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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인사원_불온한 페미니즘

효영190610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2016), 최유미 옮김

 

 

1장 반려종과 실뜨기 하기

취약하고 상처 입은 지구(vulnerable and wounded earth)’, ‘사는 것만큼이나 죽는 것으로 가득 차고, 시작하는 것들만큼 끝나는 것들로 가득찬 복잡한 역사들’ 속에서 해러웨이는 하나의 회복을 위한 실천으로 ‘실뜨기(string figures)’를 제안한다. 그것은 손에 손을 걸고 패턴을 받고 전하며 주고받기의 리듬을 통해 플레이된다. 우리는 언제나 실을 떨어뜨리고 실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실패 속에서라도 유효한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물론 이는 ‘화해나 복구’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부분적 회복(partial recuperation)’이자 ‘친하게 지내기(getting on closer)’에 전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서 ‘부분’은 중요한데, 그것은 어떤 전적인 조화 내지 질서를 향해 완전한 회복을 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를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 하기’라고 칭한다.

해러웨이는 일관되게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내파시킨다. 이 관점에서, 실뜨기를 ‘이야기(stories)’의 측면에서 조명하고, 다시 이를 ‘사변적인 우화만들기’인 동시에 ‘사변적인 현실주의’로 결부짓는 점은 흥미롭다. 여기에는 이중의 꼬임이 엿보인다. 순수하게 이성의 작동에 의존하자는 사변성이 우화만들기(fabulation)에 불려들어갈 때, 그리고 다시 이 우화가 현실의 매듭을 풀고 맺는 행위 속에서 우리의 함께 ‘살기와 죽기의 실천들을 실현’할 때, 사변성은 기이하게 가장 현실적인 것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SF다. SF는 단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인 동시에 과학적 사실(science fact)이자 실뜨기(string figures)를 위한 기호(sign)이다. 그만큼 SF의 배경도 남다르다. 어원부터 잡종인 테라폴리스(terra땅+polis도시)(미중적분 방정식?)에는 ‘불확정한 성별들과 장르들’, ‘만들어지고 있는 종류들’, ‘의미있는 타자성’으로 가득차 있다. 이곳은 human이 아닌 ‘흙 속의 일꾼‘으로서 guman을 위한 세상이다. 해러웨이가 ’다른 문제들을 생각하기 위해 어떤 문제들을 사용하느냐가 문제‘라는 스트라선(Strathern)의 말을 인용하듯, 사변적 우화는 그 ’이야기들이 어떤 worlds를 만드느냐, 어떤 worlds가 이야기들을 만드느냐‘의 문제와 결부된다. 혹은 스탱얼스(Stangers)가 보이듯, 어떤 결정이든, 그 결과를 낳을 자들이 있는 곳에서 이뤄져야 하고, 사변적 우화 는 바로 이곳에서 이뤄져야 한다. 액터 내지 플레이어들 역시 사변적우화 내지 실뜨기에 앞서 선행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종들의 세상의 subject만들기와 object만들기의 얽힘의 결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들을 ‘보통의 조우 속의 존재자들(beings-in-encounter)’로 사유한다.

