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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작품은 건축무한 육면각체 연작 중 한 작품인 ‘진단 0:1’입니다. 

이상문학에서 해석이 어려운 대표적인 작품들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나마 

숫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작품이라서 그런지 수학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해석이 시도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ㅎ

 

그중 권영민선생님은 숫자판의 해석에 수학자 김명환 선생님의 해석을 동원합니다. 

김명환 선생님은 우선 숫자판을  1/10식 곱해져 가는 등비수열로 봅니다.

따라서, 그 등비수열이 결국에는 0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권영민 선생님은 그러한  김명환 선생님의 견해를 빌어와서 '진단 0:1`을 세계 소멸에 대한 진단으로 해석합니다. 

어찌보면 사선으로 기울어지는 점의 운동은 충분히 그럴 법하게 느끼도록 하기도 합니다만... 

 ( 이상전집1/권영민판/331)  

 

그러나, 묵시록적인 전망의 무게에 비해 자연수의 배열로 이루어진 숫자판과 점은 너무 가볍고 

세계의 소멸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하기엔 시인의 창조성은 보다 더 무겁습니다. 

따라서, 해석에 대한 공감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세계의 소멸을 그렇게 '전망'하는 것이 과연  

식민지 청년의 울분과 착란을 드러내는 시적인 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갑니다. 

 

 

그러나, 작가 이상의 삶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면 폐결핵이나 식민의 경험따위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특유의 건강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이상이 적어도 원한과 증오와 같은 반응적인 정념들에 지배당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하다 못해 마지막 말이 '센비키야의 메론'이라고 말하는 데서도 드러나지 않을까요? ㅎ 

시취를 압도하는 메론의 향기려니.. 

 

더욱이 동경으로 가는 이유를  ‘살기 위해서’라고 김기림에게 편지한 것에서도 죽음을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자의 절박감은 

그다지 엿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편 소설 ‘단발’과 결부시켜서 본다면 

그에게 충만했던 것은 죽음을 피하려는 절박함이 아니라

죽음을 압도하는 삶의 역량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소설 단발에서 당시에 유행했던 낭만적 자살 담론들을 얼마나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비꼬면서 

결국,  삶을 이끌어가는 매혹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지 보아 주셔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위의 작품에서  세계의 소멸에 대한 시인의  ‘전망’을 읽어내는 것은 어쩌면 시인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식민지의 작가들을그렇게 읽어내야만 할 것같은  우리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우리들은 이상문학이 가진 비의적인 면들을 해석하기 위한  어떤 틀,

즉 ‘조건화의 관점’(382)에 참으로 지독하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식민지를 경유한 작가들에게 죄의식이나 증오, 원한의 흔적들을 찾아내려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위의 작품에서 11행의 숫자판을 등비수열의 변화로 읽어내는 것은 아마도 

사선방향으로 움직이는 ‘점’의 궤적을 규정하려는 시도로부터 나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규정적인 점은 그렇게 해서 0을 향해 나아가는 등비수열의 지표가 됩니다.

이때 등비수열은 숫자판을 규정하는 초월적인 근거가 되고 점의 운동은 외생적으로 규정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뭐,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상 문학에 대한 해석의 대부분은 이렇습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적이건(함돈균) 역사철학적인 건(신형철) , 

또는 수학적이건 간에 이상문학의 기호들은 초월적인 도식 위에서 그 위치와 기능을 할당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상의 작품들에서 확인하는 것이 꼴랑  개념적인 도식들의  반복뿐이라는 점은 못내 서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점을 미규정적인 채로 두고 자연수의 계열들에 어떠한 초월적인 도식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점의 운동성을 해명할 수는 없을까요? 말하자면 점의 이동을 하나의 순수한 운동으로 끌어내고 

그로부터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말할 수는 없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짧은 것’을 조건화의 관점이 아니라 발생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이상문학의 해석에서도 벌어져야 합니다. 

즉, 이 작품의 경우 ‘점’이나 숫자의 의미를 초월적인 도식에 근거해서 할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차이를 상호적 규정을 통해 표현’(382)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죠. 

 

 

 

우선, 점이 표현 가능한 숫자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겠지요. 말하자면 점은 

'언제나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있는 것’, 즉 ‘재현이하의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391) 

그런데, 지난 시간에 우리는 들뢰즈가  그것을 미분적인 것에 의해 표현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각 행을 사선 방향으로 옮겨다니는 점은 그 자체로서 자기 동일성을 갖거나 재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유희를 보여주는 미분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점’ 자체가 아니라 한 행에서 다음 행으로 움직여가는  위치의 차이 , 즉. ΔX 입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11행으로 반복되는 숫자판은 점의 의미를 규정하는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ΔX에 의해서 비로소 의미화되는 문제설정의 장이 됩니다. 

 

점은 규정할 수 없지만 이 미규정성에 의해서 오히려  완고한 자연수들의 포위망 속에서도 자유롭게 출현할 수 있으며 

그 난감한 출현을 통해 하나의 방향성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러한 사선의 운동이 없다면, 자연수를 반복해서 순서대로 나열해 놓은 숫자판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실, 그 동일성의 반복이야말로 세계가 소멸되어 버리는 풍경이 아닐까요? 

 

미규정적인 점은 오히려 동일성의 반복으로 인해 소멸될 운명에 처한  세계를 구원합니다.

사선의 방향은 오히려 발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어떤 역량을 증명하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사선의 운동은 세계의 발생을 규정하는 미시적인 어긋남, 

‘클리나멘’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상은 전작인 삼차각 설계도 연작에서 ‘삼차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여러모로 이 ‘삼차각’이 일탈과 경사의 

각도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상은 삼차각 설계도에서 일탈각에 대한 어떤 착상을 얻어냈고 

이 건축무한 육면각체 연작에서 그 일탈각으로 조성되는 문제설정의 장을 펼쳐보이고 있는 셈이죠. ㅎ 

 

“클리나멘 속에는 운동하는 원자들과 미분들 사이의 비율적 관계와 유사한 어떤 것이 있다.

그 속에는 또한 사유의 언어를 형성하는 어떤 편차나 편향이 있고,

사유의 한계를 증언하는 사유 안의 어떤 것이 있다.” (402)

 

따라서, 자연수 사이의 점의 위치변화는 어쩌면 ‘ 사유의 한계를 증언하는 사유 안의 어떤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소멸해가는 세계의 종말에 대한 경고나 저주가 아니라 

그 어떤 감각 가능한 형식이나 의미작용에서도 벗어나 있는 전-개체적인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386)

 

그런 점에서 진단의 결과가 0:1 , 즉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진단서는 제출되고 있으며

0:1은 그 문제설정의 장이 가진 모종의 균열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재성과는 분리될 수 없는 상태나 차원이 그 없음과 있음의 미시적인 균열 안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념들은 그 균열의 틈바구니에서 우글대고 있고, 그 균열의 가장자리로 계속 기어나오고 있다.” (373) 

 

‘환자’는 바로 균열로 인해, “생애를 침식하는 내음산한 손찌거미와 불개미와 함께 잊어버리지” (위독연작 중 ‘생애’)못하는 자이자,

‘시체이면서 시체이지 아니한’ ( 「BOITEUX∙BOITEUSE」 중 ) 자 이겠지요.. 

즉, '환자'는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비루한 자들'이고 , 이진경 선생님이 하신 말로 보자면 '바보'이며 

들뢰즈식으로 하자면 '어리석음'의 문제에 사로잡힌 자이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위의 시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자연수들의 규정성을  지워버리면서

선명한 사선으로 드러나는 미규정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위의 시-이미지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초월론적 풍경은 살아 움직인다.”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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