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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에세이

탁선경 2021.01.19 20:11 조회 수 : 240

사진 용량때문에 에세이 파일이 올라가지 않아 여러번 실패하고 텍스트로 올립니다ㅜ. 한학기 동안 11시 넘어서까지 벤야민 이해를 위해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신점 벤야민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손기태 선생님 감사했습니다. 벤야민 함께 공부했던 선생님들과도 또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발터 벤야민. 역사 유물론 에세이_탁선경

 

변증법적 이미지와

'라스 폰 트리에. 멜랑콜리아' 영화가 만드는 성좌

 

멜랑콜리아.jpg

 

 

벤야민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은 변증법적 전환, 즉 각성된 의식이 돌연 출현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정치적 방법론으로 예술을, 적합한 매체로 영화를 든다.

기본적으로 벤야민의 영화적 사유는 영화를 예술로 보기보다는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도구로 바라보는 매체학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는 혁명적인 인식을 전제하고 동시에 산업사회에서 개별화된 개인들을 통합하며 최초로 대중을 예술작품의 수용자로 내세웠다. 현대인은 뚜렷한 윤곽이 아닌 여럿 중 하나의 색점을 보고 수많은 이미지들의 충돌을 온몸으로 지각한다. 복잡한 도시속에서 현대인은 매번 순간적으로 착각하며 몸에 기입되는 촉각적 지각을 통해 공감각을 형성하고 본다라는 시각적 지각 안에서 의식의 차원에 남지 않는 것은 무의식에 저장을 한다. 영화는 오로지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있는 시각적 무의식을 다시 의식화한다. 벤야민은 사진, 영화 등의 미디어의 영역이 이렇게 지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보고 이들을 지각구조와 연결시킨다. 감각과 지각은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변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는 프롤로그, 1부 저스틴, 2부 클레어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문학, 미술, 음악 등의 예술작품에서 이미지와 스토리를 차용하고 콜라쥬하며 영화 속에 또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 낸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충돌과 소리의 조합으로 이미지는 무한하게 생성되고 그것은 뒤에 이어질 1부와 2부를 예고한다.

초현실주의적이고 정적인, 기이하고 괴기스런 이 모든 이미지들은 벤야민이 말하는 상징, 즉 감각적 대상과 초월적, 초감각적 대상을 인식하고, 이 역설적인 것들 속에서 다시 결합한다. 멜랑콜리아의 프롤로그를 구성하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들, 그리고 그 이미지들 속에 자리하는 이질적인 사물들과의 구성은 변증법적인 알레고리를 형성하며 이렇게 형성된 알레고리는 영화속에서 감정과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벤야민은 이미지를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라고 규정한다.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른 그의 이미지-변증법의 핵심은 사고가 긴장들로 가득한 성좌에서 정지할 때 섬광처럼 변증법적 이미지가 생겨난다고 보는데,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과 섬광처럼 한순간에 만나 하나의 성좌를 만든다는 것이다.

순간적인 것, 일깨우고 뒤흔드는 것은 간명함과 연관된다. 갑자기 출현한 정신, 돌연 어두운 밤을 밝히는 섬광, 그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사로잡는 순간이다. 긴장들 속에서 측정 불가능한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함으로써 하나의 상징을, 섬광을, 그리고 열매가 피어나게 된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 “알레고리적 해석의 이율배반”에서는 비애극의 이미지를 불러내고자 한다면 이율배반을 변증법으로 다루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멜랑콜리아 1부에서는 동생 저스틴을 2부에서는 언니 클레어의 상황과 성격, 심리상태를 대립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두 자매가 죽음과 종말을 상징하는 멜랑콜리아의 다가옴을 받아들이는 각기 다른 태도와 심리변화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 에세이에서는 이미지들과 음악으로만 표현하고 있는 프롤로그 부분을 보면서 이미지들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성좌, 변증법적 이미지들이 만들어가는 사유를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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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면은 음울하고 힘겹게 눈을 뜨는 저스틴과, 석양이 질 무렵 죽은 비둘기들이 떨어지는 기묘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천천히 눈은 떠지고 비둘기는 내려온다. 그리고 저스틴의 젖은 머리카락과 죽은 비둘기는 같은 색조로 연결된다.

