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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역사, 307p-378p

 

11. 에리코 말라테스타 : 혁명과 아나키즘의 전도사

11.1 청년 이탈리아당

에리코 말라테스타가 중산층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을 때만 해도 나폴리는 페르디난도 2세 치하의 양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이탈리아가 통일되며 그 주역인 마치니는 ‘청년 이탈리아’라는 애국 운동을 창시하며 젊은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지만 파리코뮌을 가차 없이 비난하며 신세대 혁명가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마치니는 젊은 말라테스타 역시 사회주의자로 의심받는다는 것을 이유로 세계공화주의동맹에 입회하는 것을 반대했다.

통일 이후 푸르동의 영향을 받은 카를로 피사카네를 필두로 절대자유주의적 경향의 사회주의를 열망하기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피사카네는 1857년 해방 반란을 기도하던 중 사망한다. 1865년 바쿠닌이 나폴리에 정착하며 그를 중심으로 통일 투쟁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모여 들었고 청년 말라테스타도 인터내셔널에 참가했다. 말라테스타는 정치적 활동을 대학 당국이 달갑게 여기지 않자 대학을 포기하고 바쿠닌과 카피에로 곁에서 아나키스트 투쟁 활동을 시작한다.

1872년 열린 리미니에셔 열린 국내회의에서 이탈리아 지부가 인터내셔널 총평회와의 관계를 끊고 권위주의자들과도 선을 긋자 엥겔스는 즉각 인터내셔널 안에 이탈리아 연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코스타, 말라테스타, 바쿠닌이 이탈리아 대표단 소속으로 생 티미에 반권위주의회의에 참석하며 이탈리아 아나키즘이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후 수많은 사회혁명을 실현시키려는 봉기가 일어나고 혁명적 출판물이 쏟아져나왔지만 탄압에 의해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말라테스타는 여론을 뒤흔들어놓을 목적으로 마테제 산에서 기습을 벌이기로 하지만 이 역시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대중의 대단한 호평을 받고 인터내셔널의 강령이 상세하게 알려질 수 있었다.

 

11.2 새로운 관점

11.2.1 선전가

일찍이 혁명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대중의 의식을 파악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말라테스타는 ‘낭만주의’에서 탈피해 이탈리아와 외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따금씩 반란과 혁명적인 국지전에 참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질서와 폭력과 범죄가 증가하자 1894년 정부는 아나키즘을 불법화하고 모든 노동조합을 와해시켰다. 따라서 1899년부터 1900년까지 말라테스타는 미국과 쿠바에 체류하며 여러 강연을 했으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집권 후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모 로마에서 말년을 보내다 사망한다.

 

11.2.2 말라테스타의 국제주의

자본가들의 세계화에 맞서 모든 노동자들의 국경을 초월한 연대가 중요한 이상 중 하나가 되며 말라테스타도 국제주의와 애국주의의 문제에 관해 설명했다.젊었을 때는 마치니주의자였고 애국주의자였음을 인정했지만, 노동운동을 전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시켜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을 느끼고 있던 말라테스타에게 국가라는 테두리는 노동자들이 이끄는 투쟁에서 지나치게 좁은 것으로 보였다.

 

11.2.3 1914: 안코나의 붉은 일주일

아드리아해의 거대 항구인 안코나는 혁명적 행동에 굉장히 유리한 장소로 하나로 심각한 정치적 동요의 무대가 되었다. 특히 3년간 투옥 중인 두 명의 아나키스트의 석방을 요구하며 안코나 혁명운동이 시작된 이후, 경찰 역시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말라테스타는 이탈리아를 떠나 다시 런던으로 망명한다.

 

11.2.3 1920: 미완의 혁명

무력 충돌에 대한 의지를 아나키스트들이 공공연히 드러낸 이후 그들은 이탈리아 정치 무대에서 여러 해 동안 완전히 배제되었다. 유럽이 평화를 되찾고 나서야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조합’이 결성되었고 언론 기관도 창설 결의되었다. 10개월 후 <신인류>가 탄생하고 말라테스타 역시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20년 밀라노 집회에서 군인들과 전차 승무원들이 죽는 일이 발생하고, 단순한 파업 이외의 다른 투쟁 수단을 사용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 말라테스타는 공장 점거 지령으로 투쟁의 노선을 수정한다. 공장점거 운동은 1920년 8월 31일에 시작되어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나 맹목적인 테러 이후 말라테스타는 체포되고 <신인류> 역시 폐간되었다.