그러나 실뜨기는 어디서나 동일하게 플레이되지 않는다. 19C 말 20C 초, 민족학자들의 수집은 각개각색의 실뜨기를 제시한다. 서로 마주보는 방향으로 달리는 코요테라는 이름을 갖는 나바호 족(Navajo)의 실뜨기는 왜 해러웨이가 실뜨기를 주요 개념으로 제시하면서도 cat’s cradle이나 jeux de ficelle라는 단어를 택하지 않았는가를 보여준다. 나바호족의 실뜨기 속 마주보는 두 마리의 코요테들처럼 매듭은 ‘분기해야 하고 테라폴리스 속의 많은 접합 부분 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일부 나바호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나바호족의 실뜨기란 일종의 ‘세계의 건전한 관계들을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패턴(화)’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실뜨기를 ‘순진무구한 일반적인 제스처’라기 보다는 ‘가차없는 역사적인 관계적 우연성 속에서의 위험한 제안’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더 살만한 cosmopolitics를 구성하기의 위험들과 기쁨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해러웨이에게 중요한 안내자는 비둘기들이다. 그에 따르면 비둘기들은 ‘복수종생물들의 육체와 경쟁하는 지형들을 통해서 분기하는 방식으로 모든 이를 위한 생태학과 정치학을 변형하고 있는 동물들’이다. 해러웨이는 한 때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의 반려로 미국에 들어와, 도시를 점령하고 병의 매개체로 인간의 사랑과 혐오를 동시에 유발한 이 비둘기들이 자리하는 테라폴리스의 틈새 공간에서 그들의 worlding을 관찰한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자신의 비둘기장을 찾아가는 이 재능있는 새들의 지도감각과 나침반 감각, 그리고 소위 자기 인식 능력은 인간이 그들과 함께 유능하게 되고, 함께 응답-능력들을 만들었다는 점을 설명한다.

다른 한편 일하는 비둘기들은, 환경 정의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의 반려들이 된다. ‘PigeonBlog’라고 불리는 예술 행동주의프로젝트는 소수자에게 더욱 위협적인 공기오염에 대한 일종의 대중사회 실험으로서 경주 비둘기들과 함께하는 복수종생물의 예술을 구현한다. 그에 대한 결과적인 반응으로 한편으로 군사적 개발으로의 제안이,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학대와 과학적 실험도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는데, 그를 전하는 코스타(Da Costa)의 물음은 그와는 다른 데에 있다. ‘인간-동물 작업은, 과학이라는 우산 아래서 만들어질 때와 같은 타입의 행동보다 덜 합법적인가?’ ‘일하고/놀이하는 인간-동물 관계들’에는 많은 논란과 (손쉬운) 공격이 뒤따른다. ‘하찮은 것’이자 ‘그저 장난’인 예술에서 오히려 해러웨이가 진지한 세속성(worldliness)과 회복이 가능하게 되는‘ ’SF의 전제‘를 발견하는 것은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PigeonBlog’는 ‘동물 혼자만은 아니고, 실천만도 아’닌, ‘명백하게 기록되는 두 ’함께-되기‘의 활성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으로 비둘기들이 사람들을 재능있는 비둘기 애호가들로 변화시키고, 그것으로 애호가들이 이 비둘기들을 믿음직한 경주 비둘기로 변화시키는, 관계들이다.’ 크라셋(Matali Crasset)이 디자인한 비둘기집(pigeonnier), 도시의 관리계획의 일환으로 구성된 이 비둘기집이 무엇을 기념하는지 데스프레(Vinciane Despret)가 물었을 때 그 역시 하나의 실뜨기 게임을 예화한다. ‘복수생물의 도시에서 매우 중대한 하나의 산아제한’, 그리고 이 복수종들의 땅의 ‘정착민/이주민’과 ‘고유한 토착민’에 대한 하나의 ‘설득력 있는 기표’로서 Batman공원의 비둘기 집은 ‘비둘기-인간 갈등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다루려고 하는 노력’을 보여준다. 블로그 Pitchfork가 주목하듯, 무엇보다 이 비둘기 집에서 생산되는 비둘기 똥(compostable dropping)은 훌륭한 퇴비로 우리의 음식 시스템 안으로 들어온다. 해러웨이는 이 실뜨기,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응답-능력’에 대한 더욱 큰 열림을 희망한다. ‘없음과 있음, 죽이기와 양욱하기, 살기와 죽기 양쪽 모두에 관한’ 응답-능력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누가 살고 누가 죽고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부적인 것들이 요구된다. ‘세부 사항들이 실제 존재자들을 실제 응답-능력들에 연결’하기 때문이다. ‘항상 서로를 감염시키는’ 반려종들과 그들의 파트너들이 ‘함께 잘 살고 죽기’ 위해 어떤 근육을 키우고 어떤 에어로빅 체조를 하고 있는지, 우리가 ‘몇 가닥의 실을 추가할 때마다’ 우리의 ‘복잡한 worlding의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좀 더 일관성을 갖게 된다.’ 비록 우리가 모두 ‘복수생물졸의 번창을 위한 조건 마련에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응답-가능하지 않다.’ ‘차이들은 중요하다.‘ 그래도 꿈꿔본다. 우리 모두에게 경주 비둘기의 그 섬세한 지도감각이 있어 이 ‘어려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항해할 수 있다면!

