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역사적 여건들II : 군사적 기획사회와 종교적 기획사회
1. 정복하는 사회: 이슬람교
1) 이슬람교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
이슬람의 주권은 일반적으로 전제군주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는 복종을 의미하고, 스스로 복종하는 이가 바로 이슬람교도인 것이다. 이슬람은 다신교 부족 아랍인들의 개별주의나 변덕스러운 남성성과는 반대되는 규율이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전투를 권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코란이다. 성전은 이슬람의 국경지대에서 항상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도와 이교도 사이에 진정한 평화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고 확장을 이슬람은 원했다. 이슬람교는 정복이라는 방법적 노력에 전념했던 규율이다.
2) 헤지라 이전 아랍인들의 소진/소모 사회
헤지라 이전 시대에 아랍 공동체들은 자신들 부족의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와중에서도 시와 중요한 관계를 유지하는 격렬한 개인주의를 유지했다. 증여와 과시적 낭비가 만연했고, 이슬람 사회에 일종의 포틀래치 의식의 형식으로 남았다. 다신교를 믿었고, 희생제의의 형식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원칙상 소진/소모 사회의 원리에 상응한다.
3) 탄생하는 이슬람 또는 군사적 기획으로 환원되는 사회
축적하는 엄격성과 탕진하는 헤픈 낭비성이 서로 번갈아 등장하는 일은 에너지의 사용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리듬이다. 이러한 운동 안에서 이슬람을 따로 특징짓는 것은 이슬람이 애초부터 외견상 힘의 무한한 성장을 향해 열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사회는 실로 경탄스러운 기구/조직이었다. 군사적 질서가 경쟁 관계에 있던 부족들의 무정부 상태를 대체했고, 개인적 자원들은 더 이상 헛되게 낭비되지 않고 군사적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었다. 개인적 힘들은 군사적 병영의 관점에서 비축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자본 축적에 의한 산업 발전을 떠올리게 한다. 이슬람 사회가 소진/소모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처럼 사용 가능한 힘을 축적하는 사회이다.
이슬람의 군사적 주권자는 결코 죽음에 처하지 않으며, 오히려 희생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폭력을 바깥으로 돌려서 내적 소진/소모로부터 공동체의 생생한 힘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그렇게 애초부터 점령, 정복, 계산된 소비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 길의 최종 목적은 바로 성장이었다.
4) 후기 이슬람 또는 안정성으로의 회귀
설립과 정복 안에서 주어졌던 이슬람의 의미는 이슬람제국의 건설로 상실된다. 일단 정복이 안정화되자, 처음에는 이슬람의 성립을 위해 부정되었던 아랍 문명의 근간이 다시금 이전과 동일하게 활발히 회복되었다. 아랍 부족들이 따랐던 가치가 처음에는 무함마드에 의해 코란의 엄격한 가르침으로 대체되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계속 아랍 세계 안에 살아남아서 폭력과 낭비, 사랑과 시를 한데 묶을 수 있는 기사도적 전통과 가치를 유지하며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2. 비무장 사회: 라마교
1) 평화로운 사회
티베트는 역설적이게도 공격만큼이나 방어에도 부적절한 평화로운 문명을 지닌 고립된 내륙국이다. 티베트가 이렇게 평화적인 성격을 가졌던 이유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다. 그 기원에 신도들에게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2) 근대 티베트와 그 티베트를 분석했던 한 영국인
영국의 관리였던 찰스 알프레드 벨은 『달라이 라마의 초상』(1946년)을 썼다. 벨은 1년 동안 라싸에 머물면서 티베트 정부로 하여금 군사 정책을 추진하게 하도록 힘썼다. 티베트가 군대를 가지지 못했던 것은 경제력 때문이었을까? 티베트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어려움은 정확히 우리에게 하나의 경제적 역설을 보여준다.
3) 달라이 라마의 순수하게 종교적인 권력
벨(1945년 사망)의 마지막 책이 다루는 특별한 대상은 바로 13대 달라이 라마의 생애이다. 불교가 티베트에 전래된 것은 640년이었다. 11세기 종교개혁가였던 총카파는 승려들이 독신생활을 엄수해야 하는 보다 엄격한 종파를 세웠다. 새로운 종파는 몽골족의 한 족장의 힘에 기대어 마지막 왕을 몰아냈고 그러한 방식으로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의 지배체제로 들어서게 된다. 달라이 라마는 이때 이 초인적인 인물의 다섯번째 육화에 붙여진 몽골식 칭호였다.
달라이 라마의 주권은 신성했지만, 그렇게 신성한 만큼 무력했다. 달라이 라마의 대를 잇는 기이한 양식은 권력의 공백기를 낳았고 그 때문에 티베트는 주기적으로 섭정에 넘겨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만큼 달라이 라마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4) 13대 달라이 라마의 무력함과 저항
13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이 나옴.
