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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 : 위반의 시학] 9강 발제

필아 2022.11.07 17:02 조회 수 : 38


2022-2 수유너머104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조르주 바타유 : 위반의 시학]

웃음의 신성, 할렐루야

김필아 발제

 

 

웃음의 신성

 

운명의 도래

 

만일 인간이 도래하는 운명이라면, 올 것이 오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질문이 바로 올 것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묻는다. 인간은 희망 없는 물음이 자신의 내면을 파헤치며 벌려놓은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169)

인간은 반문의 모든 유형을 자신의 의식의 여러 형태들에 따라 조합하는 가운데 결국은 자기 자신을 답 없는 반문 그 자체로 되게 한다. (자연 속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따라서 웃음 속에서 자신을 잉태시키는 가운데) 주관적으로 하나의 존재가 되어 간다. (170)

 

웃고 싶은 심정

 

항상 나는 올 것이 오는 것 앞에서 뒷걸음질 쳤다. 나는 나 자신으로 있기가 두려웠다. 나는 웃음 그 자체였으니! (171)

;1943년 전쟁 속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진실로 인한 울기보다는 차라리 ‘웃고 싶은 심정’속에서, 비극과 웃음은 불가분하다. 비극 속의 진실은 울음보다는 웃음으로 표출된다. 울음은 비극의 시작이나, 웃음은 비극의 완성이다. 비극은 울음으로 시작하여 웃음으로 완성된다. 인간에게 웃음은 때로는 공허한 어둠 속의 향변이다.

 

나는 휴식의 유혹과 싸워야만 한다. 번갈음의 필요성. 동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인위적 위험 번민 조차도 필요하다. 번민은 행동이 결여된 탓이기도 하다. 번민은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번민은 자신을 상실하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다.

시간의 물결 속에서의 헤엄의 여러 단계

a1) 실질적 근심

a2) 행동(생산적 에너지 소비)

a3) 이완 상태

b1) 번민

b2) 부분적 또는 폭발적인 자기 상실

b3) 이완 상태

 

우주는 자유롭다. 우주는 아무런 행해야 할 것이 없다. 헤겔은 주체-노동자와 그 대상으로서의 우주, 이 양자 사이의 동일성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나는 이러한 헤겔에 반대한다. (184)

헤겔은 노동철학을 정립하는 가운데(『정신현상학』에서는 해방된 노예, 즉 노동자가 신의 위치에 놓인다)운을―더불어―웃음을 소멸시켜버렸다. (185)

;노동자는 “계획”의 인간이다. 성스러움, 자유는 “계획”을 통해 가닿을 수 없는 것이다. “계획”의 인간은 노동의 책임(이성의 책임)에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운의 개입을 막는다. 하지만 제단은 곧 운이 출현하는 곳이다. 바타유는 운의 출현지에 위치하고 있다. 즉 웃음은 자유의 표현이다.

 

나는 정상에 다가섰건만…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결정적 순간에 나는 항상 다른 할 일이 있다. (186)

 

헤겔이 그러했던 것 못지않게 나 역시 시적 신비주의에 반대한다. 미학과 문학(문학적 부정직함)은 나를 짓누른다. 개인성에 대한 근심, 자신의 각본화에 대한 근심이 내게 고통을 안겨준다. 나는 속된 것 그리고 수치스러운 진실들에 역행하는 흐릿하고, 관념적이며, 고고한 정신에게서는 등을 돌린다. (191)

 

웃음과 전율

 

웃음은 공중에 매달림이다. 웃음은 웃는 자를 공중에 매단다. 어느 누구도 공중에 매달린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웃음의 유지는 곧 무거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웃음은 무엇을 긍정하지도, 무엇을 안정시키지도 않는다. (193)

웃음은 가능성의 영역에서 불가함의 영역 속으로의 도약이며―또 불가함의 영역에서 가능성의 영역 속으로의 도약이다. 하지만 이는 한 번의 도약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곧 불가함이 영역을 가능성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는 것일 게며, 또는 그 반대일 게다.

도약의 “유지”를 거부하는 것, 이는 곧 어떤 운동의 휴면을 거부하는 것이다. (194)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자연에 의해 만족감을 얻는 자가 됨으로써 또한 패배자로 전락한다. 인간은 늘 숨이 차 헐떡거리는 다나이데스* 딸들이다. (199)

(*다나이데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오스의 딸 50명을 가르키는 말. 다나이데스는 아버지 다나오스의 지시에 따라 첫날 밤에 그들의 신랑인 아이깁토스의 아들 50명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 죄로 다나이데스는 저승 타르타로스에서 구멍 뚫린 항아리에 영원히 물을 채워 넣어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바람이 한없이 갈기갈기 찢어놓은 구름 덮인 하늘에서 나는, 헤카테*의 대죄를 짊어진 채 죽어가는 페드라*보다도 더 다그침을 당하고 있는 비극을, 사물들의 목소리 잃은 비극을 감지했으니 (202)

(*헤카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법과 주술의 여신. 교차로, 문턱, 건널목 등을 지배하고 저승으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수호신. 서로 등을 맞댄 세 개의 몸체를 지닌 삼신상으로 표현된다.)

(*페드라: 영웅 테세우스의 후처. 전처의 아들인 히폴리토스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를 모함하는 편지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종종, 헤겔은 곧 자명함에 다름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자명함은 지탱해 내기 힘겨운 것이다. (202) 바타유는 인간의 모순을 헤겔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로 제시하고 있다. 신성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라면 야만성 또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듯, 이성의 노력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라면 이성이 잠들면 깨어나는 광기 역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모순은 자명함이다.

