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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13강 요약발제문/안차애

안차애 2020.12.17 10:53 조회 수 : 88

블랑쇼 세미나 13강 요약발제문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160-227p〉/ 안차애

 

 

k가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어렴풋이나마 큰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불빛도 없었다. k는 오랫동안 큰길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허공으로 보이는 데를 쳐다보았다.(『성』 도입부)

→ 이 불빛도 형체도 보이지 않는 모호한 ‘성’에 카프카는 우정도, 사랑도, 자기의 목소리와 나무다리 저쪽으로 이어져 있던 길마저 다 갈아 넣었다. 낮아지고 삐걱거리고 찢어질 때까지 솟아오른 자리에 ‘아무것도 아닌 것’의 빛과 소리가 쌓여 ‘성’보다 높아져 있었다.

 

[6장 , 카프카와 브로트]

 

죽은 카프카는 브로트가 완강히 주도한 카프카의 존속에 대한 은밀한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카프카는 왜 브로트를 자신의 유증자로 삼았던 것일까? 자신의 작품이 사라지길 원하였다면, 왜 카프카는 작품을 폐기하지 않았는가? (161p)

그를 알고 있던 친구들은 무슨 연유에서 젊고, 민감하고, 활달한 인물에 대한 기억에서 작품으로 옮겨가면서, 고뇌에 찬 싸늘한 밤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빛이 없진 않지만, 밝히면서도 동시에 눈을 어둡게 하는 빛이, 희망을 주면서도 희망을 불안과 절망의 그림자로 물들이는, 그러한 세계로 들어서며 놀라게 되는가?(165p)

브로트는 보다 내밀한 유혹에, 즉 주인공의 삶을 살아보려는 유혹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유혹에, 즉 주인공이 삶을 살아보려는 유혹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유혹에 이끌렸던 것 같다. 그를 더욱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고, 그로서는 잘못 찾아든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그를 일자리와 생활비 그리고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절망적으로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면서, 카프카를 우리와의 시대의 삶에 가까워지게 하고 싶은 유혹에 이끌렸던 것 같다. (166p)

카프카가 부조리에 찬 악마나 냉소적 몽상의 불안한 독창적 인물과 같은 이상한 작가가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당장의 안간적 의미를 주는 감수성 깊은 재능 있는 인물이었음을 이해시키고 싶어 했다. 의도는 가상하지만, 여기서 어떤 결과가 생겨났는가? (168p)

세계의 부재 속에서 진정한 거주의 조건을 찾으려 노력하는 인간? 이것이 자신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는 k.의 운명이요, 이러한 점에서 요제프k.와는 전혀 다른 운명이다... 브로트의 대본에는 마법과도 같이 작품의 이러한 정신이 사라져 버렸다. 그 감동은 잡히지 않고, 외침과 공허한 탄식을 거절하며, 침묵하는 거절과 냉담한 무관심을 통하는, 모든 내면세계의 소멸과 원초의 상처와 관계하는 감동이다. (169p)

떠돎, 이것이 그의 법이다. 그의 불만족은 이 떠돎의 움직임 자체이자, 그 표현, 그 반영이다. 불만족은 따라서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무엇보다 떠돎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 그것이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 그가 어기지 말아야 할 유일한 진실이다.(172p)

 → 그리하여 매개인 이미지의 환영과 초조함의 피로를 잠재워 줄, 밤이 필요하다. 죽어야하는 것처럼. 브로트는 이 떠돎과 밤과 죽음을 방해한 것일까.

 

☞ 질문1: 브로트의 「성」 대본 각색은 선명한 문장과 플롯의 통일감 등으로 인정받았지만 블랑쇼는 심각한 오독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카프카의 책임도 없지 않다. 브로트는 카프카를 망치러 온 구원자인가? 구원하러온 파괴자인가?ㅎ 브로트의 「성」 대본에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7장, 밀레나의 실패]

 

“난 정신적으로 환자이지. 폐병, 그것은 폐 주변으로 번지는 정신질환일 따름이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점심이나 저녁이 아니라 차라리 한순간 나를 뉠 수 있는 들것이겠지” 그러자 밀레나의 강렬한 열정이 폭발하면서, 편지를 펴 보는 그의 방에 “폭풍소리와 함께” 밀려든다.(178~179p)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번민이라는 말이 가장 자주 되풀이되고 그리고 그의 번민에 휩싸인 모습이 가장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따금 이 편지에서 그는 굴욕스러워하기도 하는데, 특히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거의 끝없는 비방의 감정으로 빠져드는 것도 같다.(186P)... 고문 받고 고문을 행하는 것 아닌 다른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왜 그럴까?(186p 주석)

