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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6. 10.11.12 장 쪽글

muse 2019.03.27 21:24 조회 수 : 62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6. 10.11.12 장 쪽글

                                                                                                                      박연희

(들뢰즈가 흄을 이야기할 때는 조금 느리고 신중하고 정중하다가 니체를 이야기할때는 아주 경쾌하면서도 빠른리듬으로 글을 쓰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 디오니소를 이야기할 때는 한편의 서사시처럼, 유목주의를 말할 때는 마치 선언문처럼 읽힙니다. 문장이 아름다워서 베껴쓰기가 그리 지겹지 않고 쓰면서 정리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테세우스가 진짜로 돌아오지 않을까요?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요? 아리아드네가 지워버려서인가요? 매순간 다시 살아도 좋을 삶을 사는 것이 영원회귀라면 그것의 호오를 판단하는 주체가 명석해야하는 것은 아닌지요? ^^)

박연희

6. 흄

*경험주의의 의미 :그의 경험주의는 일종의 미완의 공상과학의 영역이다. 즉 이론이 이제는 실험이 되는 것이다....만일 철학사에 관한 개론서들이‘관념 연합론’이라 불리는 것 속에 일상적인 의미의 이론을 본다거나 또는 거꾸로 합리주의와 비슷한 것을 볼 경우, 그 개론서들은 연합관념론을 오해하게 된다. (p. 130)

*관계는 관계 자신의 항들에 대해서 외적이다. 이 논제는 그것이 오로지 합리주의 철학이 행 하는 모든 노력에 맞서서 대립될 때에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합리주의 철학은 관계를 관계의 고유한 항들에게 내적이게 만드는 방식을 발견하거나 또는 처음부터 관계 자체 가 내적인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깊은 항을 찾거나 함으로써 줄곧 관계의 역설을 줄이고자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P.132)

**관계의 본성

 

* 관념이 감각되는 인상 속에 담겨 있는 것과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지니지 않으며 또 그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지니지 않는 이유는 바로 관계가 자신의 항들인 인상 들 또는 관념들에 대해 외적이고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이는 이제 관념과 인상 사이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인상 또는 관념 사이에, 즉 항들에 대한 인상 또는 관념과 관계에 대한 인상 또는 관념 사이에 있게 된다. (p. 133)

**인간의 본성

 

*흄의 사유는 이중의 장부 위에 기록된다. 즉 관념들 또는 감각적인 인상들이 도대체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낳는 예리한 최소 단위들을 이루게 되는지를 보이는 원자론이라는 한 장부와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항들에 대해 언제나 외적으로 머물고 다른 원리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머물면서 동시에 이 항들 사이에서 성립하게 되는지를 보이는 관념연합론이라는 또 다른 한 장부 위에 기록되는 것이다. 그의 사유는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정신의 물리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의 논리학인 것이다. (p.134)

 

**인간의 본성

*아울러 모든 경험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우연하고 특별한 것에 대한 경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과성이란 달리 말해서 나로 하여금 주어진 것을 넘어서게 하는, 주어진 것 또는 주어질 수 있는 것 이상을 말하게 하는, 간단히 말해 추론하고 믿게 하는, 기다리게 하는, ……을 예상하게 하는 그런 관계를 가리킨다. 즉 [그 이전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인 과관계라는] 확신을 그 근본과 인식의 원리에로 가져다놓은 바로 그 자리 옮김이다. (P. 136)

**허구

* 환상은 그가 우연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혼동하거나, 또는 실재적으로 관찰된 유사 한 경우들의 반복을 그 반복의 결과를 흉내낸 단순한 언어적인 반복으로 대체하기 위하여 언 어의 속성을 이용하거나 함으로써, 어쨌든 허구적인 인과의 연쇄들, 불법적인 규칙들, 확신의 환영들을 만들어내고야 말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반복함으로써 자시의 거짓말을 믿게 되는 일이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며, 아울러 교육, 미신, 웅변, 시 등이 행해지는 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의 방식을 따른다. (p.138)

* 하지만 환각 자체가 인간 본성의 일부를 이룰 때, 즉 불법적인 실행이나 확신이 교정 될 수 없으며 합법적인 확신들과 분리가 안 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조직화에 필수적일 때 이 때의 환각은 그 문제가 특별히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인간 본성의 원리들의 환상 적인 이용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원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착란과 허구가 인간의 본성 쪽으로 이동해버리는 것이다. (p. 139-140)

**상상

 