프롤로그의 시작과 끝을 마무리하는 바그너의 음악은 각 장면의 분위기와 인물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의 사회적 의무와 도덕을 벗어나 밤과 죽음을 찬미하는 3막의 비극 드라마이다. 기이하고 신비롭고 몽환적인 바그너의 선율은 8분간 멜랑콜리아의 프롤로그가 끝날때까지 이어지며 이미지만큼이나 강렬하게 영화 멜랑콜리아의 전반적인 감정과 심리변화를 주도하고 관람자를 화면으로 몰입시킨다. 벤야민에 따르면 음악은 구원하는 신비이며 초감각적인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감정들의 부활이다.

벤야민은 근대 도시속에서 범람하는 이미지가 서로 부딪히고 뒤섞이며 그것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도시인의 극도로 예민해지는 지각상태, 즉 신경과민증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도시인은 감정의 무력화와 둔화를 택하게 된다고 본다. 첫 장면의 저스틴의 무겁게 두눈을 뜨는 모습과 죽은 비둘기가 떨어지는 장면은 대도시속에서 지쳐 극도로 예민해진 지각상태를 지나 무력화와 둔화 속에서 반복되는 꿈꾸기와 깨어나기의 변증법 속에서의 도약을 보여준다. 시각적 혼란과 충격으로 인한 신경과민증적 증세, 이를 벤야민은 촉각적 지각이라 간주하는데 분산적 지각은 도취와 거리두기, 요소와 전체를 동시에 지각하고 이해하려는 이중적 욕망과 태도를 내포한다. 

 

정원.png

멜랑콜리아에서 정원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매번 다른 느낌으로 등장한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궁전같은 정원은 하나의 회화작품 같다. 정원은 흐트러짐 없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나란히 줄지어있는 매끈한 나무들은 흐트러짐 없이 정렬되어 있다. 중앙의 해시계는 오른쪽 허공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순간을 기록하는 해시계이지만,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멜랑콜리아 행성을 향하는듯도 하고, 행성의 도래를 끊임없이 지켜볼 천체 망원경을 보는듯도 하다.

정원의 중앙에 자리한 해시계를 멜랑콜리 자체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해보자면, 프톨로메우스가 발견한 것처럼 집중의 구심력 때문에 우주의 중심에서 완성된 상태로 있는 지구, 뒤러의 동판화에 있는 구체. 이러한 구체는 집중의 구심력과 골몰하는 자의 사유상징, 심오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정신이 밖에서 안으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다시 향해 고정되는 멜랑콜리와 유사하다.

정적을 유지하는 아름답지만 경직된 정원은 통제적이고 감시적이며, 개방되어 있는 듯 하지만 폐쇄적이다. 인위적인 정원의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바다. 그런데 바다는 손을 뻗어도 닿을 것 같지 않다. 정원의 중앙, 바다와 해시계 사이를 자세히 보면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아이와 평화롭게 뛰놀고 있다.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이 하얀 점으로 보이는 장면은 숨막히는 느낌의 정원과 대조를 이룬다. 한 장면속에서 이질적인 느낌으로 혼재되어 있는 사물들은 지각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미묘한 충돌을 일으키며 이런 변증법적인 이미지들은 하나의 성좌를 만들어내는 점으로 작용한다.

벤야민은 이질적인 속성을 지니는 재료들을 한 공간안에 혼재시키거나, 상이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다양한 시점에서 포착한 후 연쇄시키는 몽타주를 지각의 한 방식이자 사유의 한 방식으로 적용하고자 했다. 이미지 혹은 사물들의 병치가 그 자체로 혁명적인 각성을 추동시킬 수 있다고 보면서 다양한 이미지 병치를 통해 이미지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이 영화의 프롤로그는 회화 작품을 변용하고 차용한 이미지,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 이미지 속에서 사물과 장소 사이에 미묘한 공간감이 조성되어 있거나, 이질적인 사물들이 감각적으로 혼재되어 있으며, 하나의 장소를 다양한 시점에서 포착해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이미지들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지각과 사유를 창조한다.