기정화된 자명함 속에서는 인간은 인간의 속성을 불변하는 자연의 속성과 교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느낌이다. (202)

 

세계가 나의 내면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고취되고, 나아가 덧없음과도, 유치함과도, 희극적인 것과도 일치를 이룬다. 나는 주사위 던지기에 다름 아니니, 나의 힘은 바로 이 점에 있다.  한판 승부의 격렬함을 나의 내면에서 발견하매 그만 나는 행복해진다. 눈먼 격렬함이… (204)

 

나는 하나의 단어를 내세울 때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감행한다. 즉, 내가 내 주위에서 그때그때 되는 대로 주워 모은 인간의 실체 같은 것을 말이다. (207)

; 생각한다 함은 곧 소통한다 함이다. 남다를 바 없는 생각이란 곧 누구라도 그 속에서 자신을 ‘알아보는’생각을 말한다. 인간의 생각은 인간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인간은 저마다 인간의 진실 속에서 자신을 알아본다.

 

의지

에로티시즘의 두 가지 운동― 자연과의 일치, 반문(209)

인식은 행동으로 옮길 때의 확신 그리고 반문에 따른 최종적 의혹, 이 양자 사이에 대립 관계를 설정한다. 하지만 삶은 이 양자 사이에 상호 필요조건을 형성한다. 자연에 대한 순응은 행동으로 옮기는 데 장애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곤 자연에 대한 항변이다. 또 한편으로, 행동을 도모하지 못하는 무력함, 즉 시적 게으름은 그 직접적인 결과로 신의 권위에 귀의할 것을(자연의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211)

 

언어는 의지(행동으로 옮김)의 기관이다. 나는 제 갈 길을 끝까지 가는 의지를 표현 양식으로 삼아 나를 표현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말을 하고 있는 이상 의지의 포기가 의미하는 바는 곧 낭만주의, 거짓말, 무의식, 시적 횡설수설이다. (214)

; 낭만주의에 대한 그의 <시에 대한 증오>와 마찬가지로 가능성의 끝까지 나아가지 않으려는 의지의 결핍에 대한 비판이다. 낭만주의라는 이름도 시라는 이름도 가능성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불가함(초월성)의 체험으로 이어지는 가능성의 영역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밖(외재성)을 향한 의지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가능성은 항상 자신의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웃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웃음의 무한함이 무엇인 줄 모른다.

웃음은, 신발에 의해 그리고 사용함에 따라 대체로 녹초가 되어있기 마련인 발과 같은 것이다. (218)

 

숲속의 왕

 

물음을 던지는 자는, 즉 말을 하는 자는 물음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제거시킨다.

나는 나 자신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다만, 이 책에서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표명하고 있는 긍정은 어수룩한 것이라고 하겠다. 실은 나는 나를 사로잡고 있는 웃음에 불과하다. 내가 빠져들고 있는 막다른 골목은, 그리고 내가 사라져 가고 있는 막다른 골목은 기껏해야 웃음의 광막함에 다름 아니다… (225) 나는 나의 부재를 향해 나를 열어짖힌다. (228)

; 바다유는 ‘나’에 정직하고, ‘나’에 충실하다. 그만큼 바타유는 ‘나’에 시달린다. 또 그만큼 바타유는 나의 부재를 염원한다. “존재는 존재의 반대까지 나아가야 한다.” 즉, ‘나’는 ‘나’이되 또한 ‘나’가 아니다. 1943년 5월 어느날 그는 일기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나 아닌 나의 도래를 알리는 예언자이다.”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재채기가 나오는 것처럼 출현한다. 나의 태평함은 의지의 언어로 표현된다. 나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행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시간은 더 이상 멍하니 벌어진 그 상처가 아니다)

 

 

할렐루야 / 디아누스의 교리 교육

 

<할렐루야>는 바타유가 1943년 피란 시절 알게 된 스물세 살 연하의 새로운 연인 드니즈 코추베를 위해 1944년 저술한 글이다. 그의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 인물들을 통해 바타유는 ‘성년’의 조건을 묻고 있다. 교리 교육성녀에로의 길이다.

 

연인들은 서로 찢고 찢겨짐으로써만 연인들이다. 양쪽 모두 고통을 목말라한다. 연인들에게서 욕망은 마땅히 불가함을 향한 욕망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은 충족될 것이요, 욕망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284) 우리를 격렬하게 찢는 것은 단순한 찢겨짐이 아니라 바로 풍요로운 개별성, 터무니없는 개별성, 광기 어린 개별성, 고뇌에 내팽개쳐진 개별성 곧 그것이다. (296)

 

사랑-선택은 음란함에 대립하는 것이다. 정화시키는 사랑은 살이 주는 즐거움을 무미하게 만든다. 아이의 더러운 호기심은 흥분의 도가니로,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순진한 장난으로 이어진다. (289)

 

사랑 행위는 죽음에 대한 향수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향수는 그 자체로 벌써 죽음을 넘어선다. 죽음에 대한 향수는 죽음을 넘어서는 가운데 개별적 존재들 너머로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 점은 바로 둘 사이의 사랑을 상대의 성에 대한 사랑과 구별하지 않는 연인들의 융합이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사랑 행위는 선택과 직결된 것임에도 끝없이 익명의 그 문란한 집단적 향락의 순간으로 빠져든다. (294)

 

쾌락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이다. 쾌락은 덤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쾌락이든, 환희든, 두려움이 노래하는 터무니없는 할렐루야는 마음이 옷을 벗는 어느 광활한 세계를 알리는 신호이다. (304)

너의 할 일은 어떤 알 수 없는 운명을 찾아나서는 데 있다. 바로 이를 위해 너는 뭇 한계에 대한 증오 속에서―제도화된 규범에 자유를 대립시키는 이 증오 속에서―싸워나가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해 너는 비밀스런 긍지와 무적의 의지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운이 네게 준 이점들은 너의 찢겨짐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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