*왜냐하면 열중의 근본은 이기주의는 아니지만, 이기주의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고약한 편파성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의 부모, 우리와 가까운 이들, 우리와 유사한 이들에게 열중한다(제한된 인과성, 인접성, 유사성). 물론 우리가 만약 이기주의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면, 편파성에 의한 지배보다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이기주의는 사회자체를 가능케 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오로지 제한받을 것만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P. 142)

 

* 흄의 계약과 협약 또는 계약과 인위적인 수단 사이에 세우고 있는 대립을 본다. 분명히 흄은 18세기 의 사회학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계약과 법이라는 제한적임 모델과 결별하면서, 그것에 맞서서 인위적인 수단과 체제의 적극적인 모델을 대립시킨 최초의 철학자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인간에 대한 모든 문제가 그 자리를 바꾸게 된다. 인간의 문제는 더 이상 인식 속에서 보았던 허구와 인간 본성 간의 복잡한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 즉 인간의 문제는 이제 인간 본성 과 인위적인 수단 사이의 관계로 넘어가는 것이다(발명하는 종으로서의 인간). (P. 144)

 

**열중

* 흄에 따르면 정신 또는 환상은 열중에 대하여 관악기의 방식이 아닌 타악기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즉 정신 또는 환상은 “각 각의 타격 이후에 점진적이고 비감각적으로 사라져가는 소리를 진동이 여전히 유지하는” 방식으로 열중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p. 144)

*연합의 원리들은 문화 세계와 권리 세계의 세부적인 내용을 결정짓는 관계의 궤변 속에서 그들의 참된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비로 이것이 흄의 철학의 참된 대상을 이룬다. 즉 그의 철학의 대상은 법적, 경제적, 정치적 활동과 이를 위한 실천 수단으로서의 관계들인 것이다. (P. 147)

**대중적이고 과학적인 철학

* 그의 철학은 대중적이고 과학 적인 철학, 곧 대중 철학이다. 그리고 그가 여기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확고한 명석함 은 관념의 명석함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와 작용의 명석함이다. (p. 148)

 

10.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한 결론

 

* 니체의 사상이 숨겨지고 가려진 이유 : 출판상의 이유들 : 니체 누이 엘리자베스가 유고 노트들에 가한 편집과 『권력의지』와 날조된 편지들 * 병리적 이유들-완결되지 못한 채 니체의 광기에 의한 갑작스럽게 중단된 저작들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라 는 두 근본 개념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게 됨. * 방법론적 이유-관점주의/원근법주의 :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해석 방법을 발명함. 해석만이 있다. 모든 것은 해석에 대한 해석이라는 의미의 복합체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가면이라면, 그리고 모든 것이 해석이며 가치평가라면 더 이상 해석할 것도, 평가할 것도 가면을 씌울 그 어떤 것도 없는 최후의 심급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최후의 심급에는 그 자체가 돌변의 역능, 가면들의 모양을 결정하는 역능, 해석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역능인 권력의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p. 224)

* 이러한 “권력의지”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비로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내린다. 그것은 살기를 원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그 자신이 곧 생명인데 도대체 어떻게 생명이 살기를 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배의 욕구와도 관계가 없다. 그 자신이 곧 지배자인데 도대체 어떻게 지배자가 지배하기를 욕구할 수 있단 말인가?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과연 누가 지배의 욕구를 욕구라고 부르기를 원하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권력의지는 결코 권력을 원하는 의지 또는 지배하기를 욕구하는 의지가 아니다.(p. 225)

 

* 짜라투스트라가 말하고 있듯이 권력의지의 진정한 이름은 주기를 실행하는 덕인 것이다. 실제로 가면은 그 자체가 가장 훌륭한 주기와 다른 것이 아니며, 또 가면은 우리에게 유연한 힘으로서의 권력 의지, 예술의 가장 높은 능력으로서의 권력의지의 증거를 제공한다. 권력은 이처럼 의지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지 속에서 원하는 자, 곧 디오니소스인 것이다. (p. 226-227)

* 비로가 그의 글에서 니체의 원근법주의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 화, 즉 우리가 그 무엇을 위에서 아래로 보느냐 또는 아래에서 위로 보느냐에 따라 일어나 는 모든 변화를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아래로 볼 경우, 권력의지는 곧 긍정, 차이의 긍정, 놀이, 기쁨, 주기, 거리의 창조를 가리키게 되기 때 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래에서 위를 볼 경우에는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혀서 긍정은 부정 속에서 반성되고 차이는 대립 속에서 반성된다. 왜냐하면 아래로부터 비롯되는 것들만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 자신이 아닌 것들과 대립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 서 비로와 푸코의 입장이 일치한다. (p.227)