벤야민의 몽타주적 지각은 시각적 무의식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시각적 지각의 특성은 관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다라는 것은 의식의 차원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무의식에 저장을 한다. 몽타주적 지각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들 자체에 대한 주의깊은 관심과 통찰을 필수조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몽타주적 지각은 도식적 변증법에 따라 지각하고 사유하기보다는 나열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지각하고 사유하게 한다. 벤야민의 사유는 이미지들의 병치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배제된 일상적 사물들의 의미를 밝혀내려는 비변증법적 측면을 가지며 영화는 가라앉아 있던 시각적 무의식을 다시 의식화한다.

 

브뤼겔.png

정원 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피터 브뤼겔의 ‘눈속의 사냥꾼’으로 장면이 바뀐다. 계절과 달을 주제로 그려진 눈속의 사냥꾼은 피터 브뤼겔의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이 그림은 혹독한 겨울을 보여주는 1월과 2월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추정한다. 온통 눈으로 덮인, 일조량이 적은 혹독한 겨울, 사냥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세명의 농부와 지쳐보이는 개들은 저 멀리 빙판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과 대비되어 그들의 고됨은 더욱 강조된다. 잠시후 이 장면은 점차 타오르며 재가 되어 떨어진다. 마치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우려는건지 지워지는건지 검게 타오르는 이 장면은 죽은 비둘기들이 떨어져 내리는 공간속에서 저스틴이 힘겹게 눈을 뜨던 첫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그렇게 어둠이 내린다. 

 

엄마클레어발.png말.png

푸른 행성이 다가온다. 그리고 아들을 안고 탈출하려하는 클레어의 긴박한 장면으로 바뀐다. 클레어는 아들을 안고 위급하게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그녀는 바닥에서 쉽게 발을 떼기 힘들어 보인다. 하얀 깃발이 세워져 있는 잔디는 잔디라기보다는 카펫같다. 치열하게 아들을 부여안고 다급히 달리고자 하지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릎까지 빠지는 바닥은 발을 빼기도 딛기도 힘겨워 보인다. 또한 어둠속에서 앞으로 달리려 하지만 잃어서지 못하고 점차 주저 앉아버리는 말 역시, 발을 떼는것조차 맘처럼 되지 않는 무력한 클레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영상들의 느린 플레이는 긴박해 보이는 상황에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또한 바그너 음악은 음울함과 기이한 분위기를 배가시키고, 이처럼 쉽게 벗어나기 힘들어 보이는 멜랑콜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저스틴나방.png세개의 행성.png

저스틴은 두 팔을 벌린 채 주변이 온통 흰나방으로 가득한 정원의 한 가운데에 서있다. 장면이 바뀌고 시점이 바뀐 정원은 왕궁같은 집 뒤로 세 개의 행성이 떠있다. 푸른 멜랑콜리아와 달, 그리고 태양. 웨딩드레스를 입은 저스틴과 검은 예복을 입은 소년, 그리고 역시 예복을 입은 클레어. 이들은 세개의 행성이 자리하는 곳 앞에 서있다. 각각의 사물들과 인물들의 간격과 그 사이의 긴장감. 멜랑콜리아, 달, 태양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뒤에 놓인 행성에 점지 당한 것인지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 어딘가 절대적인 것으로 향하듯 천천히 장엄하게 걸어나온다.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운명과 운명에 대한 사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얽히고 설킨 알레고리의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번득이며 현재와 과거는 연결된다. 비애극을 특징짓는 것은 사건진행의 부동성도 아니고 느림도 아니며 지속적으로 중단되고 순간순간 전복되다가 또다시 경직됨으로써 생기는 단속적인 리듬이다. 비애극의 세계는 자신의 무대를 펼쳐 보이고자 하는데 자족적으로 머물러 있었다. 고도로 긴장된 양극성 속에 서로 대립해 있는 관계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멜랑콜리아 영화를 통해 사건 속에 있는 자연의 근본적인 운명, 하지만 전적으로 자연은 아닌 운명. 운명에 대해 사유해 보고, 영화를 통해 잠시 어떤 중단을, 꿈꾸기와 깨어나기의 변증법적인 사유의 시간을 제안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벤야민은 운명, 그것은 결정되어 있음이라는 영원한 의미속에서 찾아져야 함을 강조하며 운명에 대한 사유의 핵심은 행위자의 도덕적 결함이라는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라, 항상 피조물에 고유한 죄(기독교적 원죄)라는 의미에서의 죄가 반복되는 불행의 수단인 인과성으로 불러일으킨다는 확신에 있음에 대해 강조한다. 이 고립된 죄의 영역은 지속적으로 침잠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기는 일은 슬픈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천천히 장엄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깊은 사색은 파편화된 인식의 끝이며 이 한계에서 쇠락과 몰락의 경계를 보고 구원과 도약의 계기를 얻는다. 

