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용기⟫ 84년 3월 21일 견유주의의 개 같은 삶, 3월28일 기독교 금욕주의 텍스트를 읽고 궁금하신 점 댓글로 질문해 주세요!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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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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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근
신약성서에서 파레지아로 말해질수 있는 것에 '신에 대한 확신'이 있는데 이러한 믿음이 왜 파레지아인가요?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준다는 확신은 개인이 품고있는 진실일뿐이지 파레지아로 말해지는 것도 아니고, 순교나 박해처럼 어떤 실천을 수반하지 않는데 파레지아로 정의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
jaerim
323쪽. 디오게네스 일화에 대한 내용 이해의 어려움: 디오게네스가 소크라테스 일화를 이야기하다가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청중이 화가 난 상황에서 물뱀처럼 사라졌다는 것일까요?
335쪽. 신에 의해 임무를 부여받은 자-소명받은 자만이 견유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스스로를 견유주의자로 선언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에픽테토스의 말대로라면, 디오게네스나 크라투스가 소명 받았는지, 스스로를 선언한 자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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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파레지아만을, 헬레니즘 시대의 견유주의자들은 정치적+윤리적 파레지아를 동시에 한 것으로 보면 될까요? 에세이를 쓰면서 제 개인적인 생각은... 파레지아를 윤리적/정치적 구분하는게 맞나 싶기도 하거든요. 그게 딱 분질러지게 구분할 수 없는 것 같아서요. 윤리적 파레지아를 수행했지만 정치적 파급력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정치적 파레지아를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윤리생산적 효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는 것 같아서요. 아.. 헷갈려요. 뭐지요.. 고민하면 할 수록 모르겠는 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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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
"진실한 삶 = 다른 삶"이라고 푸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의 보통 삶은 절대 진실한 삶이 될 수 없는 걸까요? 다른 삶만을 살 수 있는 사람만이(극소수)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다는것에 절망감이 느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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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돌
1. P309 ~ p316 갑자기 이 챕터부터 견유주의자를 현자라 일컫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 P80 철학 안에 있는 지혜의 태도는 진실, 폴리테이아, 에토스의 근본적 단일성(unity)을 사유하고 표현
견유주의의 주권적 삶에는 현자의 말하기가 포함되어 있다는뜻일지 궁금합니다.
2. p388 자기 자신의 앎(자기 자신에 관한 앎)과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차이 무엇인지요? 자기인식(connaissance de soi)와 미묘하게 다르네요
3.견유주의자가 추구하는 다른 삶 이란 것은 결국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다른 역사로의 ‘이행’ 같은데요, 그렇다면 푸코가 견유주의 피레지아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살던 사회와 역사가 다응 형식으로 이행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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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군
이게 웬일입니까.... 저는 곧 자유의 몸이라고 생각하는데, 질문 폭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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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돌
죄송하지만 질문 하나 더 추가 하겠습니다!
4. p393 타자성의 본질적 정립이 없는 진실 창출은 없다는 것 : 진실은 결코 동일자가 아니라는 것 : 진실은 단지 다른 세계의 형식(플라톤주의)과 다른 삶의 형식(견유주의) 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
멋있는 맺음말인데 멋있다는 것만 알겠네요 ㅎㅎㅎ 보충 설명 부탁드려요.
Q1)
파레지아를 이야기할 때 ‘파레지아는 OO이다’라고 우리가 수업시간에 짧게 이야기 나눴던 문장들은 푸코가 역사속에서 건져내고 싶은 ‘푸코가 사랑하는’ 파레지아 정의일까요? 수업도 다 끝나가는 이 마당에 이제 와서 근본적으로 너무 헷갈려서 여쭤봅니다~
왜냐하면, 스토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다가, 파레지아가 나오면서부터는 견유주의에 집중하잖아요. 파레지아의 역사적 변천속에서 지금 푸코가 건져 올리고 싶은 것은 견유주의적 파레지아가 맞을까요? (맞아야만해~) 진짜 헷갈립니다. 그런 것도 같은데.. 푸코의 논의를 열심히(?) 따라가다보면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너무 나열을 하셔서… 정리가 안됩니다.
마지막 수업 분량(15강~18강)을 통해 푸코는, 에픽테토스(스토아) 문장들을 가지고 견유주의의 파레지아를 묘사하고, 또 뒤로 가서는 헬레니즘 견유주의의 금욕주의와 초기 기독교에서의 금욕주의의 연결되는 지점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나오고, 또 기독교에서의 긍정적 파레지아와 부정적 파레지아를 나누면서 너무 복잡하게 논의하고 있어서… 순간 멘붕이 오면서 (이제 와서) 제가 이해한 파레지아가 푸코가 청중과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파레지아가 맞았나 하는 의심이 들어서요.
이번 수업 분량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317-1 구절 끝에서 7번째 줄부터 입니다.
견유주의가 추구한 것은 음식을 줄이는 것, 먹고 마시는 것을 줄이는 것, 그래서 최소한의 의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쾌락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극한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지만, 이 극한은 최대한의 쾌락과 최소한의 수단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이 더 이상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모든 쾌락을 축소시켜 음식도, 물도 더 이상 어떤 형태의 쾌락도 야기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Q2)
견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통상적인 것’을 취한 후, 거기서부터 다시 극단으로 밀어 부치는 삶을 살아버리고, 그 결과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독립적인 삶을 위하여 가난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재화도, 물그릇 하나도 의존하지 않아야 독립적인 삶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견유주의의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노예의 상태(구걸)로 전락하게 되고, 견유주의자는 그 노예의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더 밀어 부칩니다. 좌판대의 물고기처럼 나도 눕겠다 같은.
이게 대체 뭘까요? ‘통화의 가치를 전도’ 시키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이러니해서요. 왜냐면 독립적 삶을 살겠다고 시작했는데, 왜 의존적 삶이 되어 버린걸까요? 견유주의자는 그 상태를 노예적 상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일거 같은데요.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거 같은데… 뭔가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되서요.
견유주의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반장님의 답변) 견유주의의 역설은 이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김피디님의 답변) "즈희도 그 얘기를 오래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 부에 대한 이중적 태도의 기존 철학자나 현자들에 대한 반동적 실천 아닐까정도로, 주체의 해석학에서 엄청 인용하던 세네카를 이 강의에서 급 사기꾼으로 격하시킨 무드 등등 ㅋㅋㅋ 근데 노예가 되는 것이 기독교적 자기 포기는 아니다! / 여튼 저희 모두 실천불가한 지경이라는데는 공감 했어요"
춘근샘의 답변) 제 생각에 노예상태라는 구속성은 우리의 관념이지 견유자들에게는 노예라는 관념 자체가 없어요....무소유인 상태가 중요할 뿐입니다.
내일 모레, 드디어 마지막 수업 시간에
견유주의의 아이러니에 대한
영종샘과 연숙샘의 답변을 엄숙히 기다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