별의 정당성은 물음에 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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