*사실 당나귀가 예를 말할 때, 당나귀가 긍정을 하거나 또는 긍정을 한다고 믿을 때, 단지 짐을 진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당나귀는 긍정한다는 것은 곧 짐을 지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때 그는 자기가 하는 긍정의 가치를 자신이 지고 있는 것의 무게를 따라서 평가한다. (p.228)

 

*하지만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예는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짜라투스트라는 긍정 함은 짐을 지거나 떠맡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의 짐을 더는 짜라투스트 라의 기호, 즉 익살 광대만이 남는다. 여기에서 짜라투스트라는 긍정함이란 당나귀의 그것 과 반대로 가볍게 하는 것, 살아 있는 것의 짐을 덜어주는 것, 춤추는 것, 창조하는 것임을 안다. 따라서 짜라투스트라에게는 긍정이 첫 번째의 것이고, 부정은 마치 그것이 긍정의 즐 거움을 증가시켜주는 역할을 하듯이 그렇게 긍정에 봉사하는 하나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니체는 자신의 작고 동그란 미로 모양의 귀를 당나귀의 길고 뾰족한 귀에 대 립시킨다. 왜냐하면 실제로 짜라투스트라의 예가 춤추는 자의 긍정이라면 당나귀의 예는 짐 을 지는 자의 긍정이기 때문이며, 또 짜라투스트라의 아니오가 [적극적인] 공격성의 아니오 라면 당나귀의 아니오는 [반응적인] 원한의 아니오이기 때문이다. (p.229-230)

*결국 간단히 말하자면 영원회귀의 세계는 강도로 이루어진 세계, 차이의 세계로서, 그것 은 일자나 동일자를 가정하는 세계가 아니라 반대로 동일한 자아의 폐허 위에서, 유일신의 무덤 위에서 건설되는 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원회귀 그 자체는 “되돌아옴으로써” 만 존재하는 세계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합치요, 반복을 통해서만 “같은 것”을 지니는 세 계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동일성이라 할 수 있다. (p.235)

* 실제로 영원회귀의 진정한 이유는 동등하지 않은 것,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것” 이 되돌아오는 이유는 그 어떤 것도 동등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p. 239)

*즉 [영원회귀와 관련된] 극단적 형식들은 영원회귀라는 시련에 앞서서 결코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회귀란 그 자체가 곧 시련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회귀를 사건들 자체와 더불어서 또는 일어나는 모든 것과 더불어서 이해해야만 한다. 불행, 질병, 광기, 심지어는 죽음에로의 접근까지, 이 모두는 분명히 두 측면을 지닌다. 즉 이것들은 한 측면을 통해서는 나를 나의 역능으로부터 분리시키지만, 다른 한 측면을 통해 서는 그 자체가 탐험을 위한 가공스러운 영역이면서 동시에 위험스러운 탐험의 수단이기도 한 그런 기이한 역능을 나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모든 것 속에서 영원회귀가 하는 기능이란 이처럼 중간의 형식들로부터 최상의 형식들을 분리해내는 일, 온화한 지역들로부터 몹시 덥거나 몹시 추운 지역들을 분리해내는 일, 절제된 상태들로부터 극단적인 역능들을 분리해내 는 일이다. (p.241)

*이렇게 정의된 초인 속에 서 우리는 랭보가 말한 바 있는 “인류로 가득 차고 심지어는 동물들까지 가득 찬” 시인, 모 든 것 속에서 최상의 형식과 극단의 역능만을 소유한 시인과의 유사성을 본다. 그 어디에서나 영원회귀는 증명을 한다. 즉 영원회귀는 같은 것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들을, 가면들과 역할들을, 형식들과 역능들을 증명하는 것이다. (p.242)

*그는 철학 자체 속에 연극을 도입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철학을 변형시키는 표현의 새로운 수단들 이 연극과 더불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니체의 경구가 그것이 마치 연극 연출가의 원칙이나 평가인 것처럼 이해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p. 245)

 

11. 아리아드네의 비밀

*숭고하거나 우월한 인간은 긍정한다는 것은 짐을 짊어지는 것도 아니요 멍에를 쓰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그와는 반대로 멍에를 벗기는 것이요 해방을 시키는 것이자 사는 것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말하자면 그는 긍정함이란 우월한 가치들 또는 영웅적인 가치들의 무게 아래에서 삶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가치들인 새로운 가치들, 즉 삶을 “가벼운 것” 또는 긍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임을 모른다. (P. 249)