 

멜랑1.png저스틴2.png

장면이 바뀐다. 푸른색의 멜랑콜리아는 지구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저스틴은 지금 3차원의 공간속에 있는 것일까. 2차원의 평면 앞에 서있는 것일까. 멜랑콜리한 자의 천재성, 특히 이것은 예언적인 것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은 당장 무슨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과 함께 어떤 공포감을 조성하며 관람자를 끌어당긴다. 마법이라도 부릴듯한 열손가락의 스파크는 멜랑콜리한 자가 가지는 광기와 열정을 잘 보여주는 듯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멜랑콜리를 천재성이 광기와 결합되어 있음으로 보고 열정적이고 지적인 활동과 끝없는 쇠락이라는 대립이 서로 이웃해 있을 경우 언제나 강렬한 공포감을 일으키며 관찰자를 끌어당김으로 보았다.

17세기에는 비애를 앞으로 다가올 모든 불행의 예언가라며 다시 음울한 것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칸트도 멜랑콜리한자의 이미지를 <미적인 것과 숭고한 것의 감정에 대한 고찰>에서 멜랑콜리한 자에게 복수욕…영감, 환영, 유혹,….의미심장한 꿈, 예감, 기적의 증표 등의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여전히 공간은 정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정된 공간속에서 현실인 듯 비현실인 듯, 정원이라는 장소는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원은 숲이고, 실내이며, 우주이고, 때론 무대이며, 그저 2차원적인 배경일 뿐이다.

 

저스틴웨딩.png

저스틴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앞으로 걸어간다. 힘차게 걸어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허리와 발목을 휘감고 있는 밧줄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는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하다.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힘껏 한발한발 내딛지만 힘겹다. 앞 장면에서 멜랑콜리의 천재성, 광기, 예언자적이고 의미심장한 면을 이미지화 했다면 이 장면은 담즙질적이고 끈적거리는, 멜랑콜리의 감정에 빠진 자를 이미지화 한 듯하다.

 

의학학교가 12세기 기질론에 부여한 형식에 의하면 멜랑콜리에 빠진 자는 ‘질투심이 있고, 슬퍼하고, 탐욕스럽고, 인색하고, 신뢰성 없고, 소심하고, 혈색이 나쁜’것으로 여겨졌으며 멜랑콜리를 일으키는 체액은 ‘가장 천박한 기질’을 낳는 것으로 여겨졌다. 습기, 따뜻한 기질 즉 다혈질적인 기질은 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습기 차고 차가운 점액질적인 기질은 물에, 그리고 메마르고 따뜻한 즉 성마른 답즙질적인 기질은 황담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비장은 해를 끼치는 검은 담즙의 형성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속으로 흘러 내려가 그곳에서 위험수위까지 증가해가는 ‘끈적거리고 메마른’ 피는 인간의 웃음을 줄어들게 만들고 우울증을 불러일으킨다. 멜랑콜리를 생리학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는 것은(아니면 몸속에 자리 잡고는 자신의 근심을 사랑하는) 피조물 상태에 있는 인간의 비참함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로크 시기에 이것이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멜랑2.png외부.png

이제 멜랑콜리아 행성은 지구와 닿을 듯하다. 어둡고 고요한 실내와 대비되는 창밖의 정원. 창을 통해 보이는 외부는 화염에 싸여있다. 정원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형같이 매끈한 정원의 나무가 불타고 있다. 멜랑콜리아는 종말과 죽음을 의미한다. 지구와 거의 닿을듯한 멜랑콜리아 행성과 실내에서 바라보는 외부의 불타는 나무의 암시.