 

 

해러웨이, 『종과 종이 만날 때』(2008), 최유미 옮김

 

 

제1부 우리는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3장. 고통나누기- 실험동물과 인간의 도구적 관계

 

 

이야기는 파머(Nancy Farmer)의 소설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실험실에서 일하는 기니 피그와 역시 일을 하는 체체 파리, 그들을 돌보는 노인 조세프(Baba Joseph)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세프는 체체파리에게 물리는 기니 피그들의 고통에 관해 알기 위해 똑같이 자신의 팔을 체체 파리장에 넣는다. 이것은 ‘영웅적 행위’가 결코 아닌데, 오히려 그는 ‘가능한 죽을 운명의 존재’이자 ’실험실에서 가장 취약한 액터의 노동조건‘을 다루는 ’실제적 및 도덕적인 의무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세프가 보여주는 ’노동조건 나누기‘는 곧 우리에게 실험실의 장면을 ’그 자체가 언제나 응답을 필요로 하고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 관계‘와 결부해서 고민하게 한다. 해러웨이가 강조하는 바, 응답이란 ’응답(response)‘하는 능력, 즉 ’책임(responsibility)과 함께 키워지는 존재’이다. 바꿔 말하면, 책임이란, 주객이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는 ‘내적 작용’ 속에서 창출되는 어떤 ‘관계성’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대칭적인 ‘형상과 감촉’을 지니지 않는다. 응답은 실험자인 인간과 피실험자인 동물과 같은 ‘경계가 확정된’ ‘자기-유사성이라는 관계성의 내부’에서는 출현할 수 없다. 그 이상의 책임을 요구하는 ‘인간과 동물의 도구적 관계’는 오히려 위험하다.

이런 점에서 해러웨이는 ‘자유가 없는’이라는 실험동물에게 붙여지는 수식어를 거부한다. 차라리 그는 ‘여러가지 정도의 자유(degrees of freedom)’라는 메타포를 택하는데, 그로써 그는 동물-인간관계를 권리보다는 노동의 카테고리를 통해 탐구하고자 한다. ‘서로 사용한다라는 관계’가 곧 ‘부자유와 침해’를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용이라는 관계’는 반려종의 관계, 즉 ‘죽을 운명의 존재로서 책임있게 사는 것’에 관한 것이다. 실험동물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동물들에게 고통을 끼친다는 악의를 지워내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응답하려 해도 대개의 경우 고통도, 죽음도 대칭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그러한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서 ‘죄악감’을 택하기보다, 그로써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억하고 감지할 근본적 능력을 함양’하자고 말한다.

가령 데리다는 동물의 ‘희생’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책임이란 계산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으 ‘희생의 로직과 응답능력의 배타적 소유’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데리다는 이를 범죄라고 부른다, 데리다는 이로부터 죽이기를 둘러싼 식별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식별에 있어 회의적이다. 오히려 그는 죽이는 행위 자체를 필요성과 노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관찰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분명히 ‘인간이 의미있는 타자를 죽일 필요성 따위, 인정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실험실의 동물은 일함을 당하는 객체인 동시에 일하는 주체이다.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시급한 문제는 인간과 동물이 얽힌 노동의 적절한 위치 부여를 고안해내는 것이고, 실험실 동물이 죽여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응답하는 의무를 지는 것이다. 이 의무는 쿳시의 소설에 등장하는 루리처럼 자신이 아끼는 개의 안락사를 의뢰함으로써 죽이기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과도 더 좋은 방식으로 마주하게 되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 내지 죽음을 결코 잘 양육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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