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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인사원 1학기 <푸코, 실존의 미학> 에세이

 

제목 : 커밍아웃은 파레지아인가

 

들어가며

 

대학졸업과 동시에 나는 커밍아웃을 했다. 대신 동성애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30대를 통과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동성애자라는 자기 규정이 답답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푸코의 책 『비정상인들』을 만났다. 푸코를 독파하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푸코 속으로 들어갔다.

푸코는 병리학, 정신의학과 같은 ‘근대과학’들이 주변인들을 비정상으로 범주화 하는 권력이라고 보았다. 또 무수한 권력의 그물망안에서 우리는 권력을 ‘생산’하고, ‘행사’하고, ‘지배당하는’ 삼중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권력의 주체도, 저항의 주체도 모호해졌다. 말년의 푸코는 서양 고대 철학의 계보를 훑으며, 개인의 윤리적 주체화 문제와 실존의 미학, 즉 다른 주체화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푸코는 에이즈로 사망한 동성애자였다. 푸코는 당시 많은 사람들, 특히 게이 액티비스트로부터 왜 커밍아웃을 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푸코는 왜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고백을 해야 하는지, 대체 고백을 강요하는 그들의 ‘앎의 의지’는 무엇인지 되물었다. 앎의 의지, 지식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지금 어떤 삶을 살아내는가에 따라 한 인간이 가지게 되는 현재적 삶의 의미는 달라진다. 커밍아웃만이 동성애자에게 있어 삶의 전환을 위한 유일한 실천은 아니다. 여전히 커밍아웃은 논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에게 있어 커밍아웃은 자신의 진실을 통한 주체 변형의 한 계기가 된다. 이분법적 삶의 각본을 넘어서 다른 삶으로 이행하는 힘도 가진다.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 나는 이번 에세이를 썼다.

 

파레지아는 기독교적 고백의 형식이 아니다

 

파레지아에 대한 개념은 시대마다 달랐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행하는 삶의 모범으로서의 파레지아였다면, 로마 제정시대에는 대중화된 파레지아였다. 심지어 수사학자도 파레지아를 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기독교 시대로 접어들면서 파레지아의 의미는 바뀌게 된다. 즉, 피지도자가 지도자에게 ‘고백’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속죄하는’ 진실-말하기로 변화한다. 그것은 자기 주권적 삶과는 정반대 방향, 즉 자기포기와 초월적인 것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진다.

커밍아웃을 하고 본인이 많이 힘들어졌다고 호소하는 동성애자 친구들이 있다. 몽둥이로 얻어 맞았다, 집에서 내쫓겼다, 등록금을 주지 않아 난감했다 왕따 당했다, 족보에 이름을 파였다 등등 무수히 많은 사례들이 있다. 이런 하소연들은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속죄하듯 고백한 자기 태도와 관련된다. 커밍아웃을 한다고 모든 이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죄의 고백이 아니다. 자신의 실존적 선언이 되어야 한다. 투구가 필요하면 써도 좋다.

진리나 진실은 복수형이다. 수많은 진리들과 진실들이 부딪힐 때 우리는 난감해진다. 현체제를 개선의 관점에서 보는가 이행의 관점에서 보는가, 존재(본질)의 관점에서 보는가 생성(외부)의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자신 입장을 어디 쪽으로 둬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일단 자신의 입장 결정이 이루어지면 대결은 불가피하다. 그 대결속에서 자기의 실존은 커밍아웃이라는 계기를 통해 다시 재구성된다.

 

파레지아는 관계 단절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커밍아웃 이후 인간 관계 단절에서 경제적 문제까지 위험성은 다양하다. 나 또한 인간 관계의 단절을 경험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왜 우리 우정관계의 끝장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로 끝장날 우정은 빨리 끝나는 게 좋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에게 관계 단절은 충격적이지가 않았다. 돌아보면 나는 경제적 자립이 가능한 시기에 커밍아웃을 했다. 인간 관계의 단절 보다 실질적인 의식주에 대한 불안이 더 컸다. 관계 단절의 위험은 그것을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관계의 끝은 또다른 관계의 시작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동성애자 스스로의 자기 혐오다. 그건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실패다. 인간은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존재이고, 커밍아웃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내면화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우울증이나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수자가 자신의 소수성을 긍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면, 그 소수성은 자신에 대한 혹은 타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바뀐다.

 

파레지아는 자신의 진실-말하기이다 그렇다고 아무 말 대잔치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파레지아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아무나가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파레지아는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의견들에 대한 윤리적 차별화가 어려워지면 현명한 의견은 파묻힐 수 있다. 그에 반해 군주제에서는 군주의 허락이 있다면 파레지아는 가능하다. 그리고 군주 한사람에게 윤리적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곧 좋은 정치로 이어질 수 있다. 군주제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보다 파레지아를 수행하기에 더 나은 정치체제일 수 있다.

동성애자 시민권 운동(ex 동성애자 결혼합법화)과 같이 커밍아웃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려고 한다.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포함시켜 달라는 애걸 운동을 너머, 이성애의 대립항으로서의 동성애, 그 너머로 가야 한다. 커밍아웃은 자신을 동성애자로 스스로 선언함과 동시에 자신의 진실을 통한 ‘다른’ 주체화를 지금부터 시작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발현이다. 비록 사람들은 ‘아 동성애자구나’라는 반응을 보이겠지만 결국 자신의 실존적 삶이 우선이라고 한다면 그건 부차적인 사항이다. 타인은 내 삶을 살아주지 못한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살아내야 한다. 파레지아와 실존은 같이 간다. 그랬을 때 ‘아무 말 대잔치’가 아닌, 자신의 ‘진실-말하기’가 시작된다.

