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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바타유: 위반의 시학 11강 발제

필아 2022.11.28 19:35 조회 수 : 46

2022-2 수유너머104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조르주 바타유 : 위반의 시학]

부록, 할렐루야

김필아 발제

 

 

부록

 

(헤겔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는 X.에게 보낸 편지)

알렉상드르 코제브에게 헤겔의 사유 간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편지.

 

“용도 없는 부정성”, 나 자신이 바로 “용도 없는 부정성”이다. 헤겔은 자신이 기술한 진행 과정의 끝 지점에 가능성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 나는 내 삶-삶의 낙태, 열려있는 상처로서의 내 삶-이 그 자체만으로도 헤겔의 폐쇄된 체계에 대한 반론이다.

어느 누구도 밤과 다를 바 없는 것인 어떤 정상으로 “인지하지는” 못 한다. 나는-(다른 사람들이 제 모습 그대로 “인지되고 있는”그런 단순한 차원에서) 나 자신을 “인지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듯 어떤 무의미함에 대한 가정을 진지하게 하지만 유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용도 없는 부정성”은 부정성으로 변모한다. 예)예술 작품

“용도 없는 부정성”으로서의 인간은 바로 물음으로 존재하는 자신에 대한 어떠한 답변도 예술 작품 속에서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인간은 단지, “인지된 부정성”으로서의 인간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능동적인 인간이 되고 싶은 자신의 욕구가 쓸모없게 되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는 예술이 던지는 미끼에 무한정 속고만 있을 수 없는 까닭에 언제가는 그 본래의 모습대로, 즉 내용이 텅 빈 부정성으로 인지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럴 때면, 이 부정성을 죄에 다름 아닌 것으로 돌려버리고 싶은 충동도 생겨날 것입니다. 그는 마치 벽을 마주하듯 자신의 부정성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 행동으로 옮기기, 그리고 반문에 대해서)

실용 지식의 기본 요건에 대해 고찰.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 자연. 인간 자신에 대해 인간이 제기하는 반문에 대해 고찰.

 

조야한

실용지식

과학적 지식

그리고 변증법

 

언어는 긍정적 제언들을 표명함과 동시에 물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들의 내면에 어떤 상처가 생기게 한다. 이 두 명백성 간의 대립은 벌써 그 자체로 명백성에 대한 “반문”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반문은 하나같이, 어떠한 답변도 생각해 볼 수 없는 물음을, 알 수 없는 욕망에 이끌리듯 답변의 부재를 갈망하는 끝없는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

과학은 변증법적 성격을 띠고 있다. 과학의 반문은 활동의 전제 조건인 불안감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철학

 

철학은 끝없는 반문을 감당해 낸다. 철학의 성과가 아무리 기만적인 것이라 해도, 철학을 폐지시키는 것이 용이치 않은 것은 철학의 위대성이다. 철학의 모든 가치는 철학이 부양하는 휴식의 부재에 있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에 대해서)

신, 이성 삶의 직접성이 언어로 대체됨으로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 것 속에서 돌출하고 있다. 인간은 실재하는 사물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언어로 그 겹을 씌워왔던바, 언어는 연상 작용 및 의미 작용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미화된 사물이 사라진 후에도 존속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역할하는 언어는, 정확히 말로 옮겨진 실재하는 것에 덧붙여 실재하지 않는 성질 혹은 존재를 연상시킴으로써 그 자체로 하나의 질서정연한 왕국을 형성한다. 사물과 자기 자신에 대한 형태 없는 의식은 성찰을 거친 사우로 대체되었으며, 또 이러한 사유를 통해 의식은 사물을 언어로 대체시켰다. 하지만 의식이 증대됨과 동시에 언어-실재하는 존재 및 실재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연상 작용-는 감각적 세계를 대신하게 되었다.

사유로서의 언어 성장은 변증법적 성장으로 실재에 귀착하는 가능성을 갖는다.

인간을 자연에 대립시키는 것은 역사이다. 역사적 사건이 배제되면 인간은 동물적 본성 속에서처럼 한없이 자신과 닮기만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은 자연에 대한 반문과 불가분하다.

 

(기독교에 대해서)

기독교는 언어의 한 결정체에 다름 아니다. 이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는 요한복음의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의 진실은 기독교적이다.

 

(죄에 대해서)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립하는 이상 죄인이다. 인간에게 용서를 빌게 하는 겸허함(기독교)은 인간의 죄를 씻어주지 않으면서 인간을 짓누른다. 정신은 자연의 하인이다. 정신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한 인간의 자율성은 육체적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부정으로 규정지으면서 죄인의 태도를 떨쳐버린다. 이로부터 바로 일종의 종교성을 상실한 희생 의식이 비롯하며, 또 여러 형태로 전경화된 사회적 진실로부터 부분적으로 탈피한 웃음, 시, 황홀함이 비롯한다.

 

(웃음에 대해서)

웃음은 어떤 공통적 대상이 인식의 근거가 되고 있는 각별한 경우이다.

충만한 소통 속으로 이끌리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소통을 마련해 주는 파열, 즉 심화될수록 소통의 강도를 증대시키는 파열이다. 간지럼 그 자체인 파열은 의지의 관점에서는 괴롭기만 한 것이다. (에로티시즘, 베르길리우스의 웃음, 어머니의 몸짓으로 아이의 웃음)

파열이 일어나는 곳은, 이타성이 관여된 곳은 웃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희극적 대상의 운동 속이다.

