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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2장 살아있는 사고

 

2022. 10. 27. 발제/나희덕

 

(17세기에 로크는 각각의 사물, 돌, 새, 나뭇가지마다 고유한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의 불완전한 언어를 임시로 지정했다. 푸네스는 한때 이런 비슷한 류의 언어를 계획했다. 하지만 그는 이 계획이 지나치게 막연하고, 또 너무 모호해서 결국 작업을 포기했다.) 푸네스는 모든 숲의 모든 나무들의 모든 잎사귀들뿐만 아니라 그가 그것들을 지각했거나 떠올렸던 모든 순간들 하나하나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모든 나날들을 7천 개의 기억으로 축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다음 그는 기호들을 갖고 기억들을 정의해보고자 했는데, 결국 두 가지 이유가 그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작업은 끝이 없을 것이란 생각,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작업을 한다 해도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분류하는 것조차 끝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를 망각하는 것이다. (또,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개념을 정의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엔 그저 대부분 즉흥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밖엔 없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2장 살아있는 사고(living thought)에서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사고하며 모든 사고는 살아있음을 논한다. 이를 위해 에두아르도 콘은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이 ‘관계성’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설명해나간다.

그에 따르면, 살아있는 세계는 주술화되어 있으며, 이때의 ‘의미화(mean-ing)’는 사고를 규정하고 제약하는 인간적 시도를 넘어선 살아있는 사고의 세계 속에서 창발한다. ‘숲은 생각한다’는 명제를 통해 그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펼쳐나간다. 이러한 주술적 애니미즘은 인간만이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 다른 존재들이나 개체들을 활기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루나족의 애니미즘은 생명과 사고의 중요한 속성들을 증폭하고 드러냄으로써 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사고에 주목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처음에 언급된 예시처럼, 살아있는 사고 속에서 개들의 혼동(퓨마와 사슴 사이의)이 갖는 생산적인 힘은 사회이론에서 한편으로는 차이와 타자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한 기본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비인간 자기들

루나족의 여인들은 개들이 짖는 소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느꼈지만, 그것이 개들을 자기로서 인식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개들’을 ‘자기들’로 만든 것은 개들의 짖는 소리가 개들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모든 생명은 본래 기호적이다. 이것은 큰개미핥기의 가늘고 긴 주둥이와 혀가 진화적응하면서 개미굴의 기하학적 구조를 더 정밀하게 표상해왔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처럼 생명의 진화적응의 논리는 기호적인 것이다. 기호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표상’한다고 할 때, 이 누군가(자기self)는 반드시 인간일 필요가 없고, 우리가 표상과 결부시키곤 하는 상징적 지시, 주체성, 내면성의 감각, 의식, 자각 등을 포함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자기성(selfhood)’은 뇌를 가진 동물뿐 아니라 식물에도 해당되며, 신체적으로 구획된 유기체만의 것도 아니다. ‘자기’는 기호작용의 경유지로서 해석과정의 기원이자 산물이다. 따라서 비인간 유기체를 자기로서, 생물학적 생명을 기호과정으로서 숙고하는 것은 타당하다.

 

기억과 부재

하나의 자기로서 큰개미핥기는 자신의 형식을 ‘기억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의 닮은꼴이자 조상의 아이콘적 표상이다. 살아있는 유기체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억과 망각의 놀이는 생명에 고유한 것이자 그 중심을 이룬다. 반면, 지상에 떨어지는 눈송이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특정 형식을 취하는 우연한 산물로, 그 형식은 선택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눈송이와 달리 살아있는 생명은 본래 기호적이고 그 기호작용은 항상 자기를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큰개미핥기는 하나의 기호로서 ‘행위주체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처소가 된다.

‘기호작용’이 신체화되어 있다 해도 그것은 신체 이상의 무언가를 언제나 포함한다. 기호작용은 ‘부재하는 무언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세대가 적응한 환경과 잠재적으로 닮아있는, 기호적으로 매개된 ‘미래의 환경’에 관한 것이다. 살아있는 기호는 퍼스가 습관이라 부른 것에 대한 ‘예측’이며, ‘가능성’의 산물이자 고도로 신체화된 ‘추측’의 산물이다.

