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원자료 :: 인사원의 과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들뢰즈의 철학사) 4,5,8,9장 쪽글

muse 2019.03.21 02:44 조회 수 : 71

(들뢰즈의 철학사) 4,5,8,9장 쪽글

박연희

(여시아문 (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가 아니라 여시아독(如是我讀): 나는 이와 같이 읽었다라고 하려했으나 양심에 찔려서 여시아견(如是我見): 이렇게 나는 보았다입니다. 아니 보면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니 그저 눈이 있으니 본 것이지요. 그래서 그냥 기록을^^ 여시아기 (如是我記):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ㅋㅋㅋ 오늘도 저는 사경(寫經) 을 하듯이 씁니다. 사경을 하면 공덕이라도 생긴다는 데...글자의 의미들이 마음에 와 닿기를 바라며...적은 노력으로 큰 것을 바라는 욕심ㅎㅎㅎ)

 

 

4장 스피노자, 그리고 마르시알 게루의 일반적 방법

 

*주석: 진행 방법을 볼 때 분석적인 방법은 구심적이고 역진적인 반면 종합적인 방법은 원심적이고 전진적이며, 또 그 성향을 볼 때 분석적인 방법은(데카르트와 칸트의 경우에서처럼) 결과로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어떤 인식의 체계를 추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식론적인 반면, 종합적인 방법은 원인에서부터 시작하여 내려오면서 결과의 유래를 설명하는 것에 알 수 있듯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이며 존재론적이다. (p. 83 주석)

*이유들의 질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숨겨진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숨어있는 내용을 가리키지도 말로써 언급되지 않을 어떤 것을 가리키지도 않는다....게루가 철학사가는 결코 해석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p. 86)

*『소론』은 실제로 무엇보다도 먼저 신과 자연을 동일화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동일화에 따라 속성들은 이제 아무런 조건 없이 실체들과 동일시 될 수 있게 되고 또 실체들 또한 속성들이라고 정의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연은 여기에서 그 어떤 샹향된 가치 매김을 부여받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은 단지 모든 속성들 또는 모든 실체들만을 나타내는 그런 존재로서 정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p. 91) ...이것은 『윤리학』에서 말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신의 특성인 자기원인의 특성을 누리지 못한다. 『윤리학』에서 신=실체이다 (p. 91. 각주)

* 사람들은 다양체라는 실사를 (다수의 속성들과 하나의 실체라는) 두 대립된 형용사로 변형시키면서 문제를 제거해 버린다. 하지만 속성들은 형식적 또는 질적 다양체이기 때문에, 즉 속성들은 자신을 구성하는 존재들의 내재적인 차이와 상호 이질성ㅇㄹ 함축하는 구체적인 복수형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통동되는 숫자상의 복수성과는 하등의 공통점을 지니지 않는다.(p.101)

*우리는 유일 실체의 건설은 두 개열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 잡으면서 정확하게 하나의 상호연결을 하고 있음을 본다. (해설가들에 의해서 마치 『윤리학』이 하나의 유일한 가정적인 계열을 따라서 속성들로부터 실체에로의 “상승”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된다든지 또는 마치 속성들이 의심스러운 한 계열을 따라서 인식의 이유들에 불과한 것처럼 해석된다든지 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p. 105)

* 우리가 스피노자의 이 공식을 뒤집어서 마치 신의 본질이 곧 역능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즉 역능은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특성이되, 어떻게 본질이 실체의 실존 원인이 되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본질이 실체로부터 유래하는 것들의 원인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는 그런 특성일 뿐인 것이다.(p. 110)

*1)신은 자기 본질의 역능(즉 무한한 것을 세우는 생산 또는 발생 역능으로서의 자기원인)이외에는 결코 다른 역능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신은 그 어떤 오성이나 의지를 통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기의 본질을 통해서만 행위하며 생산하다. 신은 자기원인과 동일한 의미로 모든 것의 원인이다. 2)신의 생산물들 또는 결과물들은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특성들이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특성들이다.. 따라서 그것은 양태들이다.(P.110-111)

*이해할 수 없는 신의 개념을 최상의 피난처로 여기는 다수의 맹목적인 신앙에 의해서 정화된 영혼이 그의 구원을 결정하는 신과 인간 사이의 완벽한 결합을 성취하는 일은 오로지 이러한 절대적인 합리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게루는 스피노자를 데카르트, 말브랑슈, 라이프니치와 대립시킨다.) (p.114)

 

5. 스피노자와 우리

 

