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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소영입니다.

질문거리 올립니다. 쓰다보니 좀 길어졌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괄호 안에 표기된 숫자는 최유미 선생님의 번역문 쪽수입니다.

 

세르의 「자연 계약」은 국지적 관계와 부분적 상호 연결들을 숙고하되, 세계적·전지구적 생태계를 그것들의 총체로 바라보고, 인간-비인간의 조건 상황을 자연 계약이라는 개념어로 압축해 표현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계약은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었겠구나 생각됩니다.

그러한 기획에 일단 경의를 표합니다만, 한편으론, 다소 미심쩍습니다.

불어를 잘 알지 못해, 그저 짧은 영어를 토대로 말문을 열겠습니다. 계약(contract)은 어원상 함께 끌고 간다는 의미에서 비롯하여, 어떤 사안에 관해 합의에 이르는 것—영미권에서는 약속—을 일컫습니다. 이때의 ‘함께’는 단순히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청약과 승낙의 당사자들입니다. 또한 이때의 ‘끌고 간다’는 노동(력)을 함의합니다. 기대 가능한 결과를 향해 함께 끌고 가는 작업에 차질이 생기면, 유책자는 자신이 가진 것—전통적으로 대개 토지이지요—을 빼앗깁니다. 계약(contract)의 이행 충족 여부가 재산을 줄어들게(contract) 만들고 누군가의 삶을 위축·수축(contract)시킵니다.

세르의 「자연 계약」에서 인간은 기생자로 간주됩니다. 기생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오랫동안 (아니, 어떤 관점에선 단기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숙주를 잘도 파먹고 살았습니다. 기생자들은 숙주의 소멸이 곧 자신의 소멸임을 깨닫고, 목숨을 담보로 한 자연 계약의 네트워크 속 자기의 자리와 처지를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대략 이런 메시지가 「자연 계약」에서 읽힙니다.

그런데, 기생은 숙주의 죽음을 결코 원하지 않는 생입니다. 기생자는 다만 숙주의 생명 활동 메커니즘 원본을 방해하거나 변화시킬 뿐입니다. 세르는 “기생자는 모든 것을 취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숙주는 모든 것을 주고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다”(9)고 하였습니다만, 기생자는 숙주에게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기생자는 숙주 안에 살지만, 숙주의 상징계로 환원되지 않는 ‘내부의 예외자’일 뿐입니다.

기생자는 죽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 이르면, 자기가 기생할 대상을 좀처럼 찾지 못하면 소멸됩니다. 마땅한 숙주가 없으면 죽어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숙주는 누구이며 어디 있습니까? 세상 모든 물질이 다 숙주인가요? 아닙니다. 기생할 수 있는 대상이 숙주입니다. 자연/지구는 숙주인가요? 총체적으로, 전적으로, 자연/지구가 숙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생자 인간이 지구상에 씨가 말라버린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기생자 인간은 애석하게도 자연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충족되지 못한 약속의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지구도 사라질까요? 자연/지구는 ‘또다시 새로워’지지 않을까요? 다른 판본의 자연/지구가 되지 않을까요? 기존의 기생자가 들러붙을 수 없는 체질로 개선되지 않을까요? “자연이 아무리 많이 사람에게 주어도, 사람은 그만큼을 이제는 법률 주체인 자연에게 돌려주어야 한다”(9)는 세르의 말은 결국엔 인간 중심적 사고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기생자인 인간은 멸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지구 전체가 멸종하리라고는 쉽사리 생각되지 않습니다. N개의 비인간들이 때로는 기생자로 때로는 숙주로 인간과 관계 맺고 있을 순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자연/지구로 ‘단순 환원’해도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므로, 기생자 인간과 자연/지구의 관계가 계약적일 수 있을까, 의문스럽습니다. ‘계약’보다는 ‘거래’가 아닐까요? 인간과 자연/지구를 공생자로 호명하며 합의의 주체로 은근슬쩍 자리하게 하는 건 사태를 낭만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랑하라는 설교로 마무리 짓는 것은(16-7) 감상주의로의 도약 같습니다. 이 정도로는 인간도, 자연/지구도 설득 못 할 것 같은데요. 설득과 감화에 실패한 말은 정치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추신 1: 저의 장황설 역시 설득은 고사하고 납득시키기 단계에서부터 실패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추신 2: 「자연 계약」외에 다른 글을 봐야, 미셸 세르가 얼마나 치밀하고 재미있게 생각의 길을 열어주는지 알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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