밀레나가 카프카를 사랑한다면, 그건 번민 때문이고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번민이다. “너의 편지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내가 번민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네가 나의 번민을 인정할 때였지.... 그래, 번민을 나의 근거로 삼자. 그것이 내가 가진 최상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가진 최상의 몫이기에, 그것은 또한 네가 사랑하는 아마도 유일한 것이리라. 번민이 아니라면 나에게서 사랑할 가치가 있는 무엇을 찾을 수 있겠니? 하지만 이것은 사랑할 가치가 있다.(187p)

자신의 재능에 모욕을 가하면서 자신을 거스르며 자신을 표현하는 듯한 여기서, 카프카가 말하는 것은 비방의 쓰라림만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추억에, 마치 함께 나누는 경험을 무한히 넘어서는 그 무엇의 다가옴에 몸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나에게 다가오려 한다면, 따라서 나에게로 내려오기 위해, 네가 머물게 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깊은 곳으로 내려오기 위해 세상 전부를 버리길 원한다면,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해 넌 여기 몸을 파묻고 저기 위로 너의 너머로 초인과도 같이 솟아올라야 하리라. 아마도 네가 찢겨지고, 네가 쓰러지고 사라질 때까지 힘차게 솟아올라야 하리라. 행복도 불행도 없이, 업적도 잘못도 없이, 오로지 사람들이 날 여기 버려두었기에 내가 머무르고 있는, 장소에 이르기 위해 솟아올라야 하리라.”(190~191p)

→ 끝없이 낮아지고 또 사라져버릴 때까지 솟아오르며 진동해야한다는 가혹하고 이상한 사랑고백.

카프카의 애정관계에서 문제 삼아야하는 것은 단지 불행한 관계의 슬픔뿐만 아니라 바로 『성』의 빛나는 신비이며, 나아가 모든 여력이 다한 곳

에서도 안간힘을 다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른바 결코 만족하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탐구의 강인한 열정이다. 『성』은 놀라운 열정의 책이며, 이 열정 가운데(『소송』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메라노의 젊은 남자를 빈의 젊은 여인에게도 이끌었던 도약이 표현되고 있다고 우리는 말 할 수 있다.(192~193p)

 

☞ 질문2: 밀레나의 열정적 연애가 실패한 게 아니라면, 『성』의 여주인공 프리다의 조금쯤 서글프고 씁쓸한 변형이 ‘낮아지고 사라지게 될 때까지 솟아오르는’ 분화와 비인칭의 과정이라고 보야야 한다는 것인가?

 

 

[8장, 서술의 목소리_ 그, 중성적인 것]

 

이따금 좋지 못한 글에서는,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하고, 인물들이나 혹은 인물들이 말해야 할 사건에 대고 속삭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경솔하고 어설픈 간섭.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자는 작가, 즉 삶에 발을 딛고서 조심성 없이 끼어드는 스스로 만족하는 권위적인 이다. 그렇다, 경솔하다 - 그리고 이렇게 하여 원은 지워진다……. 마치 원이 그 중심을 원 바깥에, 원 뒤에, 무한히 뒤에 두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이 바깥이 분명히 모든 중심의 부재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중심인 것처럼. 그런데 이 바깥이 이 ‘뒤’는 우리가 모든 것을 한눈에 포착할 수 있고, 사건들을 굽어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지배의 장소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언어가 그 자체의 결핍으로 인해 그 한계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리, 물론 외부이기는 하지만 언어에 거처하면서 얼마간 언어를 구성하는 거리 그 자체는 아닐까?(196P)

거리, 작품을 대하는 작가와 독자와의 거리, 관조적 향수를 허락하는 이 거리는 이제 어떻게 할 수 없는 낯섦의 형태를 띠고서 작품 그 자체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그것은, 마치 인물이 자신이 겪는 사건들에 대해 혹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는, 그러한 중심인물에 의해 그 자체로서 체험되는 거리일 뿐만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부터 멀리하여 인물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거리이다. 이 거리는 계속해서 측정할 수도 구별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작품의 중심을 어긋나게 하고, 동시에 그 거리는 가장 엄격한 서술내부에 변질된 다른 말을 혹은 말로서의 변질된 타자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202P)

무언가가 그들에게 일어나는데, 그것을 그들은 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을 포기하여야만 되찾을 수 있고,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이미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을 마치 서술하는 말의 현재인 기억 없는 현재 속으로 이끄는 망각처럼, 그들 자신에 대한 망각처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204p) → 너무 모호한 블랑쇼의 문장. 하지만 승환샘이 수시로 언급하는 ‘없는 것이 있다’가 생각나는 문장.