*스피노자라는 환경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양태적인 평면위에 우리가 있다는 것, 도는 차라리 이 양태적 평면위에 우리가 자리 잡고 산다는 것을 말한다....이 양태적 평면은 그 자체로서 이미 충만하게 내재성의 평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스피노자적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건설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입자들 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 입자들 간의 빠름과 느림의 관계가 바로 그 신체를 정의하며 신체의 개별성을 정의한다. 다른 한편으로 신체는 다른 신체들을 변용시키거나 또는다른 신체들에 의해 변용된다.(P. 119)

*실제로 우리가 신체와 사유를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으로 정의할 경우, 구체적으로 많은 것이 변하게 된다....노역을 하는 말은 차라리 소와 공통된 변용을 지닌다(P.111-112)

*신체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은 동물일 수 있으며, 소리 신체일 수 있고, 영혼이거나 관념일 수 있다. (p.123)

* 중요한 것은 글쓰기라는 것 자체가 빠름과 느림의 생산 행위라는 사실이다. 이 점에 있어서 괴테는 클라이스트와 대비되며, 헤겔은 횔덜린과 대비된다. 왜냐하면 괴테와 헤겔은 형식의 전개가 될 평면, 주체와 성격을 형성하고 교육하게 될 평면에 매달리지만, 반면에 클라이스트와 횔덜린은 얼어붙은 긴장, 가속된 운동, 비 주체화된 변용을 오로지 빠름과 느림의 어휘를 통해 사유하기 때문이다. 클라이스트와 횔덜린은 스피노자주의자이지만 괴테와 헤겔은 아니다. (p.125)

*『윤리학』은 동시에 두 번, 즉 한번은 정리와 증명의 연속적인 연쇄 속에서 그리고 다른 한번은 주석의 비연속적이고 돌발적인 사슬 속에서 쓰였다고 할 수 있다.(p.127)

* 오로지 철학만이 속도와 변용의 내재적인 평면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이며 문학과 영화 또한 마찬가지로 내재적인 평면을 가리킨다. (p. 128)

 

 

8. 칸트 철학을 요약해줄 수 있을 네 가지 시적인 경구에 대하여

 

1. 시간은 탈구되어 있다! The time is out of joint!(햄릿의 말)

* 시간이 자기의 돌쩌귀 안에 머문다는 말과 시간이 운동에 종속되어 있다 는 말은 같은 말이다. 물론 이때의 시간은 곧 운동의 측정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간격 또는 숫자가 된다. 고대 철학에서의 시간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햄릿 의 경구 “시간은 탈구되어 있다”처럼] 자기의 돌쩌귀를 벗어난 시간은 운동-시간 관계의 뒤집 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반대로 운동이 시간에 종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 여 운동 속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p.162-163)

 

*운동하며 변화하는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있지만, 시간 그 자체는 그것이 영 원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변화하지도 않으며 운동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시간은 변화하 고 운동하는 모든 것의 형식이지만, 시간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형식인 것이다. 또 시간은 영원한 형식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 시간은 영원하지 않은 것의 형식, 즉 변화와 운 동의 불변의 형식인 것이다. 시간이 지니는 이러한 자율적인 형식은 그 어떤 깊은 신비를 가 리킨다. 즉 이 형식은 칸트가 발견하거나 창조해야 할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p. 164)

 

2. 나는 타자이다.

JE est un autre.”랭보의 경구

 

*나는 생각하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나는 생각한다가 하나의 규정임이 사실 이라면, 규정은 반드시 자신의 규정 대상을 필요로 할 것이고, 따라서 이 나는 생각한다는 규 정되지 않은 어떤 실존(나는 존재한다)을 자신의 대상으로 함축하게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도대체 어떤 형식을 통해서 이 실존(규정 대상으로서의 나는 존재한다)이 나는 생각한다에 의 해 규정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실존은 오로지 시간 속에서만, 시간의 형식 아 래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현상적이고 수용적이며 변화하는 한 자아의 실존으로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p. 166)

 

* 이렇듯 랭보의 경구는, 형식이 질료 속에서 육화된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질료와 구분되는 형 식에, 사물을 규정하는 형식에,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보이는 것과 같은 주형에 관 계한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이 경구는 시간 일반의 형식에 관계한다. 즉 나의 행위와 나의 행 위가 부여되는 자아가 서로 구분되는 시간 일반의 형식이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중요한 것은 주형이 아니라 [나에게서 자아로 그리고 자아에게서 나에게로 나아가는] 무한한 변조modulation이다. 이처럼 시간은 주체 속에서 자아와 나를 구분하기 위하여 주체의 내부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때 시간은 나라는 것이 자아를 촉발시키는 형식이 된다. 즉 정신 자신 이 스스로 촉발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내성의 형식”은 시간이 우리에 게 내적이라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내성이 끊임없이 우리들 자신을 분할하며 둘로 쪼갠다는 사실 또한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둘로 쪼갬은 결코 그 끝에 이르지 못한 다. 왜냐하면 시간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p. 167)

3.