 

생명과 사고

생명의 기원은 또한 사고의 기원을 표시한다. 생명-형식(인간이든 비인간이든)은 본재 기호적이기 때문에 퍼스가 ‘과학적 지성’이라고 부른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과학적’이란 인간의 의식적이고 합리적 지성이 아니라 단순히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지성이다. 요컨대 생명은 기호적이며 기호작용은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과 사고 모두를 ‘살아있는 사고’로 다룰 수 있다. ‘생명’, ‘자기’, ‘사고’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에서 핵심적이다.

 

자기들의 생태학

기호들이 표상하는 세계들은 단지 ‘사물들(things)’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또한 다른 기호적인 ‘자기들(selves)’로 구성된다. 에두아르도 콘이 아빌라 숲의 내부와 그 주변을 둘러싼 살아있는 사고들의 그물망을 ‘자기들의 생태학(ecology of selves)’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이다. 여기엔 루나족은 물론이고 루나족이나 숲과 상호작용하는 다른 인간들, 숲에 사는 수많은 부류의 살아있는 존재들뿐 아니라 우리를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는 영들과 죽은 자들도 포함된다.

숲은 다층적인 불협화음의 그물망으로서, ‘생명의 패턴화’는 다양한 존재들이 다른 부류의 존재들을 표상하고 또 다른 존재들에 의해 어떻게 표상되는지에 의해 규정된다. 아빌라 사람들이 일 년에 몇 분간 가위개미가 날아오르는 시간을 예측하는 것은 기상학적 패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개미의 삶을 구조화하는 기호적 네트워크 속에서 가능하다. 개미와 연결된 수많은 생명체와의 의사소통의 세계를 활용함으로써 숲이 지닌 사고의 논리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호적 농밀함

열대림의 이 농밀한 자기들의 생태학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기호적 생명-형식들의 상호관계는 백사(白沙)의 토양에서만 자라나도록 진화해온 열대수종들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또다른 생명-형식들, 즉 식물을 먹는 유기체라는 초식동물과의 관계로 인한 것이다. 열대의 식물은, 토양조건의 차이를 증폭시켜 식물에게서 이 차이를 중요하게 만드는 초식동물과의 상호작용 때문에 토양환경을 표상하게 된다. 이 ‘다종의 집합체’는 자기들의 생태학에 존재하는 훨씬 더 많은 관계들의 함수로 기능하는 토양조건의 차이를 정확히 포착하고 증폭시킨다.

 

관계성

자기들 간의 관계를 구조화하는 논리는 기호들 간의 관계를 구조화하는 논리와 동일하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나 도나 해러웨이의 ‘구성적인 내적-행위’ 역시 관계성에 대한 전제에 의거한다. 인간과 비인간 개체를 연결하는 관계적 네트워크는 유사언어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언어적 관계성을 비인간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은 자기도취적으로 인간적인 것을 투사하는 것이다.

동물행동학자인 야콥 폰 윅스퀼의 연구에서 진드기와 그것이 기생하는 포유류의 관계는 혼동의 한 형식으로서 무차별성을 보여주며, 기호작용에 있어서 아이콘적 특성을 지닌다. 2장의 제사에 등장했던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경우처럼, 사고들의 생명은 혼동-차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일종의 ‘망각’-에 의존한다. 부류 및 계층 같은 일반적인 것은 이러한 혼동에 기초한 관계 맺은의 형식을 통해 세계로부터 창발하며, 세계 속에서 번영한다.

 

알지 못한 채 알아가기(knowing without knowing)

우리가 비인간 생명-형식을 자기로서 받아들인다 해도, 데리다의 말처럼 우리와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심연의 균열’은 존재한다. 절대적 타자성, 환원 불가능한 차이, 통약불가능성, 이것들은 관계하기에 관한 우리의 이론이 뛰어넘도록 노력해야 할 허들이다. 알 수 있음은 본래적인 자기-유사성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사물이 그 자신의 특이성을 지닌 ‘존재 그 자체’로 현존함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사고’를 생각해보면 이 유사성과 차이는 해석적 위치에 있다.

퍼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며 정신 내부에 있지도 않으며, 가장 친밀한 대상인 ‘자기’를 배타적으로 혹은 무매개적으로 향유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자기성찰과 상호주관성은 기호적으로 매개된다. 이 매개과정은 자기들의 지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가능성의 기초를 이룬다. 예를 들어, 루나족이 옥수수밭에 출몰하는 흰눈잉꼬를 겁주기 위해 허수아비를 만드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잉꼬의 퍼스펙티브에서 맹금류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상상하려는 시도이며, 이때 허수아비는 아이콘으로 작용한다.

