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원자료 :: 인사원의 과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유택

 

Q1)

 

파레지아를 이야기할 때 ‘파레지아는 OO이다’라고 우리가 수업시간에 짧게 이야기 나눴던 문장들은 푸코가 역사속에서 건져내고 싶은 ‘푸코가 사랑하는’ 파레지아 정의일까요? 수업도 다 끝나가는 이 마당에 이제 와서 근본적으로 너무 헷갈려서 여쭤봅니다~

 

왜냐하면, 스토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다가, 파레지아가 나오면서부터는 견유주의에 집중하잖아요. 파레지아의 역사적 변천속에서 지금 푸코가 건져 올리고 싶은 것은 견유주의적 파레지아가 맞을까요? (맞아야만해~) 진짜 헷갈립니다. 그런 것도 같은데.. 푸코의 논의를 열심히(?) 따라가다보면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너무 나열을 하셔서… 정리가 안됩니다.

 

마지막 수업 분량(15강~18강)을 통해 푸코는, 에픽테토스(스토아) 문장들을 가지고 견유주의의 파레지아를 묘사하고, 또 뒤로 가서는 헬레니즘 견유주의의 금욕주의와 초기 기독교에서의 금욕주의의 연결되는 지점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나오고, 또 기독교에서의 긍정적 파레지아와 부정적 파레지아를 나누면서 너무 복잡하게 논의하고 있어서… 순간 멘붕이 오면서 (이제 와서) 제가 이해한 파레지아가 푸코가 청중과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파레지아가 맞았나 하는 의심이 들어서요.

 

이번 수업 분량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317-1 구절 끝에서 7번째 줄부터 입니다.

 

견유주의가 추구한 것은 음식을 줄이는 것, 먹고 마시는 것을 줄이는 것, 그래서 최소한의 의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쾌락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극한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지만, 이 극한은 최대한의 쾌락과 최소한의 수단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이 더 이상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모든 쾌락을 축소시켜 음식도, 물도 더 이상 어떤 형태의 쾌락도 야기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Q2)

 

견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통상적인 것’을 취한 후, 거기서부터 다시 극단으로 밀어 부치는 삶을 살아버리고, 그 결과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독립적인 삶을 위하여 가난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재화도, 물그릇 하나도 의존하지 않아야 독립적인 삶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견유주의의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노예의 상태(구걸)로 전락하게 되고, 견유주의자는 그 노예의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더 밀어 부칩니다. 좌판대의 물고기처럼 나도 눕겠다 같은.

 

이게 대체 뭘까요? ‘통화의 가치를 전도’ 시키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이러니해서요. 왜냐면 독립적 삶을 살겠다고 시작했는데, 왜 의존적 삶이 되어 버린걸까요? 견유주의자는 그 상태를 노예적 상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일거 같은데요.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거 같은데… 뭔가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되서요. 

 

견유주의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반장님의 답변) 견유주의의 역설은 이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김피디님의 답변) "즈희도 그 얘기를 오래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 부에 대한 이중적 태도의 기존 철학자나 현자들에 대한 반동적 실천 아닐까정도로, 주체의 해석학에서 엄청 인용하던 세네카를 이 강의에서 급 사기꾼으로 격하시킨 무드 등등 ㅋㅋㅋ 근데 노예가 되는 것이 기독교적 자기 포기는 아니다! / 여튼 저희 모두 실천불가한 지경이라는데는 공감 했어요"

 

춘근샘의 답변) 제 생각에 노예상태라는 구속성은 우리의 관념이지 견유자들에게는 노예라는 관념 자체가 없어요....무소유인 상태가 중요할 뿐입니다.

 

내일 모레, 드디어 마지막 수업 시간에

견유주의의 아이러니에 대한

영종샘과 연숙샘의 답변을 엄숙히 기다리겠습니다~ ^^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