서술의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작품 가운데 자리를 얻지 못한 목소리...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그 중심에 모든 다른 말들이 매몰되어야 했던 그러한 구멍이 뚫린, 구멍으로서의 말”이라 언급하고 있는 부재로서의 이 말은 – 차라리 작품 속의 어떤 공백과도 같다. 그리고 그 글이 덧붙이기를, “우리는 그것이 말하게 할 수 없었고, 울리게는 할 수 있었다 거대하고 무한한 텅 빈 징처럼......” 이것이 서술의 목소리, 작품이 침묵하는 이 장소 없는 장소로부터 작품을 말하는 중성적인 것의 목소리이다... 그리하여 목소리는 중심이 될 수 없고, 중심을 만들지 않으며, 중심에서 시작하여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으로부터 무초점의 근원을 포함한 관심의 모든 특권적 근원을 몰수하고, 또한 작품이 한 번에 영원히 끝난 완성된 전체로서 남도록 허락하지 않으면서, 궁극적으로 작품이 중심을 갖지 못하도록 한다.(206p)

 

☞ 질문3: 중성적인 목소리란 탈주체화, 탈중심화 한 서술이라고 블랑쇼는 강조하는데 이것의 문학적 구현은 독자에게 어떻게 기능하는가? 현실적인 글쓰기에서는 어떤 방법론으로 모색 되는가?

 

[9장, 나무다리 _ 반복, 중성적인 것]

 

돈키호테는 많은 것을 읽었고, 그리고 읽은 것을 믿고 있다. 그는 바로 일관된 정신으로, 자신의 확신에 따라 자신의 서재를 버리고서, 세계가 문학의 매혹과 일치하는가를 알기 위해 책이 일러 준 방식대로 엄격하게 살아보리라 결심한다. 우리는, 따라서 그리고 처음으로, 의도적으로 모방을 자처한 창작품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주인공은 그의 동료들처럼 업적을 세울 수 있는 행동하는 인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여도 소용이 없다. 그 자신이 복제의 인물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가 행동하는 것은 언제나 이미 반성에 속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의 업적이 이야기되고 있는 글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또 다른 책들에 대한 하나의 참조이다.(210P)

문학 유일의 비밀스런 교리는 바로 문학이다. 무엇보다 문학은 문학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서 말한다. 문학에는 문학을 구성하는 문학의 공백이 있다. 이 결핍으로부터, 표현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게 되는 이 거리로부터 작품은 시작되므로, 작품은 일단 말을 하게 되면 확실하게 말을 하고 다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끝없는 주석의 말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를 다시 말하려고 한다... 주석을 통한 책의 반복은 작품을 말하게 하는 결핍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말, 즉 새로우면서도 사실은 동일한 그 말이 책을 채우고 충족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 움직임을 말한다.(214P)

작품이 그 자체에 주석을 붙이면 붙일수록, 작품은 더 많은 주석을 부른다. 작품이 그 중심과 서로를 비추는’(되풀이하는) 관계를 유지할 때, 이 이중성 때문에 작품은 점점 더 수수께끼 같게 된다. 『돈키호테』의 경우가 그러하다. 『성』의 경우는 한층 더 분명히 그러하다... 따라서 성은 고독한 작가의 유일한 작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모험담의 모든 판본들이 서로 겹치고 얽히고 때로는 구분되어 읽힐 수 있는 지우고 다시 쓰는 종이와도 같다.(216~217P)

카프카가 겨루어야 하는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둘러싼 아카데믹한 공간이 아니라 삼천 년에 이르는 유대교의 글쓰기이다... 해석에서 해석으로 주석자에게서 주석자로 옮겨가면서 열정을 다해 그들 각각에게 귀 기울이고, 개입하여 그들 모두와 우리가 쉽게 탈무드식 논증에 비교할 수 있는 철저한 검토의 방힉에 따라 토론을 벌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은 일련의 사건이나 서로 연관된 사태의 진전으로 수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소 느슨하게 이어지는 여러 주석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주석들은 결국 주석의 가능성만을 목적으로 한다.(220~221P)

 

왜 이 이름인가?그리고 그것은 진실로 하나의 이름인가?

-그것이 하나의 형상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형상은 이 이름만을 형상화하고,

-그리고 왜 한 명의 말하는 자, 하나의 말은 보기와는 달리 결코 그것을 이름하기에 이를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을 말하기 위해 적어도 둘은 되

-그건 알아. 우린 둘이어야만 돼.

-그런데 왜 둘이어야 하지?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해 왜 두 개의 말이?

-그것을 말하는 자, 그는 언제나 타자이다.(227p)

 

☞ 질문4: 글쓰기란 ‘새로우면서도 사실은 동일한 그 말’ 즉, 주석을 쓰는 것이라면 세르반테스도 카프카도 자신들만의 주석을 단 이들이다. 그들이 대놓고 잡다한 참고작품의 주석을 달고도 표절이나 위작 시비에 빠지기는커녕 지금도 끝없이 폐인을 양산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말미에 ‘하나의 이름’과 이를 ‘말하는 자’에 관한 문답시편이 나온다.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해 ‘두 개의 말‘이 필요하고 그것을 말하는 자가 ’타자‘라고 하는데 이 타자는 작품 안과 밖에 다 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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