 

주술화

근대를 탈주술화의 과정으로 본 막스 베버의 진단에 따르면, 생물학적인 세계가 살아있는 사고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탈주술화된 세계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목적의 시야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탈주술화는 인간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영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조건 짓는 언어와 담론체제는 닫혀 있지 않다.

반면, 과학기술학은 환원론의 형식을 통해 비인간과 인간을 동일한 분석틀 안으로 가져온다. 이 접근법을 주도하는 라투르는 표상될 수 있는 것이나 표상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저항할 수 있는 것에 ‘행위주체성’을 귀속시킨다. 그러나 저항은 행위주체성이 아니다. 저항과 행위주체성을 융합해버리면, 인간적인 것 너머에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부류의 행위주체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또한 베넷의 견해와는 반대로, 물질성은 생명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자기’란 부재, 미래, 성장, 혼동하는 능력을 포함하는 관계적 역동성의 산물이다.

 

애니미즘

이 책의 서두에서 재규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똑바로 누워 자라고 했던 루나족의 말을 상기해보자. 서로를 사물(3인칭)로서 여기지 않고 ‘나’와 ‘너’로서 마주본다는 것은 서로에게 사람(person)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재규어-인간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지닌 루나족에게 ‘푸마’는 케추아어로 ‘포식자’를 의미한다. 이렇게 루나족은 재규어를 비롯해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을 혼을 소유하고 기호를 사용하며 의도를 가진 자기들로 대한다. 그들은 애니미스트들이다.

데스콜라와 비베이루스 카스트루가 이론화한 애니미즘은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의 산물로 등장했던 애니미즘과 전혀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애니미즘은 세계의 속성에 관해 훨씬 멀리 있는 어떤 것에 도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애니미스트들은 곧잘 모든 종류의 개체들에 생명성을 귀속시킨다. 그런 점에서 ‘숲에 대해 원주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퍼스펙티브주의

비베이루스 카스트루가 말한 ‘퍼스펙티브적(perspectival)’이라는 말은 타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들 간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상정한다. 모든 부류의 자기들은 ‘나’로서 존재한다. 퍼스펙티브주의는 역사적으로 우연한 미적인 지향이라는 의미에서 ‘문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향은 그들의 연속성과 차이를 동시에 인정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동물과의 상호작용에서 루나족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모방하고자 하며, 각각의 유기체의 관점으로 더 큰 전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다른 유기체가 가진 관점에 대한 세심한 주시(attentiveness)를 통해 루나족은 활기를 만들어내고, 그 활기(animation)가 세계에 주술을 건다.

 

생각의 느낌

아빌라의 신화 중에서 지붕을 보수하는 두 시각(내부와 외부의 퍼스펙티브)에 관한 이야기는 양자를 아우르는 다자연적 퍼스펙티브주의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중기술을 사고하기 위해 에두아르도 콘은 후이, 캐시먼, 디콘 등의 개념분석을 끌고 들어온다. 이중기술은 개체들을 그 각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양상을 만드는 형태-생성의 역동성 속에서 작동된다. 이 점에서 샤머니즘적이고 퍼스펙티브적인 미학은 이 과정을 양성하고 성찰한다. 샤먼은 아마존적인 자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모든 자기들은 숲처럼 생각한다.

 

살아있는 사고

생명과 사고는 각기 다른 별개의 사태가 아니다. 자기는 기호이며, 생명은 사고다. 이를 둘러싼 기호작용은 살아 있다. 살아있는 사고와 그것을 낳은 자기들의 생태학을 인식하는 것은 생명에 있는 어떤 독특함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에두아르도 콘은 “생명은 생각하지만 돌은 그렇지 않다”고 함으로써 돌과 같은 무기물에 대해서는 생명과 사고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돌’도 살아 있는 것으로 주목한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과는 다르다.

베이트슨에 따르면, “차이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의 특징이 생명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사고와 생명은 세계 속에서 차이를 포착함으로써 성장하기도 한다. 앞에서 개가 퓨마와 사슴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을 겪었던 것처럼 기호작용은 분명 차이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 혼동은 다른 부류에 대한 주시의 결과이자 차이에 기초한 관계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살아있는 사고에서 혼동이 맡은 역할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진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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