칸트적 혁명의 세 번째 측면 : “선이 무엇인지는 법칙이 말해준다.”(카프카의 경구)

 

*만약 사람들이 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그 선에 스스로 따를 줄 안다고 한다면 사실 법 칙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따라야 할 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들은 선을 대신할 법칙을 필요로 한다.)결국 법칙들 또는 법칙 이란 “이차적인 수단”만을 의미할 뿐인 것이다. 즉 법칙들 또는 법칙은 신들이 버린 세계(그 리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 세계) 속에서 보게 되는 선의 대리자만을 의미할 뿐이 다. (p. 168)

* 달리 말하자면 법칙은 그 자체로 순수 형식일 뿐, 감각적이거나 인지 가능한 그 어떤 대상도 지니지 않는다. 따라서 법칙은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법칙은 우리의 행위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가 어떤 (주관적인)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행위의 준칙이 모순 없이 보편적인 것으로 고려될 수 있다면, 그리 고 그 행위의 동기가 이 준칙 이외에 다른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모든 행위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 169)

*결국 법칙은 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음의 명령만을 우리에 게 말할 뿐이다. 선을 무시하고서라도, 즉 순수 명령의 대상을 무시하고서라도 너는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때 [무시의 대상인] 선이 법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 결코 법칙이 선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카프카의 단편 『유형지에서 』가 그 예를 보여주고 있듯이 법칙이란 순수하게 실천적인 규정이지 이론적인 규정이 아니다. 법칙은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칙에는 “인식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p. 170)

4. 네 번째 경구 “모든 감각의 착란”(랭보) “모든 능력의 착란적 실행”(칸트)

『판단력비판』은 감성적인 것이 감성적인 것 자신을 위해 가치를 지니는 미학, 감성적인 것이 모든 논리를 넘어 파토스 속으로 감성적인 것 자신을 전개시켜 가는 미학, 시간 을 시간 자신의 분출 속에서 취하는 미학, 시간의 실과 시간의 현기증이라는 근원에 이르기 까지 시간을 꿰뚫어 볼 미학으로서 곧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미학인 것이다. 또 더 이상 『판단력비판』의 시간의 질서를 규제된 관계 속에서 자아를 나에 관련시켰던 『순수이성 비판』의 촉발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시간의 원천을 이루는 기묘한 결합들을 형성하기 위해, 즉 “가능한 직관들의 임의적인 형식들”을 형성하기 위해 나와 자아로 하여금 자유롭게 뻗어나가도록 놔두는 파토스이다. (P. 172-173)

* 다양한 능력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능력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은 일치 속으로 들어간다. 즉 그것이 더 이상 규칙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깊은 일치, 그것이 아름다운 자연의 조건 아래에서 자아와 나 사이의 자발적인 일치를 증명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깊은 일치 속으로 다양한 능력이 들어가는 것 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의미에서 보면 숭고함은 (아름다움보다)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왜냐하면 숭고함은 다양한 능력으로 하여금 그들이 마치 싸움을 하듯 서로 맞서는 방식으로 놀이를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한 능력이 다른 한 능력을 그의 최대치 또는 그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밀어 붙이지만, 이와 동시에 이렇게 밀어붙여진 능력은 자기를 밀어붙였던 능력을 자기 혼자서는 결코 획득하지 못했을 영감을 향해 다시 밀어붙이면서 반응을 한다. (p.175)

*일치하지 않은 일치, 바로 이것이 『판단력비판』의 위대한 발견이자, 칸트가 행한 마지막 뒤집음인 것이다. 재결합을 하는 분리가 『순수이성비판』에 나타난 칸 트의 첫 번째 테마였다면, 종국에 이른 칸트는 이와 같이 일치를 하는 불일치를 발견한 것 이다.(p.176)

 

9. 칸트 미학에서의 발생의 이념

 

*보다 깊이 있게 말하자면 여기에서 상상력은 (입법을 하는 것이 아니라)각각의 능력이 각 자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해줌에 틀림없는, 능력들의 실행을 위한 신호 를 제공한다. 결국 앞선 두 비판에 대해서 『판단력비판』은 그들의 근거가 되는 요소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요소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새로운 요소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곧 어떤 한 능력에 (대상들이) 필연적으로 종속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대상들이 우리의 모든 능력과 우연히 일치함을 제시하는 것이며, 또 어떤 한 능력의 주관 아래 규정 된 조화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들이 그들 간에 이루는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조화 를 제시하는 것이다. (P188~189)