5) 군사 조직화의 시도에 대항하는 승려들의 저항
달라이 라마는 결국 라마교가 앗아갔던 힘(군사력)을 티베트로 되돌리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전체 승려들뿐만 아니라 국민들 역시 당혹해했다. 군대의 증강은, 가벼운 수준이어도, 승려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키는 일이었다. 그런데 티베트는 언어, 제의, 축제, 인식의 영역 등, 한마디로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사제들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없는 나라였다. 승려들의 저항적인 대의명분은 내적으로 강력한 정부의 확고함과 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러한 대의가 실패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최초의 군중 운동이 그럼에도 그러한 대의를 그토록 열렬하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 라마들에 의한 과잉 전체의 소진/소모
달라이 라마의 군사 정책에 대한 티베트 승려들의 적의에 찬 이러한 운동을 명백히 추동했던 것은 도덕적 가책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중대하게는 승려들의 이해관계였던 것이다. 종교의 전체 예산이 국가 행정 예산의 두 배 이상에 달했고 군대 예산의 여덟 배 이상에 달했다. 이러한 수치가 달라이 라마의 군사 정책이 맞닥뜨렸던 반대의 이유를 밝혀준다. 한 민족이 자신의 활력을 거의 아낌없이 사원 조직에 쏟아 부으면서 동시에 군대를 가질 수는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마도 종교적 삶과 군사적 형태 사이에 어떤 적절한 분배가 가능할테지만, 티베트의 예산자료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단지 종교에만 배타적으로 치우친 봉헌이다.
7) 라마교에 대한 경제적 설명
한 사회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그 사회가 행하는 이러한 과잉의 사용인데, 바로 이러한 잉여야말로 동요의 원인이자 구조적 변화의 원인이며 또한 모든 역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잉여는 하나 이상의 돌파구를 갖고 있는데, 그 중 가장 공통적인 것은 바로 성장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어떤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게 한계에 부딪힌 인구의 성장은 군사적인 것으로 전환되면서 억지로 정복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한계 역시 불안정한 것이어서, 잉여는 다시금 종교라는 사치스러운 낭비의 형식을 그 돌파구로 삼고, 또 그로부터 파생된 유희나 공연의 형식 혹은 개인적 사치 마저도 그러한 돌파구로 삼게 된다.
중앙아시아에서 극단적 해결책이란 이러한 과잉의 전체를 사원에 부여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원리를 명확히 포착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한 원리란, 에너지의 체제를 그 어떤 방식으로도 발전시킬 수 없거나 (새로운 기술이나 전쟁의 도움으로) 그 총량을 증대시킬 수 없는 민족은 그 자신이 필히 생산할 수밖에 없는 잉여의 전체를 순수한 소멸로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응답이 바로 라마교의 역설이었는데. 이는 화기의 발명 이후로 가장 완벽한 형태에 도달한 소비였다. 이것은 다른 분출구가 없이 결국 외부와의 관계를 두절한 채 밀폐된 한 나라가 취했던 근본적/급진적 해결책이다.
이슬람은 과잉 전체를 전쟁에 투여했고, 근대 세계는 과잉 전체를 산업시설에 투여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라마교는 그러한 과잉 전체를 사변/명상적인 삶에, 곧 세계 속에서 지각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유희에 투여했던 것이다.
4부 역사적 여건들III : 산업사회
1. 자본주의의 기원들과 종교개혁
1) 개신교의 도덕과 자본주의의 정신
오늘날에도 보통 개신교도들은 사업으로 향하는 반면 가톨릭교도들은 보다 일반적으로 자유 직종을 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듯 노동에 더 집중하며 이익의 계산에 더 정확히 밝은 기업가의 정신상태가 개신교의 세속적 엄격성과 어떤 유사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루터(1483~1546)가 대부분 농민사회에 기초한 순박한 혁명을 정식화 했던 것이라면, 반대로 칼뱅(1509~1564)은 상업도시 중간계층의 열망을 대변했던 것인데, 이는 법률가다운 반응이었으며 그래서 그에게는 사업이 더 익숙했던 것이다.
2) 중세의 교리 속 경제와 실천 속 경제
다른 두 개의 종교적 세계(카톨릭 Vs 개신교)는 서로 대립되는 형태의 두 경제(전근대 경제 Vs 근대경제)에 상응했다. 중세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와 구별되는 점은, 정태적인 중세 경제가 과잉된 부의 상당 부분을 비생산적 소진/소모에 썼던 반면, 자본주의 경제는 축적을 통해 생산 장치의 역동적 증대를 꾀한다는 것이다. 종교를 규정하는 것은 경제이다. 종교란 한 사회가 과잉된 부의 사용에 부여한 즐거움이다.