종말과 죽음이라면 검고 어두운 암흑을 떠올릴테지만 멜랑콜리아는 검정이 아닌 빛을 띠는 푸른색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요한 실내에서 바라보는 평화로운 정원을 깨는 화염. 멜랑콜리아 행성은 다가오는 종말과 죽음이지만 빛의 색을 입고 있다. 어둠과 빛은 떨어져 있지 않다. 몰락과 쇠락 뒤엔 도약이 있으며 종말의 다음 차례는 시작이다. 죽음은 태어남을 위한 것이다.

 

사투르누스론에서는 멜랑콜리를 먼 여행을 하고자 하는 멜랑콜리적인 인간의 성향으로, 그리고 천문학과 관련하여 부정적이고 약하게 보아졌던 멜랑콜리를 신성하고 생기있게 매력적으로 재해석한다. 위협적인 별을 가장 먼 곳에 지정하는 신적인 이성에 의거해 은총이 가득한 긍정적인 의미로 파악하고 영혼을 외부에서 내면으로 불러들이고 높은 곳으로 고양시켜 지식과 예언적 재능을 부여하는 멜랑콜리에 대한 긍정이 있다. 이러한 슬픔에 젖은 자의 우울을 약하게 보았던 멜랑콜리에 관련된 원칙들에 매력을 부여하는 재해석에서 사투르누스에 대한 표상의 변증법적인 특징이 드러나고 이러한 특징은 고대 그리스 시기에 파악된 멜랑콜리 개념의 변증법과 관련을 맺는다.  

사투르누스 이미지의 생기 있는 기능, 피치노를 인용하자면 사투르누스는 ‘드물게만 평범한 성격이나 운명을 일컬으며 대개는 남다른 사람들, 신성하거나 동물 같은, 더없이 행복하거나 비참함에 굴복당한 자들을 일컫는다. 사투르누스에 대한 점성술적인 표상의 특수성은 크로노스란 개념에 내재해 있는 양극성에서 궁극적인 면이 드러나고 이 특수성은 이중성에 의해 규정된다. 사투르누스가 전적으로 세속적인 인간, 힘든 농사일에만 적합한 인간들을 만들어낸다는 것, 또 정반대로 영적이고 일체의 세속적인 삶에는 등을 돌린 ‘종교적 명상가’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언급했다.

의미상징으로서의 돌은 차고 메마른 지구를 나타내는 가장 명백한 형상이다. 아케디아, 나태한 마음이 희미한 빛을 발하는 토성의 느린 운행은 이 나태함이 멜랑콜리적 인간과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 알베르티누스는 멜랑콜리적인 여러 증후가 나태함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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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은 부케를 들고 웨딩드레스를 입은채로 호수에 누워있다. 이 장면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차용한 것이다. 문학적이고 낭만적인 중세의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는 이 그림의 모델 엘리자베스 시델은 라파엘 전파 작가들의 뮤즈였고, 시델 역시 작품 속 오필리아처럼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멜랑콜리아는 이렇게 문학, 미술, 음악 등의 작품속에서 이미지와 스토리를 차용하고 콜라쥬한다. 주인공 저스틴이라는 이름 역시 감독이 사드 후작의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에서 가져온 쥐스틴을 저스틴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오필리아’는 거룩함과 순수로 포장한 관능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세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작품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연인 햄릿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함으로써 미쳐버린 오필리아처럼 멜랑콜리아 속 저스틴은 이 스토리를 부분적으로 재해석한다. 에로시티즘과 죽음의 대립, 억압된 관능과 그로인해 강조되는 관능. 이렇게 회화를 차용한 장면들은 작품의 심리와 감정을 한껏 고조시킨다.