*칸트 미학은 다음과 같은 서로 평행하는 세 가지 발생을 우리에 게 제시한다. 첫째는 숭고함에서 출발한 발생으로서 이성과 상상력의 일치의 발생이다. 둘째는 아름다움과 연관된 [이성적] 관심에서 출발한 발생으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라 이루어지는 상상력과 오성의 일치의 발생이다. 셋째는 천재에서 출발한 발생으로서 예술의 아름다움을 따라 이루어지는 상상력과 오성의 일치의 발생이다. 물론 각각의 경우마다 해당 능력들은 그들의 기원적인 자유 상태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상호적인 일치 속에서 산출된 다. 이리하여 『판단력비판』은 앞의 두 비판의 영역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을 우리에게 제시하게 된다. 앞의 두 비판은 이미 형성된 능력들에서 출발하였고, 그 능력들 중 한 능력이 주관하는 규정된 관계들 속에 들어갔으며, 조직된 과업들을 떠맡았다. 즉 이성의 사변적인 관심 속에서는 오성이 입법을 행하였으며, 이성 고유의 실천적인 관심 속에서는 이성이 입법을 행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칸트는 『판단력비판』은 사변적인 관심으로부터 실천적인 관심에로의 이동과 사변적인 관심의 실천적인 관심에로의 종속을 동시에 보장한다. 예를 들 어 숭고함은 이미 우리 능력들의 초감성적 용도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오로지 도덕적 존재의 예정된 숙명과 같은 것일 뿐 그 외의 다른 무엇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 자연의 아름다움과 연관된 [이성적] 관심은 도덕성을 향해서 운명이 결정된 심성을 증언하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전채 그 자체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도덕적 세계에 통합시키는 일,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두 종류의 아름다움의 분리를 극복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여기 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예술의 아름다움 또한 궁극적으로 “도덕성의 상징”으로 이야기된다). (p.211-212)

 

*오성의 구속 아래에서 행해지는 도식 작용에 만족하지 않는 자유롭고 기원적인 상상력, 실 천 이성의 목적들에 더 이상 종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또한 자기 자신의 규정된 개념들이 가하는 사변적인 중량 아래 접혀 있지도 않은 무제한의 기원적인 오성, 명령 의 의욕을 여전히 취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다른 능력들을 해방시키며 자신 스스로를 해 방시키는 기원적인 이성, 바로 이것이 『판단력비판』의 궁극적인 발견들이다. “초감성적인 것 속의 집중점”을 향해 수렴하면서, 즉 우리의 모든 능력들이 자신들의 힘과 자신들의 생명을 끄집어내게 되는 바로 그 초점을 향해 수렴하면서 이처럼 우리의 각각의 능력은 자기 발생의 원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p.214)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인사원_니체 :: 너희가 니체를 알겠지?! [1] oracle 2019.01.31 664
1325 [사변적 우화 :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9,10장 발제 Siri 2022.10.20 22
1324 [사변적 우화 :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11~12장 발제 재겸 2022.10.20 19
1323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려] 5강 쪽글 sora 2022.10.20 24
1322 [조르주 바타유] 6강 후기 박소원 2022.10.17 67
1321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6강. 에로티즘 3-5장 발제. [1] file 동현 2022.10.16 68
1320 [사변적 우화: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4강 질문 haejungjung 2022.10.13 31
1319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4강 발제 종과종이만날때 8장 Siri 2022.10.13 32
1318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4강 발제_종과 종이 만날때 6,7장 탁선경 2022.10.13 126
1317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려] 4강 쪽글 sora 2022.10.12 41
1316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5강 발제. 에로티즘 서문 광기 2022.10.10 55
1315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5강 발제. 에로티즘 1-2장 사각사각 2022.10.09 31
1314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4강 후기 [1] alqm 2022.10.09 44
1313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종과종이만날때 5장 발제 Siri 2022.10.06 40
1312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3강 발제 - 종과 종이 만날때 4장 사각사각 2022.10.06 50
1311 [사변적 우화: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2강 쪽글 준택 2022.10.05 192
1310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4강 발제 [1] alqm 2022.10.03 45
1309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3강 후기 [5] file 유택 2022.09.27 203
1308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3강-2 발제 [1] 사각사각 2022.09.25 72
1307 [조르주 바타유: 위반의 시학] 3강-1 발제 [2] file 유택 2022.09.23 116
1306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2강 발제 - 종과 종이 만날때 1장 사각사각 2022.09.22 77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