 

 

 

할렐루야 / 디아누스의 교리 교육

 

 

<할렐루야>는 바타유가 1943년 피란 시절 알게 된 스물세 살 연하의 새로운 연인 드니즈 코추베를 위해 1944년 저술한 글이다. 그의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 인물들을 통해 바타유는 ‘성년’의 조건을 묻고 있다. 이‘교리 교육’은 ‘성녀’에로의 길이다.

 

쾌락의 덧없음은 사물의 심층인즉, 이 심층은 만일 처음부터 목격된 경우라면 어느 누구도 가닿을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직접적 외양은 감미로움에 다름 아닌즉, 그것에 너는 네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273)

 

우리에게 가능성으로 주어진 것은 오직 불가함뿐이다. (274) 오로지 성품이 깃든 행동, 광기 어린 행동만이 너의 내면에서 욕망의 어두운 불꽃을 유지시켜 줄 수 있을 따름이다. (275)

 

아이에게서는 순박함, 즐거운 유희, 더러움이 분리되어 있다. 성인은 이 계기들을 한데 묶는다. 성인은 더러음 속에서 순박한 환희에 가닿는다. 유치한 수치심이 결여된 더러움, 아이의 환희가 결여된 유희, 어린 시절의 정신 나간 몰입이 결여된 순박함, 이 모두는 성인들의 엄숙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우스운 연극들이다. 성품은 어린 시절을 불태웠던 불꽃을 유지시킨다. 엄숙할 대로 엄숙함은 곧 최악의 무력함이다. (278)

 

쾌락을 갈망하는 것으 곧 죽음에게 박탈당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비겁함이 아니다. 이는 삶의 최일선으로 전진하는 것이요. 대담함을 최고조에 달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충족에 대한 증오심이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부리는 술책이다. (283)

 

연인들은 서로 찢고 찢겨짐으로써만 연인들이다. 양쪽 모두 고통을 목말라한다. 연인들에게서 욕망은 마땅히 불가함을 향한 욕망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은 충족될 것이요, 욕망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284) 우리를 격렬하게 찢는 것은 단순한 찢겨짐이 아니라 바로 풍요로운 개별성, 터무니없는 개별성, 광기 어린 개별성, 고뇌에 내팽개쳐진 개별성 곧 그것이다. (296)

 

사랑-선택은 음란함에 대립하는 것이다. 정화시키는 사랑은 살이 주는 즐거움을 무미하게 만든다. 아이의 더러운 호기심은 흥분의 도가니로,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순진한 장난으로 이어진다. (289)

 

두려움과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부터 욕망이 태어나는 순간, 두려움과 역겨움은 에로티시즘의 삶에서의 정점이다. 두려움은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에 우리를 방치한다. 하지만 공허함의 신호(오물)가 그 자체의 힘만으로 이처럼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를 불러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욕망과 역겨움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갈등 속에서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공허함의 신호는 유혹적인 빛깔들을 띠면서 공포를 조성해야 한다. 성기는 오물의 배출구이다. 성기는 육체의 적나라함이 경이함을 불러일으킬 때에 한해서만 욕망의 대상이다. (292)

 

아름다움, 힘, 용기는 어떤 붕괴의 신호들이다. 그리고 용기는 표면적인 역량으로 그칠 따름이려니, 결국은 존재상의 공포 속으로 침몰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293) 아름다움은 피안의 세계에 속한다. 아름다음은 공허함이다. 아름다움은 충만함에 결여된 것, 뿌리째 뿝혀나감 곧 그것이다. (294)

 

대체 불가능한 개별성(선택받은 자)은 심연을 제시하는 손가락이다. 그 심연의 광막함을 지적하는 손가락이다. 개별성은 자신의 연인에게 자신의 그 불길한 징조들을 보여주는 어느 여인의 개별성이다. 바로 찢겨짐을 가리키는 집게손가락. 달리 말하자면, 찢겨짐의 깃발이다. (295)

 

사랑 행위는 죽음에 대한 향수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향수는 그 자체로 벌써 죽음을 넘어선다. 죽음에 대한 향수는 죽음을 넘어서는 가운데 개별적 존재들 너머로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 점은 바로 둘 사이의 사랑을 상대의 성에 대한 사랑과 구별하지 않는 연인들의 융합이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사랑 행위는 선택과 직결된 것임에도 끝없이 익명의 그 문란한 집단적 향락의 순간으로 빠져든다. (294)

 

나는 달아나고 싶다, 현 상태에서, 고독에서, 폐쇄적인 삶의 권태에서 도망치고 싶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고뇌에 빠져든다는 것은 분명 비겁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뇌를 기피하면서 초연함 속에서 안정과 굳건함을 도모하는 것 또한 비겁한 일이라 하겠다. 초연함(“아무것도 아닌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곳에서 카르멜 산의 오르막길은 시작된다. (300)

 

쾌락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이다. 쾌락은 덤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쾌락이든, 환희든, 두려움이 노래하는 터무니없는 할렐루야는 마음이 옷을 벗는 어느 광활한 세계를 알리는 신호이다. (304)

너의 할 일은 어떤 알 수 없는 운명을 찾아나서는 데 있다. 바로 이를 위해 너는 뭇 한계에 대한 증오 속에서―제도화된 규범에 자유를 대립시키는 이 증오 속에서―싸워나가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해 너는 비밀스런 긍지와 무적의 의지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운이 네게 준 이점들은 너의 찢겨짐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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