 

파레지아는 적절한 순간에 말해져야 한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뜬금없이 동성애자 해방을 부르짖는다면 그는 이해 받지 못할 것이다. 대화의 꽃이 피었을 때, 의례적으로 물어오는 결혼 유무의 흔한 질문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즉 타이밍이다. 적절한 순간임을 알아본다는 건 이미 자기 자신과의 진실한 대면이 내면에서 끝났다는 말이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망설임과 불안이 여전히 있다면, 여러 합리적인 이유와 함께 커밍아웃은 무한히 유예될 수밖에 없다.

커밍아웃의 권유 혹은 강요는 폭력이라고 말해진다. 맞다. 하지만 그에 앞서 왜 한 개인의 실존적 진실-말하기가 왜 폭력의 대상이 되는지 되물어져야 한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면서 왜 특정 인간 부류들은 배제되어 왔는지를 물어야 한다. 배제를 통한 포섭은 권력의 작동방식이다. 그것의 외연은 소수자, 장애인, 여성, 흑인, 동물 그리고 사물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

 

파레지아는 자기 배려이자 타자 배려이다

 

커밍아웃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불효라는 통념이 여전히 팽배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두려운 게 아닌지 묻고 싶다. 부모는 친구는 형제자매는 자신의 커밍아웃을 듣는다고 쓰러지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삶을 비관하지 않는다.

자기 배려는 자기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자기인식이다. 동성애자라는 인구집단으로의 규정은 근대적 발명품이라고 푸코는 말했다. 동성애자는 그들에게 속한 다양한 삶의 국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애화 된 존재로만 여전히 간주된다. 또한 그 규정의 울타리에 동성애자 스스로 갇히기도 한다. 삶은 성적지향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다.

커밍아웃은 또한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타인도 나도 서로를 전부 이해할 순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할 수 있는 것만큼은 서로의 진실을 말하는 게 온전한 관계 맺기의 시작이다. 그 시작이 왜 굳이 성적지향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반대로 성적지향 즉 사랑에 대한 진실-말하기는 왜 대화의 수많은 시작점 중에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는지도 되물어져야 한다.

자기배려는 곧 타자배려이다. 자신은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건 인류에도 유익하고, 인류에게 유익한 건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순환이다. 그러므로 파레지아 즉 ‘진실-말하기’는 자기배려이고 타자배려가 된다.

 

프로아이레시스, 파레지아를 할 상대는 서로 알아봐야 한다

 

커밍아웃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나의 관계 맺기의 바로미터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순 없다. 어떤 절대적인 척도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관계의 협소함으로 이어진다.

학벌 좋고 경제력 좋고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이성애자 한국 남성의 인문학적 문제의식은 어떤 것이 있는지, ‘엄숙한 휴머니스트’가 되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있는지, 어느 친구에게 뜬금없이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실존 자체가 지금 사회의 주류이니 뭔가 문제의식을 갖기는 힘들지 않을까 혹시 모르지.. 서양에 가서 인종차별을 당해보면 그나마 문제의식이라는게 생길 수도…”

당사자성만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누가 누가 더 피해자이고 소수자인지 가늠하는 경기대회가 될 수 있다. 옳지 않다. 따라서 진실-말하기, 파레지아를 할 상대도 여러 공간에서, 여러 인간 관계에서 찾아져야 한다. 상대를 알아보는 눈, 나도 그 상대도 파레지아를 할 준비가 되어야 만날 수 있는 행운의 순간이다.

 

파레지아는 주체의 변형을 수반한다

 

헬레니즘 시대의 파레지아스트, 견유주의자들은 통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 삶을 극단까지 몰아가 어느 순간 가치가 전도되어 버리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의 실존적 긍지를 역설의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들은 다른 주체 그리고 다른 삶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커밍아웃은 어떨까. 동성애자에게 있어 커밍아웃의 전과 후는 매우 다른 실존의 경험이다. 20대때 커밍아웃을 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세상이 준 규정을 그대로 껴안으면서 더 극단으로 밀고 나가 나를 전시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퀴어퍼레이드에서 보이는 눈쌀 찌푸려진다는 성적인 퍼포먼스 혹은 위악적인 몸부림도 그와 비슷한 실천으로 이해한다. 감히 견유주의에 비교할 순 없다. 하지만 그 당사자에겐 어떤 전도의 순간이 온다. 자기가 만든 새롭고도 다른 주체가 그것이다. 그 주체는 다른 삶으로 향한다.

 

나가며

 

“자기를 재료로 해서 자신의 삶이 작품이 되게 하라”,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나의 관심은 집중되어 있다”라고 말년의 푸코는 말했다. 푸코는 권력에 대항하는 ‘다른’ 저항의 지점을 찾으려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실존적 진실-말하기, 즉 파레지아를 수행하면서 다른 윤리적 주체가 되어 다른 삶을 살 수 있기를 푸코는 바랬다.

나는 이번 에세이에서 푸코가 말한 파레지아 개념을 통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과 파레지아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동성애자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순 없다. 삶의 길은 다양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결국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자신의 삶을 지금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관건이 된다.

고로 나는 주장한다.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파레지아이다.” 반박이 들어온다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파레지아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을 바꿀 것이다. 더한 반박이 몰려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지면,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파레지아인 척이라도 해야 한다”라고. 말년의 푸코가 ‘다른’ 주체, ‘다른’ 삶 즉 ‘다른’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나는 ‘척’에 방점을 찍고 싶다. 죽을 때까지 수행된 ‘척’은 곧 삶 그 자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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