 

11.3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들

11.3.1 조직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즘이 실패한 원인인 조직의 문제를 성찰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산다는 것은 조직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데 상부 권위의 개입 없이 아나키스트들이 단결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높은 수준의 절대자유주의적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게 조직화의 이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교육과 선전이라는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고 공동 행동에 익숙해질 때에만 연대라는 필수적인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11.3.2 당과 조합

말라테스타는 자신이 통일전선의 지지자라고 공언하며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 간에 공조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이후 곧바로 이 정당을 공공연한 적으로 간주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스트들이 단독 행동을 하거나 노동운동을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선전가이자 절대자유주의 활동가로서 자신들의 관점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1.3. 말라테스타와 볼셰비즘

러시아에서 일당 정치가 실시되고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독재가 정착되며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자 말라테스타는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예의주시하는 한편 반동분자들과도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 민중과 연대할 것임을 걷브 밝히며 볼셰비키 체제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으며 이 체제가 혁명을 민중의 손에서 빼앗아 독차지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볼셰비키 독재를 여러 얼굴을 가진 파시즘과 동일시하였다.

 

11.4. 말라테스타의 아나키즘이 지닌 특수성과 보편성

말라테스타는 절대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저지르기 쉬운 독단론을 피할 줄 알았고 민주주의적 정당들과 연결시켜주는 가느라한 실마리를 남겨놓으면서도 아나키를 정치 이데올로기가 우리 각자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유에 대한 표출로 보고 이를 밖으으로 잔퍼하고자 애썼다.

 

12. 평화주의와 반국주의

12.1 루이 르쿠앵

루이 르쿠앵은 살앙 lT는 동안 전쟁에 반대하며 군국주의 정신에 맞서 싸웠다. 1910년 르쿠앵이 속한 대대가 철도원들의 파업을 저지하도록 파병되었으나 르쿠앵은 파업자들에 맞서 돌진하기를 거부하며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제대 후 절대자유주의자들과 접촉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아나키스트공산주의연맹 부의장직을 맡으며 벌인 활동으로 갖가지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형무소에서 출감할 무렵 부대 복귀를 거절하며 또 다시 유죄판결을 받는다.

또한, 그는 스페인 출신 아나키트들인 아스카소, 두루티, 호베르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침권을 주장하는 위원회를 조직하고 석방에 성공했지만, 사코와 반체티를 위한 또 다른 투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르쿠앵은 1948년 ‘인간에 대한 옹호’라는 월간지를 창간했고, 그의 노력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법도 마련되고 또 공포되었다. 그는 전재산을 잡지 창간 자금으로 내놓고 주간지 <자유>를 발행시켰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후원하는 모임을 구성했다. 르쿠앵은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법률 제정이 지연되자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결국 정부가 5년 동안 기각했던 법안을 제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는 르쿠앵과 다른 평화주의자들이 원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범죄자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기본 방침만큼은 고수되었다.

 

12.2 장 지오노

장 지오노의 반전운동은 르쿠앵과는 달리 전적으로 자신의 체험과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입각한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경험과 실제 삶에 의거한 것으로 사람들의 이성이 아닌 상상력에 호소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을 자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돈에 대한 맹신으로 야기된 문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에게 농촌 문명은 세계의 역사만큼 오래된 위대한 것으로 개인적 자유의 근원이었으며 따라서 반자연주의적인 ‘기술 문명’을 비판했다. 지오노가 말하는 농민은 본질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그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확신했고, 전쟁과 자유 사이에 어떤 연관성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오노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평화주의 투쟁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후 군소집 명령이 떨어지자 디뉴에서 명령에 응했는데 그가 군소집 명령에 응하게 된 진정한 동기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12.3 반애국주의와 반군국주의

1871년 패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독일군에 대한 대단한 적대감으로 대대적인 국수주의 열풍이 불었는데, 문인들은 격하고 강박적인 민족주의와 사뭇 다른 입장을 취했다. 구르몽은 애국즈의라고 불리는 질병이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독일인들을 야만인으로 치부하도록 부추기는 극도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리앵은 더 신랄한 어조로 프랑스인들이 피해자의 도덕적인 우월감을 자처하면서 패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 조국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에게 일방적으로 부과된 현실이었다. 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조국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시인과 아나키스트들은 조국이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하였다.