3) 루터의 도덕적 입장
루터는 사치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부를 사치스럽게 사용함으로써 천국의 지복을 얻을수 있다는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루터는 한 가지 점에서 자신의 사상을 집중시켰는데, 그것은 신적인 세계가 현세의 속박과 일말의 타협도 없이 완벽하게 무관한 세계라는 점이다. 명상하는 성직자들의 무위도식,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증여, 전례의식과 교회의 화려함 등은 최소한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며 악마의 징표로 여겨졌다. 루터의 교리는 자원의 강렬한 소진/소모의 체제에 대한 명백한 부정이다.
4) 칼뱅주의
칼뱅은 이익을 얻는 대부업에 원칙적으로 가해졌던 단죄를 철폐하고 일반적으로 상업의 도덕성을 인정했다. 베버는 칼뱅주의를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 가치를 지닌 사상으로 평가한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칼뱅주의는 제네바나 네덜란드의 사업가 부르주아지의 종교였다. 근본적 층위에서 칼뱅의 교리는 루터의 교리와 그 의미/방향이 같다.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인이란 검소하고 노동하는 자여야 했다.
5) 종교개혁의 간접적 효과: 생산 세계의 자율성
무위도식과 사치의 측면에 대한 단죄에서부터 기업의 가치에 대한 또다른 긍정에 이르기까지, 칼뱅주의만큼 산업의 비약적 발전에 유리했던 다른 조건을 상상할 수 없다. 자본주의란 단순히 상업적, 재정적, 산업적 기업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부의 축적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개인주의이자 기업의 자유를 의미한다. 종교개혁이라는 혁명은 확실히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의미란 곧 새로운 경제 형태로의 이행이다.
2. 부르주아 세계(p209~233)
이 파트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아 ㅠㅠ
사각사각님께서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O^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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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
P190 “부자는 충분한 비축분이 있고 빈자는 먹을 것도 모자라 부자가 그를 굶어 죽지 않게 하려고 부자 자신에게는 그리 무리가 가지 않는 양의 재화를 빌려줬다고 한다면, 부자가 빈자에게서 이를 되돌려 받을 때 그가 줬던 것보다 더 많이 요구할 수 있는 일일까? 이는 시간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 일일테고, 공간과는 다르게 시간이라는 신에게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참으로 인상 깊은 구절입니다. 시간은 신에게 속해 있다. 시간 차를 이용한 이윤획득은 신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아파트 시세차익은? 핸드폰으로 주식투자 차액 획득은? 은행 예금 만기 이자 획득은? 자본주의적 윤리에서 ‘도덕적’ 경제행위들은 중세의 경제적 관념으로 볼 때는 죄를 짓는 것일까요? 중세에도 탐욕과 부의 야비한 축적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었을텐데요. (무릇 머리 까만 인간은 시대에 상관없이, 그들의 욕심은 한결 같이 똑같을 것이기 때문에^^) ‘시간은 신에게 속해 있다’ 라는 문장에서 풀려나오는 중세의 놀라운 경제 윤리관념은… 결국 어떤 ‘소수자 부류’의 도덕윤리였을까요? 중세의 지배적 윤리는 아니었을 것이다에 한 표!???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책을 읽으며 몇 가지 궁금한 점과 감상이 있어 남깁니다.
3부 Ⅱ. 비무장 사회 : 라마교
178p “스스로를 방어할 필요성에서 그러한 목적으로 인간의 삶이나 부를 사용하는 것조차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데, 한 나라가 너무나 가난하면 그러한 일을 진정 시도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는 점령되지 않고서도 침략당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한 승려가 벨에게 말했던 경전의 내용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곧 티베트는 이따금 침략당하겠지만 그 침략자들 중 아무도 티베트에 남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렇듯 더 부유하고 잘 무장된 어떤 세계의 한가운데서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고립된 가난한 나라는 과잉의 문제에 대해 그 자신의 폭발적 폭력을 내부에서 해소할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종교적으로 충만하여 국민들의 관심이 온통 종교로 가 있는 국가를 지배한다고 해서 그 국가에서 침략자들이 눈을 돌릴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그 국가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는 있지만 강제노동, 자원착취 등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티베트는 이따금 침략당하겠지만 그 침략자들 중 아무도 티베트에 남지는 않을 것’ 이라는 의견이 바타유의 성급한 일반화는 아니었을지요.
4부 Ⅱ. 부르주아 세계
225p “부르주아 자본주의가 사치/낭비에 적대적이었던 이유란 이토록 빈약하고 비논리적인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인색함과 그에 기반한 행동이 사치/낭비를 저하시켰지만, 그러한 행동의 계산되지 못한 효과들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결코 자유방임주의laisser-faire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견 자본주의는 사치/낭비를 부추긴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사치/낭비에 적대적이라는 관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끊임없이 생산과 축적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인간을 사물화 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231p 바타유는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인간의 해방을 위해 스스로를 사물화 시킬 뿐이라며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있는데 당대의 공산주의자들과 논쟁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