오필리아의 꽃과 식물들은 모두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영화속에서는 결혼 반지가 끼워져 있는 두손에 부케를 안고 있는 저스틴은 웨딩드레스를 입은채로 호수위에 누워 관중을 응시한다.  둘 다 허공을 바라보고 반쯤 입을 벌리고 있지만 도취된 듯 물속에 잠겨 관능적으로 죽어가는 듯한 오필리아와는 달리 저스틴의 눈동자는 관중에게 비애의 시선을 보낸다.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비애라는 감정에 대해 그리고 이 감정들이 어떻게 비애극을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 다룬다.

 

비애라는 감정은 공허한 세계를 끌어내어 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서 만족을 얻으려 한다. 선험적인 대상과 결합되어 있는 감정의 서술이 감정의 현상학이다. 비애의 이론은 오직 멜랑콜리적인 인간의 시선아래 드러나는 세계의 묘사 속에서만 펼쳐진다. 감정은 그것이 아무리 자아에게 애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운동성이 있는 반사적 태도로서 구체적으로 구축되어진 세계에 대답하기 때문이다. 격정과 슬픔등에서 발견되는 복잡한 변화와 사건은 그 격렬함으로 인해 운명이 연극을 추동시키고 운명극은 비애극 속에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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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행성의 저스틴, 달과 소년, 그리고 태양과 클레어. 행성은 이들을 상징하고 행성들 역시 저스틴과 소년, 그리고 클레어의 캐릭터를 반영하는 듯하다. 소년은 움막을 지을 나무를 깎는다. 소년은 깎던 나무와 칼을 꽉쥔채 고개를 들어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다가오는 멜랑콜리아를 막아내보겠다는 의지, 이겨내겠다는 각오로 보이는 그의 두려움 없는 표정과 다부진 모습. 그런데 소년은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죽음이 다가옴을 인지하고 있는걸까. 저스틴은 숲에서 나뭇가지들을 모으고 있고 클레어는 이 장면 속에 없다.

2부 클레어의 마지막 장면은 멜랑콜리아와 지구가 충돌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종말의 순간, 멜랑콜리아와의 충돌로 모든것이 파괴되는 순간, 그 모든 죽음의 순간 화면은 밝은 빛으로 가득 차오르며 정지되고 영화는 마무리된다. 

다시 소년을 들여다본다. 1부와 2부 스토리의 기억을 지우고 저 장면만을 다시 들여다본다. 멜랑콜리아를 막아보겠다는 소년의 의지와 각오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의지와 각오이다. 소년의 표정은 다가오는 몰락과 종말을 대비하는자의 표정이 아닌 도약을 준비 하는자의 표정이다.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도전적이다.

프롤로그의 이미지들은 1부와 2부에 등장하지 않지만 이 이미지들은 충분히 서사성이 짙은 1부와 2부에 비해 훨씬 강렬하고 구체적으로 멜랑콜리아 영화 한편을  완성한다.

벤야민은 무의식과 꿈을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것으로 본다. 각성에서 최초의 단계는 잠이다. 잠들기, 꿈꾸기, 깨어나기. 그리고 깨어남을 통한 실천. 현실 속에서 깨어남을 통해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행위, 이것이 각성이고 꿈에서 깨어남이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망각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를 다시 불러내어 각성하는 것이다. 비애극이라는 거친 무대는 멜랑콜리라는 창조적인 수호신 앞에서 자신의 내적인 삶을 시작한다. 피할 수 없는 이율배반의 변증법은 파국앞에 내던져진 덧없음과 공허함 속에서 구원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수많은 감정의 무력화와 둔화 속에서도 꿈꾸기와 깨어나기는 반복된다. 

도취와 거리두기를 통해 작은 원소와 전체를 동시에 지각하고 이해하려는 태도.

주의깊게 볼 것. 그리고 있는 그대로 지각할 것.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란 돛이 역사의 바람을 맞도록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돛은 개념이다. 그러나 돛을 자유롭게 조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돛을 세우는 기술이다. _ 벤야민의 인식론. 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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