시대가 변했고 군대는 현대화되고 미국화되었다. 군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젊은 군인들의 태도는 훨씬 민주적으로 변했다. 또한 예전의 반군국주의의 오래된 적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직업군인들은 미사일에 대한 재교육을 받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지구 위에 나타난 전세계적인 “죽음의 정치”에 비하면 예전의 군국주의는 순진했던 과거에 불과한 셈이다.

 

13. 야생적 좌파

13.1 상황주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1957년에 결성되었고 ‘실험적 예술을’을 옹호하는 전위예술과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젊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는 “삶을 변화시키자”는 랭보의 말을 관점으로 취하여 이를 급진적으로 정치화하였고, 대학을 구심점으로 활동했다. 상황주의자들은 전세계가 논하는 정치 혁명은 ‘새로운 상황’들을 생산해내지 않으면 진부한 반복만을 걷듭하기 십상이라고 비판했다. 상황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개인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에 관심ㅇ르 가지면서 이데올로기라는 힘의 굴레 속에서 억압받는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기 드보르는 상황주의 운동의 주요 이론가로 포이어바흐가 “우리 시대의 본질은 허상”이라고 말하며 종교적 소외를 설명하면서 보여주었던 비판을 계승하면서 심리학적 혹은 사회학적 형식을 통합하였다. 드보르는 경제성장에 대한 맹신과 생산의 무제한적 양적 발달에 대한 자본주의체제의 결함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은 시간을 상품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순환적 시간”을 합리적 추상적인 시간으로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스펙터클은 단순히 “시각 중심적인 세계의 폭력, 즉 이미지의 거대한 분열 기술의 산물” 아니고 시청각 장치의 끝없는 유혹과 광고를 통해 이미지의 범람을 낳고 현대인은 상상력을 통해 그가 창조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이미지들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몽환 상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 스펙터클이란 “효율적으로 변하고 물질적으로 해석된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는 세계의 시각이다.”

 

13.2 5월, 네 멋대로 해라

196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고삐 풀린 젊은이들이 혁명에 참가했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은 일으킨 당사자들조차 놀랄 정도로 커다란 규모였다. 프라하, 바르샤바, 암스테르담, 베를린, 마드리드 등 유럽 뿐 아니라 제 3세계에서도 혁명의 물결이 불었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가장 확실한 원인은 전세계적으로 대학생의 수가 두드러지게 증가했다는 점이며,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마찬가지이며, 물질적 풍요가 극도의 정신적인 공허를 수반하는 세계에 대한 젊은이들이 변화에 대한 깊은 욕구에 사로잡혔던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5~6월 학생 혁명에 개인적으로 참여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아나키즘은 대중 속에 용해되어 3월 22일 콩-방디 운동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13.3 자연과 생명의 수호자

생태주의가 등장하며 아나키즘과의 교차점을 찾아볼 수 있다. 탈정치주의를 선언하고 기성 정치의 규칙들을 넘어서 중개 정부의 중개 없이 직접적으로 행동한다는 원칙이다. 특히 유럽의 유전자조작식품 반대 운동은 권력에 대응한 절대자유주의적 본능이 표출되고 있음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지금의 산업사회는 최근 몇 년 간의 모든 환경 대란에 책임이 있다. 이번에는 지구 전체의 자연,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생물학적 존재가 위협을 받고 있음에도 미국의 위성국가들이 수동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에 ‘정치’ 부문과 사회‘ 부문을 막론한 저항에 박차를 가했다.

 

13.4 반세계화주의

소련의 붕괴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시장을 미국의 주도 하에 재편할 기회로 삼았다. 신자본주의는 어떤 외적 제재도 받지 않은 채 지리경제학상 총체적 집중화의 실현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목표는 세계 초강대국의 건설이 아니라 자원과 이윤을 독차지하기 위한 최강 시장의 창출이다. 진보라는 미명하에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일차원적 세계가 점점 가까오는 이때 폭력을 비롯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대응이 지구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오늘날 비록 초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이 두드러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 응수해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다국적인‘ 흐름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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