*테세우스로부터 버림받은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가 접근해옴을 느낀다. 디오니소스-황소는 다수의 순수긍정이자 참된 긍정이요 긍정적인 의지이다. 그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떠맡지 않지만,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볍게 해준다. 그는 우월한 인간이 할 줄 모르는 것을, 예를 들어 웃기, 놀기, 춤추기, 즉 긍정하기를 할 줄 안다...결국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로부터 버림을 받아야만 했다(p. 252)

*디오니소스는 왜 아리아드네를 필요로 했을까? 또는 디오니소스는 왜 사랑받기를 원했 을까? 그는 고독의 노래를 부르면서 약혼녀를 필요로 한다. 분명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 다. 하지만 긍정 그 자체가 긍정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제2의 긍정이 요구된다. 또는 긍정은 긍정 그 자신을 배가할 수 있도록 그 스스로가 둘로 나누어져야만 한다. 니체가 “존재의 영원한 긍정이여, 나는 영원히 그대의 긍정이라오”라고 말할 때, 그는 두 긍정을 잘 구분하였다. 여기에서 디오니소스가 존재의 긍정이라면, 아리아드네는 이 긍정에 대한 긍정, 제2의 긍정 또는 적극적인 긍정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이제 아리아드네의 모든 상징은, 그 상징들이 테세우스에 의해서 흐트러지는 대신에 디오니소스와 관계될 때, 그들의 모든 의미를 바꾸게 된 다. (p. 254-255)

*영원회귀는 반드시 변환을 동반한다. 생성의 존재 또는 영원회귀는 이중 긍정의 산물이며, 이때 이 이중 긍정은 스스로 긍정하는 것을 되돌아오게 하고 오로지 적극적인 것만 생성하도록 한다. 반응적인 힘도, 부정의 의지도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변환에 의해서, 즉 선별하는 영원회귀에 의해서 제거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이제 테세우스를 잊었다. 그리고 이것은 더 이상 나쁜 추억도 아니다. 왜냐하면 [제거되어버린] 테세우스는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는 이처럼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또 그것은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간의 결합이다. (p.256)

 

12. 유목적 사유

 

*우리의 문화라는 차원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진정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재코드화의 시도이다. 즉 스스로를 끊임없이 탈코드화하는 것을 그럭저럭 재코드화하는 일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지니되, 하나는 공적이며 다른 하나는 사적인, 근본적인 두 관료주의와도 같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진정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 재코드화의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니체의 작업 은 결코 재코드화에 있지 않다. 그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크 도를 넘어서, 스스로를 코드화하지 않으며 또 코드화하지 않을 어떤 것을 작용토록 하는 일, 이 어떤 것으로 하여금 새로운 신체[“힘의 발생론적 관계”] 위에서 작용토록 하는 일, 그리고 이 어떤 것이 그 위이ㅔ서 작용하고 흐를 수 있는 신체, 즉 우리 자신의 신체, 대지의 신체, 쓰여진 글의 신체……가 될 그런 신체를 발명하는 일, 바로 이것이 니체의 관심사요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코드화의 주요 도구들이 무엇인지를 안다 (p. 260-261)

*유목민이 꼭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장소 위에서의 여행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도 속에서의 여행 또한 있기 때 문이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보면, 유목민들은 이주민의 방식으로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동하지 않는 사람들, 즉 코드들을 벗어나되 같은 장소에 머물기 위해 유목에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에 있어서의 혁명의 문제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 또는 국가장치의 전제군주적이고 관료적인 조직 속에 결코 다시 빠지지 않는 엄격한 투쟁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이다. 즉 국가 장치를 다시는 만들지 않을 전쟁 기계를 발견하는 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내적인 전제군주적 단위를 다시는 만들지 않을 유목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를 이처럼 전쟁 기계로 만들고 유목 적인 역능으로 만든 것, 아마도 이것이 니체에게서 보이는 가장 심오한 것일 것이며, 아마도 이것이 경구 속에 나타난 그 모습 그대로의 철학과의 결별이 함축하는 진수일 것이다. 비록 여행이 부동적이라 할지라도, 또 비록 여행이 감지되지 않은 채 불시에 숨겨진 상태로 이루어 진다할지라도,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유목민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가 진정으로 우리 의 니체주의자들인지 물어야만 한다.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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